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동식의 다섯 계절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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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 |
*제67회 - " 전통예술을 살려놓은 임권택 "
영광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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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1 03:44
또 한 번의 감동
런던에 특파원으로 있을 때 장승업에 관한 영화를 만든다는 애기를 제작사를 통해 전해 들었다. 그 애기를 듣고 가장 걱정했던 것은 자칫 이 영화가 술 먹고 계집질하다 죽는 떠돌이 화가의 스토리 정도로 끝나는 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미술 쪽을 취재하면서 보고들은 장승업의 그림과 생애에 관한 단편적인 지식을 근거로 생각할 때 ‘영화 소재로는 괜찮지만 과연 천한 영화가 아닌 멋있는 영화로 구워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서울에 돌아와 시사회에 초대받아 영화를 보면서 내가 평소 얼마나 쓸데없이 조바심 많고 남을 잘 믿지 못하는 옹졸한 성격이었던가를 확인하고 말았다. 그 모든 것이 기우였던 것이다.
두 시간에 가까운 영화가 끝나고 제작진들의 이름이 올라갈 때 나는 나도 모르게 박수를 치고 있었다. 영화의 성공을 인정해서였으며, 우리도 이제 이런 정도의 영화를 또 하나 가지게 되었구나 하는 자긍심에서였다.
한국 영화 역사를 70년으로 보건 80년으로 보건 그 속에서 예술가를 다룬 영화가 얼마나 있었을까? ‘서편제’ 가 처음으로 판소리라는 예술과 예술가들을 다루었다면 ‘취화선’은 처음으로 한국인 미술가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도였고, 두 작품이 모두 성공을 했다. 그러나 두 작품이 모두 남다른 감동을 남기는 것이 단순히 소재가 좋아서만은 아닐 것이다.
제작기법이나 기술로만 본다면 ‘서편제’ 보다 ‘취화선’ 이 더 힘들 수밖에 없다. 서편제에는 시간을 끌어가는 긴 소리가 있고, 그것을 배우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있다. 그런데 그림이라는 것은 우선 평면에 나타나는 것이요, 소리가 없는 것인데다 우리 동양화(또는 한국화)라는 것이 서양화처럼 화면을 꽉 채우지 않고 많은 부분을 남겨놓는데다가 때로는 누워 있는 몇 개의 먹선만으로 이루어질 때도 있어서 좁은 앵글로 생동감 있게 담아내기가 무척이나 어려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림들이 모두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살아 올라온 것은 기술이 발달한 덕이라고 하기에는 무언가 미흡한,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메라 렌즈의 앵글이란 것은 막상 들여다보면 때로는 너무 넓고 때로는 너무 좁은 것이 보통이다. 대자연을 담기에는 너무 좁고, 우리네 소소한 삶을 담을 때는 너무 넓은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앵글에 관한 한 모자라거나 넘침이 보이지 않는다. 채우지 못한 예술가로서의 포부를 담을 때는 넓게, 세밀한 손길과 정교한 기술을 담을 때는 좁게 쪼아서 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감독과 촬영감독, 그리고 출연 배우가 한 마음, 한 정심으로 통해 있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우리 전통에 대한 살아 있는 해설서
인사동 거리를 지나면서 사람들은 미술관이나 화랑에 걸린 그림을 보면서도 무심히 보고 지나친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그림이 전혀 다르게 보인다. 이 그림은 작가의 어떤 마음을 담고 있으며 이 그림이 말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눈에 보여지는 것 뒤에 또 무엇이 있는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 영화는 우리의 전통 그림에 대한 살아 있는 해설서 역할을 하였다. 그림이란 것 하나에도 우리조상들은 그처럼 많은 생각과 감정을 쏟아 부으며 고민을 했구나 하는 것을 새롭게 체득하게 해주었으며, 그림이란 것도 눈요기가 아니라 마음을 가다듬고 생각을 높여주는 훌륭한 교과서임을 생생하게 가르쳐주었던 것이다.
‘문자향 서권기’, ‘부벽준’ 등 이 영화에서 출연자들이 주고받는 대화가 상당히 수준 높은 것이어서 대부분 한문을 배우지 않고 화론을 배우지 않은 요즘 세대들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기가 쉽지 않다는 한계는 있다. 그러나 문제는 어렵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런 정도의 대화를 못 알아듣는다는 데 있다. 그만큼 우리는 전통예술에 대해 무지하고, 전통이 갖고 있는 수준 높은 향기를 교육하는 데도 무심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옛날에는 떠꺼머리 머슴이나 시장의 장돌뱅이도 줄줄이 주워섬기던 말을 요즘은 대학은 나온 성인들도 못 알아듣게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영화는 그동안 전통을 외면하고 살아온 현대인들에게 하나의 경종으로 다가온다. 나라가 기울어가는 시대적 상황에서 방황하던 한 미술가의 치열한 삶을 통해 우리가 지나쳐왔던 전통문화의 수준 높은 세계를 보여주며, 거기에 멈춰 서서 우리의 삶을 새롭게 반추해 보는 귀중한 시간을 갖게 해주었다.
이 영화는 그러면서 동시에 ‘비록 아무리 수준 높은 예술세계라 할지라도 남의 것을 무조건 따라 하는 것은 결코 올바른 예술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조용히 외치고 있다. 천하에 명망 높은 추사 김정희와 한국인이 자랑하는 작품 세한도를 흔들어놓는 그 자신만만함은 할리우드를 치고 올라가는 한국 영화계의 야심만큼이나 당찬 것이다.
여기에는 이 영화를 위해 온갖 자문과 지도, 귀중한 자료와 재료를 아끼지 않은 우리 미술인들과 문화계 인사들의 정성이 밑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과거 어느 영화에 이처럼 많은 성원이 있었던가? 그러므로 이 영화는 영화 제작자들만의 작품이 아니라 우리 문화예술계의 공동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판을 바꿔놓은 서편제
되돌아보면 영화 ‘서편제’ 는 떠돌이 소리꾼 ‘유봉’ 과 그 가족의 일생을 담았지만, ‘소리’ 곧 판소리가 주인인 본격 음악영화이다. 어떻게 보면 김명곤이나 오정해, 김규철 등 주요 배역들도 모두 소리를 들려주기 위한 배역에 지나지 않는다. 소리꾼 유봉의 떠돌이 인생은 모두 소리로 설명되고 딸과 아들에게 소리를 가르치는 대목이나 인생의 주요 고비 모두를 소리가 채워준다. 마지막으로 심청이가 눈 뜨는 대목에 이르기까지 굵직굵직한 소리들이 이 영화의 뼈대를 이끌어가고 있다.
그 소리는 우리의 귀를 의심케 했다.
“아니, 판소리가 이처럼 쉬운 것이었던가?”
“판소리가 이처럼 감동적인 것이었던가?”
“판소리가 이처럼 신나는 것이었던가?”
사람들의 놀람은 소문이 되어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갔다. 꼭 대통령이 보아서가 아니라 이 영화를 보지 않으면 뭔가 비문화적인 인물군에 속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들 정도로 너도 나도 이 영화를 보고 감탄의 말을 전해주었다. 그 결과 관객 100만 명을 돌파했다.
한국 영화가 단일 작품으로 관객 100만 명에 달하는 관객을 불러 모을 수 있었다는 그 사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영화인들은 힘이 솟았다. 터미네이터 속편 등 외화들이 50만 명, 100만 명을 돌파할 때 매번 부러워하면서 ‘우리 영화는 어쩔 수 없어’ 하며 자위하던 영화인들이 불현듯 ‘나도 하면 된다’ 는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이다.
많은 관객은 돈으로 이어졌고, 한국 영화로도 돈을 벌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그 이후 영화판으로 우리의 젊은 영화인들, 감독과 작가들이 몰려들었다. 그전까지는 광고계나 금융업으로 갔을 인재들이었다. 그들이 영화판으로 몰려들자 영화계의 수준이 올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서기 2000년을 전후해 많은 우리 영화가 대박을 떠뜨린 것도 바로 이런 인재들이 모여들었던 것과 관련이 없지 않다.
서편제의 힘은 판소리의 힘
판소리 영화 ‘서편제’ 가 우리 문화계를 휩쓴 이후 이 영화가 촬영된 장소들이 영화와 함께 유명해졌다. 영화 속의 장소를 찾는 관광객들이 급증했던 것이다. 유홍준의 문화유산답사기가 나오기 전 영화촬영장소 답사 붐이 일었던 셈이다.
그 장소들로 유명한 곳은 고창 선운사 골짜기와 강진으로 내려가는 도암만 일대, 그리고 해남 두륜산 대흥사 등.
그 중에서도 청산도는 완도에서도 철선을 타고 한 시간 반을 가야 하는 남해의 고도에서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들이는 관광섬이 되었다. 수석 애호가들에게만 알려져 있던 이 섬은 이 영화에서 그 유명한 ‘진도 아리랑’ 이 불려지는 5분 40초 동안 단 한 커트로 촬영된 곳이다. 무려 5분 40초 동안 카메라는 조금도 실수하지 않고 아주 천천히 청산도의 한 마을을 담아내며 진도 아리랑의 사설을 그대로 그림으로 그려내었던 것이다.
그 덕에 청산도는 한때 밀려드는 관광객들로 성황을 이루었다. 이 때문에 완도군에서는 관광객들에게 편의를 제공한다고 마을 한복판을 가로지는 길을 시멘트로 포장했다가 항의를 받고는 다시 흙으로 덮는 소동까지 있었다.
이제 그 영화의 광풍이 지나간 지 10년이 넘었다.
그 때 판소리를 불렀던 김명곤은 국립극장 극장장에 이어 문화부 장관까지 올라갔고, 오정해는 FM 음악방송의 진행자로 자기의 길을 탄탄히 걸어가고 있다. 민족의 음악인 소리를 영화로 되살려낸 감독 임권택은 ‘서편제’ 의 후속이자 완성작인 ‘천년학’을 그의 100번째 영화로 제작하였으며, 제작자 이태원은 이제 한국 영화 최대의 변성기를 누리며 영화계에 남긴 자신의 발자취를 되돌아보며 흐뭇해하고 있다.
다시 위기라는 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취화선과 서편제는 우리의 영화판을 바꿔놓았고, 알려지지 않았던 국토의 아름다움을 사람들에게 일깨웠으며, 전통의 소중함과 우리 문화와 예술에 대한 자부심을 불러일으켜주었다. 이 모든 것은 임권택이라는 걸출한 감독과 정일성이라는 촬영감독, 그리고 그 뒤를 묵묵히 받쳐준 제작자 이태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세분들에게 우리가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런던에 특파원으로 있을 때 장승업에 관한 영화를 만든다는 애기를 제작사를 통해 전해 들었다. 그 애기를 듣고 가장 걱정했던 것은 자칫 이 영화가 술 먹고 계집질하다 죽는 떠돌이 화가의 스토리 정도로 끝나는 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미술 쪽을 취재하면서 보고들은 장승업의 그림과 생애에 관한 단편적인 지식을 근거로 생각할 때 ‘영화 소재로는 괜찮지만 과연 천한 영화가 아닌 멋있는 영화로 구워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서울에 돌아와 시사회에 초대받아 영화를 보면서 내가 평소 얼마나 쓸데없이 조바심 많고 남을 잘 믿지 못하는 옹졸한 성격이었던가를 확인하고 말았다. 그 모든 것이 기우였던 것이다.
두 시간에 가까운 영화가 끝나고 제작진들의 이름이 올라갈 때 나는 나도 모르게 박수를 치고 있었다. 영화의 성공을 인정해서였으며, 우리도 이제 이런 정도의 영화를 또 하나 가지게 되었구나 하는 자긍심에서였다.
한국 영화 역사를 70년으로 보건 80년으로 보건 그 속에서 예술가를 다룬 영화가 얼마나 있었을까? ‘서편제’ 가 처음으로 판소리라는 예술과 예술가들을 다루었다면 ‘취화선’은 처음으로 한국인 미술가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도였고, 두 작품이 모두 성공을 했다. 그러나 두 작품이 모두 남다른 감동을 남기는 것이 단순히 소재가 좋아서만은 아닐 것이다.
제작기법이나 기술로만 본다면 ‘서편제’ 보다 ‘취화선’ 이 더 힘들 수밖에 없다. 서편제에는 시간을 끌어가는 긴 소리가 있고, 그것을 배우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있다. 그런데 그림이라는 것은 우선 평면에 나타나는 것이요, 소리가 없는 것인데다 우리 동양화(또는 한국화)라는 것이 서양화처럼 화면을 꽉 채우지 않고 많은 부분을 남겨놓는데다가 때로는 누워 있는 몇 개의 먹선만으로 이루어질 때도 있어서 좁은 앵글로 생동감 있게 담아내기가 무척이나 어려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림들이 모두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살아 올라온 것은 기술이 발달한 덕이라고 하기에는 무언가 미흡한,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메라 렌즈의 앵글이란 것은 막상 들여다보면 때로는 너무 넓고 때로는 너무 좁은 것이 보통이다. 대자연을 담기에는 너무 좁고, 우리네 소소한 삶을 담을 때는 너무 넓은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앵글에 관한 한 모자라거나 넘침이 보이지 않는다. 채우지 못한 예술가로서의 포부를 담을 때는 넓게, 세밀한 손길과 정교한 기술을 담을 때는 좁게 쪼아서 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감독과 촬영감독, 그리고 출연 배우가 한 마음, 한 정심으로 통해 있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우리 전통에 대한 살아 있는 해설서
인사동 거리를 지나면서 사람들은 미술관이나 화랑에 걸린 그림을 보면서도 무심히 보고 지나친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그림이 전혀 다르게 보인다. 이 그림은 작가의 어떤 마음을 담고 있으며 이 그림이 말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눈에 보여지는 것 뒤에 또 무엇이 있는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 영화는 우리의 전통 그림에 대한 살아 있는 해설서 역할을 하였다. 그림이란 것 하나에도 우리조상들은 그처럼 많은 생각과 감정을 쏟아 부으며 고민을 했구나 하는 것을 새롭게 체득하게 해주었으며, 그림이란 것도 눈요기가 아니라 마음을 가다듬고 생각을 높여주는 훌륭한 교과서임을 생생하게 가르쳐주었던 것이다.
‘문자향 서권기’, ‘부벽준’ 등 이 영화에서 출연자들이 주고받는 대화가 상당히 수준 높은 것이어서 대부분 한문을 배우지 않고 화론을 배우지 않은 요즘 세대들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기가 쉽지 않다는 한계는 있다. 그러나 문제는 어렵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런 정도의 대화를 못 알아듣는다는 데 있다. 그만큼 우리는 전통예술에 대해 무지하고, 전통이 갖고 있는 수준 높은 향기를 교육하는 데도 무심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옛날에는 떠꺼머리 머슴이나 시장의 장돌뱅이도 줄줄이 주워섬기던 말을 요즘은 대학은 나온 성인들도 못 알아듣게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영화는 그동안 전통을 외면하고 살아온 현대인들에게 하나의 경종으로 다가온다. 나라가 기울어가는 시대적 상황에서 방황하던 한 미술가의 치열한 삶을 통해 우리가 지나쳐왔던 전통문화의 수준 높은 세계를 보여주며, 거기에 멈춰 서서 우리의 삶을 새롭게 반추해 보는 귀중한 시간을 갖게 해주었다.
이 영화는 그러면서 동시에 ‘비록 아무리 수준 높은 예술세계라 할지라도 남의 것을 무조건 따라 하는 것은 결코 올바른 예술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조용히 외치고 있다. 천하에 명망 높은 추사 김정희와 한국인이 자랑하는 작품 세한도를 흔들어놓는 그 자신만만함은 할리우드를 치고 올라가는 한국 영화계의 야심만큼이나 당찬 것이다.
여기에는 이 영화를 위해 온갖 자문과 지도, 귀중한 자료와 재료를 아끼지 않은 우리 미술인들과 문화계 인사들의 정성이 밑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과거 어느 영화에 이처럼 많은 성원이 있었던가? 그러므로 이 영화는 영화 제작자들만의 작품이 아니라 우리 문화예술계의 공동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판을 바꿔놓은 서편제
되돌아보면 영화 ‘서편제’ 는 떠돌이 소리꾼 ‘유봉’ 과 그 가족의 일생을 담았지만, ‘소리’ 곧 판소리가 주인인 본격 음악영화이다. 어떻게 보면 김명곤이나 오정해, 김규철 등 주요 배역들도 모두 소리를 들려주기 위한 배역에 지나지 않는다. 소리꾼 유봉의 떠돌이 인생은 모두 소리로 설명되고 딸과 아들에게 소리를 가르치는 대목이나 인생의 주요 고비 모두를 소리가 채워준다. 마지막으로 심청이가 눈 뜨는 대목에 이르기까지 굵직굵직한 소리들이 이 영화의 뼈대를 이끌어가고 있다.
그 소리는 우리의 귀를 의심케 했다.
“아니, 판소리가 이처럼 쉬운 것이었던가?”
“판소리가 이처럼 감동적인 것이었던가?”
“판소리가 이처럼 신나는 것이었던가?”
사람들의 놀람은 소문이 되어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갔다. 꼭 대통령이 보아서가 아니라 이 영화를 보지 않으면 뭔가 비문화적인 인물군에 속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들 정도로 너도 나도 이 영화를 보고 감탄의 말을 전해주었다. 그 결과 관객 100만 명을 돌파했다.
한국 영화가 단일 작품으로 관객 100만 명에 달하는 관객을 불러 모을 수 있었다는 그 사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영화인들은 힘이 솟았다. 터미네이터 속편 등 외화들이 50만 명, 100만 명을 돌파할 때 매번 부러워하면서 ‘우리 영화는 어쩔 수 없어’ 하며 자위하던 영화인들이 불현듯 ‘나도 하면 된다’ 는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이다.
많은 관객은 돈으로 이어졌고, 한국 영화로도 돈을 벌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그 이후 영화판으로 우리의 젊은 영화인들, 감독과 작가들이 몰려들었다. 그전까지는 광고계나 금융업으로 갔을 인재들이었다. 그들이 영화판으로 몰려들자 영화계의 수준이 올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서기 2000년을 전후해 많은 우리 영화가 대박을 떠뜨린 것도 바로 이런 인재들이 모여들었던 것과 관련이 없지 않다.
서편제의 힘은 판소리의 힘
판소리 영화 ‘서편제’ 가 우리 문화계를 휩쓴 이후 이 영화가 촬영된 장소들이 영화와 함께 유명해졌다. 영화 속의 장소를 찾는 관광객들이 급증했던 것이다. 유홍준의 문화유산답사기가 나오기 전 영화촬영장소 답사 붐이 일었던 셈이다.
그 장소들로 유명한 곳은 고창 선운사 골짜기와 강진으로 내려가는 도암만 일대, 그리고 해남 두륜산 대흥사 등.
그 중에서도 청산도는 완도에서도 철선을 타고 한 시간 반을 가야 하는 남해의 고도에서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들이는 관광섬이 되었다. 수석 애호가들에게만 알려져 있던 이 섬은 이 영화에서 그 유명한 ‘진도 아리랑’ 이 불려지는 5분 40초 동안 단 한 커트로 촬영된 곳이다. 무려 5분 40초 동안 카메라는 조금도 실수하지 않고 아주 천천히 청산도의 한 마을을 담아내며 진도 아리랑의 사설을 그대로 그림으로 그려내었던 것이다.
그 덕에 청산도는 한때 밀려드는 관광객들로 성황을 이루었다. 이 때문에 완도군에서는 관광객들에게 편의를 제공한다고 마을 한복판을 가로지는 길을 시멘트로 포장했다가 항의를 받고는 다시 흙으로 덮는 소동까지 있었다.
이제 그 영화의 광풍이 지나간 지 10년이 넘었다.
그 때 판소리를 불렀던 김명곤은 국립극장 극장장에 이어 문화부 장관까지 올라갔고, 오정해는 FM 음악방송의 진행자로 자기의 길을 탄탄히 걸어가고 있다. 민족의 음악인 소리를 영화로 되살려낸 감독 임권택은 ‘서편제’ 의 후속이자 완성작인 ‘천년학’을 그의 100번째 영화로 제작하였으며, 제작자 이태원은 이제 한국 영화 최대의 변성기를 누리며 영화계에 남긴 자신의 발자취를 되돌아보며 흐뭇해하고 있다.
다시 위기라는 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취화선과 서편제는 우리의 영화판을 바꿔놓았고, 알려지지 않았던 국토의 아름다움을 사람들에게 일깨웠으며, 전통의 소중함과 우리 문화와 예술에 대한 자부심을 불러일으켜주었다. 이 모든 것은 임권택이라는 걸출한 감독과 정일성이라는 촬영감독, 그리고 그 뒤를 묵묵히 받쳐준 제작자 이태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세분들에게 우리가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