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동식의 다섯 계절의 노래


 

이동식
1953년 생. 서울대학교 영어교육학과 졸업후 1977년 KBS에 입사하여 30여 년을 현장에서 보낸 언론인이다. 초대 북경특파원, 런던지국장, 과학부장, 국제부장, 보도제작국장, 문화담당....< 더보기 >

*제45회 - " 왜 나에게만 "

영광도서 0 688
미국 뉴욕에서 젊은 랍비(유대교의 율법교사)로서 경건한 생활로 언제나 남의 모범이 되며 칭찬도 많이 받은 헤럴드 쿠시너에게 아들이 있었다.그런데 아론이란 이름의 이 아들은 생후 8달이 지난 후부터 몸무게가 늘지 않더니 돌이 지난 다음에는 머리가 빠지기 시작했다. 세 살이 되던 해 그 아들은 ‘선천성 조로증’으로 진단을 받는다. 앞으로 키는 90센티미터 이상 크지 않을 것이며, 머리는 빠지고 늙은이처럼 보이다가 10대 후반에 사망할 것이라는 청천벽력과 같은 사실을 의사로부터 통보받는다.

“이런 소식을 들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아직도 인생에서 겪을 슬픔에 익숙해지지 않은 젊은, 경험 없는 랍비일 뿐이다. 그 날 나는 가슴이 깊이 아프도록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말이 안되는 것이다. 나는 좋은 사람이었다. 나는 신(神)이 보는 견지에서 옳은 일만 하려고 했다. 나아가서는 내가 아는 어떤 사람들, 건강한 대가족을 꾸려나가는 사람들보다도 더 경건하게 살아오고 있다. 나는 신(神)의 방식대로, 그의 뜻을 따르고 있다고 믿어왔다. 어떻게 이런 일이 내 가족에게 닥치는가? 만약 신이 계신다면, 신이 정말로 아주 최소한이라도 공평하시다면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어떻게 나에게 이렇게 하실 수 있는가?

그리고 만약 내가 모르는 태만이나 교만의 죄를 범한 것이 있어서 내가 이런 벌을 받을만 하다고 나 자신 설득할 수 있다고 해도, 어떻게 우리 아들 아론이 고통을 받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순진하고 즐겁고 외향적인 세 살짜리 소년이었다. 왜 그가 매일매일 육체적인, 심리적인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왜 그는 어디에 가든 다른 애들로부터 쳐다보고 손가락질 받아야 하는가? 왜 그는 사춘기가 금지되어 다른 소년 소녀들이 데이트를 하는 것을 바라만 봐야 하고, 그 자신 결코 결혼을 하고 아빠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하는가? 이것은 도대체 말이 안된다” ......해럴드 쿠시너, 「선한 사람들에게 나쁜 일이 생길 때」, 1981년판의 머리말 중에서

이같은 고통 속에 갑자기 늙어가는 자기 아들을 지켜보기만 할뿐 어떻게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하다가 결국은 우리나이로 15살이 되던 1977년에 그의 아들 아론이 폭삭 늙은 모습으로 죽자, 4년 후에 해롤드 쿠시너는 전 세계를 울린 그의 명저 「선한 사람들에게 나쁜 일이 생길 때」를 발표한다.

아프간에 갔다가 두 번째 희생자가 된 고 심상민씨가 우리 회사의 한 선배의 조카라는 소식에 다소 멀게 느껴졌던 피납 소식이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고 심상민씨의 가족이 아니더라도, 굳이 미국의 쿠시너가 아니더라도, 요즈음 우리나라에는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이든 아니든, 만약 신(神)이 있다면 신에게 울분에 찬 목소리로 불평을 하고 싶은 사람들이 무척 많으리라. 비행기 추락사고 등 각종 사고로 인해 갑자기 변을 당하는 경우도 많고, 돈을 목적으로, 보험금을 타기 위해 부모까지도 죽이는 이런 세상에서 고통을 당한 가족이나 이웃들은 외칠 것이다;

“하나님! 제가 무엇을 잘못 했기에 저에게 이런 힘든 고통을 주십니까? 왜 선한 사람들에게 나쁜 일이 자꾸 생기게 놔두시는 겁니까?”

쿠시너 랍비는 이 책을 써내려가면서 이같은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았다. 아니 수많은 기도를 통해 스스로 깨우쳤다고 하는 편이 맞으리라. 그는 “고통은 잔인한 신이 인간에게 내리는 벌이 아니고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댓가”라고 정의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인생의 모든 고난은 나 혼자 당하는 것이 아니다.

2. 이 땅에 우연한 일은 없다. 나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용납이 안되고 이해가 안되지만 이 고통 가운데,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 있고 계획이 있다.

3. 길을 막은 하나님은 다른 길을 준다. 하나님은 슬픔과 기쁨을 병행해서 준다.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기쁨만을 얻은 자도 없고 슬픔만을 일상에서 지고 살아가는 사람도 없다.

독실한 유대교 랍비이므로 그의 설명은 <욥기>를 바탕으로 해서 유대교적 신앙의 세계를 재해석한 것이라고 해야겠지만 불교적인 세계관도 엿보인다. 사실 신앙의 본질적인 면은, 그것이 고등종교라면, 어느 종교나 같은 수밖에 없는 것이기에, 불교적 세계관이 나온다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할 일은 없을 것이다. 하느님은 선한 인간들이라고 고통을 유예시키지 않고, 악한 인간이라고 일부러 고통을 더 크게 하지도 않는다. 중요한 것은 슬픔과 고통이 크다면, 그것을 우회해서 돌파하는 방법도 가르쳐주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신이 우리 나약한 인간에게 준 최고의 무기라는 것이다.

쿠시너는 이 책의 마지막을 이렇게 묻는 것으로 대신한다;

“질문에 대한 ‘대답’은 ‘반응’이나 ‘설명’으로도 가능하며, 바로 그런 의미에서 우리 생에서의 비극에 대한 만족할만한 ‘대답’이 가능하다. 그것은 구약 <욥기>에서 욥의 ‘반응’이다....세상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용서하는 것, 신이 더 좋은 세상을 만들지 못한 것을 용서하고 우리 주위로 내려와 어루만져주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결국 왜 선한 사람들에 게 나쁜 일이 생기는가 하는 질문은 아주 다른 질문으로 바뀐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느냐고 묻는 것 대신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고 그 일이 일어날 경우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를 묻는 것이다.

당신은 이렇게 완전하지 못해서 당신을 실망시킨 이 세상을, 이렇게 불공평과 잔인함, 질병, 범죄, 지진, 사고로 얼룩져 있는 이 세상을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

쿠시너 랍비는 하나님은 이제는 직접 우리들의 삶과 생활을 통제하거나 손을 보지는 않는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 결론에 대해 기독교계에서는 당연히 그렇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아니 앞으로도 영원히 역사(役事)를 한다’고 믿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불교나 다른 종교도 그런 반응이 가능하다. 결국은 신앙의 영역인 것이다. 다만 우리가 여기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런 것이라고 생각된다;

“갑자기 닥친 불행으로 괴로워하는 분들이여. 뜻하지 않은 일로 가족을 잃은 모든 이들이여. 신이 있느냐고 소리쳐 항변하고 싶은 이들이여. 신은 그 불행을 만드시지도 않고 가져가지는 않으시며 다만 우리에게 불행과 아픔은 극복될 수 있다고 가르쳐준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도 반드시 있으며, 그 길을 찾아가는 방법은 불행과 고통을 일으킨 그 원인에 대해 집착하지 말고 그 원인을 용서하고 생명이 남아있음을 감사하며, 고통은 나 혼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잘 인식하고 그 고통을 기쁨으로 승화시켜 앞으로의 삶을 이웃과 나누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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