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동식의 다섯 계절의 노래


 

이동식
1953년 생. 서울대학교 영어교육학과 졸업후 1977년 KBS에 입사하여 30여 년을 현장에서 보낸 언론인이다. 초대 북경특파원, 런던지국장, 과학부장, 국제부장, 보도제작국장, 문화담당....< 더보기 >

*제48회 - " 장미꽃 "

영광도서 0 492
길게 끌리던 여름 더위의 옷자락이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지고 11월로 접어들면서 곧바로 비바람과 눈이 내려 계절이 벌써 가을의 끝 무렵에 와 있음을 알려준다. 과연 계절은 무서운 것인가? 입동이라는 절기를 일부러 맞추기라도 한 듯 전국에 추위와 함께 첫 눈이 내린다. 사진가들은 상고대가 깔린 뒷산을 배경으로 아직도 빨간 가을을 담고 있는 단풍과 홍시를 보여준다. 멋진 색깔의 대비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갑자기 가는 가을에 대한 아쉬움에 이럴 때에는 엉뚱하게 화풀이하고 싶어진다.“가을아 너는 어디에 가 있다가 갑자기 와서는 예고도 없이 가려고 하느냐?”

그런 아침에 산보를 나갔다가 우리 아파트 단지 담장에 남아있는 장미줄기 가운데에서 아주 소담스럽게 핀 빨간 장미 몇 송이를 발견하고는 마음이 밝아진다. 그 장미들은 어린이 주먹만한 작은 크기이지만 색이 얼마나 고운지 자연히 발길을 머물게 한다. 산보를 나갈 때에는 어두워서 몰랐다가 돌아오는 길에 발견한 우리 집사람이 소매를 붙잡아서 알게 된 것이다. 곱다는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이런 꽃들을 우리가 봐주지 않으면 이들이 얼마나 섭섭하겠어요? 아직도 자기들 세상인줄 알고 열심히 꽃을 피웠을텐데”라고 하는 말에 발길을 금방 떼지 못하고 몇 번 눈길을 주고야 만다.

그러면서 문득 언젠가 본 한시가 하나 생각이 났다.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 1527~ 1572)이 쓴 “말라버린 국화를 탄식하며(殘菊嘆)”이라는 제목인데

늦가을 온갖 꽃이 말라 죽는데도 / 窮秋百卉死
서리 속의 이 국화는 감탄스럽네 / 感此霜中菊
곱고 고운 자태를 머금고자 하니 / 鮮鮮欲含姿
홀로 아름다움을 간직하는 구나 / 婉戀保幽獨
추위의 위엄도 어찌할 수 없구나 / 寒威無奈何
타고난 명 원래 맑고 깨끗하기에 / 受命自淸淑
그 시듬도 맑고 환하기만 하구나 / 蕭蕭漸向衰

라며 늦가을 추위 속에서도 기품을 잃지 않고 서서히 말라가는 국화의 금도(襟度)를 칭찬하고 있다. 원래 국화의 기품은 우리가 잘 아는 “오상고절 傲霜孤節”, 이 한마디로 응축되는 것이 아닌가? 서릿발이 심한 추위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홀로 꼿꼿하다는 뜻으로서. 어떠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지조를 잃지 않고 굿굿한 선비들의 모습을 대변하는 것이지만, 이것도 아직 시들기 전에 일. 이미 요즈음처럼 흰 눈이 오는 시절에는 국화도 시들어 볼품이 없는데, 오로지 붉은 장미꽃 몇 송이가 오히려 오상고절(傲霜孤節)이 아니라 오설고절(傲雪孤節)을 뽐내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철없이 나온 장미꽃을 보며 사람들은 눈치 없다고 장미를 욕할 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장미야 무슨 잘못이 있는가? 자연이 오뉴월 한창 때처럼 따뜻함과 맑은 하늘을 계속 보여주니 여전히 한창 때 인줄 알고 열심히 광합성작용을 해서 꽃을 피운 죄밖에. 그래도 철없는 그 행동에 이 늦가을 이 길을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따뜻함과 밝음을 선물로 줄 수 있으니 너의 그 철없음이 얼마나 우리에게는 고마운 것인가?

요즈음 자고 나면 오르는 아파트값에 국민들의 마음이 갈갈이 부서지고 찢어지고 있지 않은가? 며칠사이에 몇 억이 올랐다는 말에 대다수 국민들은 이미 포기한 상태가 아닌가? 도대체 그 돈이 어디서 나서 이렇게 올라가는지, 왜 아파트값은 현 정권이 발족 초기부터 잡는다고 그래놓고도 못 잡고 현정권 들어서 오히려 더 올랐는지 궁금해하는 것을 넘어서서, 다시 또 남은 기간동안에 집 값 안정에 온 힘을 다 쏟겠다는 말에 차라리 그냥 놔두는 것이 도와주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부동산과 집 값 문제에는 아예 등을 돌리고 싶은 상황이지 않은가?

생각해 보면 아파트값이 하루가 다르게 널뛰기를 하면서 돈을 번 사람들이 없지는 않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늘 자기 집에서 그냥 그대로 사는 것이고, 실제로 집을 팔아 돈을 남긴 사람들 숫자는 얼마나 될 것인가? 올랐다는 집 값은 언제 다시 떨어질지 몰라, 집을 가진 사람들이나 d나가진 사람들이나 다 같이 불안하기는 매한가지고, 집 값이 오르고 공시지가니 과세표준이니 하는 것들이 올라서 세금부담이 늘어남으로서 결과적으로는 우리 생활은 더욱 어려워지기만 한 셈이니, 누군들 마음이 괴롭지 않겠는가?

그래서 좋은 방법은 아예 집 값을 쳐다보지 말고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집 값의 광풍에 휩쓸리지 않고 우리의 품위를 지키는 일이다.

실제로 우리 주위에는 그런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 생활에 낭비를 줄이고 틈틈이 저축을 하고, 그 돈을 후손에게만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에 주고 가시는 분들. 평생 시장에서 꼬깃꼬깃 때묻은 지폐와 동전을 모아 수 억을 만들고 그것을 교육사업에 과감히 내놓은 할머니들, 자기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면서도 주위의 어려움에는 눈을 돌리지 못하는 분들....그들의 소식이 끊이지 않고 우리에게 전해진다.

그들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오상고절이다. 그들이야말로 서리가 와도 시들지 않는 아름다운 분들이오, 눈 속에 피는 에델바이스이며, 이 늦가을에 빨간 꽃을 피우는 장미이다. 어차피 도깨비춤을 추는 집 값 문제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묵묵히 예전에 우리가 배운 그대로 열심히 일상을 살고 저축을 통해 덕을 실천함으로서 삶의 의미를 이루어 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이야말로 현대의 이 거대하고도 냉혹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철을 모르는, 철이 없는, 철이 지난 분들이지만, 그들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삶의 온기와 향기는 현대라는 이 시대에도 사라지지 않고 살아남는다는 데서 더욱 오래오래 이웃을 데우고 밝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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