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동식의 다섯 계절의 노래


 

이동식
1953년 생. 서울대학교 영어교육학과 졸업후 1977년 KBS에 입사하여 30여 년을 현장에서 보낸 언론인이다. 초대 북경특파원, 런던지국장, 과학부장, 국제부장, 보도제작국장, 문화담당....< 더보기 >

*제56회 - " 백의민족론을 말한다 "

영광도서 0 734
슬픈 민족이라 흰색을 좋아했는가?

“중국이나 일본의 미를 짙은 화장과 화려한 의상을 휘감은 요란스런 배우나 기생의 미라고 한다면, 우리의 미는 삼베옷을 입고 물동이를 머리에 얹은 이른 아침 시골 처녀의 미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김원용 <한국의 미>중에서

이른 아침 막 떠오르는 햇살을 받아 이름 없는 들풀에 내린 이슬이 영롱한 빛을 발할 때, 식수들의 아침상을 준비하기 우해 물을 길어 머리에 이고 가는 한 시골 처녀, 이러한 표현으로 상징되는 우리 민족의 미, 그것은 고구려 벽화에서 볼 수 있는 밝고 힘찬 아름다움이나 고려 불화와 청자에서 보이는 정교함이나 화려함과는 또 다른 조선 시대 예술의 주요한 특징이라고 하겠다. 과장됨 없이 소박하고, 수수하고, 자연스럽고, 단정하고, 솔직하고, 담백한 예술의 세계, 그것은 조선시대 백자가 주는 멋이요, 조선시대 목공예가 남긴 아름다움이며, 우리의 전통 의상인 한복이 주는 느낌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민족은 백의민족이라 불리어왔고, 흰색을 좋아하는 사람들로 알려졌다. 고대 부여 때부터 특히 흰옷을 즐겨 입었다고 해서 백국민이란 이름이 붙기도 했고, <위지>에는 신라 사람들이 흰옷을 많이 입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송사>에는 고려인들이 소복을 즐겨 입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또한 조선 시대에도 사람들이 백의를 좋아하며, 고종 때는 백의를 입는 것을 금지한 적도 있으나, 사람들로부터 반감만 사고 정착되지 못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들은 우리 민족이 흰색을 좋아하는 민족이란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게 한다.
그런데 우리 민족은 왜 흰옷을 즐겨 입었으며 흰색을 좋아하는 것일까? 한국인의 어떤 조선이 흰색을 좋아하게 한 것일까? 몇 해 전 일본에서 이러한 의문이 제기돼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는 논쟁이 벌어졌던 적이 있다. 그러나 감정적인 차원의 논쟁에 머물고 말아 충분한 결론을 얻지 못하고 문제제기로만 끝나버린 느낌이다.

사람들은 남의 얼굴은 잘 보면서 자기 얼굴은 잘 보지 않는 법이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신의 몸과 정신을 다스리는 데는 힘을 썼지만, 자신에 대해 파악하는 데는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이 어떤 얼굴을 갖고 있는지, 자신의 특성이 어떤지를 잘 알지 못했다. 그랬기 때문에 일제 시대 일본인 민예학자인 야나기무네요시가 한국인들의 얼굴을 처음 그려주었을 때, 너무나도 고맙게 생각한 나머지 그 그림이 잘 된 것인지 아닌지, 그 묘사의 진위도 따지지 않은 채 그저 고마워하기만 했다. 암흑의 시기에 자기를 알아주는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 누군들 반갑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가 애기하는 것을 무작정 우리의 모습이라고 받아들였던 것이다. 야나기는 일찍이 아무도 관심을 쏟지 않았던 조선 시대 백자에서 아름다운을 발견하고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도자기는 때때로 그 모양이 인체의 아름다움을 암시하기도 한다. 이것은 특히 보드랍다. 살결의 아름다움은 따뜻한 느낌마저 준다. 살결의 빛깔이 얼마나 아름다운 흰빛인지 모른다. ... 이 단순한 흰 빛깔에서조차 우리는 민족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그것은 여인과 같이 다소곳하고 안으로 숨은 조용한 빛깔이다. 우리는 밖으로 나가려는 어떠한 교만도 여기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모든 아름다움이 내면적이라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를 보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모양이다.”

이 같은 백자에서 한국인의 마음을 처음 읽었다는 야나기는 이어서 한국인들의 일상 의복인 흰옷에도 특별히 주문하였다. 그리고 한국인과 흰색의 관계를 궁리하던 중 한국인들이 명절 때는 색동옷 등 화려한 옷을 입고, 흰옷은 평상시에만 입는다는 사실에 착안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본에 나라를 빼앗겨 고통 받고 있던 조선의 현실에 대한 동정심과 연민을 바탕으로 새롭고 괴상한 이론을 폈으니, 곧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흰색은 지극한 슬픔의 색이요, 한국인들은 원래부터 슬픈 민족이기에 흰색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중국이나 일본에서 그처럼 다양한 빛깔의 의복이 발달하고 있는데, 어째서 그 이웃나라인 조선에서는 이러한 예를 거의 볼 수 없는 것인가? 그들이 입고 있는 의복의 빛깔은 아무런 색도 없는 백색이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가장 빛깔이 약한 물색이 아닌가. 늙은이나 젊은이나 남자나 여자나 모두 똑같은 흰옷을 입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 세상에 나라가 많고 민족이 많으나 모두가 흰옷을 입는 이 같은 이상한 현상은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 흰 의복이란 언제나 상복이었다, 외롭고 신중한 마음의 상징이었다. 백성은 흰옷을 입는 것으로 영원히 상복을 입고 있는 것이다, 그 민족이 맛본 고통 많은, 의지하기 어렵다는 역사적인 경험은 이러한 의복을 입는 것을 오히려 어울리게 만든 것이 아닌가? 가령 조섬 사람들이 흰옷을 입는다는 관례를 버리고 오색이 찬란한 의복을 입는 드문 경우를 생각해 보자. 단지 즐거움이 허용되어 있을 때에 한해서만 빛깔이 있는 의복을 입는다. ...즐거움이 없을 때 조선 사람들은 모두 또다시 흰옷 즉 상복을 입는다. 아니, 평소에는 이렇다 할 즐거움이 없기 때문에 백의가 또다시 평상시의 의복이 된다. 이렇게 빛깔을 떠난 세계가 조선인들이 살지 않으면 안 될 세계였던 것이다. ...”

야나기는 이렇게 한국인들의 흰옷에서 외로움과 슬픔이라는 소극적인 측면만 발견하고, 한국인들이 처했던 불행한 역사 환경과 결부시켜 한국의 미 전체에 이러한 관점을 확대시켰으니, 곧 한국의 미는 비애의 미, 애상의 미라고 일방적으로 단정해버린 것이다. 반도라는 지정학적인 위치, 숱한 외침으로 핍박받은 민중들의 생활, 그래서 이 세상에 희망을 걸지 못하고 저 세상에 소망을 걸었으며, 무엇인가를 꿈꾸고 그리워하며 안으로 괴로움을 감추었던 한민족, 그런 민족이었기에 한민족은 주어진 숙명을 내면의 미로써 따뜻이하고 무한의 세계로 연결하려 했다는 슬픔의 미학을 야나기는 제시한다. 그의 미학은 한민족의 품성을 가장 잘 포착해낸 것인 양 오해 되었고, 이 미학에 따라 한민족은 불행한 역사 속에서 고통만 받아 외롭고 쓸쓸하기 그지없는 예술을 창조해낼 수밖에 없었다는 한계가 부지불식간에 설정돼버렸다.
그런 그의 미학은 일제가 우리나라 통치를 위해 조작, 왜곡한 식민사관과 의도적이건 비의도적이건 결탁되어, 우리 민족은 5천년 역사 동안 남에게서 침범만 받았고, 그러면서도 한 번도 제대로 반격하지 못했으며, 당파 싸움만 벌이는 등 단합과는 거리가 멀고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이기적인 민족이란 부정적이고 위축된 역사관을 심어줌으로서 한국인들의 독립정신과 용기를 꺾었던 것이다. 가장 조선을 사랑했다는 한 일본인 학자의 가장 양심적(?)이라는 글이 잘못 지적한 한민족의 예술관이 후대에까지 그 얼마나 심한 해독을 주었던가? 우리는 이러한 편협되고 왜곡된 예술관을 우리 자신의 힘으로 줌 더 일찍이 극복했어야 했다.

백샤먼계의 신앙에서 비롯된 흰색 선호 경향

왜 흰 색에서 슬픔과 고통, 인내를 연상하는가? 왜 흰옷을 상복으로 보는가? 이러한 점이 야나기 미학의 한계를 인식하는 출발점이다.
지중해의 밝은 태양 아래 환하게 빛나는 스페인과 이태리의 하얀 석고 건물들, 독립을 위해 스페인 정권에 대항하여 수없이 많은 붉은 피를 적신 멕시코인들의 솜브렐로(모자)와 흰옷들, 그런 것이 모두 슬픔과 고통을 상징하는 것이란 말인가? 서양에서는 순결과 신성의 상징인 백색을 왜 야나기는 그렇게 보았던가? 흰색을 좋아하는 사람은 쾌활하고, 노래를 잘 부르고, 그림도 잘 그린다는데. 아득한 고대로부터 흰색은 태양을 상징하는 것이며, 태양이 대표하는 모든 탁월함과 긍정적인 면을 상징한다는데, 그래서 흰색은 풍요를 상징하며, 길, 선, 호 등 인간 세계의 밝은 면을 대표하는 색깔이라는데, 야나기는 왜 슬픔의 색으로 인식했던가?

우리 민족 신앙의 뿌리가 되는 무속신앙을 살펴보면 우리는 백색을 좋아해왔음을 알 수 있다. 시인 조지훈에 따르면 우리는 무속신앙은 사람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선신을 믿는 백샤먼계이다. 백샤먼은 방울이나 북을 흔들고 두드리면서 미친 듯이 춤을 춤으로써 선신과 만나고, 이 선신을 통해 풍요와 무병, 혼인, 장수 등 좋은 일, 길한 일을 주재받는 무당으로, 흰 망토를 잘 입고, 흰 말을 탄다고 한다. 선신은 흰빛으로 상징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주신이 태양이기 때문에 백산을 숭배하고 박달나무를 좋아하며 흰옷을 즐겨 입게 된 것이라는 설명이다.
육당 최남선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개 조선 민족은 옛날에 태양을 하나님으로 알고 자기네들은 이 하나님의 자손이라고 믿었는데, 태양의 광명을 표시하는 의미로 흰빛을 신성하게 알아서 흰옷을 자랑삼아 입다가 나중에는 온 민족의 풍속을 이루고 만 것이다. 이것은 조선뿐 아니라 세계 어디서고 태양을 숭배하는 민족은 모두 흰빛을 신성하게 알고, 또 흰 옷 입기를 좋아하니, 이를테면 이집트와 바빌론의 풍속이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원초신앙인 무속신앙에서 흰빛을 숭상했기 때문에 조선 시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한민족이 백색을 좋아한다는 설명은 설득력이 약하다. 바로 그런 까닭에 70년대 후반 일본에서 조선의 백색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을 때, 일본 신문에서 한민족의 백색은 민중의 ‘하느님 신앙’으로부터 비롯된 한민족의 상징적인 색깔이며, 고대로부터 낙천적이고 밝은 민족성을 보여주는 태양을 상징하는 색깔이라고 주장했던 김양기가 재일 사학자 이진희로부터 공박을 받게 된 것이다.

“백색을 하느님 신앙과 결부시킨다고 해서 야나기에 대한 비판이 충분한 설득력을 갖지는 못한다. ...한국이 백색을 키울 수 있는 혜택 받은 자연환경과 풍토를 갖고 있다면 고려 5백년간에는 왜 백색이 키워지고 번성되지 않았는지를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어찌 해서 청자가 그토록 많이 구워졌음에도 고려의 백자는 손으로 꼽을 만큼 적은 수에 지나지 않으며, 백색을 키워주는 혜택 받은 한국의 자연환경과 풍토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진희는 이렇게 말하면서 백색은 고대로부터 한국의 상징적인 색깔이 될 수 없으며, 조선시대의 산물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진희는 그 증거로 무명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이 1300년대 후반이므로 그 전에는 무명이 없고 누런 삼베만 있었는데, 이것이 어찌 흰색이냐고 반박하기도 했다.

육당이 말한 무속신앙은 일종의 초기 원시종교 형태였기 때문에 외래의 보다 고등하고 보다 강력한 종교가 들어오면서 생활의 저류로 스며들게 된다. 이에 따라 흰색을 좋아하는 민족적인 경향도 생활의 저변으로 깔리게 된 것은 아닐까? 불교라는 외래 종교가 들어오면서 우리 민족이 갖고 있던 백샤먼계의 신앙은 흰색을 좋아하는 경향으로 생활의 저변에 가라앉은 채, 불교 미술의 영향으로 밝고 적극적인 색채감이 발달하였으니 불교의 단청과 회화, 섬세하고 유장한 선으로 갖는 고려청자가 그것이다. 이렇게 겉으로 드러난 미술은 화려했지만 민중들은 생활 속에서 백색 선호의 경향을 그대로 유지했으니, 삼베옷 등 흰옷을 즐겨 입었던 것이다.
삼베옷의 색깔이 누렇다고는 하지만 빨면 빨수록 더욱 하얗게 되는 것이요, 붉은 색을 좋아하는 중국 사람들의 눈에는 희끄무레하거나 하얗거나 모두 희게 보였을 것이다. 그런 관찰이 중국의 문헌에 남은 것이요, 조선 시대에 청복을 장려하기 위해 국법으로 흰옷을 금지시키기도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는 기록도 민중의 저변에 깔린 흰색 선호 사상을 입증해주는 사실이다.

한국인들이 흰 옷을 즐겨 입었던 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 민중의 생활이 그만큼 어려웠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생활의 어려움 때문에 값비싸고 화려한 물감의 옷은 입지 못하고, 흰 옷만 입을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흰 옷에 그들의 슬픔을 담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저 삼베나 무명이 많았으니까 삼베나 무명으로 옷을 해 입었으며, 물감을 구하기 쉽지 않으니까 굳이 물들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색인 흰색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을 것이다. 조선은 유교 국가였기 때문에 귀족이 입는 옷과 평민이 입는 옷을 구별하기 위해 평민은 화려한 색의 옷을 입지 못하게 금지시켰고 그래서 흰 옷을 입게 됐다고는 하지만, 만일 있는 그대로의 자연색이 싫었다면 사람들은 흑색으로라도 물을 들여 입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그냥 흰 옷을 입는 것을 더 좋아했다. 굳이 물을 들이는 것 자체를 싫어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한국인들의 특성을 자연관에서도 엿볼 수 있다. 뜨락이나 정원의 경우 일본인들은 칼이나 가위로 나무를 죄다 잘라 인공적으로 형태를 만들고, 중국인들은 원형이나 사각형의 담 안에 흉측한 괴석을 갖다놓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정원, 우리의 뜨락은 바람이 잘 통하도록 틔어 있고, 밖에서 안이 들여다보이도록 사립문으로 둘러쳐져 있으며, 바로 흙냄새를 맡을 수 있도록 돌과 나무를 자연스럽게 배치하고 있다.
이처럼 있는 그대로의 자연, 가공하지 않은 자연을 선호한 우리 민족이었기에 밝은 태양이 비치는 환한 세상에서 굳이 옷에 물들일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밝은 흰색 외에 달리 무슨 색이 필요하겠는가? 그것은 굳이 백색이라고 표현할 것이 아니라 자연색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가공하지 않은 자연을 사랑한 한민족의 흰 빛
흰 빛을 지닌 것은 많이 있다. 하늘의 구름도 희고, 살빛도 희며, 얼굴에 바르는 분도 희고, 백자의 표면도 희다. 흰색은 이렇게 생활 속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한국인들이 흰색을 좋아한다면 결국 한국인들이 살고 있는 자연 속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한국의 자연조건은 어떤가? 이웃하고 있는 중국, 일본과 대비해보면, 우리의 자연은 온난하지만 습도가 많고 비가 많아 음울한 편인 일본과도 다르고, 너무 넓어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중국과도 달라서 너무 습윤하지도 너무 건조하지도 않은 중간적인 기후에, 벌판이 너무 많은 중국과도 다르고 산이 너무 많은 일본과도 달라서 산과 들이 적당하게 갖춰져 있다. 너무 습윤하지 않기에 일본인들처럼 매일 목욕을 하지 않아도 되고, 너무 건조하지 않기에 중국인들처럼 온통 웃통을 벗어버리고 벌거벗은 채 거리에 나오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우리의 자연은 지나친 인공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도 웬만큼 갖춰져 있기 때문에 많은 꾸밈이나 장식이 필요치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자연조건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이었기에 무명이건 삼베건 명주건 짠 그대로 사용하고 굳이 무늬를 넣거나 염색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높지 않은 산의 능선은 둥글고, 그 낮은 산 위로 둥근 구름이 흐르며, 강도 굽이굽이 곡선으로 흐르는데, 그런 자연 속에서 사람들이 사는 초가지붕의 선 또한 둥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중국에서 기와지붕 양식을 받아들이면서도 그 선은 중국처럼 너무 급하게 하늘로 치솟아 오르거나 일본처럼 직선으로 잘리는 것이 아니라 완만하고 날씬하게 상승하는 곡선이 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리라. 자연에 대한 정감과 향수, 자연의 품안에 안기려는 어린아이와 같은 감정, 그런 심성으로 우리 민족은 자연은 손대는 것이 아니라는 일종의 신념과 사상을 형성해 온 것이리라.

“한국인의 백의에의 집착은 순수한 것, 본연의 것, 비 장식적인 것에의 귀의를 뜻하고 있으며, 즐거움과 화려함을 나타내기 위해서도 한국인들은 그저 순수한 몇 가지 원색을 나열했을 따름이다. 그러나 이 가미없는 단순한 용색과 배색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은 그것이 근본 정신이나 법칙에 있어서 하늘에 걸쳐진 무지개와 상통하고 있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 김원용 <한국의 미>중에서

사랑방 탁자 위에 놓여 있는 백자 항아리나 접시, 필통의 형태를 보라. 보는 이에게 지극히 안정되고 편안한 느낌을 주지 않는가? 누가 볼세라 자신의 광채를 안으로 숨기며 다소곳이 앉아 있는 그 모습. 대리석처럼 차갑지 않고, 항상 따뜻한 체온이 흐르는 듯, 막걸리처럼 구수한 맛을 풍기는 백자, 그것은 홍사중 씨의 표현을 빌리면 시골길을 걷다가 먼지를 뒤집어쓴 할아버지의 땀 밴 흰 두루마기 같고, 첫 아이에게 젖을 물린 채 꾸벅거리는 새댁의 새큼한 젖내가 나는 흰 무명 적삼과 같다.

양풍이 몰려오기 전까지 일본에서 백색은 상복의 빛깔이었다. 그러한 문화 속에서 자란 일본인이기에 야나기는 흰색에서 우리 한국인과 달리 슬픔의 의미를 느꼈던 것이리라. 어찌 보면 그것은 오히려 중세와 근세를 봉건 영주들의 전란 속에서 보내며 언제나 불안한 삶을 누려야 했던 그들 일본 농민 계급들의 슬픔을 은연중에 드러낸 것인지도 모른다. 셉부꾸를 위해 배에 감던 흰 천에서 연상되는 슬픔일지도...

슬픈 역사라는 선입견을 지워버리고 우리의 백자를 다시 보면 거기에서는 비애라는 것이 도무지 느껴지지 않는다. 정숙한 백자에는 한국인들의 정적인 아름다움이 스며 있되, 슬픔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색이 많지 않은 우리의 단색성은 적조미와 통하고, 그 전통은 우리 현대 미술의 큰 특징 중의 하나로 지적 받고 있는 모노크롬으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는데, 이 것은 오랜 세월 생활 속에서 쌓여진 것이기에 실은 단순한 한 가지 색이 아니라 복합된 색이다. 일견 단순해 보이는 흰색이지만 그 속에는 누룽지와 숭늉의 맛이 녹아 있고, 막걸리의 텁텁함이 뒤엉켜 있으며, 참기름의 고소함이 스며 있는 것이다. 마치 일곱 빛깔 무지개색이 합쳐져 흰빛이 되고, 흰빛은 일곱 가지 색을 아우르고 포괄하는 지고의 빛이 되듯이.
온화한 자연조건 속에서 몇천 년을 살아온 한국인들은 위대한 자연주의자로서의 전통을 쌓아왔다. 그렇기에 장식보다는 무장식을, 인공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더 좋아했으며, 인공을 가한다 하더라도 인위 이전의 자연의 세계를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정도에 그쳤다. 자연에 대한 애착과 순응과 수용, 이것이 한국 민족의 특징이요, 한국 미술의 본질이기에, 한국인들은 전통적으로 있는 그대로의 색, 백색을 좋아했던 것이다.
야냐기는 무력으로 이웃나라를 삼킨 나라의 국민으로서 이웃나라 조선에 대해 한없는 죄책감을 느꼈기에 한국의 흰옷, 한국의 백자에서 정복당한 사람들의 슬픔을 느꼈는지 모르지만, 한국인들에게 백색은 평화와 순결, 자연과의 동화를 상징하는 것이며, 자연스런 감정의 표출일 뿐 결콘 슬픔이 아닌 것이다.
대지를 뒤덮는 흰 눈에서 보듯 백색은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가장 깨끗한 선물이다. 그것을 우리 한민족은 가장 사랑하는 것이니, 이제 더 이상 한국인들의 백색에서 슬픔은 보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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