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때로는 가치 있는 나의 위선

영광도서 0 1,492

형식이 실질을 지배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적어도 짐승이 아닌 인간에게만 적용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인간만이 고도의 의도된 행동을 하기 때문입니다. 동물은 마음이 곧 행동으로, 행동이 곧 마음으로 의도랄 것 없이 생각과 행동이 거의 맞아 떨어지게 생활합니다. 반면 인간은 생각 따로 행동 따로입니다. 이를테면 짐승은 행동을 보면 그 속내를 알 수 있지만, 인간은 행동을 보아도 속내를 알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행동만으로는 인간의 속내를 읽을 수 없습니다. 그만큼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 아주 영악한 동물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아주 공등적인 형식주의자들인 셈입니다. 

 

형식우선, 이 말은 보다 고등한, 달리 말하면 순수하지 않은 위선적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면에서 위선이라면 나 역시 한가락합니다.

지난주에 아버지 산소에 다녀왔습니다. 단 혼자 다녀왔습니다. 올해 한 해도 아니고 거의 해마다 혼자 다녀오곤 합니다. 큰형이 묘지 가까이 있을 때  몇번 다녀온 적이 있으나 다른 형제자매들은 가지 않습니다.  어쩌면 지극히 현실주의적이라서인지, 형제들은 많지만, 누이들도 있지만, 아버지 산소에 가지 않습니다. 멀다면 멀지만 아주 못 갈 정도로 멀지 않은데도, 나름 사정이야 있겠지만 마음만 먹으면 어렵지 않을 겁니다. 부끄러운 이야기다만 돌아가신 이가 무엇을 알겠냐는 생각 때문일 겁니다. 아버지와 관계가 나빴느냐, 형제자매간에 안 좋은 일이 있느냐, 그런 것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세상을 떠난 이는 아무런 의식도 없다는 믿음 , 그 때문일 겁니다.

 

나 역시 돌아가신 이가 인간 삶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위선적으로 나는 행동합니다. 아버지를 향한 각별한 정이 있어서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순전히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할까, 거기에 가장 영향을 받습니다. 수많은 주검들이 묻힌 공원묘지, 거기에 가면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알 수 있습니다. 무덤 앞에 꽂힌 조화들을 보면, 꽃 색깔이 생생한지 색이 바랬는지, 그걸 보면 돌아가신 이의 후손이든 자녀든, 관계를 맺었던 이들이 언제 다녀갔는지 가늠이 가능합니다.  특히 명절 때엔 그것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다른 때는 몰라도 명절 때면 나 같은 형식주의자들도 다녀가기 때문입니다.

 

나 역시 그걸 의식합니다. 아버지를 향한 애틋한 감정이 있어서라든가, 마음이 선한  효자라든가, 아버지가 보살펴주실 거란 믿음이 있다든가, 그런 건 아닙니다. 무엇보다 다른 이들이 우리 아버지의 무덤을 지나치면서 느낄 그런 마음들을 먼저 생각합니다. 내가 듣지 않으니, 내가 목격하지 않으니 아무 상관이 없긴 하지만 그런 체면을 생각하는 겁니다. 순수한 마음의 발로가 아닌 형식우선인 겁니다. 소위 형식주의자입니다. 엄마는 그런 나에게 효자라고 하지만, 그 말을 들을수록 더은 부끄럽습니다. 정말 마음에서 우러나서 가끔 아버지 산소를 찾는 것이 아니라 체면을 생각해서니까요. 오히려 그 위선이 더 가증스럽지요.

 

그럼에도 형식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인간의 본분이니까요. 순수한, 순결한 동물과 달리 남을 의식하기 때문에 그에 걸맞는 행동을 하려하고 보여주려 하는 게 인간이고, 그게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남에게 좋게 보여주려는 것이라면, 그런 형식은 필요할 테니까요. 이렇게든 저렇게든 남에겐 눈속임일 수 있지만 형식은 내면에 영향을 미치는 건 분명합니다. 세상을 떠나신지 30여 면, 그러니 평소엔 거의 생각조차 않습니다. 그러다 이렇게 산소에 오면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한 번도 자식들에게 매를 들지 않으신, 험한 말씀을 한 적 없으신, 큰 소리 한 번 못치신, 울 엄마의 기에 눌려 사신 아버지, 산소에 오면 그제야 아버지를 다시 생각합니다.

 

나는 아버지의 성품을 꼭 닮았습니다. 아버지인들 왜 험한 말 하고 싶으실 때, 화내고 싶으실 때, 엄마에게 불만 있으실 때, 짜증내고 싶으실 때, 왜 없으셨겠어요. 참고 참으셨을 테지요. 지나치게 남을, 자식을 포함한 모든 남을 의식한 때문이었을 테지요. 그런 면에서 아버지는 나처럼 형식주의자인 셈입니다. 아버지의 산소 앞에, 생화도 아닌, 그래서 향기도 없는, 다만 조화이기 때문에 시들지 않는 장점의 눈속임의 꽃을 바꾸어 꽂으면서 나는 나의 형식을, 나의 위선을 정당화합니다. 형식이 실질을 지배한다는 말처럼 평소엔 잊고 지내다 이렇게라도 조화를 바꿔 꽂으면서 추억을 재생하니까요. 현실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무시하기보다는 이런 형식이 더 순수하다고 믿으니까요.  아버지는 돈 한 푼 없이 여기 누워 계실 뿐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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