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복현의 나를 찾는 여행


 

최복현

[약력]
서강대에서 불어교육학 석사학위, 상명대학교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동양문학으로 등단해서 [새롭게 하소서] [맑은 하늘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등의 시집, [도둑일기][몽롱한 중산층][에로틱문학의 역사] [정신적 희롱][어린 왕자] [별][틱낫한, 마음의 행복][낙천주의자 캉디드]등의 번역서, 생활철학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어린 왕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사랑하는 지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탈무드의 지혜] 등이 있으며, 생활철학 에세이 [행복을 여는 아침의 명상] [하루를 갈무리하는 저녁의 명상]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작은 기쁨으로 함께 하는 마음의 길동무] [가난한 마음의 행복]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쉼표 하나... <더 보기>

살짝 취한 개포도서관에서의 신화 강의 현장

영광도서 0 1,509

백세시댄가요, 백이십세시댄가요?

어떤 시대든 평균수명이 앞선 시대보다 훨씬 올라간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 인간 모두는 언제 집행을 당할지 모르는 사형수란 부조리한 존재라는 까뮈의 말이 나름 일리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는 동안 무엇이든 해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무료하게 살다 가느니보다는 무엇이든 꾸물거리든, 열중하든, 그 무엇에든 살짝 취해 사는 게 행복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슬며시 건네보고 싶은 아침입니다.

 

여느 날보다 무척이나 냉기가 감도는 겨울 아침, 날씨와는 달리 뜨거운 배움의 현장이 떠오릅니다. 무언가를 배우고 싶은 마음에 취했든, 지적 욕구에 취했든 취해서 아름다운 사람들, 차한 게 아니라면 살짝 미친 사람들이라고나 할까요. 호기심 때문에 살짝 미쳤든, 지적 욕구로 미쳤든 말입니다. 지금 취했느니, 미쳤느니 이 말은 부정적은 의미가 아니라 멋지다는, 아름답다는 의미의 말입니다. 인생이란 게 그런 것 아니겠어요. 뭐 그리 거창한 것도 아니고, 내일을 기약할 수 없지만 지금이란 순간순간은 내 것으로 삼을 수 있는 그런 것 아니겠느냐고요. 그 순간들을 사랑하는 일, 남들과는 좀 유다른 그런 것이 살짝 미치거나 살짝 취해서 사는 멋진 삶 아니겠느냐고요.

 

지난 11월이었습니다. 10월에 시작한 개포도서관에서의 그리스신화로 세상 읽기 마지막 강의는 11월 중순에 끝났습니다. 5주간의 신화 강의, 다섯 가지 주제를 골라 진행한 강의는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강남이란 특수성 때문일까요? 강의실이 매 시간 꽉 찼습니다. 간이 의자를 놓고 듣는 이들로 공간이 별로 남지 않았습니다. 강의 하는 바로 내 코 앞까지 사람들로 찼습니다. 대부분 인문학의 열기 때문이라고는 해도, 첫날 하루만 그렇게 오고 다음 시간부터는 줄어드는 게 대부분이지만 매번 예외 없이 만원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강의 시간 전에 대부분 사람들이 자리를 채웠습니다. 먼저 좋은 자리를 잡으려는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인상적이었는 시간은 마지막 강의 시간이었습니다.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막 강의의 피치를 올리려는데 갑자기 불이 나갔고, 불빛이라곤 밖에서 새들어오는 불빛이 전부였습니다. 마이크도 작동하지 않았고 켜져 있던 피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맥놓고 그냥 있을 수 없는, 좀 맨숭맨숭한 시간이 흘렀습니다. 좀 생각을 하다 어둠 속에서도 진행 할 수 있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어둠 속에서 강의를 진행하면서 질문을 함께 받았습니다. 수강하는 이들은 필기를 하고 싶어도 필기를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그 분위기에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한동안 시간이 흘렀지만 모두 자리를 그대로 지켜주었습니다. 궁여지책으로 담당자가 방법을 찾았습니다. 강의실을 2층에 마련하고 옮길 것을 제안했습니다. 갑자기 마련한 2층 강의실, 피티는 올려졌으나 마이크는 작동이 안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강의는 그럭저럭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놀라운 건 어느 누구 하나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2층으로 올라와서 강의를 들었습니다. 다리가 불편하신 할머니 한 분, 매번 맨 앞에 와서 앉으셨던 분은, 그만 강의실을 일층에서 이층으로옮기는 와중에 늦게 올라온 바람에 맨 뒷자리에 앉아야 했습니다.

 

시설의 갑작스러운 문제인데 어쩔 수 없지만, 담당자가 미안해하며 음료수 비타500을 사다가 각자에게 한 병씩 나누어주었습니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인데 그런 센스를 보여주는 담당자의 배려에 모두들 고마워했습니다. 갑자기 전기가 나가는 우여곡절,  흐트러짐 없는 강의, 담당자의 재빠른 대처와 미안해하는 마음으로 고마운 감정을 담은 음료수 제공, 이러 저라한 우여곡절이 있었던 마지막 강의라서 더 인상적이면서 아름다운 시간이었습니다. 끝까지 자리를 지켜준 이들, 아무런 불평도 없고 아무런 큰소리도 없이 그냥 강의장을 떠나지 않은 이들, 이런 강의가 있을까 감동적이었습니다.

 

게다가 강의장을 떠나면서 모두들 한 마디씩 건네줍니다. 고맙다고 좋은 강의 잘 들었다고, 어디서 또 이런 강의하느냐고. 공부하고 싶은 열망에 살짝 취한 멋진 분들과 보낸 다섯 차례의 강의, 강의하는 내가 더 행복한 사간이었습니다. 오래 오래 기억에 남는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면 그런 열망의 분위기에 나 역시 젖어, 그 분위기에 살짝 미친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무엇엔가 열정이 저절로 가서. 살짝 미쳐서 살기, 아니면 살짝 취해서 살기, 이런 게 세상 살이의 즐거움 아니겠어요. 행복한 일 아니겠어요. 100세시대든 120세시대든 사는 동안 마음은 살짝 뜨겁게 사는 달뜬 마음의 행복한 삶이겠지요. 세월을 잊고 하루 하루를 즐겁게 살 수 있는 방법, 그건 무엇에든 배우고 싶은 마음에 살짝 취해 사는 게 아닐까 싶어 나의 미래 역시 그런 그림을 그려봅니다. 이 춥디 추운 겨울 아침 대신 따뜻한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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