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동식의 다섯 계절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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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 |
*제60회 - " 예술은 사기다 - 백남준 1 "
영광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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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1 03:44
백남준의 등장
“안녕하십니까? 당신도 우리도 드디어 해내고 말았습니다. 지나가는 해에 작별을 고하면서 악명 높은 새해 1984년에 인사를 하기 위해 여기에 모였습니다.”
1984년 1월 2일 새벽 2시, KBS 텔레비전은 한 외국인이 하는 엉뚱한 인사말을 전해주고 있었다. 한 시간 동안 계속된 세계 최촉의 위성예술제, 그 개막을 알리는 인사말이었다. 그 시간 미국 뉴욕은 1월 1일 낮 12시, 그 위성예술쇼의 제목은 ‘굿모닝, 미스터 오웰’ 이란 다소 특이한 것으로, 영국의 유명한 소설가 조지 오웰이 그의 대표작 <1984년>에서 독재자가 텔레비전을 통해 지배하는 암울한 미래 사회를 묘사해 놓은 것에 대해 “이제 1984년이 된 만큼 과연 조지 오웰이 예언한 대로 텔레비전이 인간의 행동을 감시하는 독재의 도구이던가? 아니다. 보라. 텔레비전은 이처럼 인류의 미래를 밝혀주는 새로운 테크놀로지이다.” 라는 메시지를 보여주는 위성쇼였다.
이 프로그램을 지휘한 사람은 스무 살 전에 우리나라를 떠난 뒤 30년이 넘도록 한 번도 제대로 얼굴을 비친 적이 없으며, 정경화나 김영욱처럼 외모로나 음악전 예술세계로나 사람들을 고상하게 휘어잡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그 해 6월에 34년 만에 고국을 찾으면서 그 누구보다도 많은 관심과 흥미를 불러 일으켰다. 언론들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추적했으며, 그의 행적은 그와 관련이 있는 미술이나 음악, 또는 행위예술계에 한정되지 않고 많은 일반인들의 촉각을 곤두세우게 했다.
그가 바로 백남준이었다!
1984년 6월30일, 30여 년만에 서울로 들어오던 날, 공항에서 처음 만난 그의 모습은 사진에서 보던 그대로였다. 언제나처럼 반쯤 풀어 헤쳐진 와이셔츠, 곧 흘러내릴 듯한 멜빵, 졸린 듯한 눈초리, 계면쩍은 듯, 그러나 누구에게나 빙긋 웃어주는 천진스러운 웃음...
그를 보려고 많은 기자들이 몰려들어 공항 귀빈실이 임시 기자회견장이 되어 버렸다. 백남준을 처음 소개한 것이 KBS임을 아는 신문기자들이 그의 옆자리를 자연스럽게 비워주어 내가 그 옆에 낮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많은 질문들이 쏟아졌지만 그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 중에서도 자신의 예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예술은 사기예요. 예술가는 고등 사기꾼이지! 그러니까 나도 사기를 하는 사람이지 뭐!”
어떤 예술가도 해본 적 없는 말,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말이었다. 일반적으로 고상한 것으로 치부되던 예술을 사기, 그것도 고등 사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그의 이 말은 우리 문화계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1984년 당시 그의 말은 우리 문화예술계의 화두가 되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들고,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백남준은 왜 예술을 사기라고 했을까? 사기도 그냥 사기가 아니라 고등 사기.
집안이 워낙 부유했던 터라 1949년 홍콩에 건너가서 살다 1950년 한국으로 돌아왔다가 6.25전쟁을 맞아 부산에서 배를 타고 고베를 통해 일본에 건너가 살게 된 백남준은 1952년 일본의 수재들만이 들어갈 수 있다는 최고의 명문 동경대학의 문학부에 입학한다. 동경대학 문학부 미학과에서 음악에 관심을 갖고 있던 백남준은 1956년 졸업한 뒤 곧바로 독일로 건너가 뮌헨 대학, 프라이부르크 고등음악원, 쾰른 대학을 차례로 거치면서 당시 스톡하우젠 등에 의해 주도된 전자음악을 연구한다. 1959년 뒤셀도르프에서 열린 ‘존 케이지에 바친다’라는 이름의 연주회에 출연해서 피아노를 때려부숨으로써 전위적인 행동음악가로서의 첫발을 내딛는 백남준! 그가 독일에서 선택한 것이 바로 사기의 일환이라는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음악공부를 진짜 제대로 해보자고 독일로 건너간 건데, 작곡가들이라는 게 모두 엉터리예요. 이미 인정받고 있는 음악가들은 너무나 가마득하고, 이런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서려면 기존의 것을 따라만 해서는 안되겠더라구. 무언가 주목을 끌 수 있는 행동을 해야겠다는 결론을 얻었지.”
백남준은 1960년 쾰른에서 당시 현대 음악의 거장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가위로 자르고 무대 위에서 샴푸로 머리를 감는 등의 행동을 시작으로 기성화 된 모든 것을 깨고 부수는 전위적인 예술가로 차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뒤셀도르프의 카마 극장에서 열린 바이올린 독주회에서는 엄숙한 표정으로 무대에 등장해 바이올린을 아주 천천히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가 갑자기 밑으로 내리치며 부수어 버렸다. 파리의 에펠탑에서는 ‘관객이 없는 높은 탑을 위한 음악’ 이란 이름 아래 무대 위에서 피아노를 쓰러뜨리고 해머로 부수어 버리는 과감한 음악은 연주(?)한다. 1961년에는 전후 독일의 가장 중요한 행동예술가 그룹인 플럭서스의 창시자 조지 마츄너스를 만나 이 운동의 중요한 멤버로서 많은 새로운 퍼포먼스 활동을 계속한다.
이것을 행동음악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백남준은 당시 행동음악을 통해 모종의 사기를 획책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기존의 것을 따라만 해서는 영원히 남을 앞설 수 없으므로, 남이 하지 않은, 생각하지 않은 새로운 것을 하려 했던 것이다. 새로운 것은 기존의 것을 깨뜨리는 데서 나온다. 그것을 겉으로 보면 파괴로 보일지 모르지만 파괴라기보다는(기존의 것에 대한) 해체이다.
남다른 의식과 실험 정신
“아무래도 그 때 유행하던 전자음악을 보니까 한정된 전자음에는 내가 구하던 음이 없었지. 개인이 스튜디오를 만들어 간단한 전자음악을 하는데, 아무리 해도 클라이막스에 도달이 안 되는 거야. 그래서 생각한 것이 역시 즉흥적, 일회성 해프닝을 해야겠다는 것이었어. 그래서 피아노 쓰러뜨리기를 한 것인데, 이것으로 평판이 나기 시작했지. 그 때가 26살이야.”
그러나 그 사기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정확한 안목과 과감한 발상이 필요했는데, 백남준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소유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기는 점점 성공을 거두어 갔다.
‘텔레비전 수상기, 전기가 들어오면 그림이 나오고 소리가 나오는 이 괴상한 현태의 사생아도 무언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팔아먹을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생각에 미치자 1963년부터 그는 고물 텔레비전을 괴롭히기 시작한다(당시는 돈이 없어서 새 수상기는 쓸 엄두도 못 내던 형편이었다). 전류가 흐르는 브라운관 가까이에 강한 자석을 붙여보았다. 전류와 전압, 자기라는 전기의 3요소로 형성되어 있는 텔레비전 화면은 자석의 영향으로 일그러지면서 전혀 새로운 영상을 만들어내었다. 비뚤어지고 휘어지고 구부러지고 휘감긴, 그러면서 작가의 손놀림에 따라 전혀 예상치 못한 세계를 그려낸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 해 3월, 인류사상 최초로 텔레비전 수상기를 예술작품의 소재로 쓴 비디오아트가 발표되었다. 부퍼탈의 파르나스 화랑에서였다.
이 전시회는 그때까지 음악가였던 백남준을 자신도 모르게 미술가로 변신시킨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또한 현대기술문명을 대표하는 텔레비전을 예술의 소재로 쓴다는, 전혀 새롭고 엉뚱한, 그러나 현대에 가장 중요한 예술 장르인 비디오예술이 창시된 예술사적인 사건이었다. 무언가 남과 달라야 한다는 그의 생각이 이루어낸 일이었다.
1963년 일본인 전자기술자인 아베 슈와와 함께 노래하며 걸어가는 로봇을 만들어낸 것도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자, 무언가 남과는 다른 것을 하자, 남이 안 하던 것을 하자는 그의 남다른 의식과 모험정신, 실험정신이 빚어낸 기념비적인 작품이었다.
바이올린은 어깨 위에 올려놓고 연주하는 악기라는 고정관념도 백남준에 의해 깨어졌다. 그는 바이올린을 끌로 다니다가 분수에 버려버린다. 텔레비전도 그에게는 단순히 바라보기만 하는 기계가 아니다. 그냥 남들이 만들어주는 프로그램을 시청만 하는 게 아니라 텔레비전을 갖고 마음대로 즐겁게 놀라고 말한다.
미국에서 인정을 받다
60년대로 넘어서면서 새로운 것을 찾아내고 시험할 기회는 구대륙보다는 신대륙에 많았고, 그것도 세계 제일의 부국인 미국의 경제 중심지 뉴욕이 최고였다. 예술적 아이디어와 변신의 천재인 백남준이 이 사실을 놓칠 리 없었다. 1964년 독일에서 뉴욕으로 건너온 그는 첼로 연주가인 샬롯 무어맨을 만난다. 백남준은 이 젊은 여자 첼리스트를 상대로 그 때까지 그 누구도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던 음악과 섹스의 결합을 과감하게 시도한다. 이번에는 미국에서 사기를 치기 시작한 것이다.
1965년 1월, 미국에서의 첫 전시회에서 샬롯 무어맨은 백남준의 기획에 따라 ‘성인만을 위한 첼로 소나타 1번’을 연주하면서 차례로 상의를 하나씩 벗어 완전 누드가 된다. ‘생상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에서는 얇은 가운을 입고 생상의 작품 ‘백조’를 연주하다가 옆에 있는 물통에 들어가 젖은 몸이 된다. 1967년 2월엔 뉴욕에서 상의를 모두 벗은 채 ‘오페라 섹스트로니크’란 작품을 연주하던 무어맨이 하의까지 벗으려 하다가 경찰에 의해 중지당한다. 이런 일련의 작업도 끊임없이 새 것을 추구하는 백남준의 예술적 창작정신의 소산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무언가 센세이셔널한 것을 통해 갓 입문한 뉴욕 문화계에 빨리 이름을 알리려는 고도의 계산이 갈려 있는 작업이기도 했다.
“나는 당시 영주권이 없어서 체포되면 큰일이었어. 여자는 계속해 체포될 것이고, 예술은 어차피 난봉꾼이니깐 어느 정도 놀아나야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가십이 되는 거고, 그렇게 해야 유명인 리스트에 들어가는 거지. 유명 인물에 들어가야 추방당하지도 않잖아?”
그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이런 식이었다. 즉,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기상천외한 사기를 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백남준의 관심은 텔레비전에 쏠리고 있었다. 그의 텔레비전 작업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TV를 조각 작품처럼 세우거나 눕히는 등 진열하고 전시하는 일이었고, 또 하나는 TV의 화면 자체를 변형시키거나 화면에 이미지를 첨가시켜 새로운, 예술성이 강한 화면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비디오예술이 본격화되면서 백남준이 보여주는 비디오작품은 그의 특기인 음악뿐 아니라 무용, 종교 등이 포함된 종합예술로 확대, 발전되어, 단순한 화면 장난에 머무르지 않고 현대 문명을 역설적으로 비판하는 메시지를 담아내기 시작한다. 1975년 뉴욕의 르네 블록 화랑에 처음 등장한 'TV - 붓다‘가 그것이다. 앉은 자세의 부처가 그 앞에 놓인 텔레비전에 비쳐진 자기모습을 말없이 바라본다. 이 작품에는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가 절묘하게 결합돼 있어서 격찬을 받았다.
1976년에 발표한 작품 ‘달은 가장 오래된 TV'라는 작품은 어두운 공간에 있는 12대의 텔레비전에 수상기 조작으로 각가 차례로 커지는 달의 형상을 재현해 놓은 것으로, 텔레비전이 동양적 명상과 신비로움의 세계를 표현할 수 있는 훌륭한 조각 소재임을 입증했다. 1978년에는 프랑스의 퐁피두 문화센터에서 수 많은 나무와 풀 사이에 텔레비전 수상기를 눕혀 늘어놓는 ’TV - 정원‘을 발표해 또 다시 갈채를 받는다.
그러다 드디어ㅓ 미국인들, 아니 뉴욕에 모여 있는 세계인들이 그에게 넘어간 사건이 생겼다. 1982년 미국의 대표적 미술관인 휘트니 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열어준 것이다. 휘트니 미술관이 그의 회고전을 열어주었다는 것은 그의 일거수일투족, 그가 만든 작품들, 그의 기발한 행동들이 이미 예술적으로 상당한 경지에 올라서 있으므로, 그를 인정하고 그 예술 세계를 함께 평가하자는 뜻이다.
“안녕하십니까? 당신도 우리도 드디어 해내고 말았습니다. 지나가는 해에 작별을 고하면서 악명 높은 새해 1984년에 인사를 하기 위해 여기에 모였습니다.”
1984년 1월 2일 새벽 2시, KBS 텔레비전은 한 외국인이 하는 엉뚱한 인사말을 전해주고 있었다. 한 시간 동안 계속된 세계 최촉의 위성예술제, 그 개막을 알리는 인사말이었다. 그 시간 미국 뉴욕은 1월 1일 낮 12시, 그 위성예술쇼의 제목은 ‘굿모닝, 미스터 오웰’ 이란 다소 특이한 것으로, 영국의 유명한 소설가 조지 오웰이 그의 대표작 <1984년>에서 독재자가 텔레비전을 통해 지배하는 암울한 미래 사회를 묘사해 놓은 것에 대해 “이제 1984년이 된 만큼 과연 조지 오웰이 예언한 대로 텔레비전이 인간의 행동을 감시하는 독재의 도구이던가? 아니다. 보라. 텔레비전은 이처럼 인류의 미래를 밝혀주는 새로운 테크놀로지이다.” 라는 메시지를 보여주는 위성쇼였다.
이 프로그램을 지휘한 사람은 스무 살 전에 우리나라를 떠난 뒤 30년이 넘도록 한 번도 제대로 얼굴을 비친 적이 없으며, 정경화나 김영욱처럼 외모로나 음악전 예술세계로나 사람들을 고상하게 휘어잡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그 해 6월에 34년 만에 고국을 찾으면서 그 누구보다도 많은 관심과 흥미를 불러 일으켰다. 언론들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추적했으며, 그의 행적은 그와 관련이 있는 미술이나 음악, 또는 행위예술계에 한정되지 않고 많은 일반인들의 촉각을 곤두세우게 했다.
그가 바로 백남준이었다!
1984년 6월30일, 30여 년만에 서울로 들어오던 날, 공항에서 처음 만난 그의 모습은 사진에서 보던 그대로였다. 언제나처럼 반쯤 풀어 헤쳐진 와이셔츠, 곧 흘러내릴 듯한 멜빵, 졸린 듯한 눈초리, 계면쩍은 듯, 그러나 누구에게나 빙긋 웃어주는 천진스러운 웃음...
그를 보려고 많은 기자들이 몰려들어 공항 귀빈실이 임시 기자회견장이 되어 버렸다. 백남준을 처음 소개한 것이 KBS임을 아는 신문기자들이 그의 옆자리를 자연스럽게 비워주어 내가 그 옆에 낮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많은 질문들이 쏟아졌지만 그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 중에서도 자신의 예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예술은 사기예요. 예술가는 고등 사기꾼이지! 그러니까 나도 사기를 하는 사람이지 뭐!”
어떤 예술가도 해본 적 없는 말,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말이었다. 일반적으로 고상한 것으로 치부되던 예술을 사기, 그것도 고등 사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그의 이 말은 우리 문화계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1984년 당시 그의 말은 우리 문화예술계의 화두가 되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들고,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백남준은 왜 예술을 사기라고 했을까? 사기도 그냥 사기가 아니라 고등 사기.
집안이 워낙 부유했던 터라 1949년 홍콩에 건너가서 살다 1950년 한국으로 돌아왔다가 6.25전쟁을 맞아 부산에서 배를 타고 고베를 통해 일본에 건너가 살게 된 백남준은 1952년 일본의 수재들만이 들어갈 수 있다는 최고의 명문 동경대학의 문학부에 입학한다. 동경대학 문학부 미학과에서 음악에 관심을 갖고 있던 백남준은 1956년 졸업한 뒤 곧바로 독일로 건너가 뮌헨 대학, 프라이부르크 고등음악원, 쾰른 대학을 차례로 거치면서 당시 스톡하우젠 등에 의해 주도된 전자음악을 연구한다. 1959년 뒤셀도르프에서 열린 ‘존 케이지에 바친다’라는 이름의 연주회에 출연해서 피아노를 때려부숨으로써 전위적인 행동음악가로서의 첫발을 내딛는 백남준! 그가 독일에서 선택한 것이 바로 사기의 일환이라는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음악공부를 진짜 제대로 해보자고 독일로 건너간 건데, 작곡가들이라는 게 모두 엉터리예요. 이미 인정받고 있는 음악가들은 너무나 가마득하고, 이런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서려면 기존의 것을 따라만 해서는 안되겠더라구. 무언가 주목을 끌 수 있는 행동을 해야겠다는 결론을 얻었지.”
백남준은 1960년 쾰른에서 당시 현대 음악의 거장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가위로 자르고 무대 위에서 샴푸로 머리를 감는 등의 행동을 시작으로 기성화 된 모든 것을 깨고 부수는 전위적인 예술가로 차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뒤셀도르프의 카마 극장에서 열린 바이올린 독주회에서는 엄숙한 표정으로 무대에 등장해 바이올린을 아주 천천히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가 갑자기 밑으로 내리치며 부수어 버렸다. 파리의 에펠탑에서는 ‘관객이 없는 높은 탑을 위한 음악’ 이란 이름 아래 무대 위에서 피아노를 쓰러뜨리고 해머로 부수어 버리는 과감한 음악은 연주(?)한다. 1961년에는 전후 독일의 가장 중요한 행동예술가 그룹인 플럭서스의 창시자 조지 마츄너스를 만나 이 운동의 중요한 멤버로서 많은 새로운 퍼포먼스 활동을 계속한다.
이것을 행동음악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백남준은 당시 행동음악을 통해 모종의 사기를 획책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기존의 것을 따라만 해서는 영원히 남을 앞설 수 없으므로, 남이 하지 않은, 생각하지 않은 새로운 것을 하려 했던 것이다. 새로운 것은 기존의 것을 깨뜨리는 데서 나온다. 그것을 겉으로 보면 파괴로 보일지 모르지만 파괴라기보다는(기존의 것에 대한) 해체이다.
남다른 의식과 실험 정신
“아무래도 그 때 유행하던 전자음악을 보니까 한정된 전자음에는 내가 구하던 음이 없었지. 개인이 스튜디오를 만들어 간단한 전자음악을 하는데, 아무리 해도 클라이막스에 도달이 안 되는 거야. 그래서 생각한 것이 역시 즉흥적, 일회성 해프닝을 해야겠다는 것이었어. 그래서 피아노 쓰러뜨리기를 한 것인데, 이것으로 평판이 나기 시작했지. 그 때가 26살이야.”
그러나 그 사기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정확한 안목과 과감한 발상이 필요했는데, 백남준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소유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기는 점점 성공을 거두어 갔다.
‘텔레비전 수상기, 전기가 들어오면 그림이 나오고 소리가 나오는 이 괴상한 현태의 사생아도 무언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팔아먹을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생각에 미치자 1963년부터 그는 고물 텔레비전을 괴롭히기 시작한다(당시는 돈이 없어서 새 수상기는 쓸 엄두도 못 내던 형편이었다). 전류가 흐르는 브라운관 가까이에 강한 자석을 붙여보았다. 전류와 전압, 자기라는 전기의 3요소로 형성되어 있는 텔레비전 화면은 자석의 영향으로 일그러지면서 전혀 새로운 영상을 만들어내었다. 비뚤어지고 휘어지고 구부러지고 휘감긴, 그러면서 작가의 손놀림에 따라 전혀 예상치 못한 세계를 그려낸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 해 3월, 인류사상 최초로 텔레비전 수상기를 예술작품의 소재로 쓴 비디오아트가 발표되었다. 부퍼탈의 파르나스 화랑에서였다.
이 전시회는 그때까지 음악가였던 백남준을 자신도 모르게 미술가로 변신시킨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또한 현대기술문명을 대표하는 텔레비전을 예술의 소재로 쓴다는, 전혀 새롭고 엉뚱한, 그러나 현대에 가장 중요한 예술 장르인 비디오예술이 창시된 예술사적인 사건이었다. 무언가 남과 달라야 한다는 그의 생각이 이루어낸 일이었다.
1963년 일본인 전자기술자인 아베 슈와와 함께 노래하며 걸어가는 로봇을 만들어낸 것도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자, 무언가 남과는 다른 것을 하자, 남이 안 하던 것을 하자는 그의 남다른 의식과 모험정신, 실험정신이 빚어낸 기념비적인 작품이었다.
바이올린은 어깨 위에 올려놓고 연주하는 악기라는 고정관념도 백남준에 의해 깨어졌다. 그는 바이올린을 끌로 다니다가 분수에 버려버린다. 텔레비전도 그에게는 단순히 바라보기만 하는 기계가 아니다. 그냥 남들이 만들어주는 프로그램을 시청만 하는 게 아니라 텔레비전을 갖고 마음대로 즐겁게 놀라고 말한다.
미국에서 인정을 받다
60년대로 넘어서면서 새로운 것을 찾아내고 시험할 기회는 구대륙보다는 신대륙에 많았고, 그것도 세계 제일의 부국인 미국의 경제 중심지 뉴욕이 최고였다. 예술적 아이디어와 변신의 천재인 백남준이 이 사실을 놓칠 리 없었다. 1964년 독일에서 뉴욕으로 건너온 그는 첼로 연주가인 샬롯 무어맨을 만난다. 백남준은 이 젊은 여자 첼리스트를 상대로 그 때까지 그 누구도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던 음악과 섹스의 결합을 과감하게 시도한다. 이번에는 미국에서 사기를 치기 시작한 것이다.
1965년 1월, 미국에서의 첫 전시회에서 샬롯 무어맨은 백남준의 기획에 따라 ‘성인만을 위한 첼로 소나타 1번’을 연주하면서 차례로 상의를 하나씩 벗어 완전 누드가 된다. ‘생상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에서는 얇은 가운을 입고 생상의 작품 ‘백조’를 연주하다가 옆에 있는 물통에 들어가 젖은 몸이 된다. 1967년 2월엔 뉴욕에서 상의를 모두 벗은 채 ‘오페라 섹스트로니크’란 작품을 연주하던 무어맨이 하의까지 벗으려 하다가 경찰에 의해 중지당한다. 이런 일련의 작업도 끊임없이 새 것을 추구하는 백남준의 예술적 창작정신의 소산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무언가 센세이셔널한 것을 통해 갓 입문한 뉴욕 문화계에 빨리 이름을 알리려는 고도의 계산이 갈려 있는 작업이기도 했다.
“나는 당시 영주권이 없어서 체포되면 큰일이었어. 여자는 계속해 체포될 것이고, 예술은 어차피 난봉꾼이니깐 어느 정도 놀아나야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가십이 되는 거고, 그렇게 해야 유명인 리스트에 들어가는 거지. 유명 인물에 들어가야 추방당하지도 않잖아?”
그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이런 식이었다. 즉,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기상천외한 사기를 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백남준의 관심은 텔레비전에 쏠리고 있었다. 그의 텔레비전 작업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TV를 조각 작품처럼 세우거나 눕히는 등 진열하고 전시하는 일이었고, 또 하나는 TV의 화면 자체를 변형시키거나 화면에 이미지를 첨가시켜 새로운, 예술성이 강한 화면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비디오예술이 본격화되면서 백남준이 보여주는 비디오작품은 그의 특기인 음악뿐 아니라 무용, 종교 등이 포함된 종합예술로 확대, 발전되어, 단순한 화면 장난에 머무르지 않고 현대 문명을 역설적으로 비판하는 메시지를 담아내기 시작한다. 1975년 뉴욕의 르네 블록 화랑에 처음 등장한 'TV - 붓다‘가 그것이다. 앉은 자세의 부처가 그 앞에 놓인 텔레비전에 비쳐진 자기모습을 말없이 바라본다. 이 작품에는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가 절묘하게 결합돼 있어서 격찬을 받았다.
1976년에 발표한 작품 ‘달은 가장 오래된 TV'라는 작품은 어두운 공간에 있는 12대의 텔레비전에 수상기 조작으로 각가 차례로 커지는 달의 형상을 재현해 놓은 것으로, 텔레비전이 동양적 명상과 신비로움의 세계를 표현할 수 있는 훌륭한 조각 소재임을 입증했다. 1978년에는 프랑스의 퐁피두 문화센터에서 수 많은 나무와 풀 사이에 텔레비전 수상기를 눕혀 늘어놓는 ’TV - 정원‘을 발표해 또 다시 갈채를 받는다.
그러다 드디어ㅓ 미국인들, 아니 뉴욕에 모여 있는 세계인들이 그에게 넘어간 사건이 생겼다. 1982년 미국의 대표적 미술관인 휘트니 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열어준 것이다. 휘트니 미술관이 그의 회고전을 열어주었다는 것은 그의 일거수일투족, 그가 만든 작품들, 그의 기발한 행동들이 이미 예술적으로 상당한 경지에 올라서 있으므로, 그를 인정하고 그 예술 세계를 함께 평가하자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