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내장산 한 바퀴 도는 즐거움

영광도서 0 1,541

단풍철을 맞은 내장산엔 단풍이 사람인지 사람이 단풍인지 모를 만큼 울긋불긋합니다. 사람과 단풍이 서로 고운 색깔을 가졌다는 듯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의 화려한 옷차림에도 불국하고 주눅들지 않은 단풍들이 아침 햇살을 받아 찬란한 모습을 자랑합니다. 곱게 옷을 입은 사람들, 화사한 옷차림으로 한껏 멋을 낸 여인네들도 햇살 받아 너무 아름답게 고운 색상을 뿜어내는 단풍들을 보며 탄성을 자아냅니다. 잔잔하게 살며시 이는 바람결에 나긋나긋 한들거리는 단풍들의 율동에 누구라도 저절로 탄성이 새나올 듯 합니다. 구경꾼 무리에 끼어 걷다가 우화정 채 못 미처서 단풍 터널을 벗어납니다.

 

동구리에서 산길로 들어섭니다. 사람들의 행렬에서 잠깐 벗어났을 뿐인데, 그 많던 사람들은 흔적 조차 없고 혼자만 남습니다. 아침 아홉시 조금 넘은 시간, 적당히 이른 시간입니다. 단풍 구경 온 사람들이 태반이라 애써 산에 오를 사람은 없나 봅니다. 사람들 틈에서 벗어나니 한결 여유롭습니다. 산길에 들어서니 단풍 나무들은 많지 않지만 가을 분위기를 느끼기엔 충분합니다. 이내 오르막이 시작되면서 몸이 어떻게 알았는지 벌써 열을 내기 시작합니다. 제법 쌀쌀한 날씨임에도 겉 점퍼를 벗는 게 좋을 만큼 송글송글 이마에 땀이 맺힙니다. 가파르게 오르는 길, 속도저절을 하면서 걸으니 그닥 힘들다는 걸 못 느낍니다.

 

벌써 하산하는 분 한 사람을 만납니다. 그리곤 다시 혼자 걷습니다. 우군치에 올라서면서 두 사람과 조우합니다. 정규 길이 아닌 비법정 통행로로 올라온 이들입니다. 잠시 스치고 또 다시 걷습니다. 능선입니다. 바람이 붑니다. 능선 바로 아래와 능선 위는 이렇게 차이납니다. 바람이 능선임을 표나게 합니다. 제법 싸늘한 바람입니다. 바람 탓인지 능선에 오르니 나무로만 치면 벌써 가을입니다. 앙상한 나무들이 줄지어 길을 안내합니다. 우군치에서 잠시 숨을 고르면서 오를 수 있는 길이 이어지다 조금씩 다시 숨이 거칠어집니다. 깔딱고개라고 해도 될 만큼의 경사를 오르고 나면 장군봉입니다. 사방을 돌아볼 수 있는 전망 좋은 봉우리입니다. 한 쌍의 부부와 인사를 나눕니다.

 

나 이 정상을 밟고 간다는 인증으로 정삼임을 알리는 표식만 카메라에 담고 다음 봉우리를 향합니다. 하늘이 파란 원색을 드러내거나 구름이 점점 떠 있으면 훨씬 좋으련만 비 소식과 함께 뿌연 하늘이라 좀 아쉽습니다. 장군봉에서 연자봉에 이르는 능선은 뾰족뾰족하고 날카로운 바위 능선이라 사방을 둘러볼 수 있어 전망이 좋은데, 흐린 탓에 조망이 그닥 좋지 않습니다. 눈으로 즐기면서 걷노라면 금세 연자봉 정상입니다. 케이블카 타는곳이 바로 밑이라 이 정상에서는 대여섯 명이 올라와 있습니다. 점심을 먹기엔 아직 이르다만 신선봉을 바로 앞에 두고 아침 겸 점심으로 군고구마 두 개로 점심을 대신합니다. 내장사를 등지고 촘촘한 산의 능선들을 바라보며 달달한 군고구마를 먹습니다. 맛이 촉촉하게 마음 속 마저 물들이는 듯합니다.

 

그리 길게 쉴 필요도 없습니다. 내리막으로 잠시 내려가면 신선 삼거리, 하산하는 이들이 더러 있습니다. 삼거리를 그냥 지나쳐 신선봉으로 향하면서는 다시 나그네처럼 혼자입니다. 호젓한 산행을 이어 신선봉에서 섭니다. 내장산 최고봉으로 763미터입니다. 이쯤에선 인적은 더 드뭅니다. 아랫바닥에는 구경꾼들이 흔한 말로 인산인해지만 산 위에는 바람 소리만 왱왱거릴 뿐 산새마저 떠난 가을엔 고요합니다. 걷다가 심심하면 노래를 부릅니다. 이런 노래 저런 노래 '루루루루루루루 지금도 마로니에는.....' 노래는 잘 못한다만 이럴 때는 음치로부터의 자유를 만끽합니다. 덥지 않은 계절, 목마름도 못 느끼는 계절, 그닥 걸음을 재촉하지 않아도 열한시 반에 까치봉에 섭니다.

 

뒤돌아보면 걸어온 길이 촘촘하니 뒤를 메우고 있습니다. 저만큼이나 걸어왔구나 대견함을 느낍니다. 앞으로 갈 길을 바라보면 아직 멀게만 보입니다. 잠시 멈추어 물 한 모금 두세 모금 머금어 목을 달래고 잠시 걸으면 이내 연지봉입니다. 걷는 만큼 출발점에서 멀어지는 게 아니라 점차 가까워지는 능선, 걸으면 걸을수록 가는 길은 다르나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듯이 걸어온 길을 나란히 바라보며 좀 더 걸으면 망해봉을 만납니다. 뒤돌아서면 평온한 농촌마을 그리고 저수지가 올려다보고 있고, 앞을 보면 걸어온 능선들이 건너편 성곽처럼 길게 펼쳐져 있습니다. 장군봉에서 연자봉이 뾰족뾰족한 바윗길이었듯이 망해봉에서 불출봉을 잇는 길 역시 바윗길입니다. 그런 만큼 조망이 좋습니다. 내려다보면 아득한 절벽처럼 깍아지른 벼랑이라 쾌감도 있고요.

 

전형적인 산봉우리처럼 바윗봉우리 불출봉에서 하산을 시작합니다. 엳두시 반, 미지막 봉우리인 서래봉까기 잘 시간은 충분하지만, 혹여 강의 시간이 늦을 세라 내장사로 하산을 결정합니다. 가파른 내리막길은 불편하지만 오르막보다는 빠르게 걸을 수 있습니다. 높은 곳에서 추락하듯 십여 분걸으면 앙상한 능선과는 달리 고운 단풍들이 바람에 살랑댑니다. 파란 하늘이 들락거리며 숨박꼭질을 하면서 가끔 햇살을 풀어놓으면 햇살 받는 단풍들의 화려한 색깔이 고운 자태를 뽐냅니다. 햇살이 들어와 금빛을 뽐내면 얼른 카메라에 담으며 내장사를 만납니다. 온통 울긋불긋 단풍의 천국인가 하니 사람의 천국입니다. 사람들물 물결이 단풍처럼 울긋불긋합니다.

 

하늘이 맑지 않아, 구름 속에 숨은 해가 나오지 않아 아쉽다만 빙 두른 능선 안에 성안 처럼 평탄한 바닥에 늘어선 단풍나무들이 미의 제전처럼 멋진 자태를 서로 견주고 있습니다. 빨간색, 노란색, 주황색, 오렌지색, 진빨간색, 같은 듯 사로 다른 다양한 색깔의 단풍들이 물결처럼 내장산 속을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새들 소리 대신 사람들의 감탄사, 물 건너온 사람들의 낯선 언어들이 내장산 속을 가득 메웁니다. 귀에 거슬리는 불협화음들도 눈의 늘거움을 방해하지는 못합니다. 눈이 다부지게 호강합니다. 다섯 시간 채 안 되어 산행을 마무리합니다. 가득 찬 버스를 그냥 보내고 빈 버스를 기다려 버스에 오릅니다. 오후 두시 이십분 버스로 내장산을 벗어나는데, 내장산 빨간 곳에 여전히 내 마음을 붙잡습니다.

 

붉은 단풍, 노란 단풍, 고운 단풍들이 지붕을 이룬 단풍 터널을 버스는 용케도 헤집고 나갑니다. 변덕스러운 하늘이 햇살을 뿌리다가 가두기를 거듭하는 즈음 버스는 내장산을 뒤로 하고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 속으로 들어섭니다. 마냥 들뜨고 설렘이 많았던 사춘기 적 고향을 벗어나 진지하게 세상을 맞닥뜨리면서 살아가야 할 성인기의 진지함처럼 다시 세상으로 돌아온 기분, 정신적인 독립을 꿈꾸던 시절의 사회초년병이 된 기분, 마음은 아직 단풍에 물들었는데 몸은 벌써 세상 한가운데에 들어와 있습니다. 치열한 생존의 현장으로 들어서는 느낌입니다. 단풍에 물든 이 마음, 한동안 세상살이의 상큼한 기억으로 남겠지요.

 

추억 하나 마음에 심어둡니다. 훗날 어느 아름다운 가을날이라고, 나이들어가는 즐거움은 곰씹는 추억 하나 하나 들추어가며 사는 것일 테니 이 하루는 참 잘한 일상 아니겠어요. 처음 출발한 곳으로 되돌아오듯 멀리 간듯 원점으로 가까이 돌아오는 일주산행처럼, 아름다운 기억으로만 나를 물들였으면 합니다. 하여 어느 날엔가 추억이나 곱씹는 날들엔 살풋살픗 미소를 머금고 세상 모두를 원만하게 바라볼 수 있기를, 노욕으로 추한 삶이 아닌 멀지 않은 날을 삼키며 단풍처럼 고운 색조를 유지하는 내 삶이기를, 미래의 고운 가을을 염원하며 목포행 열차를 타기 전에 나를 푹 담글 수 있는 사우나로 들어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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