▣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양산의 천성산 원효봉에서

영광도서 0 1,396

천성산에 오릅니다. 살다 보니란 말 참 진부한 것 같긴한데 쓰기 편합니다. 이런 말을 쓸 상황이 많다는 말입니다. 지난해에 양산박물관대학에 그리스신화와 함께 떠나는 여행을 주제로 강의를 했는데, 반응이 좋았던 덕분에 올해도 초청을 받았습니다. 이번엔 교사들 직무연수로 그리스신화로 읽는 신전건축이 주제였습니다. 즐겁게 강의를 했습니다. 강의 끝나고 그냥 갈 수 없잖아요. 온 김에 근처 산에 오르기로 하고 하루를 더 묶었습니다. 선택한 산은 천성산, 흑룡사 주차장에서 시작하여 정상을 찍고 내원사계곡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그야 말로 살다 보니 천성산에 오를 기회가 생겼습니다. 

 

제1봉인 원효봉은 해발 922m입니다. 골골이 깊은 계곡과 폭포가 많은데다가 경치가 좋아서 금강산의 축소판이랍니다. 그보다 왜 천성산인지 궁금하여 유래를 알아 보니,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가 천 명의 민중을 이끌고 이 곳에 이르러 89암자를 건립하고, 이들에게 화엄경을 설법하여 이들 모두 득도하게 한 곳이라서, 천성산(千聖, 천명의 성인)이라 했답니다. 흑룡사 주차장에서 보니 직진하면 무지개폭포 방향입니다. 좌측길은 흑룡사와 흑룡폭포 쪽입니다. 올라오면서 보니 저수지가 바닥을 드러내 저수지란 이름을 갖기도 민망스럽습니다. 미루어 생각하면 폭포란 말뿐이지 보나마나 절벽만 있겠다 싶습니다. 그럼에도 명승지니 폭포를 봐야지요. 

 

가파른 도로를 따라 흑룡사로 오릅니다. 신라시대에 지은 절이니 족히 1500여 년 전부터 자리를 지킨 절입니다. 그 절 안에 흑룡폭포가 있습니다. 높다란 곳에서 낙하하는 물줄기, 너무 가물어서 거인의 오줌줄기 정도밖에 흐르지 않습니다. 상상으로 폭포의 경관을 봅니다. 힘찬 물소리를 듣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그때 다시 오고 싶습니다. 아쉬움을 뒤꼬리로 남기고 등산로로 접어듭니다. 육산이라 샌들 아래 밟히는 흙의 촉감이 괜찮습니다. 아, 짐을 줄이려다 보니 등산화 대신 샌들을 가져왔거든요. 강의를 하려면 옷 따로 신발 따로 챙겨야 하니까요. 그쯤 불편은 감수해야 합니다.  

 

다른 지역에는 그렇게 비가 많이 왔다만 여기 양산에는 무척 가물었습니다. 계곡이라야 말이 계곡이지 먼지가 펄펄 날립니다. 그런데 어제 잠깐 퍼부은 소나기 덕분에 길바닥은 촉촉하니 좋습니다. 물론 습도가 높아져 온몸에서 땀이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느낌입니다. 올려다보면 금세 능선이 나올 듯 한데, 좀체로 나오지 않습니다. 빽빽한 나무잎들로 하늘이 보이지 않다가 하늘 문이 열리듯, 또는 하늘 뚜경이 여린 듯하여 정상이 가깝구나 싶은데 올라간 만큼 정상은 또 저만큼 물러납니다.  

 

쉽게 정상을 보여주지 않는 천성산, 하여 정상 모습이 더 궁금합니다. 내리막이 없는, 돌아감이 없는 오르막 경사로를 오르고 또 오릅니다. 그렇다고 힘들다는 건 아닙니다. 한참 올랐다 싶을 때 드디어 갈래길이 나옵니다. 우측으로는 원효암, 좌측으로는 화엄늪입니다. 느낌이 화엄늪이 좋을 듯합니다. 곧바로 오르면 정상일 듯 한데 오르막이 아니라 옆으로 돕니다. 더는 숨은 차지 않아도 딥니다. 정상일 듯 정상일 듯 우롱하던 산이 곧바로 올라야 할 듯한데 옆으로만 돕니다. 그러나 길은 외길 그 길따라 걷고 걷습니다. 드디어 하늘이 열립니다. 건너편에 초록 능선이 눈을 번쩍 뜨이게 합니다.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숲속으로 들어섭니다.

 

무엇이든 끝이 있듯이 이제 숲을 나섭니다. 바로 이 맛입니다. 대평원이 펼쳐져 있습니다. 이렇게 넓은 억새밭이 있을 줄 몰랐습니다. 보여줄 듯 보여줄 듯 애태우다 드디어 진면목을 드러내는 화엄늪, 초록의 대평원, 마침 가냘피 부는 바람에 마음을 얹고 저 초원 위로 비행하고 싶습니다. 사방으로 열린 공간, 그 맛 때문인지 더는 덥지 않습니다. 마음도 몸도 시원합니다. 초록의 편원으로 난 길을 갑니다. 연초록의 울타리는 금강산 가는 길을 연상하게 합니다. 녹슨 철조망도 설레설레 경계를 이룹니다. 이전에 지뢰 매설지역이었나 봅니다. 때문에 여기선 울타리 안 길로만 다녀야 합니다.  

 

 

 

드넓은 초록의 평원 한가운데 길을 걷는 기분, 알 수 없는 설렘으로 길 옆을 보면 희귀하고 어여쁜 야생화 몇 가지 만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마담 앞에 무릎을 꿇고 프로포즈 하듯, 작고 앙증맞고 귀여운 야생화들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이들을 모델 삼아 사진예술을 하는 척합니다. 간간이 부는 바람을 친구 삼아 자그마한 야생화들을 말동무 삼으며 한결 푸른 마음으로 산책하듯 걷다 보면 벌써 정상입니다. 눈 앞에 펼쳐진 광활한 초록의 평원, 구름이 피어오르는 저 아래 계곡들, 어쩜 저리 아름다운 멋진 하늘, 파란 하늘에 새털 구름들이 아주 멋지고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낸 하늘, 이 모두가 나를 위해 준비되어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나, 내가 주인공입니다. 이 곳의 주인입니다. 이 기분 아시겠어요? 가지 않으면 맛볼 수 없는, 오르지 않고는 느낄 수 없는 이 맛, 마음껏 푸른 초원을 숨쉽니다. 파란 하늘을 곱게 장식한 새털구름을 마십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의 맛을 봅니다. 조금 불편을 감수한 덕분에 웬만큼 힘을 소비한 덕분에 이 정상의 주인공이 되어, 주인이 되어 나 여기 있습니다. 땀의 정직함을 되새김하며, 역시 "백년도 못 살면서 천년을 걱정하는 중생들아!" 이 한 마디 읊조리며 비로봉으로 출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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