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동식의 다섯 계절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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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 |
*제61회 - " 예술은 사기다 - 백남준 2 "
영광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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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0
2016.12.01 03:44
지상의 예술에서 우주의 예술로
그의 사기는 이제 지상에 머물 수 없었다. 미국과 프랑스, 독일, 일본 등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그는 서로 떨어진 각 나라를 잇는 사상 최대의 예술작품을 만들어 팔아먹자는 아주 기발한 착상을 하게 된다. 그것은 곧 막 실용화되기 시작한 위성을 이용한 아트, 곧 새틀라이트 아트라는 것이었다.
그 첫 작품이 이 글 맨 앞에서 언급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다. 미국 뉴욕과 프랑스 파리 등을 위성으로 연결해 양쪽의 대표적인 전위 예술가들이 벌인 첨단 예술쇼.
조지 오웰이 전체주의가 도래할 것이라고 예언했던 새해, 그가 예언한 대로 텔레비전은 과연 인류의 생활을 감시하는 나쁜 도구가 되었는가? 일찍부터 텔레비전을 예술의 도구로 활용해 온 백남준으로서는 결코 인정할 수 없는 잘못된 전제였다. 그것을 메시지로 삼아 전 세계의 신 문명의 도래를 알리는 지구 대축제였다.
1984년 성공 이후 1986년 아시안게임에서는 뉴욕, 도쿄, 서울을 잇는 위성쇼 ‘바이바이 키플링’을 만들어 방송했고, 다시 1988년에는 서울 올림픽을 기념해서 ‘wrap around the world'라는 위성잔치를 열었다. 우리말로 ’지구를 싸는 보자기‘라는 뜻의, 한국, 미국, 일본뿐 아니라 소련, 독일, 중국, 그리고 이스라엘까지를 연결하는, 그야말로 지구 전체를 문화예술의 보자기로 둘러싸는 가장 큰 지구문화잔치를 직접 지휘함으로써 그는 역사상 가장 넒은 지역에 예술작업을 펼친 예술가로 기록되게 되었다. 그의 예술은 이때 비로소 새틀라이트 아트, 곧 인공위성을 이용한 예술, 나아가서는 스페이스 아트, 곧 시공예술이란 가장 높고 넓은 차원의 예술이름을 부여받게 된다. 그의 말대로 “새로운 콘택트가 새로운 콘텐트를 부르고 새로운 콘텐트가 새로운 콘택트를 부르는 문명의 피드백’이 그에 의해서 실현된 것이다. 이쯤 되면 더 이상 그를 사기꾼이라고 비난할 수가 없다. 그의 사기는 너무나 완벽했고 너무나 앞서 갔고 너무나 기상천외해서 보통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것 이상이었던 것이다.
그의 성공은 그의 재능과 노력에 의한 당연한 결과이지만, 그가 일찍부터 그의 예술적 야망을 성취하기 위해 서울을 떠나 일본, 독일, 미국 등으로 차례로 옮겨온 과정을 더듬어 보면 옛날 유라시아의 광대한 벌판을 누비던 우리 선조들의 피가 몸속에 흐르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 자신이 시인하든 부인하든 세계의 예술계를 흔들고 일반 시민들을 예술이라는 영역 속으로 불러들인 예술의 영매, 곧 무당이었던 것이다.
새로운 것에의 끝없는 욕구
현대의 매스커뮤니케이션은 인간을 획일화하고 독자적인 사고를 제약하며 행동이나 의욕, 창의력을 상실케 하여 이른바 틀에 박힌, 획일화된 인간을 만들었다. 예술은 이렇게 비인간화된 기술로 인해 고갈된 생명력과 에너지를 다시 한번 부활시켜야 한다.
현대의 대표적인 사회학자 루이스 멈포드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우리가 예술가를 존경하고 우대하는 것은 그들이 우리 범인들이 갖지 못한 창조의 에너지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멈포드가 말한 창조의 에너지가 백남준에게 있었던 것이다.
백남준은 1940년 대 후반 김순남, 이건우 등의 음악가들로부터 당시로서는 첨단 음악가인 쇤베르크의 음악을 배우고 이를 작곡에 응용했을 정도로 일찍부터 세계에 눈을 돌리고 있었다. 그는 특히 김순남의 음악세계를 높이 평가하면서, 그가 이북으로 끌려가 재능이 꽃피지 못한 것을 한국 문화계의 큰 손실이라고 아쉬워하고 있다.
“날 자꾸만 서양에서 다 배운 사람인 줄 아는데, 사실 내 인생을 결정지은 사상이나 예술의 바탕은 모두 내가 한국을 떠나기 전에 이미 한국에서 흡수한 거거덩. 우리나라 일제 시대 때 한국 예술가들의 수준이 서구라파나 일본의 아방가르드적 수준에 조금도 뒤지지 않았단 말이지. 난 쇤베르크나 스트라빈스키도 이건우 선생한테서 유학 가기 이전에 다 배운 거구, 신재덕 선생이나 이건우 선생 같은 분이 가르쳐주신 수준이나 김순남 선생한테 사사한 수준이 독일 가서 작곡가 노릇을 할 수 있었던 바탕을 다 만들어주셨던 거거덩. 역사는 자꾸 단절적으로 보면 안 돼. 우리는 일제 시대때 전통문화고 서양문화고 다 높은 수준으로 가지고 있었거덩. 난 그걸 흡수한 거야. 그리고 내가 내 속에 가지고 있었던 전통문화하고 서양의 아방가르드가 결국 비슷한 거라는 것을 나중에 발견한 것뿐이지.”
나는 백 선생과의 인터뷰를 마감하면서 보통의 기자들이 그러듯이 좀 멋있어 보이는 말로 질문을 했다. 시대가 바뀌면 예술가의 역할도 바뀌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루벤스 시대의 뛰어난 화가는 임금 얼굴을 잘 그리는 것이고, 현대에는 사람들에게 재미를 주는 거지. 결국 예술은 엔터테이너라고 할 수 있겠지. 지루한 일상에 재미를 던져 주는 것, 사람들에게 무언가 할 거리, 볼거리를 만들어 주는 거야. 요즈음을 보라고. 우리 주위에 어디 하나 부족한 게 있냐고. 21세기는 살 물건이 없는 시대야. 뭐든지 다 있거든. 그러니까 무언가 할 것을 만들어 줘야 하는 거야. 예술가는 욕망의 창조가가 돼야 하는 거지.”
백남준은 1992년 8월 국립현대미술관이 그의 회갑을 기념해서 마련한 전시회를 위해 한국을 방문해서 철학자이며 한의학자인 도옥 김용옥 선생과 애기를 나눈 자리에서도 같은 내용의 이야기를 했다.
“컴퓨터 문화가 점점 증대되면 인간의 할 일이 없어진다. 생산은 많이 지는데 소비는 한정된다. 여태까지는 이런 잉여를 처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전쟁이었다. 그런데 이젠 전쟁도 쉽게 할 수가 없다. 그러면 인간의 삶에서 삶의 이기의 모든 것이 포화되어 버린다. 냉장고도 다 사버리고, 자동차도 다 사버리고, 이제 이런 건 20년 이면 끝난다. PC도 얼마 못가서 다 팔아먹고 새로 팔아먹기가 어렵게 된다. 무슨 지랄을 해 본들 인간의 소유는 한정이 있다. 그럼 이런 상황에서 예술이란 뭐냐? 폭력적 결과를 초래하지 않는 소비를 조장시키는 일이다. 전쟁이나 공해로 연결되지 않는 인간의 소비를 부추겨주는 일이다. 다시 말해서 예술가의 임무는 어떻게 하면 소비를 창안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는 유명해지고 싶어서 여러 가지 깜짝 놀랄 행위들을 끊임없이 쏟아내었지만. 그 근본에는 남들이 하는 것에 대한 따분함, 일상에 대한 지겨움, 뭔가 재미있는 것을 찾아보고 만들어보자는 정신, 그런 것들이 있었던 것이다. 거창한 예술적 이론을 떠나서 그것이 오늘날 세게 미술사에 유일하게 이름이 오르는 한국인 예술가 백남준을 낳은 것이다.
시대가 낳은 천재적인 사기꾼
백남준, 그는 시대가 낳은 천재적인 사기꾼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다. 그저 우연이나 요행으로 세계 정상급 예술가로 올라설 수는 없다. 그는 예술을 심각하게 보기보다는 인생의 양념이라고 보고 갖가지 양념을 뿌려주는 사람이었다. 그러면서 역사에 대한 통찰과 반성, 그리고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과 풍자도 담아내었다. 그의 사기는 멋지게 성공했다. 그리고 지칠 줄 모르는 사기꾼의 기질에 의해 무한대로 뻗어나갔다. 좁은 무대, 전시장에서 국가의 영역을 넘어 우주로 올라갔고, 다시 빛의 궁극적인 형태인 레이저를 예술에 도입해서 새로운 재미를 주는 영역으로 들어섰다.
재미를 주는 예술가로서 그는 그에게 맡겨진 임무를 누구보다도 잘 수행했다. 사기를 치되, 남에게 해를 주는 사기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새로운 볼거리, 들을 거리를 주고 사람들을 즐겁게 한 사기를 쳤다. 그는 아무도 모방하지 못할, 아무도 추종하지 못할 기상천외한 사기를 계속 터뜨려 온 이로운 사기꾼이었다.
세계 정상의 예술인으로서 현대 세계 미술사에 유일하게 등재된 한국인 예술가 백남준, 그는 회갑을 넘고 고희를 넘으면서 과거를 때려 부수는 문화의 테러리스트로서가 아니라 인간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긍정적 예술가로 재평가 받았고, 동시에 그런 작품세계를 보여주었다. 그는 평생 동안 결코 가만히 앉아 있지 않는 예술가였다.
“인생의 베타막스에는 REWIND(되감기)의 단추가 없다.”
- 1984년 도쿄도립미술관에서 열린 백남준 비디오전 카탈로그의 자필 서문
그의 사기는 이제 지상에 머물 수 없었다. 미국과 프랑스, 독일, 일본 등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그는 서로 떨어진 각 나라를 잇는 사상 최대의 예술작품을 만들어 팔아먹자는 아주 기발한 착상을 하게 된다. 그것은 곧 막 실용화되기 시작한 위성을 이용한 아트, 곧 새틀라이트 아트라는 것이었다.
그 첫 작품이 이 글 맨 앞에서 언급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다. 미국 뉴욕과 프랑스 파리 등을 위성으로 연결해 양쪽의 대표적인 전위 예술가들이 벌인 첨단 예술쇼.
조지 오웰이 전체주의가 도래할 것이라고 예언했던 새해, 그가 예언한 대로 텔레비전은 과연 인류의 생활을 감시하는 나쁜 도구가 되었는가? 일찍부터 텔레비전을 예술의 도구로 활용해 온 백남준으로서는 결코 인정할 수 없는 잘못된 전제였다. 그것을 메시지로 삼아 전 세계의 신 문명의 도래를 알리는 지구 대축제였다.
1984년 성공 이후 1986년 아시안게임에서는 뉴욕, 도쿄, 서울을 잇는 위성쇼 ‘바이바이 키플링’을 만들어 방송했고, 다시 1988년에는 서울 올림픽을 기념해서 ‘wrap around the world'라는 위성잔치를 열었다. 우리말로 ’지구를 싸는 보자기‘라는 뜻의, 한국, 미국, 일본뿐 아니라 소련, 독일, 중국, 그리고 이스라엘까지를 연결하는, 그야말로 지구 전체를 문화예술의 보자기로 둘러싸는 가장 큰 지구문화잔치를 직접 지휘함으로써 그는 역사상 가장 넒은 지역에 예술작업을 펼친 예술가로 기록되게 되었다. 그의 예술은 이때 비로소 새틀라이트 아트, 곧 인공위성을 이용한 예술, 나아가서는 스페이스 아트, 곧 시공예술이란 가장 높고 넓은 차원의 예술이름을 부여받게 된다. 그의 말대로 “새로운 콘택트가 새로운 콘텐트를 부르고 새로운 콘텐트가 새로운 콘택트를 부르는 문명의 피드백’이 그에 의해서 실현된 것이다. 이쯤 되면 더 이상 그를 사기꾼이라고 비난할 수가 없다. 그의 사기는 너무나 완벽했고 너무나 앞서 갔고 너무나 기상천외해서 보통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것 이상이었던 것이다.
그의 성공은 그의 재능과 노력에 의한 당연한 결과이지만, 그가 일찍부터 그의 예술적 야망을 성취하기 위해 서울을 떠나 일본, 독일, 미국 등으로 차례로 옮겨온 과정을 더듬어 보면 옛날 유라시아의 광대한 벌판을 누비던 우리 선조들의 피가 몸속에 흐르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 자신이 시인하든 부인하든 세계의 예술계를 흔들고 일반 시민들을 예술이라는 영역 속으로 불러들인 예술의 영매, 곧 무당이었던 것이다.
새로운 것에의 끝없는 욕구
현대의 매스커뮤니케이션은 인간을 획일화하고 독자적인 사고를 제약하며 행동이나 의욕, 창의력을 상실케 하여 이른바 틀에 박힌, 획일화된 인간을 만들었다. 예술은 이렇게 비인간화된 기술로 인해 고갈된 생명력과 에너지를 다시 한번 부활시켜야 한다.
현대의 대표적인 사회학자 루이스 멈포드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우리가 예술가를 존경하고 우대하는 것은 그들이 우리 범인들이 갖지 못한 창조의 에너지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멈포드가 말한 창조의 에너지가 백남준에게 있었던 것이다.
백남준은 1940년 대 후반 김순남, 이건우 등의 음악가들로부터 당시로서는 첨단 음악가인 쇤베르크의 음악을 배우고 이를 작곡에 응용했을 정도로 일찍부터 세계에 눈을 돌리고 있었다. 그는 특히 김순남의 음악세계를 높이 평가하면서, 그가 이북으로 끌려가 재능이 꽃피지 못한 것을 한국 문화계의 큰 손실이라고 아쉬워하고 있다.
“날 자꾸만 서양에서 다 배운 사람인 줄 아는데, 사실 내 인생을 결정지은 사상이나 예술의 바탕은 모두 내가 한국을 떠나기 전에 이미 한국에서 흡수한 거거덩. 우리나라 일제 시대 때 한국 예술가들의 수준이 서구라파나 일본의 아방가르드적 수준에 조금도 뒤지지 않았단 말이지. 난 쇤베르크나 스트라빈스키도 이건우 선생한테서 유학 가기 이전에 다 배운 거구, 신재덕 선생이나 이건우 선생 같은 분이 가르쳐주신 수준이나 김순남 선생한테 사사한 수준이 독일 가서 작곡가 노릇을 할 수 있었던 바탕을 다 만들어주셨던 거거덩. 역사는 자꾸 단절적으로 보면 안 돼. 우리는 일제 시대때 전통문화고 서양문화고 다 높은 수준으로 가지고 있었거덩. 난 그걸 흡수한 거야. 그리고 내가 내 속에 가지고 있었던 전통문화하고 서양의 아방가르드가 결국 비슷한 거라는 것을 나중에 발견한 것뿐이지.”
나는 백 선생과의 인터뷰를 마감하면서 보통의 기자들이 그러듯이 좀 멋있어 보이는 말로 질문을 했다. 시대가 바뀌면 예술가의 역할도 바뀌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루벤스 시대의 뛰어난 화가는 임금 얼굴을 잘 그리는 것이고, 현대에는 사람들에게 재미를 주는 거지. 결국 예술은 엔터테이너라고 할 수 있겠지. 지루한 일상에 재미를 던져 주는 것, 사람들에게 무언가 할 거리, 볼거리를 만들어 주는 거야. 요즈음을 보라고. 우리 주위에 어디 하나 부족한 게 있냐고. 21세기는 살 물건이 없는 시대야. 뭐든지 다 있거든. 그러니까 무언가 할 것을 만들어 줘야 하는 거야. 예술가는 욕망의 창조가가 돼야 하는 거지.”
백남준은 1992년 8월 국립현대미술관이 그의 회갑을 기념해서 마련한 전시회를 위해 한국을 방문해서 철학자이며 한의학자인 도옥 김용옥 선생과 애기를 나눈 자리에서도 같은 내용의 이야기를 했다.
“컴퓨터 문화가 점점 증대되면 인간의 할 일이 없어진다. 생산은 많이 지는데 소비는 한정된다. 여태까지는 이런 잉여를 처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전쟁이었다. 그런데 이젠 전쟁도 쉽게 할 수가 없다. 그러면 인간의 삶에서 삶의 이기의 모든 것이 포화되어 버린다. 냉장고도 다 사버리고, 자동차도 다 사버리고, 이제 이런 건 20년 이면 끝난다. PC도 얼마 못가서 다 팔아먹고 새로 팔아먹기가 어렵게 된다. 무슨 지랄을 해 본들 인간의 소유는 한정이 있다. 그럼 이런 상황에서 예술이란 뭐냐? 폭력적 결과를 초래하지 않는 소비를 조장시키는 일이다. 전쟁이나 공해로 연결되지 않는 인간의 소비를 부추겨주는 일이다. 다시 말해서 예술가의 임무는 어떻게 하면 소비를 창안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는 유명해지고 싶어서 여러 가지 깜짝 놀랄 행위들을 끊임없이 쏟아내었지만. 그 근본에는 남들이 하는 것에 대한 따분함, 일상에 대한 지겨움, 뭔가 재미있는 것을 찾아보고 만들어보자는 정신, 그런 것들이 있었던 것이다. 거창한 예술적 이론을 떠나서 그것이 오늘날 세게 미술사에 유일하게 이름이 오르는 한국인 예술가 백남준을 낳은 것이다.
시대가 낳은 천재적인 사기꾼
백남준, 그는 시대가 낳은 천재적인 사기꾼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다. 그저 우연이나 요행으로 세계 정상급 예술가로 올라설 수는 없다. 그는 예술을 심각하게 보기보다는 인생의 양념이라고 보고 갖가지 양념을 뿌려주는 사람이었다. 그러면서 역사에 대한 통찰과 반성, 그리고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과 풍자도 담아내었다. 그의 사기는 멋지게 성공했다. 그리고 지칠 줄 모르는 사기꾼의 기질에 의해 무한대로 뻗어나갔다. 좁은 무대, 전시장에서 국가의 영역을 넘어 우주로 올라갔고, 다시 빛의 궁극적인 형태인 레이저를 예술에 도입해서 새로운 재미를 주는 영역으로 들어섰다.
재미를 주는 예술가로서 그는 그에게 맡겨진 임무를 누구보다도 잘 수행했다. 사기를 치되, 남에게 해를 주는 사기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새로운 볼거리, 들을 거리를 주고 사람들을 즐겁게 한 사기를 쳤다. 그는 아무도 모방하지 못할, 아무도 추종하지 못할 기상천외한 사기를 계속 터뜨려 온 이로운 사기꾼이었다.
세계 정상의 예술인으로서 현대 세계 미술사에 유일하게 등재된 한국인 예술가 백남준, 그는 회갑을 넘고 고희를 넘으면서 과거를 때려 부수는 문화의 테러리스트로서가 아니라 인간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긍정적 예술가로 재평가 받았고, 동시에 그런 작품세계를 보여주었다. 그는 평생 동안 결코 가만히 앉아 있지 않는 예술가였다.
“인생의 베타막스에는 REWIND(되감기)의 단추가 없다.”
- 1984년 도쿄도립미술관에서 열린 백남준 비디오전 카탈로그의 자필 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