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동식의 다섯 계절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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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 |
*제58회 - " 동양에서 가장 아름다운 "
영광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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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1 03:44
에카르트가 본 것
우리나라가 일제에 합병되던 시기인 1909년부터 1928년 까지 20년 동안 우리나라에서 선교사로 활동한 안드레아스 에카르트 신부는 고국인 독일로 돌아가 신부직을 버리고 환속한다. 그리고 다음해인 1929년 <한국미술사>를 펴낸다. 독일어로 된 이 책은 8.15 광복 이전에 한국 미술을 일본어 이외의 외국 언어로 소개한 최초의 책으로, 한국 미술의 특성을 서구 사회에 처음으로 본격 소개함으로써 해방 전까지 세계인들이 한국 미술의 아름다움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삼국시대부터 한말까지의 미술을 건축, 조각, 회화 등 여섯 부분으로 나눠 서술한 이 책에서 에카르트는 단순성을 한국 전통 미술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으로 강조하였다.
“조선 사람들은 동양에서 가장 아름답고 또 고전적인 미술품을 만들었다. 이렇게 강조하는 것은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과장하거나 왜곡된 것이 많은 중국 미술이나, 감상으로 치닫거나 지나치게 형식에 얽매이는 일본 미술과는 다르다.”
그는 동양 3국의 미술관의 차이를 이렇게 아주 간단, 극명하게 표현하였다. 그런 그의 미술관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건축물이 바로 종묘다.
종묘는 비록 중국에서 비롯한 제도에 따라 지은 건축이지만, 건축내용에서 중국의 태묘와 다르다. 북경에 있는 명청 시대 중국의 태묘는 건축 구성이 복잡하고 장식은 번쇄하고 화려하다. 반면, 우리나라 종묘 건축은 고도로 절제되고 생략된 기법으로 일관되어 있다. 꼭 필요한 장식만 존재하고 단청도 색채와 문양 사용을 극히 절제하였다. 묘정을 구성하는 건축 요소들 역시 극히 간략하고 단출하다. 이러한 구성, 장식, 색채의 간결함과 단순함으로 해서 종묘를 방문하는 이들은 이곳에서 존엄한의 극치를 맛보게 된다. 그러기에 종묘는 1995년 12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정기총회의 정식 의결을 거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 된 것이다.
종묘의 건축학적 아름다움을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이곳에서 연주되는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이다. 1969년부터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종묘제례가 재현되고, 이 제사에서 종묘제례악이 연주된다. 조선 왕조 시대에 종묘제례는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계절의 첫 달과 일년의 마지막 달인 섣달 등에 모두 다섯 번 올렸지만, 6.25 전쟁으로 중단되었다가 일년에 한 차례 하는 것으로 다시 살아났다. 중묘제례는 조상 신령을 맞이하는 영신례에서 시작해서 신령에게 폐백과 제물을 올리고 세 번의 잔을 올린 뒤 제기를 거두고 신령을 보내는 여덟 가지의 절차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전 과정이 중요무형문화재 56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그런데 이 제례 때 연주되는 음악, 곧 종묘제례악은 중요무형문화재 1호로 지정돼 있어 이채를 띤다. 정부가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를 지정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바로 종묘제례악이라는 이야기다.
종모제례악은 각 제례의식의 절차마다 보태평과 정대업이라는 두 음악을 연주하고 이 때 조상의 공덕을 찬양하는 내용의 노래를 부른다. 보태평은 조선조 왕들의 문덕을 찬양하는 음악이고 정대업은 왕들의 무공을 칭송하는 음악이다. 음악이 연주되는 동안에는 선왕들의 문덕을 기리는 춤과 찬양하는 춤이 곁들여진다. 즉, 성악과 기악, 춤이 어우러지는 종합예술로서, 세계에서 보기 드문 궁중음악의 걸작인 것이다.
이 종묘제례악은 종묘제례와 함께 2001년 5월 18일 유네스코의 ‘세계무형유산걸작’으로 선정되었다. 그러므로 종묘는 건축뿐 아니라 이곳에서의 제사와 제사음악까지가 모두 인류의 문화유산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종묘가 인류의 문화유산이 될 수 있었던 데는 조선 시대 두 명의 왕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첫 번째는 우리가 잘 아는 세종대왕, 두 번째는 조카 단종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 것 때문에 이미지가 좋지 않은 세조이다.
태조 이성계는 나라를 새로 연 뒤 조상과 토지신을 제사지내기 위해 종묘와 사직단을 세웠다. 이 때는 종묘제례악으로 당악과 아악을 썼다.
그런데 즉위한 지 7년째를 맞은 1425년 세조대왕은 친히 종묘에 제향하고 환궁하면서 이조판서 허조에게 이른다.
“...종묘대제에 먼저 당악과 아악을 쓰고 겨우 종헌에서야 향악을 쓰니 어이된 일인가? 아악은 본시 우리나라 음악이 아니고 실은 중국 음악이다. 중국 사람이라면 평일에 들어 익숙하게 들었을 것이므로 제사에 연주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살아서는 향악을 듣는데 죽어서는 아악을 듣게 되니 어찌 된 셈인가? 앞으로는 조고 신령께서 생시에 익히 들으시던 향악으로 아뢰게 하는 것이 어떠할지 맹사성과 의논하라.”
그러자 세종 자신이 발탁한 당대의 최고 중국 음악 이론가 박연과 유신들의 반대가 일어났다. 세종은 이를 무릅쓰고 스스로 작곡을 강행하여 마침내 10년 후인 1435년 우리의 향악으로 된 ‘보태평’ 11곡과 ‘정대업’ 15곡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세종 때에는 이 음악을 곧바로 종묘제례에 쓰지는 못하고 궁중에서 연회를 할 때에만 사용했다.
세종과 문종의 사후 조카 단종을 둘러싼 피비린내 나는 정권 싸움에서 승리한 세조는 즉위 6년을 맞은 서기 1460년, 비로소 국정의 구석구석을 세밀히 챙기기 시작한다. 어릴 때부터 누구보다도 음악에 비상한 재질을 보인 세조는 이 때 그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우선 음악기관의 정비와 악곡의 정리에 나선다. 조선 전기의 음악기관은 건축 초기에 종묘제례악의 악기 연주를 관장하던 아악서와, 종묘제례악 등가의 노래와 임무를 맡은 봉상시, 연향에 쓰이는 당악과 향악의 연주 활동을 맡은 전악서, 음악 이론 연구와 악복 및 의례의 고증과 악서 편찬을 맡은 악학, 악공과 무희의 실기 연습을 맡은 관습도감 등 다섯 기관이 있었다. 세조는 이것들을 장악서와 악학도감으로 정비하고 다시 장악서로 통합한다. 이 통합 과정에서 고려 시대부터 맹목적으로 가장 중요한 음악으로 여겨져온 당악, 곧 중국의 음악을 담당하던 별도의 부서를 없애고 향악과 합침으로써 중국 음악의 조선음악화가 가속화될 수 있었다.
이런 작업과 함께 세조는 기존의 음악도 재정비한다. 평소 종묘제례악에 대해 아버지 세종과 같은 생각을 해온 세조는 “‘정대업’과 ‘보태평’은 그 성용이 성대하므로 종묘에 쓰지 않음은 가석하다.”라고 말하고 최항에게 명하여 세종이 지은 음악을 간추려 새로 짓게 했다. 15곡의 정대업은 11곡으로 축소되었고, 대대적으로 편곡 작업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1464년 개작이 완료되어 종묘제례악으로 채택되었다. 그러므로 본래 조선의 음악을 새로 많이 만든 것은 세종이되 이를 국가 의식에 맞게 재편한 것은 세조이며, 기존의 왕실 연회 음악이었던 ‘보태평’과 ‘정대업’을 종묘제례음악으로 거듭 태어나게 한 것도 세조였다. 그리하여 500여 년이 지나 현대에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당당히 등극하기에 이른 것이다.
결국은 한국적인 것
세조가 음악에 비상한 재주를 타고났음은 여러 군데에서 확인된다.
세종11년인 1429년 9월, 세종은 세조에게 명하여 안평대군, 임영대군과 더불어 음악을 배우도록 하였다. 평소 안평대군은 그 성품이 화려한 것을 좋아하였고, 임영대군은 본래 음률에 밝았기 때문에 모두 즐겨 배웠으나 세조는 궁마에 뜻을 두고 무인들과 어울려 힘을 겨루는 데 더 관심을 보여 음악에는 별로 소질이나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그런데 아버지 세종이 거문고를 탄다는 말을 듣고 곧 배우기 시작하였다.
어느 날 안평대군, 임영대군이 같이 있는 자리에서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은 세조가 향금을 연주하는데, 동생들이 따라가지 못했다고 한다. 또 세조가 일찍이 가야금을 타니 세종이 감탄하여 이르기를, “진평대군의 기상으로 모든 일인들 이루지 못하겠는가?”하고, 또 말하기를, “진평대군이 만약 비파를 탄다면, 능히 쇠약한 기운도 다시 일게 할 것이다.”하였다.
세조가 또 일찍이 피리를 부니 자리에 있던 모든 종친들이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학이 날아와 뜰 가운데에서 춤을 추니 금성대군이 나이가 바야흐로 어렸는데도 이를 보고 홀연히 일어나 학과 마주서서 춤을 추었다고 한다.
1441년 10월에 문종이 세조 및 여러 아우들과 같이 밤에 앉아 있는데 퉁소소리가 나더니 바람결에 삽연하게 두 번이나 들려왔다. 이를 듣고 세조가 곧바로 “협종의 청조이다”라고 그 곡을 알아맞혔다. 형 문종이 “누구일까”라고 궁금증을 표시하자 세조는 곧바로 “귀신의 소리입니다”라고 답하였다. 문종이 “어찌 아느냐?”라고 물으니 세조가 말하기를, “나는 천하의 극을 부는터인데도 유빈의 청조를 감히 넘지 못하는데, 이를 협종의 청조이면서도 상이에서 또 여유가 있으니 이를 임종의 청조입니다. 또 그 소리가 어지럽지 않고 떨리는 것이 더디지 않으며, 풍자를 용납하지 않으면서도 불평스런 뜻이 있으니, 이는 아마 와서 섬기려는 귀신일 것입니다.” 라고 하여 주의를 놀라게 했다고 한다.
이런 재능을 알았음인지 일찍이 세종은 문종에게 이르기를, “악을 아는 자는 우리나라에서 오로지 진평대군뿐이니, 이는 전후에도 있지 아니할 것이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세조는 평소에 말하기를 “고요하면서도 능히 당겨서 끌고, 약하면서도 능히 강한 것을 이기고, 낮아도 범하지 못하며, 태극을 보유하고 지도를 함축하며 조화를 운용하는 것이 곧 악의 공효이다.” 라며 음악의 역할을 인정하고 그 효능을 극대화하는 데 힘썼다.
세종이 정간보를 창안해 음의 고저와 장단을 처음으로 제대로 기록하게 되었는데, 정간보는 1행을 32간으로 질러 정자처럼 만들어 그 속에 율명을 기보하는 것이었다면, 세조는 그것을 개량하여 1행을 16간으로 하는 오음악보를 창안했다.
돌이켜보면 “우리나라 음악이 비록 진선은 못 되나 중원에 비하여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중원의 음악이라고 해서 또한 어찌 바르다고 하겠느냐?”라는 생각을 갖고 있던 세종이 용비어천가를 비롯해 여민락, 치화평, 취풍형, 보태평, 정대업, 창수곡, 경근곡 등 신악을 만들었고 그 음악을 받아 세조가 혹은 거동음악으로 혹은 종묘제례악으로 확립함으로써 조선 왕조의 궁중음악은 500년 이어오면서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이다.
음악을 만들어내고 연주하는 것은 음악가들의 몫이되, 그런 음악을 만들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고 정책으로 구체화하고 실제 음악으로 확립하는 것은 정치지도자들의 몫이라고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음악뿐 아니라 모든 문화예술의 발전에 정치지도자들의 예술에 대한 식견과 안목, 그리고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조선의 종묘제례악을 중흥시킨 세종과 세조의 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5천년의 긴 역사를 갖고 있다고 하나 옛 음악은 제대로 전승하지 못하여 모두 실전된 지금, 그나마 조선 왕조의 음악이 남아서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대접받고 있다.
세종과 세조대에 확립된 음악이 현대까지 전해 내려오기는 했지만, 이제는 새로운 우리 음악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싶다. 아직도 우리는 진정한 우리의 음악을 가지지 못하고 있어, 음악회엘 가면 온통 서양 음악 일색이고 외국 음악가들의 곡을 연주하는 것이 음악의 최고 가치인 양 외국 연주가들을 불러와서는 값비싼 입장료로 국민들을 현혹시킨다. 전통 음악은 고루한 음악으로 분류돼 우리의 현재 삶 속에 되살아나지 못하고, 그 간극을 파고 든 외국의 저급 대중음악들이 우리 국민들의 심성을 어지럽히고 있다.
옛 지도자들은 “예로써 그 뜻을 인도하고, 악으로써 그 소리를 화하게 하며, 정사로써 그 행실을 일정하게 하고, 형법으로써 그 간사함을 막으셨다”고 했다. 동양의 고전인 <악기>는 이처럼 국정, 곧 예, 악, 형, 정이 지향하는 극점은 하나라고 말한다. 이는 민심을 고르게 하여 다스리는 도를 내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그의 글 <악론>에서 “성인의 도는 음악이 아니면 행해지지 않고, 제왕의 다스림도 음악이 아니면 이루저지지 않고, 천지만물의 정도 음악이 아니면 조화되지 않는다.”고 하였으며, 그보다도 먼저 공자는 “시로 흥취를 느끼고, 예에 설 자리를 찾고, 음악으로 인간의 삶이 완성된다.”고 했는데, 그것은 올바른 음악이야말로 인간의 심성을 교화시켜 그의 삶을 완성으로 이끄는 것이란 가르침을 2천 5백여 년전에 이미 설파한 것이다.
정세근의 표현처럼 “‘엽기토끼’에서 ”엽기적인 그녀‘까지 일본식 엽기 문화가 판을 치고, 할리 데이비슨 오토바이의 엔진 진동 소음을 틀어놓고 타악기를 연주하는 이 시대에“ 올바른 음악과 사악한 음악을 구별하고 차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피아노를 부수는 것으로 공연을 대신하고 가락이 아닌 읊조림과 외침으로 노래를 대신하는 이 시대에, 육체와 감각만 해방되었을 뿐 진정한 방향은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리하여 우리의 에는 땅에 떨어졌다는 지적에도 달리 변명할 말이 없다.
우리 시대, 우리의 진정한 음악은 어떤 것이며 언제 누가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는가? 그것을 위해 우리 정치 지도자들이 세종, 세조와 같은 자질과 식견과 안목을 갖게 되기를 간절히 원한다.
우리나라가 일제에 합병되던 시기인 1909년부터 1928년 까지 20년 동안 우리나라에서 선교사로 활동한 안드레아스 에카르트 신부는 고국인 독일로 돌아가 신부직을 버리고 환속한다. 그리고 다음해인 1929년 <한국미술사>를 펴낸다. 독일어로 된 이 책은 8.15 광복 이전에 한국 미술을 일본어 이외의 외국 언어로 소개한 최초의 책으로, 한국 미술의 특성을 서구 사회에 처음으로 본격 소개함으로써 해방 전까지 세계인들이 한국 미술의 아름다움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삼국시대부터 한말까지의 미술을 건축, 조각, 회화 등 여섯 부분으로 나눠 서술한 이 책에서 에카르트는 단순성을 한국 전통 미술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으로 강조하였다.
“조선 사람들은 동양에서 가장 아름답고 또 고전적인 미술품을 만들었다. 이렇게 강조하는 것은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과장하거나 왜곡된 것이 많은 중국 미술이나, 감상으로 치닫거나 지나치게 형식에 얽매이는 일본 미술과는 다르다.”
그는 동양 3국의 미술관의 차이를 이렇게 아주 간단, 극명하게 표현하였다. 그런 그의 미술관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건축물이 바로 종묘다.
종묘는 비록 중국에서 비롯한 제도에 따라 지은 건축이지만, 건축내용에서 중국의 태묘와 다르다. 북경에 있는 명청 시대 중국의 태묘는 건축 구성이 복잡하고 장식은 번쇄하고 화려하다. 반면, 우리나라 종묘 건축은 고도로 절제되고 생략된 기법으로 일관되어 있다. 꼭 필요한 장식만 존재하고 단청도 색채와 문양 사용을 극히 절제하였다. 묘정을 구성하는 건축 요소들 역시 극히 간략하고 단출하다. 이러한 구성, 장식, 색채의 간결함과 단순함으로 해서 종묘를 방문하는 이들은 이곳에서 존엄한의 극치를 맛보게 된다. 그러기에 종묘는 1995년 12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정기총회의 정식 의결을 거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 된 것이다.
종묘의 건축학적 아름다움을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이곳에서 연주되는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이다. 1969년부터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종묘제례가 재현되고, 이 제사에서 종묘제례악이 연주된다. 조선 왕조 시대에 종묘제례는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계절의 첫 달과 일년의 마지막 달인 섣달 등에 모두 다섯 번 올렸지만, 6.25 전쟁으로 중단되었다가 일년에 한 차례 하는 것으로 다시 살아났다. 중묘제례는 조상 신령을 맞이하는 영신례에서 시작해서 신령에게 폐백과 제물을 올리고 세 번의 잔을 올린 뒤 제기를 거두고 신령을 보내는 여덟 가지의 절차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전 과정이 중요무형문화재 56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그런데 이 제례 때 연주되는 음악, 곧 종묘제례악은 중요무형문화재 1호로 지정돼 있어 이채를 띤다. 정부가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를 지정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바로 종묘제례악이라는 이야기다.
종모제례악은 각 제례의식의 절차마다 보태평과 정대업이라는 두 음악을 연주하고 이 때 조상의 공덕을 찬양하는 내용의 노래를 부른다. 보태평은 조선조 왕들의 문덕을 찬양하는 음악이고 정대업은 왕들의 무공을 칭송하는 음악이다. 음악이 연주되는 동안에는 선왕들의 문덕을 기리는 춤과 찬양하는 춤이 곁들여진다. 즉, 성악과 기악, 춤이 어우러지는 종합예술로서, 세계에서 보기 드문 궁중음악의 걸작인 것이다.
이 종묘제례악은 종묘제례와 함께 2001년 5월 18일 유네스코의 ‘세계무형유산걸작’으로 선정되었다. 그러므로 종묘는 건축뿐 아니라 이곳에서의 제사와 제사음악까지가 모두 인류의 문화유산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종묘가 인류의 문화유산이 될 수 있었던 데는 조선 시대 두 명의 왕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첫 번째는 우리가 잘 아는 세종대왕, 두 번째는 조카 단종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 것 때문에 이미지가 좋지 않은 세조이다.
태조 이성계는 나라를 새로 연 뒤 조상과 토지신을 제사지내기 위해 종묘와 사직단을 세웠다. 이 때는 종묘제례악으로 당악과 아악을 썼다.
그런데 즉위한 지 7년째를 맞은 1425년 세조대왕은 친히 종묘에 제향하고 환궁하면서 이조판서 허조에게 이른다.
“...종묘대제에 먼저 당악과 아악을 쓰고 겨우 종헌에서야 향악을 쓰니 어이된 일인가? 아악은 본시 우리나라 음악이 아니고 실은 중국 음악이다. 중국 사람이라면 평일에 들어 익숙하게 들었을 것이므로 제사에 연주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살아서는 향악을 듣는데 죽어서는 아악을 듣게 되니 어찌 된 셈인가? 앞으로는 조고 신령께서 생시에 익히 들으시던 향악으로 아뢰게 하는 것이 어떠할지 맹사성과 의논하라.”
그러자 세종 자신이 발탁한 당대의 최고 중국 음악 이론가 박연과 유신들의 반대가 일어났다. 세종은 이를 무릅쓰고 스스로 작곡을 강행하여 마침내 10년 후인 1435년 우리의 향악으로 된 ‘보태평’ 11곡과 ‘정대업’ 15곡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세종 때에는 이 음악을 곧바로 종묘제례에 쓰지는 못하고 궁중에서 연회를 할 때에만 사용했다.
세종과 문종의 사후 조카 단종을 둘러싼 피비린내 나는 정권 싸움에서 승리한 세조는 즉위 6년을 맞은 서기 1460년, 비로소 국정의 구석구석을 세밀히 챙기기 시작한다. 어릴 때부터 누구보다도 음악에 비상한 재질을 보인 세조는 이 때 그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우선 음악기관의 정비와 악곡의 정리에 나선다. 조선 전기의 음악기관은 건축 초기에 종묘제례악의 악기 연주를 관장하던 아악서와, 종묘제례악 등가의 노래와 임무를 맡은 봉상시, 연향에 쓰이는 당악과 향악의 연주 활동을 맡은 전악서, 음악 이론 연구와 악복 및 의례의 고증과 악서 편찬을 맡은 악학, 악공과 무희의 실기 연습을 맡은 관습도감 등 다섯 기관이 있었다. 세조는 이것들을 장악서와 악학도감으로 정비하고 다시 장악서로 통합한다. 이 통합 과정에서 고려 시대부터 맹목적으로 가장 중요한 음악으로 여겨져온 당악, 곧 중국의 음악을 담당하던 별도의 부서를 없애고 향악과 합침으로써 중국 음악의 조선음악화가 가속화될 수 있었다.
이런 작업과 함께 세조는 기존의 음악도 재정비한다. 평소 종묘제례악에 대해 아버지 세종과 같은 생각을 해온 세조는 “‘정대업’과 ‘보태평’은 그 성용이 성대하므로 종묘에 쓰지 않음은 가석하다.”라고 말하고 최항에게 명하여 세종이 지은 음악을 간추려 새로 짓게 했다. 15곡의 정대업은 11곡으로 축소되었고, 대대적으로 편곡 작업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1464년 개작이 완료되어 종묘제례악으로 채택되었다. 그러므로 본래 조선의 음악을 새로 많이 만든 것은 세종이되 이를 국가 의식에 맞게 재편한 것은 세조이며, 기존의 왕실 연회 음악이었던 ‘보태평’과 ‘정대업’을 종묘제례음악으로 거듭 태어나게 한 것도 세조였다. 그리하여 500여 년이 지나 현대에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당당히 등극하기에 이른 것이다.
결국은 한국적인 것
세조가 음악에 비상한 재주를 타고났음은 여러 군데에서 확인된다.
세종11년인 1429년 9월, 세종은 세조에게 명하여 안평대군, 임영대군과 더불어 음악을 배우도록 하였다. 평소 안평대군은 그 성품이 화려한 것을 좋아하였고, 임영대군은 본래 음률에 밝았기 때문에 모두 즐겨 배웠으나 세조는 궁마에 뜻을 두고 무인들과 어울려 힘을 겨루는 데 더 관심을 보여 음악에는 별로 소질이나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그런데 아버지 세종이 거문고를 탄다는 말을 듣고 곧 배우기 시작하였다.
어느 날 안평대군, 임영대군이 같이 있는 자리에서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은 세조가 향금을 연주하는데, 동생들이 따라가지 못했다고 한다. 또 세조가 일찍이 가야금을 타니 세종이 감탄하여 이르기를, “진평대군의 기상으로 모든 일인들 이루지 못하겠는가?”하고, 또 말하기를, “진평대군이 만약 비파를 탄다면, 능히 쇠약한 기운도 다시 일게 할 것이다.”하였다.
세조가 또 일찍이 피리를 부니 자리에 있던 모든 종친들이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학이 날아와 뜰 가운데에서 춤을 추니 금성대군이 나이가 바야흐로 어렸는데도 이를 보고 홀연히 일어나 학과 마주서서 춤을 추었다고 한다.
1441년 10월에 문종이 세조 및 여러 아우들과 같이 밤에 앉아 있는데 퉁소소리가 나더니 바람결에 삽연하게 두 번이나 들려왔다. 이를 듣고 세조가 곧바로 “협종의 청조이다”라고 그 곡을 알아맞혔다. 형 문종이 “누구일까”라고 궁금증을 표시하자 세조는 곧바로 “귀신의 소리입니다”라고 답하였다. 문종이 “어찌 아느냐?”라고 물으니 세조가 말하기를, “나는 천하의 극을 부는터인데도 유빈의 청조를 감히 넘지 못하는데, 이를 협종의 청조이면서도 상이에서 또 여유가 있으니 이를 임종의 청조입니다. 또 그 소리가 어지럽지 않고 떨리는 것이 더디지 않으며, 풍자를 용납하지 않으면서도 불평스런 뜻이 있으니, 이는 아마 와서 섬기려는 귀신일 것입니다.” 라고 하여 주의를 놀라게 했다고 한다.
이런 재능을 알았음인지 일찍이 세종은 문종에게 이르기를, “악을 아는 자는 우리나라에서 오로지 진평대군뿐이니, 이는 전후에도 있지 아니할 것이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세조는 평소에 말하기를 “고요하면서도 능히 당겨서 끌고, 약하면서도 능히 강한 것을 이기고, 낮아도 범하지 못하며, 태극을 보유하고 지도를 함축하며 조화를 운용하는 것이 곧 악의 공효이다.” 라며 음악의 역할을 인정하고 그 효능을 극대화하는 데 힘썼다.
세종이 정간보를 창안해 음의 고저와 장단을 처음으로 제대로 기록하게 되었는데, 정간보는 1행을 32간으로 질러 정자처럼 만들어 그 속에 율명을 기보하는 것이었다면, 세조는 그것을 개량하여 1행을 16간으로 하는 오음악보를 창안했다.
돌이켜보면 “우리나라 음악이 비록 진선은 못 되나 중원에 비하여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중원의 음악이라고 해서 또한 어찌 바르다고 하겠느냐?”라는 생각을 갖고 있던 세종이 용비어천가를 비롯해 여민락, 치화평, 취풍형, 보태평, 정대업, 창수곡, 경근곡 등 신악을 만들었고 그 음악을 받아 세조가 혹은 거동음악으로 혹은 종묘제례악으로 확립함으로써 조선 왕조의 궁중음악은 500년 이어오면서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이다.
음악을 만들어내고 연주하는 것은 음악가들의 몫이되, 그런 음악을 만들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고 정책으로 구체화하고 실제 음악으로 확립하는 것은 정치지도자들의 몫이라고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음악뿐 아니라 모든 문화예술의 발전에 정치지도자들의 예술에 대한 식견과 안목, 그리고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조선의 종묘제례악을 중흥시킨 세종과 세조의 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5천년의 긴 역사를 갖고 있다고 하나 옛 음악은 제대로 전승하지 못하여 모두 실전된 지금, 그나마 조선 왕조의 음악이 남아서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대접받고 있다.
세종과 세조대에 확립된 음악이 현대까지 전해 내려오기는 했지만, 이제는 새로운 우리 음악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싶다. 아직도 우리는 진정한 우리의 음악을 가지지 못하고 있어, 음악회엘 가면 온통 서양 음악 일색이고 외국 음악가들의 곡을 연주하는 것이 음악의 최고 가치인 양 외국 연주가들을 불러와서는 값비싼 입장료로 국민들을 현혹시킨다. 전통 음악은 고루한 음악으로 분류돼 우리의 현재 삶 속에 되살아나지 못하고, 그 간극을 파고 든 외국의 저급 대중음악들이 우리 국민들의 심성을 어지럽히고 있다.
옛 지도자들은 “예로써 그 뜻을 인도하고, 악으로써 그 소리를 화하게 하며, 정사로써 그 행실을 일정하게 하고, 형법으로써 그 간사함을 막으셨다”고 했다. 동양의 고전인 <악기>는 이처럼 국정, 곧 예, 악, 형, 정이 지향하는 극점은 하나라고 말한다. 이는 민심을 고르게 하여 다스리는 도를 내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그의 글 <악론>에서 “성인의 도는 음악이 아니면 행해지지 않고, 제왕의 다스림도 음악이 아니면 이루저지지 않고, 천지만물의 정도 음악이 아니면 조화되지 않는다.”고 하였으며, 그보다도 먼저 공자는 “시로 흥취를 느끼고, 예에 설 자리를 찾고, 음악으로 인간의 삶이 완성된다.”고 했는데, 그것은 올바른 음악이야말로 인간의 심성을 교화시켜 그의 삶을 완성으로 이끄는 것이란 가르침을 2천 5백여 년전에 이미 설파한 것이다.
정세근의 표현처럼 “‘엽기토끼’에서 ”엽기적인 그녀‘까지 일본식 엽기 문화가 판을 치고, 할리 데이비슨 오토바이의 엔진 진동 소음을 틀어놓고 타악기를 연주하는 이 시대에“ 올바른 음악과 사악한 음악을 구별하고 차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피아노를 부수는 것으로 공연을 대신하고 가락이 아닌 읊조림과 외침으로 노래를 대신하는 이 시대에, 육체와 감각만 해방되었을 뿐 진정한 방향은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리하여 우리의 에는 땅에 떨어졌다는 지적에도 달리 변명할 말이 없다.
우리 시대, 우리의 진정한 음악은 어떤 것이며 언제 누가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는가? 그것을 위해 우리 정치 지도자들이 세종, 세조와 같은 자질과 식견과 안목을 갖게 되기를 간절히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