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동식의 다섯 계절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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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 |
*제63회 - " 만남의 예술 - 이우환 "
영광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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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1 03:44
만남의 작가 이우환
이우환은 세게적인 미술가다.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상을 모르기 때문이요, 이우환은 우리가 알건 모르건 세계적인 작가로 이미 평가를 받고 있다.
이우환은 흔히 ‘만남의 작가' 로 알려져 있다. 그가 제시한 모토가 ’만남‘ 이기 때문이다.
“만남이란 것은 어떤 정화적인 장면에서 있어서 기실 어떤 무엇과도 부딪치지 않고, 일체가 투명한 시간으로 되는 생김, 일의 세계인 것이다. 만든다는 행위는 그러한 ‘만남의 경험을 부르는 짓’ 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만남의 철학을 표현하기 위해 그는 작품에서 다양한 재료와 재료의 만남, 사상과 사상의 만남, 생명과 기법의 만남을 추구하고 있다.
“시각적인 작품의 생명력은 기운의 생동에 있으며, 훌륭한 작품일수록 말없이 투명한 차원을 연다.”
“온갖 붓 자국과 물감과 형태를 넘어서서 그 곳에 감추어진 캔버스의 밑바닥을 환히 볼 수 있는 이야말로 최상의 감상자이자 진정한 로맨티스트이다.”
“나는 만들어지지 않기 위해서 만든다. 이것은 끊임없는 자기부정을 통해서 크낙한 자기긍정을 꿈꾸게 하는 우주의 역설이자 섭리임에 틀림없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은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게 하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이게 하는 양의적인 전이 작업이다. 그러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세계와의 접점이야말로 작품이라는 즉의 차원이다.”
“모든 것은 점에서 시작하여 점으로 돌아간다. 나타나서 사라지고 사라져서 나타나는 점을 이은 것이 선이다.”
- 이우환의 노트에서
일본 미술을 세계 미술로 끌어올린 작가
서예에서의 가로 긋기를 한번 생각해보자. 처음 붓을 댈 때는 마치 한 점을 찍는 것과 같다. 그렇게 하나의 점을 무수히 찍어 나가 결국 선이 된다. 초등학교 때 습자 공부를 해본 사람이라면 잘 알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그림으로 그린다면 어떨까? 그것을 그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물의 존재는 원소라는 하나의 작은 단위에서 시작되듯, 미술, 그 가운데서도 회화는 하나의 점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우환이란 미술가에게 있어서의 시작도 역시 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 점에서부터 회화를 시작하는가? 여기에 이우환이란 현대 미술가의 새로운 영역이 있다.
이우환은 1936년 경남에서 태어났다. 1956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다니다 일본에 건너가 일본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미술가다. 필자가 이우환을 처음 만난 것은 1984년 이었다. 1984년 8월 KBS 보도본부가 제작한 ‘세계 정상의 예술가’ 시리즈의 두 번째 인물로 소개하기 위해서 였다.
그의 예술은 처음 보는 이에게는 우선 당혹감을 준다. 필자가 시내에 걸려 있는 그의 그림을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흰 캔버스 위에 푸른 유화 물감으로 몇 개의 점을 찍어놓은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한 점이 점점 옅어지는 과정을 볼 수 있을 뿐인 7 ~ 8개의 점, 그것이 이우환의 작품이란 꼬리표와 함께 걸려 있었다. 이른바 입체 작품이란 것도 큰 철판과 자연석 한 개, 또는 두 개를 한자리에 함께 놓은 것이었다. 돌과 철판은 서로 맞대고 있거나 기대어 있거나 서로가 아래 위로 놓여 있거나, 혹은 철판 사이에 돌이 있거나, 돌 사이에 철판이 있거나 하였다. 마치 처음 붓을 잡아 본 문외한의 작품처럼, 돌을 쪼아서 형체를 만든다는 조각의 기본도 모르는 사람의 작품처럼, 아무것도 특별히 만든 것이 없는 작품들이.
그런데 그런 이우환의 작품들이 세계적인 평가를 받는단 말인가? 그것이 처음 그의 작품을 접한 필자에게 던져진 의문이었다.
점은 점이요, 선은 선일 뿐인데, 그것으로 대우주의 의미를 넘겨다보기라도 한단 말인가? 여기서 예술이라는 것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예를 들어 붓으로 닭 한 마리를 그렸다고 치자. 종이 위에 그려진 것은 어떤 특정한 닭 외에 다른 어떤 의미도 없다. 말하자면 닭이라는 하나의 이미지를 벗어날 수 없다. 우리 주위의 예술은 이처럼 무수한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이미지란 무엇이란 말인가? 닭을 아무리 잘 그렸다고 한들 그게 어쨌단 말인가? 닭과 가장 가깝게 그려냈다면 그의 솜씨가 훌륭하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훌륭한 예술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을까?
돌이란 것도 그렇다. 돌이란 사물을 놓고 볼 때 중요한 것은 돌이 무엇을 닮았다거나, 사람과 똑같이 생겼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무겁다거나, 표면이 거칠다거나, 유리와 부딪치면 유리를 깬다거나 하는 사실이 오히려 돌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물이 지니고 있는 본래적인 것, 원초적인 것을 드러내 보여주는 일이 예술가의 임무가 아닐까? 그럼으로써 우주의 의미, 생명, 리듬을 볼 수 있지 않을까?
1970년 초 이우환은 일본의 예술계에 바로 이와 같은 질문을 던졌다. 이러한 의문에 대해 예술가들이 공동으로 해답을 찾아보자고 외쳤다. 이우환이 일본 대학 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하고 1969년 미술출판사의 예술평론 모집에서 <사물에서 존재로>라는 평론이 입상한 뒤부터의 일이다. 1971년 그는 예술평론집인 <만남을 찾아서>를 출판하면서 이 같은 새로운 예술 세계를 일본 미술계에 강력하게 펼쳐보였다.
이러한 질문은 전후 서양의 미술 이론을 답습하면서 철학의 빈곤으로 고민하던 일본의 젊은 작가들에게 좌표를 던져 주었다. 高松次郎, 少淸水 등 전후 일본 미술을 대표하는 젊은 작가들이 그의 이론을 바탕으로 해서 일본뿐 아니라 세계 미술 무대에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이우환은 전후의 일본 미술을 세계 미술로 끌어올린 장본인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당시 젊은 작가들은 사물의 본성을 드러내 보이는 작업에 열중하여 ‘물파’ 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이우환이 바로 이러한 ‘물파’ 의 선두주자였던 것이다.
이 때 이우환이 보여준 작품은 나무나 돌, 쇠, 목, 밧줄 등을 공간에 하나 혹은 몇 개의 조합으로 늘어놓은 것이었다. 1971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17회 파리 청년 비엔날레에서는 넓은 유리판 위에 큰 자연석을 올려놓았는데, 유리를 일부러 깨어져 금이 가 있는 상태를 만들어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 작품이 당시 상당히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파리 비엔날레를 계기로 이우환은 유럽과 미국 미술계에까지 알려져 주목을 받게 된다.
7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지’에 구멍을 뚫거나 풀로 여러 가지 행위를 하던 이우환은 ‘점에서’ 라는 제목의 일련의 작품과 ‘선에서’ 라는 제목의 작품들을 계속해서 발표한다. 73년부터의 일이다. 이 작품들은 앞에서 설명한 대로 점을 계속 찍어 나가거나 선을 계속 그어 나간 비교적 단조로운 작품들이다. 때로는 길이 2미터가 넘는 대형 화폭에 무수히 많은 점을 찍은 것도 있다. 마치 말뚝과 같은 선을 무수히 내려 그은 것도 있다. 짙은 점이 점차 흐려져 소멸해 버리거나 선이 하나 있으면 또 하나의 선이 있고, 리듬을 타고 이어졌다가 스스로 자취를 감추기도 한다. 이들 점과 선이 마치 자신들만의 삶의 리듬과 생명을 갖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러한 작업은 80년대 이후 ‘관계향’ 이라는 개념으로 발전된다. 돌이면 돌, 철판이면 철판, 유리면 유리, 그러한 사물들이 그 자체로 어떤 관계로 만날 수 있는지, 그 관계를 느껴보고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동양 정신을 추구한 세계적 작가
세계 미술계에서의 이우환의 위치를 알려면 공공미술관에 그의 작품이 얼마나 소장되어 있는가를 보아야 한다. 우선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파리의 퐁피두 미술관에서 84년 5월 그의 작품 13점을 구입해 갔으며, 파리 시립 야외 조각미술관에 그의 입체 작품이 서 있다. 네덜란드의 국립 크뢸러뮬러 미술관에도 그의 큰 입체 작품이 서 있으며, 독일에서는 베를린 국립 현대미술관, 뒤셀도르프 국립 미술관이 그의 작품을 다수 소장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뉴욕의 근대미술관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이같이 세계 최고의 미술관에 작품이 고루 소장된 미술가는 90년대까지 극동 출신으로는 거의 없다고 한다.
이우환의 예술은 현대 미술에서 후기 미니멀리즘이란 계열로 분류되고 있다. 1960년대부터미국에서부터 전개되기 시작한 미니멀리즘은 어떤 최소한의 표현단위를 계속 반복하거나 최소 형태로 사물을 환원시키는 방법을 기본으로 하는 신예술사조로서, 예술의 자율성이나 순수성을 부각시켜 물체와 현실의 대비 또는 대조를 추구하는 20세기 후반 특유의 예술 개념이다. 이우환은 그의 탁월한 논리를 바탕으로 예술에서 환상을 제거하고 물자체로서의 회화나 입체를 보여주려 한 것이다.
1970년대 초 그의 논리가 일본 화단에 던진 파문이 알려지면서 한때 그에 대해 예술의 논리화 때문에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정서를 빼앗은 사람이라는 비판이 일기도 했다. 그러나 80년대 중반 들어 그의 작품에서 엄격한 정형만이 아니라 스스로 허물어지고 흐트러지고 용서하는 점과 선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그의 작품은 정서를 빼앗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물의 정서를 살려내는 예술이라고 하는 것이 합당할 것 같다.
80년대에 우리 화단의 많은 미술인들이 개념 중심의 작업을 많이 보여주었는데, 그것은 우리의 젊은 미술인들이 이우환이 제시한 새로운 미술의 논리, 새로운 미술철학에 그만큼 영향을 받았다는 뜻이 아닐까.
그는 일본에 살면서 작품 활동을 했기 때문에 작품에 국적이 없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1971년 파리 비엔날레에 참가할 때 일본측에 참가해 달라는 주제측의 간곡한 요청이 있었음에도 단호히 뿌리치고 한국 코너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대상 후보 물망에 올랐으면서도 결국 아무런 수상을 하지 못했던 사실은 그의 의식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우환은 대학에 다닐 때까지 서예와 사군자를 특히 잘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들에서는 서예의 필법을 느끼게 하는 것이 많다. 가로 긋는 선, 내려 긋는 선들은 각각이 어떤 글자의 구성요소로서만 존재 가치가 있던 것들인데, 그의 작품 속에서는 그것 자체로서 생명을 부여받고 있다. 이러한 작품들을 보면 이우환의 발상은 지극히 동양적이며, 예술세계 또한 본질적으로 동양적임을 느끼게 된다. 본질적으로 동양 고유의 정신세계를 담고 있기에 그의 작품들은 평면이건 입체 작품이건 서양 미술계, 나아가서는 세계 미술계에서도 주목받고 인정을 받아오고 있는 것이리라.
“20세기 후반 서양 미술사는 한마디로 회화의 부정이었죠. 다 지우거나 찢거나 하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시 시작할 것인가? 한번 붓을 대서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를 일으켜 보자. 공백과 사람이 부딪혀 나타나는 새 출발점을 제시해보자라는 것이 제가 생각한 미술의 활로였습니다.”
- 중앙일보 2004. 11. 3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과의 대담에서
오늘날 우리 미술인들은 세계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많은 미술인들이 국제 미술전에 나가 우리의 새로운 미술을 선보이며 당당히 평가받고 있다. 한국 미술인들에 대한 그러한 평가가 가능하기까지는 이우환이 국제무대에서 쌓아온 역사가 작용을 하지 않았을까? 당시의 시대 조류를 무조건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으로서의 주제적 발상으로 미술의 세계를 새롭게 들여다보고 새로운 물줄기를 찾아내었기에 국제 미술계가 ‘한국이라는 새로운 미술의 보물 창고’를 주목하게 되었던 것이 아닐까?
백남준이 비디오아트라는 첨단예술 영역에서 이름을 날린 것과 함께 이우환은 순수 미술계에서 세게적인 위치에 서있다.
이우환은 세게적인 미술가다.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상을 모르기 때문이요, 이우환은 우리가 알건 모르건 세계적인 작가로 이미 평가를 받고 있다.
이우환은 흔히 ‘만남의 작가' 로 알려져 있다. 그가 제시한 모토가 ’만남‘ 이기 때문이다.
“만남이란 것은 어떤 정화적인 장면에서 있어서 기실 어떤 무엇과도 부딪치지 않고, 일체가 투명한 시간으로 되는 생김, 일의 세계인 것이다. 만든다는 행위는 그러한 ‘만남의 경험을 부르는 짓’ 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만남의 철학을 표현하기 위해 그는 작품에서 다양한 재료와 재료의 만남, 사상과 사상의 만남, 생명과 기법의 만남을 추구하고 있다.
“시각적인 작품의 생명력은 기운의 생동에 있으며, 훌륭한 작품일수록 말없이 투명한 차원을 연다.”
“온갖 붓 자국과 물감과 형태를 넘어서서 그 곳에 감추어진 캔버스의 밑바닥을 환히 볼 수 있는 이야말로 최상의 감상자이자 진정한 로맨티스트이다.”
“나는 만들어지지 않기 위해서 만든다. 이것은 끊임없는 자기부정을 통해서 크낙한 자기긍정을 꿈꾸게 하는 우주의 역설이자 섭리임에 틀림없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은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게 하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이게 하는 양의적인 전이 작업이다. 그러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세계와의 접점이야말로 작품이라는 즉의 차원이다.”
“모든 것은 점에서 시작하여 점으로 돌아간다. 나타나서 사라지고 사라져서 나타나는 점을 이은 것이 선이다.”
- 이우환의 노트에서
일본 미술을 세계 미술로 끌어올린 작가
서예에서의 가로 긋기를 한번 생각해보자. 처음 붓을 댈 때는 마치 한 점을 찍는 것과 같다. 그렇게 하나의 점을 무수히 찍어 나가 결국 선이 된다. 초등학교 때 습자 공부를 해본 사람이라면 잘 알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그림으로 그린다면 어떨까? 그것을 그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물의 존재는 원소라는 하나의 작은 단위에서 시작되듯, 미술, 그 가운데서도 회화는 하나의 점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우환이란 미술가에게 있어서의 시작도 역시 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 점에서부터 회화를 시작하는가? 여기에 이우환이란 현대 미술가의 새로운 영역이 있다.
이우환은 1936년 경남에서 태어났다. 1956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다니다 일본에 건너가 일본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미술가다. 필자가 이우환을 처음 만난 것은 1984년 이었다. 1984년 8월 KBS 보도본부가 제작한 ‘세계 정상의 예술가’ 시리즈의 두 번째 인물로 소개하기 위해서 였다.
그의 예술은 처음 보는 이에게는 우선 당혹감을 준다. 필자가 시내에 걸려 있는 그의 그림을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흰 캔버스 위에 푸른 유화 물감으로 몇 개의 점을 찍어놓은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한 점이 점점 옅어지는 과정을 볼 수 있을 뿐인 7 ~ 8개의 점, 그것이 이우환의 작품이란 꼬리표와 함께 걸려 있었다. 이른바 입체 작품이란 것도 큰 철판과 자연석 한 개, 또는 두 개를 한자리에 함께 놓은 것이었다. 돌과 철판은 서로 맞대고 있거나 기대어 있거나 서로가 아래 위로 놓여 있거나, 혹은 철판 사이에 돌이 있거나, 돌 사이에 철판이 있거나 하였다. 마치 처음 붓을 잡아 본 문외한의 작품처럼, 돌을 쪼아서 형체를 만든다는 조각의 기본도 모르는 사람의 작품처럼, 아무것도 특별히 만든 것이 없는 작품들이.
그런데 그런 이우환의 작품들이 세계적인 평가를 받는단 말인가? 그것이 처음 그의 작품을 접한 필자에게 던져진 의문이었다.
점은 점이요, 선은 선일 뿐인데, 그것으로 대우주의 의미를 넘겨다보기라도 한단 말인가? 여기서 예술이라는 것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예를 들어 붓으로 닭 한 마리를 그렸다고 치자. 종이 위에 그려진 것은 어떤 특정한 닭 외에 다른 어떤 의미도 없다. 말하자면 닭이라는 하나의 이미지를 벗어날 수 없다. 우리 주위의 예술은 이처럼 무수한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이미지란 무엇이란 말인가? 닭을 아무리 잘 그렸다고 한들 그게 어쨌단 말인가? 닭과 가장 가깝게 그려냈다면 그의 솜씨가 훌륭하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훌륭한 예술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을까?
돌이란 것도 그렇다. 돌이란 사물을 놓고 볼 때 중요한 것은 돌이 무엇을 닮았다거나, 사람과 똑같이 생겼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무겁다거나, 표면이 거칠다거나, 유리와 부딪치면 유리를 깬다거나 하는 사실이 오히려 돌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물이 지니고 있는 본래적인 것, 원초적인 것을 드러내 보여주는 일이 예술가의 임무가 아닐까? 그럼으로써 우주의 의미, 생명, 리듬을 볼 수 있지 않을까?
1970년 초 이우환은 일본의 예술계에 바로 이와 같은 질문을 던졌다. 이러한 의문에 대해 예술가들이 공동으로 해답을 찾아보자고 외쳤다. 이우환이 일본 대학 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하고 1969년 미술출판사의 예술평론 모집에서 <사물에서 존재로>라는 평론이 입상한 뒤부터의 일이다. 1971년 그는 예술평론집인 <만남을 찾아서>를 출판하면서 이 같은 새로운 예술 세계를 일본 미술계에 강력하게 펼쳐보였다.
이러한 질문은 전후 서양의 미술 이론을 답습하면서 철학의 빈곤으로 고민하던 일본의 젊은 작가들에게 좌표를 던져 주었다. 高松次郎, 少淸水 등 전후 일본 미술을 대표하는 젊은 작가들이 그의 이론을 바탕으로 해서 일본뿐 아니라 세계 미술 무대에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이우환은 전후의 일본 미술을 세계 미술로 끌어올린 장본인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당시 젊은 작가들은 사물의 본성을 드러내 보이는 작업에 열중하여 ‘물파’ 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이우환이 바로 이러한 ‘물파’ 의 선두주자였던 것이다.
이 때 이우환이 보여준 작품은 나무나 돌, 쇠, 목, 밧줄 등을 공간에 하나 혹은 몇 개의 조합으로 늘어놓은 것이었다. 1971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17회 파리 청년 비엔날레에서는 넓은 유리판 위에 큰 자연석을 올려놓았는데, 유리를 일부러 깨어져 금이 가 있는 상태를 만들어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 작품이 당시 상당히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파리 비엔날레를 계기로 이우환은 유럽과 미국 미술계에까지 알려져 주목을 받게 된다.
7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지’에 구멍을 뚫거나 풀로 여러 가지 행위를 하던 이우환은 ‘점에서’ 라는 제목의 일련의 작품과 ‘선에서’ 라는 제목의 작품들을 계속해서 발표한다. 73년부터의 일이다. 이 작품들은 앞에서 설명한 대로 점을 계속 찍어 나가거나 선을 계속 그어 나간 비교적 단조로운 작품들이다. 때로는 길이 2미터가 넘는 대형 화폭에 무수히 많은 점을 찍은 것도 있다. 마치 말뚝과 같은 선을 무수히 내려 그은 것도 있다. 짙은 점이 점차 흐려져 소멸해 버리거나 선이 하나 있으면 또 하나의 선이 있고, 리듬을 타고 이어졌다가 스스로 자취를 감추기도 한다. 이들 점과 선이 마치 자신들만의 삶의 리듬과 생명을 갖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러한 작업은 80년대 이후 ‘관계향’ 이라는 개념으로 발전된다. 돌이면 돌, 철판이면 철판, 유리면 유리, 그러한 사물들이 그 자체로 어떤 관계로 만날 수 있는지, 그 관계를 느껴보고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동양 정신을 추구한 세계적 작가
세계 미술계에서의 이우환의 위치를 알려면 공공미술관에 그의 작품이 얼마나 소장되어 있는가를 보아야 한다. 우선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파리의 퐁피두 미술관에서 84년 5월 그의 작품 13점을 구입해 갔으며, 파리 시립 야외 조각미술관에 그의 입체 작품이 서 있다. 네덜란드의 국립 크뢸러뮬러 미술관에도 그의 큰 입체 작품이 서 있으며, 독일에서는 베를린 국립 현대미술관, 뒤셀도르프 국립 미술관이 그의 작품을 다수 소장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뉴욕의 근대미술관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이같이 세계 최고의 미술관에 작품이 고루 소장된 미술가는 90년대까지 극동 출신으로는 거의 없다고 한다.
이우환의 예술은 현대 미술에서 후기 미니멀리즘이란 계열로 분류되고 있다. 1960년대부터미국에서부터 전개되기 시작한 미니멀리즘은 어떤 최소한의 표현단위를 계속 반복하거나 최소 형태로 사물을 환원시키는 방법을 기본으로 하는 신예술사조로서, 예술의 자율성이나 순수성을 부각시켜 물체와 현실의 대비 또는 대조를 추구하는 20세기 후반 특유의 예술 개념이다. 이우환은 그의 탁월한 논리를 바탕으로 예술에서 환상을 제거하고 물자체로서의 회화나 입체를 보여주려 한 것이다.
1970년대 초 그의 논리가 일본 화단에 던진 파문이 알려지면서 한때 그에 대해 예술의 논리화 때문에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정서를 빼앗은 사람이라는 비판이 일기도 했다. 그러나 80년대 중반 들어 그의 작품에서 엄격한 정형만이 아니라 스스로 허물어지고 흐트러지고 용서하는 점과 선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그의 작품은 정서를 빼앗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물의 정서를 살려내는 예술이라고 하는 것이 합당할 것 같다.
80년대에 우리 화단의 많은 미술인들이 개념 중심의 작업을 많이 보여주었는데, 그것은 우리의 젊은 미술인들이 이우환이 제시한 새로운 미술의 논리, 새로운 미술철학에 그만큼 영향을 받았다는 뜻이 아닐까.
그는 일본에 살면서 작품 활동을 했기 때문에 작품에 국적이 없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1971년 파리 비엔날레에 참가할 때 일본측에 참가해 달라는 주제측의 간곡한 요청이 있었음에도 단호히 뿌리치고 한국 코너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대상 후보 물망에 올랐으면서도 결국 아무런 수상을 하지 못했던 사실은 그의 의식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우환은 대학에 다닐 때까지 서예와 사군자를 특히 잘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들에서는 서예의 필법을 느끼게 하는 것이 많다. 가로 긋는 선, 내려 긋는 선들은 각각이 어떤 글자의 구성요소로서만 존재 가치가 있던 것들인데, 그의 작품 속에서는 그것 자체로서 생명을 부여받고 있다. 이러한 작품들을 보면 이우환의 발상은 지극히 동양적이며, 예술세계 또한 본질적으로 동양적임을 느끼게 된다. 본질적으로 동양 고유의 정신세계를 담고 있기에 그의 작품들은 평면이건 입체 작품이건 서양 미술계, 나아가서는 세계 미술계에서도 주목받고 인정을 받아오고 있는 것이리라.
“20세기 후반 서양 미술사는 한마디로 회화의 부정이었죠. 다 지우거나 찢거나 하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시 시작할 것인가? 한번 붓을 대서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를 일으켜 보자. 공백과 사람이 부딪혀 나타나는 새 출발점을 제시해보자라는 것이 제가 생각한 미술의 활로였습니다.”
- 중앙일보 2004. 11. 3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과의 대담에서
오늘날 우리 미술인들은 세계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많은 미술인들이 국제 미술전에 나가 우리의 새로운 미술을 선보이며 당당히 평가받고 있다. 한국 미술인들에 대한 그러한 평가가 가능하기까지는 이우환이 국제무대에서 쌓아온 역사가 작용을 하지 않았을까? 당시의 시대 조류를 무조건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으로서의 주제적 발상으로 미술의 세계를 새롭게 들여다보고 새로운 물줄기를 찾아내었기에 국제 미술계가 ‘한국이라는 새로운 미술의 보물 창고’를 주목하게 되었던 것이 아닐까?
백남준이 비디오아트라는 첨단예술 영역에서 이름을 날린 것과 함께 이우환은 순수 미술계에서 세게적인 위치에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