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추억이 묻은 무등산을 걸어볼까요

영광도서 0 1,315

스그락사그락 낙엽이 소리를 냅니다. 공중에서 줄을 타는 곡예사보다 더 재치있게, 더 자연스럽게 바람의 줄이라도 있는지 공중제비를 돌거나 춤을 추거나 재주를 넘으며 내려와 살포시 지상에 내려앉습니다. 바람이 한두 차례 불어 지납니다. 이때다 싶게 나뭇잎들이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를 내면 흔한 말로 우수수 떨어집니다. 마침 숲 사이를, 생기를 잃어 더는 빛을 가려주지 못하는 숲 사이 사이로 새들어오는 햇빛을 받아 귀엽게 반짝거리며 멋진 은빛 금빛 물고기들이 유영하는 듯한 볼만한 장면을 연출합니다. 가을이 이렇게 곱고 아름답습니다.

 

그렇게 멋지게, 아름답게 내려 쌓은 나뭇잎들을 즈려 밟고 싶으나 발 디딜 곳이 없으니 그냥 밟습니다. 아프다는 소리가 날 것 같으나 정겨운 가을의 세레나데처럼 조금은 쓸쓸한, 조금은 우수에 찬 음악처럼 감흥어린 발자국 소리들이 숲에 은은히 울려펴집니다. 이렇게 우수 어린 가을 숲길을 걷는 나는 참 행운아란 생각이 듭니다. 그래 나는 걷고 있다, 아름다운 숲길을 걷고 있다, 즐거운 마음으로 걷는다, 아름다운 생각을 하며 걷는다, 지난 날을 회상하며 걷는다, 지난 나 중에 아름다운 그 한 날을 기억하며 걷는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걷습니다.

 

나는 걸었습니다. 무등산 길을 걸었습니다. 무등산에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무등산은 참 정겨운 산입니다. 우선 높이가 마음에 듭니다. 도심에서 그리 멀지 않고 버스로 얼마든 부담 없이 갈 수 있는 산임에도 높이가 100미터 고지를 자랑합니다. 이렇게 높으면 산을 자주 안 다니는 사람이라면 주눅이 들만 하지만, 무등산은 그런 위압감을 주지 않습니다. 그냥 동네 야산을 오르듯 풍경을 즐기며 오르다보면 내가 어떻게 이 높은 정상에 왔지 싶게 완만한 경사로로 산객을 유혹합니다. 오르다 보면 새인봉에선 암봉의 묘미를 맛볼 수 있습니다. 중머리재에 오르면 확 트인 산의 즐거움을 누립니다. 중머리재에서 장불재로 걷다 중간쯤엔 시원한 생수로 상큼하게 목을 축일 수 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마치 오랜 신전, 무너진 신전이랄까요, 그리스 신전을 연상하게 하는 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일면 입석대와 서석대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 앞에 서면 어떻게 자연이 이렇게 멋진 건축물을 만들어 놓았을까 싶게, 자연의 경이로움에 놀랍니다. 그렇게 정상에 오르면 사방을 조망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광주시내를,  뒤로 돌아 좌측으로 담양고을의 우아한 산세들을, 우측으로 화순고을의 오순도순한 산 그리메를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정상에서 내려가 중봉으로, 중봉을 넘어 동화사터까지 가면서는 넓다란 억새밭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영남알프스의 광활한 억새밭에 견줄 수는 없지만, 아쉬운 대로 해마다 한번은 봐야 할 것 같은 억새밭을 누릴 수 있고, 그 사잇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억새밭 사이로 멋진 그림 같은 길이 펼쳐져 있습니다. 길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무등산 입구에서 원효사 주차장, 주차장에서 늦재에 이르는 신작로는 때만 잘 맞추어 오면 단풍터널을 걷고 걸을 수 있습니다. 단풍 색은 내장산보다는 조금 덜 고울 수 있으나, 분위기로는 훨씬 고상하고 고아합니다. 높이 솟은 단풍 터널이라고나 할까요. 이렇게 볼 게 많고 기분 좋게 할 꺼리가 만은 무등산은 원효사 주차장으로 가든, 증심사로 가든 시내버스가 자주 오갑니다. 그러니 광주에 갈 일이 있을 때마다 가능하면 한 번쯤 휘휘돌아올 만합니다.

 

지난주에 무등산에 이렇게 다녀왔습니다. 어쩌면 올해 볼 수 있는 고운 단풍을 보았고, 정겨운 길을 걸었고, 추억의 보따리를 풀며 돌아왔습니다.  마침 전남공무원교육원에서 강의해 달라는 부름을 받은 덕분이었습니다. 연고가 없음에도 무등산을 알게 된 지는 30년, 공무원교육원에 강의를 가는 지는 9년이 되어갑니다. 덕분에 무등산과도 꽤 오랜 인연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번에 무등산을 다녀오면서 지난날들이 많이 떠올랐습니다. 어려 무등산을 만났습니다. 봄의 무등산, 여름의 무등산, 가을의 무등산, 겨울의 무등산, 계절에 따른, 세분하면 시기에 따른 각기 다른 여러 모습의 무등산을 기억속에서 만났습니다. 나름의 각각의 아름다움을 심상으로 마음껏 누렸습니다.

 

지금을 누린다는 건 이처럼 과거도 함께 누리는 것이고, 미래도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그 자리, 그 시간, 거기에 가면 자연스럽게 지난날이 새록새록 솟아납니다. 그 자리에 가지 않으면 그 곳을 잊고 삽니다. 어쩌다 기억한다지만 구체적인 추억은 떠오르지 않습니다. 정겨운 길이며 정겨운 바위며, 정겨운 풍경이며, 현재의 모습들이 지난날의 모습도 생생하게 재생해냅니다. 그만큼 지금 나는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하느냐는 나의 지나간 현재를 누리는 일, 나의 다가올 현재를 누리는 일이며, 지금을 누리는 일입니다. 가끔 이렇게 지난날을 퍼올려 현재의 행복으로 만들어낸다면 내 삶도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조금은 촉촉해지는 것 아니겠어요. 슬픔을 지운, 아픔을 어루만진 시간들은 지난날들을 추억이란 이름으로 곱게 포장해주니까요.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