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동식의 다섯 계절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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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 |
*제65회 - " 아! 윤이상 "
영광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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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1 03:44
윤이상 선생과의 만남
Sakrower Kirchweg 47.
독일 베를린 교외에 있는 윤이상 선생의 집 주소다. 정원이 딸려 있는 아담한 주택, 1층은 응접실, 2층은 작업실과 침실, 그리고 약간의 비탈을 파고 만든 반지하실이 있었다. 1984년 3월과 1988년 12월, 필자는 두 번 이 집을 찾아가 윤이상 선생을 만났다.
1984년의 첫 만남은 거실에서만 이뤄졌다. 당시 다른 취재로 베를린에 갔다가 갑작스런 인터뷰 요청이었지만 선뜻 응해주신 탓에 미처 세심한 준비를 하지 못한 채 급히 한 인터뷰였다. 동베를린 사건 이후 한국 언론들이 잘 찾지 않아서 텔레비전으로는 처음 회견을 하게 되었는데, 그 사건 이후의 심경과 자신의 음악 세계, 한국에 대한 생각 등을 담담하고 솔직하게 털어놓으셨다. 당시는 서울 올림픽을 몇 년 앞두고 있었기에 필자는 서울올림픽에 음악가로서 참여할 의향이 있는지를 질문했고, 이에 대해 윤이상 선생은 정부에서 초청을 해준다면 기꺼이 응하겠지만 그때까지도 연락이 없노라고 응답했다. 윤 선생과의 인터뷰는 곧바로 서울에서 KBS 뉴스파노라마 시간에 방송이 됐고, 많은 사람들이 윤이상 선생을 처음으로 화면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당시 우리 문화당국에서는 윤 선생을 초청하는 문제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그래서 윤 선생의 올림픽 음악 참여는 무산되고 말았다. 그리고 윤 선생은 우리에게서 잊혀졌다. 서울에서는 민주화의 진통이 계속되었고, 올림픽이 성공적으로 치러지면서 들뜬 국내 분위기는 멀리 유럽에 있는 예술가를 생각하게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88년 가을 인사동의 한 화랑에서 이듬해 신년 기획으로 재불 호가 이응로 씨를 초대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응로 씨도 윤이상 선생과 함께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에 연로돼 옥고를 치른 데다 윤정희 납치의혹사건까지 겹쳐 우리들의 관심 밖에 있던 화가가 아닌가? 그런 미술가를 한국에 초대한다면 좋은 취재거리가 된다는 생각에 인터뷰를 요청해 승낙을 받았고, 그렇다면 차제에 윤이상 선생도 같이 취재해 정치적 사건과 이념의 굴레에 갇혀 우리 문화사에서 실종된 두 예술가를 한 번에 조명하는 것이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에 윤 선생께 다시 연락을 드려 취재 허락을 받았다. 그래서 다시 베를린을 찾았다.
두 번째 뵈니 윤 선생은 서울 올림픽의 성공으로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많이 좋아진 것으로 퍽 고무되신 듯했다. 마침 집을 방문하니 당시 예총의 전봉초 회장이 오신다고 했다. 두 분은 서울에서 예전에 같이 활동한 적이 있는 친구 사이. 전봉초 회장은 윤이상 선생과 함께 남북이 음악으로 같이 만나는 행사를 기획하고 있어서 그에 대한 보다 진전된 논의를 하려고 방문을 한 것이었다. 그 때문에 취재가 더욱 뜻깊게 되었다. 전봉초 회장과 윤이상 선생이 뜰을 거닐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도 촬영할 수 있었다. 전 회장은 윤이상 선생께 이제 한국을 방문해도 좋지 않으냐, 옛날의 군부독재국가가 아니라 민주적인 국가가 되었으며, 올림픽 이후 특히 많이 변했으니 웬만하면 고향을 방문하자고 권유했다. 이에 대해 윤 선생은 가고 싶은 마음이야 누구보다 앞서지만 현실적으로 몇 가지 정리할 일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밑그림 촬영을 위해 2층으로 올라가니, 이층 벽 한가운데에 조그만 고구려 사신도가 눈에 띄었다. 백호도로 기억되는데, 강서대묘의 것을 축소 모사한 것이었다. 이 사신도에 관심을 보이자 2층으로 따라 올라오셨던 윤 선생의 부인 이수자 씨가 귀띔을 한다. 당시 유럽에서 발매된 윤 선생의 음악 레코드 자켓에 바로 그 사실도가 그려져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고구려 벽화 속에 살아 있는 민족혼, 그것을 선생은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인터뷰가 끝나자 윤 선생은 취재진에게 레코드 1장씩을, 그리고 필자에게는 CD 1장을 더 주신다. 본인의 자필 서명과 함께 주신 이 CD에는 칸타타 ‘나의 땅, 나의조국이여’가 전면에 실려 있고 뒷부분에는 ‘광주여 영원하라’가 함께 들어 있었다. “나중에 이 음악들이 유명해질 테니 잘 갖고 있으세요” 라고 하셨던 그 음악이 2005년에야 한국에서 초연되었다.
윤 선생과의 인터뷰는 나중에 파리에서의 이응로 화백 취재분과 합쳐져 1989년 1월 6일 KBS1 텔레비전에서 ‘신년기획 이향에서 본 조국, 윤이상. 이응로’ 라는 제목으로 약 한 시간 동안 방송되었다. 방송되고 나서 나흘 후 이응로 선생이 영면하셨다. 그 소식을 듣고 이 프로그램이 이응로 선생에게는 예술가로서의 마지막 한을 풀어 드린 것이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돌아가시기 전에 육성으로 자신의 예술세계와 그 동안의 어려웠던 생활과 심경 등을 진솔하게 밝힐 수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길지 않은 기자 생활 중에 1989년 방송된 이 프로그램이야말로, 멀리 유럽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었지만 동베를린 사건 이후 어쩔 수 없이 조국을 등지고 살아야 했던 두 분 예술가의 조국 한국에 대한 그리움을 전함으로써 그들을 신원해준 작품이라 감히 자부하고 있다.
그의 음악의 주제는 조국이었다
윤이상 선생의 예술세계야 이제는 각계에서 활발한 조명을 해서 많이 소개가 되었지만, 23년 전 처음으로 그를 인터뷰하고 본격 프로그램을 만들었던 필자로서는 회견을 통해 느꼈던 그의 고향에 대한 간절한 향수를 잊을 수 없다. 고향 이야기만 나오면 그의 눈매는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빛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런 윤이상 선생이 1994년 고국 방문을 위해 큰 마음을 먹고 일본에까지 왔다가 당국과의 최종 조율이 안 돼 되돌아간 일은 정말 안타깝기 그지없다.
윤이상 선생이야말로 조국 분단이란 현실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남북이 음악을 통해서라도 우선 하나가 되자고 누구보다 앞장서서 노력해 남북 통일 음악회도 성사시키지 않았던가. 고인의 그런 노력이 이제 결실로 나타나 남북한 간의 교류가 점점 왕성해지고 있으며, 분단의 장벽이 낮아지면서 왕래와 가족상봉도 점차 수월해지고 있다. 그는 수많은 작품을 발표했지만 그 음악의 주제는 조국이었고 그 음악이 목표하는 바는 조국의 통일과 번영이었다.
“서양의 음악사를 볼 때 어느 저명한 작곡가건 다 그들의 조국에 예술의 뿌리를 박고 있다. 대별한다면 이탈리아 음악, 독일 음악, 프랑스 음악, 러시아 음악 등 어느 나라의 작곡가도 다른 나라 작곡가들이 흉내낼 수 없는 귀중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체로 독일 사람이 진정한 러시아 작품을 소화하기 힘들고, 다른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동양의 연주가들이 독일의 고전이나 낭만을 완전히 소화하려 할 때는 더욱 그렇다.
나의 음악은 역사적으로는 나의 조국의 모든 예술적, 철학적, 미학적 전통에서 생겼고, 사회적으로는 나의 조국의 불행한 운명과 민족, 민귄 질서의 파괴, 국가 권력의 횡포에 자극을 받아 음악이 가져야 할 격조와 순도의 한계 안에서 가능한 한 최대의 표현적 언어를 구사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음악은 구체적으로 말을 하지 않지만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강한 힘이 있는 것이다.“
- 윤이상, <나의 조국, 나의 음악>
윤이상은 생전에 21세기 생존 최고 작곡가 5인 중의 1명으로 인정받았다. 그런데 만약 윤이상이 독일에 나가서 그 때까지 유행하던 독일식의 음악철학이나 음악기법을 사용했다면 오늘의 위치에 올라설 수 있었을까? 그 답이 당연히 ‘아니오’ 라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정신적인 가치, 우리가 키워 온 전통적인 방법론에 대해 충분히 자긍심을 가져도 될 것이다.
서양인들도 한국인이 서양의 것을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의 이야기를 하기를 원하고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연주가들이 우리나라에서 즐비하게 나오지만, 그것은 작곡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이다. 우리는 우리 것을 만들고 그것으로 인류의 역사에 공헌해야 한다.
Sakrower Kirchweg 47.
독일 베를린 교외에 있는 윤이상 선생의 집 주소다. 정원이 딸려 있는 아담한 주택, 1층은 응접실, 2층은 작업실과 침실, 그리고 약간의 비탈을 파고 만든 반지하실이 있었다. 1984년 3월과 1988년 12월, 필자는 두 번 이 집을 찾아가 윤이상 선생을 만났다.
1984년의 첫 만남은 거실에서만 이뤄졌다. 당시 다른 취재로 베를린에 갔다가 갑작스런 인터뷰 요청이었지만 선뜻 응해주신 탓에 미처 세심한 준비를 하지 못한 채 급히 한 인터뷰였다. 동베를린 사건 이후 한국 언론들이 잘 찾지 않아서 텔레비전으로는 처음 회견을 하게 되었는데, 그 사건 이후의 심경과 자신의 음악 세계, 한국에 대한 생각 등을 담담하고 솔직하게 털어놓으셨다. 당시는 서울 올림픽을 몇 년 앞두고 있었기에 필자는 서울올림픽에 음악가로서 참여할 의향이 있는지를 질문했고, 이에 대해 윤이상 선생은 정부에서 초청을 해준다면 기꺼이 응하겠지만 그때까지도 연락이 없노라고 응답했다. 윤 선생과의 인터뷰는 곧바로 서울에서 KBS 뉴스파노라마 시간에 방송이 됐고, 많은 사람들이 윤이상 선생을 처음으로 화면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당시 우리 문화당국에서는 윤 선생을 초청하는 문제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그래서 윤 선생의 올림픽 음악 참여는 무산되고 말았다. 그리고 윤 선생은 우리에게서 잊혀졌다. 서울에서는 민주화의 진통이 계속되었고, 올림픽이 성공적으로 치러지면서 들뜬 국내 분위기는 멀리 유럽에 있는 예술가를 생각하게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88년 가을 인사동의 한 화랑에서 이듬해 신년 기획으로 재불 호가 이응로 씨를 초대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응로 씨도 윤이상 선생과 함께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에 연로돼 옥고를 치른 데다 윤정희 납치의혹사건까지 겹쳐 우리들의 관심 밖에 있던 화가가 아닌가? 그런 미술가를 한국에 초대한다면 좋은 취재거리가 된다는 생각에 인터뷰를 요청해 승낙을 받았고, 그렇다면 차제에 윤이상 선생도 같이 취재해 정치적 사건과 이념의 굴레에 갇혀 우리 문화사에서 실종된 두 예술가를 한 번에 조명하는 것이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에 윤 선생께 다시 연락을 드려 취재 허락을 받았다. 그래서 다시 베를린을 찾았다.
두 번째 뵈니 윤 선생은 서울 올림픽의 성공으로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많이 좋아진 것으로 퍽 고무되신 듯했다. 마침 집을 방문하니 당시 예총의 전봉초 회장이 오신다고 했다. 두 분은 서울에서 예전에 같이 활동한 적이 있는 친구 사이. 전봉초 회장은 윤이상 선생과 함께 남북이 음악으로 같이 만나는 행사를 기획하고 있어서 그에 대한 보다 진전된 논의를 하려고 방문을 한 것이었다. 그 때문에 취재가 더욱 뜻깊게 되었다. 전봉초 회장과 윤이상 선생이 뜰을 거닐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도 촬영할 수 있었다. 전 회장은 윤이상 선생께 이제 한국을 방문해도 좋지 않으냐, 옛날의 군부독재국가가 아니라 민주적인 국가가 되었으며, 올림픽 이후 특히 많이 변했으니 웬만하면 고향을 방문하자고 권유했다. 이에 대해 윤 선생은 가고 싶은 마음이야 누구보다 앞서지만 현실적으로 몇 가지 정리할 일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밑그림 촬영을 위해 2층으로 올라가니, 이층 벽 한가운데에 조그만 고구려 사신도가 눈에 띄었다. 백호도로 기억되는데, 강서대묘의 것을 축소 모사한 것이었다. 이 사신도에 관심을 보이자 2층으로 따라 올라오셨던 윤 선생의 부인 이수자 씨가 귀띔을 한다. 당시 유럽에서 발매된 윤 선생의 음악 레코드 자켓에 바로 그 사실도가 그려져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고구려 벽화 속에 살아 있는 민족혼, 그것을 선생은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인터뷰가 끝나자 윤 선생은 취재진에게 레코드 1장씩을, 그리고 필자에게는 CD 1장을 더 주신다. 본인의 자필 서명과 함께 주신 이 CD에는 칸타타 ‘나의 땅, 나의조국이여’가 전면에 실려 있고 뒷부분에는 ‘광주여 영원하라’가 함께 들어 있었다. “나중에 이 음악들이 유명해질 테니 잘 갖고 있으세요” 라고 하셨던 그 음악이 2005년에야 한국에서 초연되었다.
윤 선생과의 인터뷰는 나중에 파리에서의 이응로 화백 취재분과 합쳐져 1989년 1월 6일 KBS1 텔레비전에서 ‘신년기획 이향에서 본 조국, 윤이상. 이응로’ 라는 제목으로 약 한 시간 동안 방송되었다. 방송되고 나서 나흘 후 이응로 선생이 영면하셨다. 그 소식을 듣고 이 프로그램이 이응로 선생에게는 예술가로서의 마지막 한을 풀어 드린 것이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돌아가시기 전에 육성으로 자신의 예술세계와 그 동안의 어려웠던 생활과 심경 등을 진솔하게 밝힐 수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길지 않은 기자 생활 중에 1989년 방송된 이 프로그램이야말로, 멀리 유럽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었지만 동베를린 사건 이후 어쩔 수 없이 조국을 등지고 살아야 했던 두 분 예술가의 조국 한국에 대한 그리움을 전함으로써 그들을 신원해준 작품이라 감히 자부하고 있다.
그의 음악의 주제는 조국이었다
윤이상 선생의 예술세계야 이제는 각계에서 활발한 조명을 해서 많이 소개가 되었지만, 23년 전 처음으로 그를 인터뷰하고 본격 프로그램을 만들었던 필자로서는 회견을 통해 느꼈던 그의 고향에 대한 간절한 향수를 잊을 수 없다. 고향 이야기만 나오면 그의 눈매는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빛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런 윤이상 선생이 1994년 고국 방문을 위해 큰 마음을 먹고 일본에까지 왔다가 당국과의 최종 조율이 안 돼 되돌아간 일은 정말 안타깝기 그지없다.
윤이상 선생이야말로 조국 분단이란 현실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남북이 음악을 통해서라도 우선 하나가 되자고 누구보다 앞장서서 노력해 남북 통일 음악회도 성사시키지 않았던가. 고인의 그런 노력이 이제 결실로 나타나 남북한 간의 교류가 점점 왕성해지고 있으며, 분단의 장벽이 낮아지면서 왕래와 가족상봉도 점차 수월해지고 있다. 그는 수많은 작품을 발표했지만 그 음악의 주제는 조국이었고 그 음악이 목표하는 바는 조국의 통일과 번영이었다.
“서양의 음악사를 볼 때 어느 저명한 작곡가건 다 그들의 조국에 예술의 뿌리를 박고 있다. 대별한다면 이탈리아 음악, 독일 음악, 프랑스 음악, 러시아 음악 등 어느 나라의 작곡가도 다른 나라 작곡가들이 흉내낼 수 없는 귀중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체로 독일 사람이 진정한 러시아 작품을 소화하기 힘들고, 다른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동양의 연주가들이 독일의 고전이나 낭만을 완전히 소화하려 할 때는 더욱 그렇다.
나의 음악은 역사적으로는 나의 조국의 모든 예술적, 철학적, 미학적 전통에서 생겼고, 사회적으로는 나의 조국의 불행한 운명과 민족, 민귄 질서의 파괴, 국가 권력의 횡포에 자극을 받아 음악이 가져야 할 격조와 순도의 한계 안에서 가능한 한 최대의 표현적 언어를 구사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음악은 구체적으로 말을 하지 않지만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강한 힘이 있는 것이다.“
- 윤이상, <나의 조국, 나의 음악>
윤이상은 생전에 21세기 생존 최고 작곡가 5인 중의 1명으로 인정받았다. 그런데 만약 윤이상이 독일에 나가서 그 때까지 유행하던 독일식의 음악철학이나 음악기법을 사용했다면 오늘의 위치에 올라설 수 있었을까? 그 답이 당연히 ‘아니오’ 라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정신적인 가치, 우리가 키워 온 전통적인 방법론에 대해 충분히 자긍심을 가져도 될 것이다.
서양인들도 한국인이 서양의 것을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의 이야기를 하기를 원하고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연주가들이 우리나라에서 즐비하게 나오지만, 그것은 작곡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이다. 우리는 우리 것을 만들고 그것으로 인류의 역사에 공헌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