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 최복현 |
추억에 잠겨 걸은 사패산
지난날들이 지나갑니다. 눈앞에 생생하게 지나갑니다. 마치 무성영화를 보듯, 말소리는 하나도 나오지 않으나 희미한 영상에서부터 생생한 영상까지, 빛바랜 흑백영화에서부터 다채로운 올칼라 영화까지, 도막도막 잘렸다 이어지는 영화처럼 눈 앞에 아른거리며 수많은 영상들이 지니갑니다. 주마등처럼 지나간다는 통속적인 표현이 이때는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평소엔 잊고 있었으나 그 자리에 오니까 지난 일들이 마구 떠오릅니다. 시간의 순서와는 상관 없이 무질서하게 떠오르는 것 같으나 용케도 한 편의 영화처럼 차곡차곡 추억들이라고 표현하든 지난 일이라고 표현하든 지나간 현재들이 생생하게 기억 속에서 올라옵니다.
무슨 이야기냐고요. 가을이 시간에 푹 담가져서 가을을 잃어가는 즈음 사패산에 다녀왔습니다. 올라보면 좋은데, 북한산에 비하거나, 도봉산에 비하면 조금 떨어지기는 하지만, 다시 보면 그다지 떨어지지 않는 아기자기한 산입니다. 불암산, 수락산, 관악산처럼 서울을 둘러싼 산들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 멋진 산이라는 걸, 구석구석 다디면서 보면 알 수 있는 산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사패산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습니다. 명산 중의 명산이라할 도봉산 한쪽 귀퉁이에 붙어 있는 탓일 겁니다. 이름 조차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으니까요. 하지만 직접 구석구석 들여다보면 멋진 바위들도 많습니다. 길도 소박하니 걷기 좋습니다. 더구나 정상에 오르면 거대한 바위로 넉넉하게 앉아서 즐길 수 있습니다.
회룡역에서 출발하여 호암사 방향으로 걷습니다. 곧 내가 7년간 살던 아파트 단지를 지납니다. 먼 기억이지만 살던 날들이 생생합니다. 아파트를 올려다보고 또 올려다봅니다. 처음으로 집을 마련해 내 집이라고 가졌던, 물론 집 값의 절반은 대출로 구했던 아파트, 쉽지 않게 살았던, 그러나 팔팔했던 날들이 떠오릅니다. 몸이 안 좋아 죽었다 살아나기를 몇 번, 굳게 결심을 했드랬습니다. 건강을 위해 매주 한 번은 반드시 산에 오르기로. 그걸 시작으로 지금껏 매주 한 번 산행을 지키고 있으니, 이곳을 지나노라면 더 감회가 새롭습니다. 주변도 많이 변했습니다. 펄이었던 곳은 상가건물들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앞에 야트막한 동산은 절반이 깍여 동사무소와 작은 도서관이 자리잡았습니다.
순환도로 밑으로 나 있는 터널을 지나면 호암사로 오르는 신작로입니다. 말끔하게 포장이 되어 있는 게 이전과 다릅니다. 전에 주로 다니던 길은 등산로를 폐쇄한 대신 어기면 혼난다는 듯 출입급지 경고판이 붙어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멋진 버섯바위를 보러 갈까 싶었는데, 그나마 가는 길을 막아 두었네요. 게다가 하필이면 이날 따라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파견한 할배가 일찌감치 경고를 하네요. 조금 올라가니 이번에 정식직원인 듯 싶은 젊은이가 길을 막고 섰네요. 조금은 서운하지만 포장도로를 따라 호암사로 오릅니다.
지금은 들어갈 수 없는 길, 추억이 많이 서린 길, 처음 의정부 이사와서 저 길을 걸었습니다. 무척이나 비실대며 힘들었습니다. 정상은커녕 1키로미터 남짓 올라가는데 꼬박 두 시간이 걸렸습니다. 얼마나 체력이 꽝이었는지 짐작이 가시지요. 숨을 할딱 거리며 오르다 전망좋은 그 곳에 올랐을 때 스스로 생각해도 참 한심했드랬습니다. 시골에서 나뭇지게를 지고 산을 오르내리던 그때를 생각하니 그때의 내가 나 아닌 것 같았으니까요. 이젠 나는 틀렸다 그 생각을 하니 서글펐습니다. 그날은 그곳에서 하산했습니다. 내려와 생각하니 나 자신이 한심하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했습니다.
오기가 생겼습니다. 그 다음주에 다시 그 길을 걸었습니다. 두 시간에 걸은 1키로미터를 한 시간에 걸었습니다. 그때 결심한 겁니다. 매주 등산을 한 번은 하기로. 그 다음주엔 30분에 그 곳에 올랐고 정상까지 애써 올랐습니다. 지금은 그 지점까지 갈 수만 있다면 20분도 채 안 걸려 오를 수 있는 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줄기차게 매주 오른 산, 다른 산은 생각도 않고 사패산 한 곳만 장장 7년을 다녔으니 구석구석 무엇이 있는지 지형이며 바위들이며 모두 알 정도로 올랐습니다. 그만큼 정든 산입니다. 덕분에 완전히 체력이 떡이었던 나는 지금은 이렇게 건강합니다. 채력도 격세지감이고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호암사에 들어서니 단풍이 참 곱습니다. 호암사를 눈으로 찍으며 이미 기억 속에서 곳곳을 들추어냅니다. 조금 변하긴 했으나 포인트가 되는 지점은 그대로 있습니다, 호암사 뒷길에 넓직한 바윗굴도 슬쩍들여다봅니다. 지금은 그곳도 출입금지 팻말을 붙여두었군요. 거기서 100여미터 오르면 자그만 능선입니다. 그때부터는 맨발로 걸어도 괜찮습니다. 조금 더 오르면 마당바위, 야간산행이 가능하다면 마당바위에서 내려다보면 의정부 시내의 불빛들이 한눈에 가득 들어올 겁니다. 건너편에는 멋진 바위들로 이루어진 소박한 봉우리가 있습니다. 그 길 지나 쉴만한 바위들을 오른쪽으로 내려다보며 비잉 돌아 한 굽이 올라서면 잠시 죄측으로 다시 멋진 바위봉우리 있습니다. 찾는 사람은 적으나 줄을 잡고 그 봉우리에 오르면 동서남북을 휘둘러 볼 수 있습니다. 퍼질러 앉아 엉덩이로 바위맛을 보는 즐거움도 있고요.
이쯤에서부터는 오르는 데 별 어려움 없이 공원길을 걷듯 걷습니다. 능선을 따라 좌우를 살피면서 가을을 만낄하면 걷다보면 어느덧 삼거리입니다. 계속 가면 도봉산이여, 우측으로 600미터 벗어나 걸으면 사패산 정상입니다. 촌스럽게 사패산의 내력을 쓰지는 않겠습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그 길을 걸으면 오래지 않아 사패산 정상입니다. 참 멋진 봉우리입니다. 정상표지석도 있습니다. 넉넉한 바위에 앉아 도봉산을 건너다보는 즐거움은 여기에 와야만 볼 수 있습니다. 수없이 올라와 본 여기 정상, 특히 나에게 등산의 어려움을 처음 느끼게 해준 곳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연이 여기에 머물겠어요. 많은 사람들을 여기서 만나기도 했고 함께 오르기도 했드래습니다.
산을 몰라도 너무 몰랐던, 그냥 나무나 하거나 나물 채취 또는 약초 채취를 하려고 올랐던 어린 시절의 산으로만 생각했던 내가 산행의 쓰라림을 체험한 곳이 여기니까요. 등산장비라곤 아무것도 없었고, 그냥 평상복차림에 운동하를 신고 여기 올랐었습니다. 여름날이라 땀도 많이 흘렸습니다. 처음 정상을 밟을 때이니 체력도 완전 바닥 났고 배도 무척 고팠습니다. 표정에서 그걸 읽었던 것일까요. 어떤 친절한 아저씨가 빠다코코넛 다섯 조각과 물 한 컵을 주었습니다. 그때의 그맛을 잊지 못합니다. 그때부터 물은 꼭 챙기고, 빠다코코넛을 무척 좋아합니다.
오랜만에 사패산에 오르니 수많은 지난 일들이 살아납니다. 잊었던 일들이 나를 가득 채웁니다. 모처럼 사패산에 올라 추억을 마십니다. 지나고나니 모두 아름답습니다. 그러면서 벌써 내려가면서 보아야 할 추억의 장소들을 그려봅니다. 내 안에서 가만 숨어 있던 추억들은 그 자리에 서면 되살아나는군요. 이 가을, 고운 추억이 있걸랑, 추억의 장소로 떠나보는 건 어떨까요?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다는데, 지나간 것은 모두 아름다운 것 같군요. 그러니 쓰라린 과거마저도 아름답게 포장해주는 지난날의 장소로 돌아가 고운 색으로 추억을 색칠하는 가을이 되었으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