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동식의 다섯 계절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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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 |
*제66회 - " 음악의 노벨상, 진은숙 "
영광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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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1 03:44
앞서가는 상상력의 진은숙
음악이라는 예술에도 3요소가 필요하다. 먼저 작곡이 있어야 하고, 연주가 있어야 하며, 그것을 감상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이 3요소 중 어느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가장 우선돼야 할 것은 역시 작곡이다. 서양 음악이 세계의 음악을 대표하는 양 군림하게 된 것은 비발디나 바흐, 헨델 이후 그들 작곡가들이 만들어놓은 작품이 민족음악의 차원을 넘어 인류의 보편적인 음악으로 올라설 수 있었기 때문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기에 음악 하면 가장 작곡가가 많은 독일이 최고봉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그 다음이 프랑스나 이탈리아 등이고, 나머지는 지역적, 민속적인 음악 전통을 보편적인 음악으로 끌어올리고 있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우리의 음악을 어떨까?
우리 음악은 사실 세계 어느 나라 음악과 비교해도 수준이 낮다거나 모자라다고 할 수 없을 만큼 나름대로 독특한 힘과 멋이 있다. 동양의 여러 나라와 비교하면 가장 힘 있는 음악이 아닐까도 생각된다. 그런데 우리의 음악은 아직 민족음악, 민속음악의 차원에 머무르고 있다.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공통의 음악으로 인정받고 사랑받는 음악이라고는 말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훌륭한 작곡가를 필요로 한다. 자신의 고유한 음악세계, 한국적인 전통에서 키워온 소리를 자각하고, 이를 세계인이 함께 들을 수 있는 음악으로 표현해낼 수 있는 작곡가 말이다.
우리는 이미 윤이상을 갖고 있지 않은가? 맞다. 그러나 윤이상을 한국의 음악인이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주저되는 면이 있다. 그는 이른바 동베를린간첩단 사건 이후 독일에서 한 번도 귀국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해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정치와 음악은 별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본의 아니게 끝까지 조국과 등진채 근 3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조국과 단절을 하고 살았던 까닭에 우리가 느기고 생각하는 세계와는 다른, 그 어떤 단절감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반갑게도 젊은 한국인 작곡가가 음악의 노벨상이라는 ‘그라베마이어 상’ 을 받았다. 그 작곡가는 독일에서 활동하는 진은숙. 진은숙은 매년 세계 최고의 작곡가에게 수여하는 ‘그라베마이어 상’ 2004년 수상자로 결정돼 20만 달러의 상금을 받았다. 그러나 이 상의 영예는 상금으로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라베마이어 상은 모든 작곡가들의 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워낙 유명한 대가들이 받아왔고, 피에르 불레즈 같은 거장도 불과 2년 전에 수상했습니다. 최소한 20년은 더 기다려야 되지 않을까 여겼는데 올해 이 상의 수상자로 지명됐다는 것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수상자로 결정된 뒤 진은숙이 모 신문과의 전화 통화에서 밝힌 수상 소감이다.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그라베마이어 상은 교토상과 함께 손꼽히는 작곡상이다. 교토상이 일종의 공로상이라면, 그라베마이어상은 창조적 아이디어를 담은 작품에 주는 상으로서 미국 실업인 찰스 그라베마이어가 1984년 모교인 컨터키 주 루이빌대학에 기부한 900만 달러로 만든 그라베마이어 재단이 제정했다. 그 후 이상은 1985년 루토슬라브스키를 시작으로 리게티, 코릴리아노, 타케미추, 불레즈 등 당대 최고의 작곡가들만이 수상했다. 그런 반열에 진은숙이 들어간 것이다.
진은숙은 지금껏 발표된 작품만으로도 이미 세계 최고의 평가를 받고 있다. 베를린 필하모닉 음악감독인 지휘자 사이먼 래틀은 지난 1999년에 이미 진은숙을 ‘세계 작곡계를 이끌 차세대 5인’으로 지목했으며, ‘앙상블 앙테르콩탕포렝’, ‘앙상블 모데른’, ‘크로노스콰르텟’ 등 현대의 대표적인 연주단체들이 진씨에게 창작곡을 위촉했다. 그동안 발표된 ‘Akrostichon(말의 유희)’, ‘Fantasiemecanique(기계적 환상곡)’, ‘Xi(씨)’, ‘Double Concerto(이중협주곡)’ 등이 모두 화제를 모았다. 2001년에 도이체 심포니는 진은숙의 ‘바이올린 협주곡’ 을 베를린 필하모닉 홀에서 연주해 일약 진은숙의 이름을 세상에 알렸다.
그의 은사인 강석희 교수의 말처럼 진씨는 “시대를 앞서가는 상상력은 21세기 현대 음악계를 이끄는 리더의 한 사람”이 된 것이다.
한국혼을 담은 음악
진은숙은 윤이상이나 강석희 등 국제적인 수준의 작곡가들이 있었기에 오늘이 가능했다고 하면서 현대 음악이 매너리즘에 빠져있어서 이를 탈출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말한다. 그녀는 서양, 특히 독일어권에서 50년대부터 해왔던 ‘현대음악’을 해왔지만 항상 마음 한 구석에는 이것이 내 음악이 아니라는 의구심을 가졌다고 한다. 그래서 10여 년전부터 새로운 화성을 사용한, 그렇지만 지나간 서양의 조성음악과는 다른 음악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현대 음악만을 듣는 제한된 청중보다는 일반 청중을 대상으로 생각하고 곡을 쓰고 있다고 한다. 현대 음악이 너무나 철학적이고 사변적이고 음의 유희에 얽매여 청중들과 멀어진 데 대한 반성이란다. 결국 음악은 어떠한 차원에서든 일반청중과 교감해야지 자폐증 환자와 같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그것이 현대 음악의 하나의 탈출구로 인정한 요인이리라.
“저의 다른 작품도 마찬가지지만 현대 음악의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는, 바이올린이라는 악의 성격에 위배되지 않는 음악을 쓰려고 노력했습니다. 화성의 구조도 아주 단순하게 바이올린의 4개 개방현에 기초를 두고, 악장도 고전적 4악장 구성으로 했습니다. 길이는 약 25분이에요. 화성 구조나 악장의 분할이 단순한 데 비해 오케스트라 음향은 최대한 독특한 소리를 끌어냈습니다.”
이 부분의 설명을 들으면 우리의 가야금이 생각난다. 가야금은 5개의 음을 가지고도 수많은 세계를 표현하되 그 연주는 개방현을 많이 사용함으로써 영롱한, 심금을 끌어당기는 소리를 낸다. 윤이상이 심청 등 우리 전통의 설화나 무속, 민속, 사상을 현대 음악으로 표출했다면 진은숙은 우리 음악의 기본요소를 보다 충실히 현대화함으로써 청중과 멀어진 현대 음악을 다시 청중 앞으로 보내주는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세계 무대에서 활동하는 한국의 음악가들이 많지만 그들이 모두 연주가들이었다는 점에서 우리 음악의 세계화는 아직도 요원하다. 남이 만든 음악을 연주하면서 한국적인 심성이나 한국인만의 특성을 담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동안 우리의 작곡가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세계적으로 인정받으면서 동시에 대중과 함께 호흡했던 작곡가는 아직 없었다. 그런 점에서 진은숙의 등장은 우리 음악계에 희망을 던져 주고 있다.
우리 민족은 아득한 옛날부터 술을 좋아하고 노래를 좋아했다. 노래 잘 하기로는 아마 동야에서 최고일 것이다. 그러한 민족의 음악적 재질과 특성이 그동안 제대로 된 표현의 길을 찾지 못해 나래를 활짝 펴지 못했다면, 이제 진은숙을 통해 우리 음악의 힘이 세계에 알려지게 될 것을 기대한다. 그가 우리와 동시대를 살면서 같은 고민을 한 우리의 젊은이라는 점에서 더욱 기대가 된다. 한국이란, 한국인이라는 독특한 집단의 음악혼을 세계 속으로 던져주는 투수가 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음악이라는 예술에도 3요소가 필요하다. 먼저 작곡이 있어야 하고, 연주가 있어야 하며, 그것을 감상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이 3요소 중 어느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가장 우선돼야 할 것은 역시 작곡이다. 서양 음악이 세계의 음악을 대표하는 양 군림하게 된 것은 비발디나 바흐, 헨델 이후 그들 작곡가들이 만들어놓은 작품이 민족음악의 차원을 넘어 인류의 보편적인 음악으로 올라설 수 있었기 때문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기에 음악 하면 가장 작곡가가 많은 독일이 최고봉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그 다음이 프랑스나 이탈리아 등이고, 나머지는 지역적, 민속적인 음악 전통을 보편적인 음악으로 끌어올리고 있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우리의 음악을 어떨까?
우리 음악은 사실 세계 어느 나라 음악과 비교해도 수준이 낮다거나 모자라다고 할 수 없을 만큼 나름대로 독특한 힘과 멋이 있다. 동양의 여러 나라와 비교하면 가장 힘 있는 음악이 아닐까도 생각된다. 그런데 우리의 음악은 아직 민족음악, 민속음악의 차원에 머무르고 있다.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공통의 음악으로 인정받고 사랑받는 음악이라고는 말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훌륭한 작곡가를 필요로 한다. 자신의 고유한 음악세계, 한국적인 전통에서 키워온 소리를 자각하고, 이를 세계인이 함께 들을 수 있는 음악으로 표현해낼 수 있는 작곡가 말이다.
우리는 이미 윤이상을 갖고 있지 않은가? 맞다. 그러나 윤이상을 한국의 음악인이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주저되는 면이 있다. 그는 이른바 동베를린간첩단 사건 이후 독일에서 한 번도 귀국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해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정치와 음악은 별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본의 아니게 끝까지 조국과 등진채 근 3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조국과 단절을 하고 살았던 까닭에 우리가 느기고 생각하는 세계와는 다른, 그 어떤 단절감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반갑게도 젊은 한국인 작곡가가 음악의 노벨상이라는 ‘그라베마이어 상’ 을 받았다. 그 작곡가는 독일에서 활동하는 진은숙. 진은숙은 매년 세계 최고의 작곡가에게 수여하는 ‘그라베마이어 상’ 2004년 수상자로 결정돼 20만 달러의 상금을 받았다. 그러나 이 상의 영예는 상금으로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라베마이어 상은 모든 작곡가들의 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워낙 유명한 대가들이 받아왔고, 피에르 불레즈 같은 거장도 불과 2년 전에 수상했습니다. 최소한 20년은 더 기다려야 되지 않을까 여겼는데 올해 이 상의 수상자로 지명됐다는 것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수상자로 결정된 뒤 진은숙이 모 신문과의 전화 통화에서 밝힌 수상 소감이다.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그라베마이어 상은 교토상과 함께 손꼽히는 작곡상이다. 교토상이 일종의 공로상이라면, 그라베마이어상은 창조적 아이디어를 담은 작품에 주는 상으로서 미국 실업인 찰스 그라베마이어가 1984년 모교인 컨터키 주 루이빌대학에 기부한 900만 달러로 만든 그라베마이어 재단이 제정했다. 그 후 이상은 1985년 루토슬라브스키를 시작으로 리게티, 코릴리아노, 타케미추, 불레즈 등 당대 최고의 작곡가들만이 수상했다. 그런 반열에 진은숙이 들어간 것이다.
진은숙은 지금껏 발표된 작품만으로도 이미 세계 최고의 평가를 받고 있다. 베를린 필하모닉 음악감독인 지휘자 사이먼 래틀은 지난 1999년에 이미 진은숙을 ‘세계 작곡계를 이끌 차세대 5인’으로 지목했으며, ‘앙상블 앙테르콩탕포렝’, ‘앙상블 모데른’, ‘크로노스콰르텟’ 등 현대의 대표적인 연주단체들이 진씨에게 창작곡을 위촉했다. 그동안 발표된 ‘Akrostichon(말의 유희)’, ‘Fantasiemecanique(기계적 환상곡)’, ‘Xi(씨)’, ‘Double Concerto(이중협주곡)’ 등이 모두 화제를 모았다. 2001년에 도이체 심포니는 진은숙의 ‘바이올린 협주곡’ 을 베를린 필하모닉 홀에서 연주해 일약 진은숙의 이름을 세상에 알렸다.
그의 은사인 강석희 교수의 말처럼 진씨는 “시대를 앞서가는 상상력은 21세기 현대 음악계를 이끄는 리더의 한 사람”이 된 것이다.
한국혼을 담은 음악
진은숙은 윤이상이나 강석희 등 국제적인 수준의 작곡가들이 있었기에 오늘이 가능했다고 하면서 현대 음악이 매너리즘에 빠져있어서 이를 탈출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말한다. 그녀는 서양, 특히 독일어권에서 50년대부터 해왔던 ‘현대음악’을 해왔지만 항상 마음 한 구석에는 이것이 내 음악이 아니라는 의구심을 가졌다고 한다. 그래서 10여 년전부터 새로운 화성을 사용한, 그렇지만 지나간 서양의 조성음악과는 다른 음악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현대 음악만을 듣는 제한된 청중보다는 일반 청중을 대상으로 생각하고 곡을 쓰고 있다고 한다. 현대 음악이 너무나 철학적이고 사변적이고 음의 유희에 얽매여 청중들과 멀어진 데 대한 반성이란다. 결국 음악은 어떠한 차원에서든 일반청중과 교감해야지 자폐증 환자와 같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그것이 현대 음악의 하나의 탈출구로 인정한 요인이리라.
“저의 다른 작품도 마찬가지지만 현대 음악의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는, 바이올린이라는 악의 성격에 위배되지 않는 음악을 쓰려고 노력했습니다. 화성의 구조도 아주 단순하게 바이올린의 4개 개방현에 기초를 두고, 악장도 고전적 4악장 구성으로 했습니다. 길이는 약 25분이에요. 화성 구조나 악장의 분할이 단순한 데 비해 오케스트라 음향은 최대한 독특한 소리를 끌어냈습니다.”
이 부분의 설명을 들으면 우리의 가야금이 생각난다. 가야금은 5개의 음을 가지고도 수많은 세계를 표현하되 그 연주는 개방현을 많이 사용함으로써 영롱한, 심금을 끌어당기는 소리를 낸다. 윤이상이 심청 등 우리 전통의 설화나 무속, 민속, 사상을 현대 음악으로 표출했다면 진은숙은 우리 음악의 기본요소를 보다 충실히 현대화함으로써 청중과 멀어진 현대 음악을 다시 청중 앞으로 보내주는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세계 무대에서 활동하는 한국의 음악가들이 많지만 그들이 모두 연주가들이었다는 점에서 우리 음악의 세계화는 아직도 요원하다. 남이 만든 음악을 연주하면서 한국적인 심성이나 한국인만의 특성을 담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동안 우리의 작곡가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세계적으로 인정받으면서 동시에 대중과 함께 호흡했던 작곡가는 아직 없었다. 그런 점에서 진은숙의 등장은 우리 음악계에 희망을 던져 주고 있다.
우리 민족은 아득한 옛날부터 술을 좋아하고 노래를 좋아했다. 노래 잘 하기로는 아마 동야에서 최고일 것이다. 그러한 민족의 음악적 재질과 특성이 그동안 제대로 된 표현의 길을 찾지 못해 나래를 활짝 펴지 못했다면, 이제 진은숙을 통해 우리 음악의 힘이 세계에 알려지게 될 것을 기대한다. 그가 우리와 동시대를 살면서 같은 고민을 한 우리의 젊은이라는 점에서 더욱 기대가 된다. 한국이란, 한국인이라는 독특한 집단의 음악혼을 세계 속으로 던져주는 투수가 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