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몽환적인 풍경을 선사하는 북한산 영봉
"완전이란 더 이상 덧붙일 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떼어낼 것이 없을 때 이루어진다."는 생텍쥐페리의 말처럼, 완전한 것을 찾으려면 최소한의 피상적인 것만 남았을 때 찾을 수 있습니다. 이쯤의 경지에 이르면 완전이란 것은 본질과 맞닿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완전을 위해서는 자꾸 이것 저것을 덧붙입니다. 본질을 찾는다면서 점점 더 복잡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다 결국 본질도 완전도 단순함의 원리의 적용을 받는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산이 그렇습니다. 산은 스스로 변화를 시도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대로 있습니다. 바람이 불면 그 바람을 그대로 맞습니다. 안아들입니다. 바람이 헤집고 다니도록 그냥 있습니다. 날씨가 추우면 추운 대로 추위를 고스란히 맞아들입니다. 그 무엇 하나 거부하지 않는 산, 어떤 변화도 시도하지 않는 산, 그냥 본질 그대로를 유지합니다. 누가 오든 무엇이 오든, 오는 그 무엇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산은 온화한 어머니를 닮았습니다. 그럼에도 산처럼 다양한 모습을 가진 것도 없습니다. 변화를 시도하지 않으나 변하고, 한결같은 모습이나 늘 새로운 느낌을 줍니다. 그렇습니다. 스스로는 변하지 않으나, 스스로는 다양하지 않으나 모든 것을 안아들이고 품어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비가 내리고 나면, 특히 간밤에 비가 내렸다면 그 다음날 아침이면 북한산 영봉에 종종 갑니다. 그런 날씨에 영봉에 오르면 늘 멋진 모습을 볼 수 있어서입니다. 아주 매혹적인 해돋이로 나를 환장하게 만들거나, 좀 흐리다면 도시를 구름으로 포근히 감싸는 황홀한 유토피아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때마다 항상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어쩌면 그리도 변신을 잘하는지 항상 같은 모습이 아닙니다. 다른 모습, 아주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변덕이라면 변덕, 변신이라면 변신, 한결같지 않아 실망스러울 테지만, 그 변하는 모습 하나 하나가 무척 사랑스럽습니다. 그러니 비갠 다음날엔 그곳에 오르고 싶은 겁니다.
추석 연휴에 막 접어들 무렵, 역시 그런 날씨에 그 기대를 하고 북한산 영봉에 해맞이를 갔습니다. 여지없이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해주었습니다. 간밤에 촉촉하게 내린 가을비 덕분에 산길은 차분하게 발바닥을 안아드렸습니다. 산이 부르는 유혹을 못 이겨 새벽에 오른 산, 해를 만날 시간 전에 벌써 영봉 정상에 올랐습니다. 한참을 해가 뜨기를 기다리는 중에 도시를 내려다보았습니다. 환상적인 야경이 기다림의 지루함을 싹 씻어주었습니다. 서늘한 바람이 마음마저 경쾌하게 했습니다. 앞을 보면 도시, 뒤로 돌아서면 산첩첩이라는 걸, 같은 장소에 있어도 앞과 뒤가 확연히 다르다는 걸 아직 미처 몰랐습니다. 아무도 없는 산에 한참 있으려니 그걸 발견했습니다. 그렇군요. 생각에 잠기면 같은 것으로 여겼던 것에서 새로운 면모를 발견할 수 있군요.
먼동이 터오는 때 뒤에 우뚝 앉은 인수봉이 친근한 눈빛으로 나를 굽어 살펴줍니다. 한번도 오른 적이 없는 인수봉, 그렇다고 굳이 애써 오르고 싶지 않은 인수봉은 노랫말처럼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좋습니다. 제법 대견한 생각을 하는 사이 북한산이 먼제 부시시 잠을 깹니다. 덩달아 잠들어 있던 도시가 서서히 잠깨어납니다. 수많은 별들처럼 반짝러리던 불빛들이 서서히 줄어드는 것에서 도시가 잠에서 깨어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잠자리에서 일어서는 사람들의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릴 듯 고요한 아침입니다. 구름 사이로 황홀하게 떠오르는 멋진 해돋이를 보여주겠지 하는 기다림의 시간, 두방망이질 하는 듯한 설렘, 누군가와의 첫키스가 이랬던가요?
구름을 빨갛게 물들이며 떠오를 해, 기다림의 시간 시간 시간... 기대했으나 해돋이는 볼 수 없었습니다. 제법 두터운 구름 속에서 해가 탈출할 수 없었나 봅니다. 그 대신에 구름 바다에 잠긴 몽환적인 도시 풍경을 선사해주었습니다. 북한산 영봉에서 자연이 베풀어준 몽환적인 풍경, 마치 천국으로 가는 길이 열리는 듯한 풍경 속에 내가 있었습니다. 꽃처럼 피어난 도시의 불빛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까마귀들이 사람 소리를 흉내낼 즈음, 아침이 몽환적인 모습으로 풍경을 바꾸며 도래하고 있었습니다.
그랬습니다. 영봉에 섰으나 나는 영봉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도시를 내려다보거나 뒤로 돌아 첩첩으로 둘러싸인 산들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것들의 아름답게 변신하는 모습을 보고 있었습니다. 변하는 건 영봉이 아니라는 걸,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그 무엇인가를 바라보려면 그 안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그 생각을 하면서, 그 깨달음에 기쁨 하나 가슴에 품으면서, 나의 대견스러운 생각에 나 자신을 대견하게 여기면서 주변을 돌아보니 모두 사랑스럽습니다. 부시시 일어나는 도시를 바라봅니다. 뒤로 돌아 첩첩이 고요하니 잠든 듯 평온한 산들을 바라봅니다.
전에 보던 풍경과는 전혀 다른 모습, 그 발견 앞에 살이 있음이 참 감사합니다. 아침에 마시는 막걸리 한 잔이 감사합니다. 달달하니 입술을 적셔주는 따끈한 믹스커피 한 잔이 고맙습니다. 비인 속을 천상의 맛으로 채워주는 컵라면의 길쭉한 면발이 고맙습니다. 이 아침엔 모든 것이 고맙습니다. 인생을 맛볼 수 있음이, 삶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음이 한없이 고맙습니다. 그 모든 감사할 일들 중에 특히 산에 오르는 즐거움은 그 산을 보려는 것이 아니라 올라야 볼 수 있는 주변 풍경들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깨달음입니다. 산은 그대로 있습니다. 주변의 다른 것들이 변하여 산이 변한 것처럼 보일 뿐, 본질 그대로 있으니 완전한 산, 변하지 않으니 믿음이 가는 산, 언제든 찾으면 안아주는 산, 그래서 나는 산이 참 좋습니다. 이 아침엔 마음 한 줄 한 줄이 모두 시가 되어 나올 듯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