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동식의 다섯 계절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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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 |
*제43회 - " 운문사 "
영광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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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1 03:44
우리말로 가지에 매달려 있는 감을 수식하는 말이 얼마나 있을까?
서울에 살고 있는 우리 집안의 종손이 사위를 본다고 대구로 초청을 하길래 대구로 올라가 토요일 1시에 축하를 하고 나니 그냥 부산으로 내려오기도 뭐하고 해서 평소에 가고 싶었던 운문사를 내비게이션에 찍었다. 그런데 내비게이션은 이상하게도 청도로 가는 길로 연결하지 않고 경산쪽으로 돌아서 연결해준다. 아무려나 모로 가나 바로 가나 서울만 가면 된다고 운문사로 길을 재촉하니 도로 옆이 온통 주렁주렁 감 천지다. 경산에서부터 청도군 경내로 들어서니 더욱 그렇다. 아니 이것은 ‘심하다’라고 표현해야 할 정도다. ‘주절이 주절이’, ‘주렁주렁’, 겨우 이 두 가지 표현밖에는 모르겠는데, 아 하나가 더 있구나: ‘올망졸망’. 아무튼 나뭇가지에 달려있는 감의 형상을 묘사하는 우리말 표현이 부족한 것을 한탄하며, 나는 감의 고향인 청도군의 가을을 달렸다.
청도 감은 대부분 동글납작하다. 그래서 이름도 소반 반(盤)자를 써서 반시(盤柿)라고 한다. 씨가 없고 수분이 많아서 입 안에 놓으면 말랑말랑한 살에서 나오는 즙이 은근하고 달콤하다. 우리 고향인 문경도 감나무가 없는 것은 아닌데, 우리 고향은 밭 주위로 띄엄띄엄 서 있는데 여기는 기후가 알맞아서 그런지 아예 감을 과수원처럼 줄을 맞추어 심고 키운다. 이름하여 감농장이다. 길 옆에는 조그만 원두막 같은 것들이 만들어져 있고 거기서 아낙네들이 감을 깎기고 하고 선별작업을 하며, 손님을 맞는다.
그런데 오늘 가는 길은 감을 보기 위함은 아니다. 운문사(雲門寺)다. 청도에서도 한 참 동쪽으로 가서 고개를 넘고 물을 건너야 하니 평소에 가기 힘든 곳이다. 경산에서부터 가는 길도 운문댐으로 생긴 큰 호수를 빙빙 돌아서 가야한다. 그러나 가는 길 옆 산들은 이미 짙은 가을색으로 갈아입고 있어 그 의상의 잔치를 보는 것만으로도 피곤하지 않다.
만일에 운문사가 우리나라 최대의 비구니 사찰이 아니었다면 나의 관심이 높았을까? 그렇다. 그 점 때문에 간간히 언론을 통해 본 운문사의 단편들이 나의 호기심을 끌어당겼을 것이다. 나만이 아니다. 왜 곧바로 부산으로 가지 않고 험한 길을 찾아가느라 또 밤늦게 집으로 들어가는 고생을 자초하느냐며 시큰둥하던 우리 집사람도 운문사가 비구니 사찰이라고 하니까 반색을 한다. 가끔 절을 찾아 열심히 삼배를 하는 처지인지라 허구한 날 비구들만 보는 것보다 색다른 경험일 터이니까.
이상한 일이다. 절 앞 가게들이 즐비한 곳에 마련된 주차장에 들어가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갑자기 앞 차에서부터 주차장을 막고는 절 안으로 들어가라고 손짓한다. 엉겁결에 따라 들어가면서 이게 왠 떡이냐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러지 않아도 결혼식장에 가느라 정장에다 굽 높은 구두를 신고 온 집사람이 내내 걱정을 했는데 갑자기 부처님이 그 마음을 알아주었는지, 차를 절 경내 안으로 집어넣어주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걸어나고 나오는 사이로 차를 몰고 가면서 겉으로는 미안하고 속으로는 신이 났다. 남들과 조금만 다른 대우를 받으면 사람은 이처럼 교만해지고 뻔뻔해지는 것인가?
그러나 우리가 고속도로를 타고 지나갔다고 그 고장을 여행한 것이 아니듯이 적어도 절 경내를 차를 타고 달리면 그곳을 참배한 것이 되지를 않는다. 아니 오히려 손해인 것이다. 절 입구를 들어서면서 펼쳐있는 솔밭이 그 손해의 첫째요. 길 옆을 따라 이어지는 계곡이 둘째요, 길을 따라서 걸으면서 스님, 특히 비구니들을 보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아쉬움이다. 솔밭은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그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선의 소나무이며, 조선의 힘과 자랑을 가장 극명하게 상징한다”고 칭찬을 아까지 않은 그 소나무인데 주차간림(走車看林:차를 타고 가느라 숲을 지나쳐보다)이 되어버린 것이다.
신라 진흥왕시대인 서기 560년에 처음 만들어진 것이라니 신라로 보면 불교 도입 초기에 만들어진 절인데, 몇 번의 불사로 다시 세우고 만들어졌지만, 현재 운문사 안에는 30여 채의 건물이 있는데다가 6건의 보물과 천연기념물까지 있는 유서 깊은 절이란다. 절의 문을 들어서면 커다란 소나무가 눈에 들어오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처진 소나무(盤松)로서 천연기념물 제180호로 보호되고 있다. 굵은 나무 줄기가 약 2미터 높이에서 사방으로 둥글게 뻗어나가면서 늘어진 가지들이 원심에서부터 약 10미터 가까이 퍼져 있어서, 나뭇가지들로 된 원, 곧 소나무 그늘의 면적이 10곱하기 10곱하기 3.14 하면 314평방미터, 곧 100평에 이르고 있다. 이 가지들을 부축하기 위해서 수많은 보조기둥들이 서 있는데, 안으로 머리를 디밀고 보는 이 소나무의 그 넓은 우산은 신비롭기만 하다. 임진왜란 전에 어느 대사가 시들어가는 나무를 꽂아심은 것이 살아나서 이처럼 큰 나무가 되었다는데, 임진왜란 때에도 상당히 컸다고 하니 수령이 400년이 넘었다는 이야기이다. 매년 봄에 이 나무에 12말의 막걸리를 물 12말에 타서 뿌려주는 행사를 계속하고 있다는 것은 이제 우리가 다 아는 내용이고.
다른 절과 달리 이 절에는 대웅전이 두 개가 있다. 자세히 보니 하나는 크고 화려하고 색깔도 선명한 것이 최근에 새로 지은 것 같고, 또 하나는 오래되고 고즈넉하고 그 건물 앞에 삼층 석탑이 양 쪽으로 있는 것으로 보니 이것이 원래의 대웅전인 것 같다. 돌아와서 찾아보니 비로전이라고 하니 비로자나불을 모신 법당인데, 협시보살이 없이 부처님 한 분만 모시고 있다. 그런 것 외에도 만세루라고 하는 넓은 강원이 있는 것도 달라 보이는데 사실 운문사에 관한 글을 쓰도록 만든 것은 이런 저런 다른 것보다도 보물 317호로 지정되어 있는 석조여래좌상과 그것을 소개하는 안내문이다.
돌로 만든 그 여래좌상은 높이 63센티미터로 자그만하며, 광배(光背)와 대좌(臺座)를 모두 갖춘 완전한 형태의 불상이다. 돌로 만든 것임에도 얼굴은 하얗게 호분이 칠해져 있다. 아마도 보다 사람의 얼굴에 가깝게 표현하고 싶어서였을까? 그 표정은 편안하다 못해 무심하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다만 조각 수법은 어딘가 둔탁한 느낌이 없지는 않다. 이 여래좌상의 양 옆에는 특이하게 사천왕상을 돌에 양각으로 새긴 네 개의 돌기둥이 두 개 씩 서 있다. 이 조각들은 원래 이 곳이 아니고 다른데 있던 것인데, 어느 탑의 4면을 돌아가며 만든 조각이 아닌가 싶지만, 원래의 터를 잃고 이 곳에 와서 부처님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 여래상과 사천왕석주는 모두 작압전이란 전각 안에 모셔져 있다.
그런데 나를 화나게 만든 것은, 작압전(鵲鴨殿)이란 특이한 이름을 알려주는 글은 없고 여래좌상을 소개한 글이 그 전각 앞 안내판에 있는데, 그것도 너무나 전문적이어서 일반 사람들의 이해에는 전혀 도움이 안되는 것이 아닌가? 한번 같이 읽어보자!
“대좌(臺座)와 광배(光背)가 갖추어진 완전한 이 불상(佛像)은 육계(肉髻)가 뚜렷한 나발(螺髮)의 머리에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손 모양을 하고 있다. 네모진 상체와 하체에 규칙적으로 흐르는 층단식 옷주름선, 섬려(纖麗)해진 주형거신광배(舟形擧身光背), 둔중(鈍重)한 연화문(蓮華紋)이 새겨진 6각연화대좌(六角蓮華臺座) 등 다소 경직된 면도 나타나고 있다. 반면, 통견(通肩)의 법의(法衣)가 비스듬히 표현된 것으로 보아 9세기 불상을 답습하려고 한 900년을 전후한 불상양식을 단적으로 드러낸 중요한 작품이다”
이 짧은 문장에는 불교문화재에 관한 풍부한 이해가 없으면 도저히 알 수 없을 정도로 곳곳에 한자어를 써가며 필요이상으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육계(肉髻)가 뚜렷한 나발(螺髮)”은 무슨 뜻이며 “ 네모진 상체와 하체에 규칙적으로 흐르는 층단식 옷주름선”은 왜 경직된 것이며 “통견(通肩)의 법의(法衣)가 비스듬한 ” 것이 9세기 불상의 특징이라 하더라도 굳이 그것을 여기서 밝혀야 했는가? 9세기이니까 신라시대 말기에 접어든 시대라고 하면 될 것이고 이 절의 창건이나 중창 사실을 감안하면 신라 말기 세상이 어지러울 때에 사람들이 부처님을 좀더 가까이 모시고 싶어서 인간적인 얼굴로 표현했다고 하는 것이 더 우리에게 알기 쉬운 설명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문화재 용어라는 것이 다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지만 이 안내판을 읽는 사람들은 불교연구학자가 아닌 만큼 일반 사람들에게 필요한 만큼 필요한 수준으로 그 요체만을 알려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 생각을 갖고 절 주위를 돌아보니 다시 아쉬움이 더해진다. 법당 곳곳에 써 있는 주련(柱聯)들, 불교의 경지와 깨달음의 의미를 짧은 한문문구로 전해주는 것인데, 사실상 우리들은 그 의미를 알 수가 없다. 운문사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 많은 법당에 걸려있는 주련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그런데 양산의 통도사는 달랐다. 그 통도사 문을 들어서면 저 멀리 금강계단에 모셔진 부처님 사리를 보러 가는 동안 좌우에 서 있는 모든 건물, 모든 탑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을 해 놓았는데, 그 설명이 참으로 보고 알기 쉬웠다. 또한 주련들을 가까이 가 보면 거기에는 주련에 쓰인 한문과 함께 우리 말로 친절하게 설명을 해 놓아 금방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과연 도가에서 말한 대로 “대교약졸, 대현약우(大巧若拙, 大賢若愚)”이다. 서툰 듯 하는 데에 큰 기교가 있고 어리석은 듯 하는 데에 큰 현명함이 있다. 즉 많이 알고 뜻을 제대로 알수록 쉽게 표현한다는 뜻일 텐데, 누구나 알기 쉽게 안내판을 써주는 일이 이처럼 어렵고 힘들만 말인가?
그런 아쉬움을 느꼈다 하더라도 이 가을의 마지막 가는 길에 운문사를 들릴 수 있었던 것은 아무나 누릴 수 없는 큰 복이라 생각되었다. 절 곳곳의 나무들이 노란, 누런, 연황, 진홍, 진갈색 등 기온과 시간에 따라 천변만화된 색깔의 향연을 보여주고 있었다. 사람들은 연신 가을을 담기에 바쁘다. 사진기가 없는 우리는 마음에 담았다. 그리고는 어느 새 물들어가는 저 나뭇잎처럼 우리도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기로 했다. 절 옆을 흐르는 개울에는 극락교라는 다리가 하나 놓여있고 그 뒤편으로는 또 숲 속에 전각이 보이는데, 그 속이 무척 아름답게 보여 건너가고 싶은 욕망이 한 여름 뭉게구름처럼 일어났지만, 건너가지 않기로 했다. 굳이 지금 극락을 보러갈 일이 무엇 있겠는가? 나중에 내가 저 세상으로 가서 보면 되는 것, 미리 보려고 한다면 그것은 이 생을 빨리 마감하려는 욕심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다시 차를 타고 운문사 경내를 빠져나오면서 걸어서 나가는 분들에게 미안했지만 그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므로 그냥 뻔뻔해지기로 했다. 거기서부터 부산에 오는 길은 청도로 나오거나 아니면 언양으로 넘어오는 것인데, 언양으로 넘어오는 길을 책해서 가지산을 넘으니 석양볕에 가을이 온통 지천이다. 길 가에는 누군가가 보낸 편지들이 낙엽이 되어 구르고 있다. 노란 은행잎 편지가 가장 눈에 잘 띈다. 길 가에 널려있는 청도 반시를 사서 배를 채우면서 가지산을 넘으니 저 멀리 울산 쪽으로 겹겹이 펼쳐있는 산과 산이 거리에 따라 진함의 차이를 보여주어 시계가 한없이 넓어진다. 그 가을 속에 나도 갇혀서 다시 도시로 나가고 싶지 않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저문 해를 뒤로 하고 부산까지 내려오는 동안 주말 귀가길 국도와 고속도로가 막히면서 여기서도 교통체증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러나 그 차에 갇힌 몇 시간이 결코 힘들지 않은 것은, 운문사에서 본 가을과 청정한 자연의 가르침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리라. 아마도 그런 가을에 언제 다시 묻혀볼 수 있으랴?
서울에 살고 있는 우리 집안의 종손이 사위를 본다고 대구로 초청을 하길래 대구로 올라가 토요일 1시에 축하를 하고 나니 그냥 부산으로 내려오기도 뭐하고 해서 평소에 가고 싶었던 운문사를 내비게이션에 찍었다. 그런데 내비게이션은 이상하게도 청도로 가는 길로 연결하지 않고 경산쪽으로 돌아서 연결해준다. 아무려나 모로 가나 바로 가나 서울만 가면 된다고 운문사로 길을 재촉하니 도로 옆이 온통 주렁주렁 감 천지다. 경산에서부터 청도군 경내로 들어서니 더욱 그렇다. 아니 이것은 ‘심하다’라고 표현해야 할 정도다. ‘주절이 주절이’, ‘주렁주렁’, 겨우 이 두 가지 표현밖에는 모르겠는데, 아 하나가 더 있구나: ‘올망졸망’. 아무튼 나뭇가지에 달려있는 감의 형상을 묘사하는 우리말 표현이 부족한 것을 한탄하며, 나는 감의 고향인 청도군의 가을을 달렸다.
청도 감은 대부분 동글납작하다. 그래서 이름도 소반 반(盤)자를 써서 반시(盤柿)라고 한다. 씨가 없고 수분이 많아서 입 안에 놓으면 말랑말랑한 살에서 나오는 즙이 은근하고 달콤하다. 우리 고향인 문경도 감나무가 없는 것은 아닌데, 우리 고향은 밭 주위로 띄엄띄엄 서 있는데 여기는 기후가 알맞아서 그런지 아예 감을 과수원처럼 줄을 맞추어 심고 키운다. 이름하여 감농장이다. 길 옆에는 조그만 원두막 같은 것들이 만들어져 있고 거기서 아낙네들이 감을 깎기고 하고 선별작업을 하며, 손님을 맞는다.
그런데 오늘 가는 길은 감을 보기 위함은 아니다. 운문사(雲門寺)다. 청도에서도 한 참 동쪽으로 가서 고개를 넘고 물을 건너야 하니 평소에 가기 힘든 곳이다. 경산에서부터 가는 길도 운문댐으로 생긴 큰 호수를 빙빙 돌아서 가야한다. 그러나 가는 길 옆 산들은 이미 짙은 가을색으로 갈아입고 있어 그 의상의 잔치를 보는 것만으로도 피곤하지 않다.
만일에 운문사가 우리나라 최대의 비구니 사찰이 아니었다면 나의 관심이 높았을까? 그렇다. 그 점 때문에 간간히 언론을 통해 본 운문사의 단편들이 나의 호기심을 끌어당겼을 것이다. 나만이 아니다. 왜 곧바로 부산으로 가지 않고 험한 길을 찾아가느라 또 밤늦게 집으로 들어가는 고생을 자초하느냐며 시큰둥하던 우리 집사람도 운문사가 비구니 사찰이라고 하니까 반색을 한다. 가끔 절을 찾아 열심히 삼배를 하는 처지인지라 허구한 날 비구들만 보는 것보다 색다른 경험일 터이니까.
이상한 일이다. 절 앞 가게들이 즐비한 곳에 마련된 주차장에 들어가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갑자기 앞 차에서부터 주차장을 막고는 절 안으로 들어가라고 손짓한다. 엉겁결에 따라 들어가면서 이게 왠 떡이냐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러지 않아도 결혼식장에 가느라 정장에다 굽 높은 구두를 신고 온 집사람이 내내 걱정을 했는데 갑자기 부처님이 그 마음을 알아주었는지, 차를 절 경내 안으로 집어넣어주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걸어나고 나오는 사이로 차를 몰고 가면서 겉으로는 미안하고 속으로는 신이 났다. 남들과 조금만 다른 대우를 받으면 사람은 이처럼 교만해지고 뻔뻔해지는 것인가?
그러나 우리가 고속도로를 타고 지나갔다고 그 고장을 여행한 것이 아니듯이 적어도 절 경내를 차를 타고 달리면 그곳을 참배한 것이 되지를 않는다. 아니 오히려 손해인 것이다. 절 입구를 들어서면서 펼쳐있는 솔밭이 그 손해의 첫째요. 길 옆을 따라 이어지는 계곡이 둘째요, 길을 따라서 걸으면서 스님, 특히 비구니들을 보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아쉬움이다. 솔밭은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그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선의 소나무이며, 조선의 힘과 자랑을 가장 극명하게 상징한다”고 칭찬을 아까지 않은 그 소나무인데 주차간림(走車看林:차를 타고 가느라 숲을 지나쳐보다)이 되어버린 것이다.
신라 진흥왕시대인 서기 560년에 처음 만들어진 것이라니 신라로 보면 불교 도입 초기에 만들어진 절인데, 몇 번의 불사로 다시 세우고 만들어졌지만, 현재 운문사 안에는 30여 채의 건물이 있는데다가 6건의 보물과 천연기념물까지 있는 유서 깊은 절이란다. 절의 문을 들어서면 커다란 소나무가 눈에 들어오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처진 소나무(盤松)로서 천연기념물 제180호로 보호되고 있다. 굵은 나무 줄기가 약 2미터 높이에서 사방으로 둥글게 뻗어나가면서 늘어진 가지들이 원심에서부터 약 10미터 가까이 퍼져 있어서, 나뭇가지들로 된 원, 곧 소나무 그늘의 면적이 10곱하기 10곱하기 3.14 하면 314평방미터, 곧 100평에 이르고 있다. 이 가지들을 부축하기 위해서 수많은 보조기둥들이 서 있는데, 안으로 머리를 디밀고 보는 이 소나무의 그 넓은 우산은 신비롭기만 하다. 임진왜란 전에 어느 대사가 시들어가는 나무를 꽂아심은 것이 살아나서 이처럼 큰 나무가 되었다는데, 임진왜란 때에도 상당히 컸다고 하니 수령이 400년이 넘었다는 이야기이다. 매년 봄에 이 나무에 12말의 막걸리를 물 12말에 타서 뿌려주는 행사를 계속하고 있다는 것은 이제 우리가 다 아는 내용이고.
다른 절과 달리 이 절에는 대웅전이 두 개가 있다. 자세히 보니 하나는 크고 화려하고 색깔도 선명한 것이 최근에 새로 지은 것 같고, 또 하나는 오래되고 고즈넉하고 그 건물 앞에 삼층 석탑이 양 쪽으로 있는 것으로 보니 이것이 원래의 대웅전인 것 같다. 돌아와서 찾아보니 비로전이라고 하니 비로자나불을 모신 법당인데, 협시보살이 없이 부처님 한 분만 모시고 있다. 그런 것 외에도 만세루라고 하는 넓은 강원이 있는 것도 달라 보이는데 사실 운문사에 관한 글을 쓰도록 만든 것은 이런 저런 다른 것보다도 보물 317호로 지정되어 있는 석조여래좌상과 그것을 소개하는 안내문이다.
돌로 만든 그 여래좌상은 높이 63센티미터로 자그만하며, 광배(光背)와 대좌(臺座)를 모두 갖춘 완전한 형태의 불상이다. 돌로 만든 것임에도 얼굴은 하얗게 호분이 칠해져 있다. 아마도 보다 사람의 얼굴에 가깝게 표현하고 싶어서였을까? 그 표정은 편안하다 못해 무심하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다만 조각 수법은 어딘가 둔탁한 느낌이 없지는 않다. 이 여래좌상의 양 옆에는 특이하게 사천왕상을 돌에 양각으로 새긴 네 개의 돌기둥이 두 개 씩 서 있다. 이 조각들은 원래 이 곳이 아니고 다른데 있던 것인데, 어느 탑의 4면을 돌아가며 만든 조각이 아닌가 싶지만, 원래의 터를 잃고 이 곳에 와서 부처님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 여래상과 사천왕석주는 모두 작압전이란 전각 안에 모셔져 있다.
그런데 나를 화나게 만든 것은, 작압전(鵲鴨殿)이란 특이한 이름을 알려주는 글은 없고 여래좌상을 소개한 글이 그 전각 앞 안내판에 있는데, 그것도 너무나 전문적이어서 일반 사람들의 이해에는 전혀 도움이 안되는 것이 아닌가? 한번 같이 읽어보자!
“대좌(臺座)와 광배(光背)가 갖추어진 완전한 이 불상(佛像)은 육계(肉髻)가 뚜렷한 나발(螺髮)의 머리에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손 모양을 하고 있다. 네모진 상체와 하체에 규칙적으로 흐르는 층단식 옷주름선, 섬려(纖麗)해진 주형거신광배(舟形擧身光背), 둔중(鈍重)한 연화문(蓮華紋)이 새겨진 6각연화대좌(六角蓮華臺座) 등 다소 경직된 면도 나타나고 있다. 반면, 통견(通肩)의 법의(法衣)가 비스듬히 표현된 것으로 보아 9세기 불상을 답습하려고 한 900년을 전후한 불상양식을 단적으로 드러낸 중요한 작품이다”
이 짧은 문장에는 불교문화재에 관한 풍부한 이해가 없으면 도저히 알 수 없을 정도로 곳곳에 한자어를 써가며 필요이상으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육계(肉髻)가 뚜렷한 나발(螺髮)”은 무슨 뜻이며 “ 네모진 상체와 하체에 규칙적으로 흐르는 층단식 옷주름선”은 왜 경직된 것이며 “통견(通肩)의 법의(法衣)가 비스듬한 ” 것이 9세기 불상의 특징이라 하더라도 굳이 그것을 여기서 밝혀야 했는가? 9세기이니까 신라시대 말기에 접어든 시대라고 하면 될 것이고 이 절의 창건이나 중창 사실을 감안하면 신라 말기 세상이 어지러울 때에 사람들이 부처님을 좀더 가까이 모시고 싶어서 인간적인 얼굴로 표현했다고 하는 것이 더 우리에게 알기 쉬운 설명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문화재 용어라는 것이 다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지만 이 안내판을 읽는 사람들은 불교연구학자가 아닌 만큼 일반 사람들에게 필요한 만큼 필요한 수준으로 그 요체만을 알려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 생각을 갖고 절 주위를 돌아보니 다시 아쉬움이 더해진다. 법당 곳곳에 써 있는 주련(柱聯)들, 불교의 경지와 깨달음의 의미를 짧은 한문문구로 전해주는 것인데, 사실상 우리들은 그 의미를 알 수가 없다. 운문사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 많은 법당에 걸려있는 주련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그런데 양산의 통도사는 달랐다. 그 통도사 문을 들어서면 저 멀리 금강계단에 모셔진 부처님 사리를 보러 가는 동안 좌우에 서 있는 모든 건물, 모든 탑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을 해 놓았는데, 그 설명이 참으로 보고 알기 쉬웠다. 또한 주련들을 가까이 가 보면 거기에는 주련에 쓰인 한문과 함께 우리 말로 친절하게 설명을 해 놓아 금방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과연 도가에서 말한 대로 “대교약졸, 대현약우(大巧若拙, 大賢若愚)”이다. 서툰 듯 하는 데에 큰 기교가 있고 어리석은 듯 하는 데에 큰 현명함이 있다. 즉 많이 알고 뜻을 제대로 알수록 쉽게 표현한다는 뜻일 텐데, 누구나 알기 쉽게 안내판을 써주는 일이 이처럼 어렵고 힘들만 말인가?
그런 아쉬움을 느꼈다 하더라도 이 가을의 마지막 가는 길에 운문사를 들릴 수 있었던 것은 아무나 누릴 수 없는 큰 복이라 생각되었다. 절 곳곳의 나무들이 노란, 누런, 연황, 진홍, 진갈색 등 기온과 시간에 따라 천변만화된 색깔의 향연을 보여주고 있었다. 사람들은 연신 가을을 담기에 바쁘다. 사진기가 없는 우리는 마음에 담았다. 그리고는 어느 새 물들어가는 저 나뭇잎처럼 우리도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기로 했다. 절 옆을 흐르는 개울에는 극락교라는 다리가 하나 놓여있고 그 뒤편으로는 또 숲 속에 전각이 보이는데, 그 속이 무척 아름답게 보여 건너가고 싶은 욕망이 한 여름 뭉게구름처럼 일어났지만, 건너가지 않기로 했다. 굳이 지금 극락을 보러갈 일이 무엇 있겠는가? 나중에 내가 저 세상으로 가서 보면 되는 것, 미리 보려고 한다면 그것은 이 생을 빨리 마감하려는 욕심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다시 차를 타고 운문사 경내를 빠져나오면서 걸어서 나가는 분들에게 미안했지만 그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므로 그냥 뻔뻔해지기로 했다. 거기서부터 부산에 오는 길은 청도로 나오거나 아니면 언양으로 넘어오는 것인데, 언양으로 넘어오는 길을 책해서 가지산을 넘으니 석양볕에 가을이 온통 지천이다. 길 가에는 누군가가 보낸 편지들이 낙엽이 되어 구르고 있다. 노란 은행잎 편지가 가장 눈에 잘 띈다. 길 가에 널려있는 청도 반시를 사서 배를 채우면서 가지산을 넘으니 저 멀리 울산 쪽으로 겹겹이 펼쳐있는 산과 산이 거리에 따라 진함의 차이를 보여주어 시계가 한없이 넓어진다. 그 가을 속에 나도 갇혀서 다시 도시로 나가고 싶지 않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저문 해를 뒤로 하고 부산까지 내려오는 동안 주말 귀가길 국도와 고속도로가 막히면서 여기서도 교통체증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러나 그 차에 갇힌 몇 시간이 결코 힘들지 않은 것은, 운문사에서 본 가을과 청정한 자연의 가르침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리라. 아마도 그런 가을에 언제 다시 묻혀볼 수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