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동식의 다섯 계절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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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 |
*제53회 - " 제9요일 "
영광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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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1 03:44
"어머 저 창틀에 쌓인 눈 좀 봐!"
집사람의 탄성이 일요일 아침의 고요를 깬다. 올 겨울 들어 첫 눈은 아니지만 서울에서는 사실상의 첫 눈이 큰 눈이 되어 온 동네를 하얗게 덮어놓았다. 창틀에 눈이 소복하게 쌓이는 것도 쉽지는 않은데 저 멀리 창문 아래로 보이는 공원의 나무들도 서울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물게 완전히 하얀 옷으로 전신을 덮고 있었다.
"무어라 해도 겨울이 겨울다운 서정시(敍情詩)는 백설(白雪), 이것이 정숙히 읊조리는 것이니, 겨울이 익어 가면 최초의 강설(强雪)에 의해서 멀고 먼 동경의 나라는 비로소 도회에까지 고요히 고요히 들어오는 것인데, 눈이 와서 도회가 잠시 문명의 구각(舊殼)을 탈(脫)하고 현란한 백의(白衣)를 갈아입을 때, 눈과 같이 온, 이 넓고 힘세고 성스러운 나라 때문에 도회는 문득 얼마나 조용해지고 자그만해지고 정숙해지는지 알 수 없지만, 이 때 집이란 집은 모두가 먼 꿈속에 포근히 안기고 사람들 역시 희귀한 자연의 아들이 되어 모든 것은 일시에 원시 시대의 풍속을 탈환한 상태를 정(呈)한다."
학교 때에 배운 김진섭(金晋燮)의 <백설부(白雪賦)>가 생각나지 않는가? 하얗게 덮인 서울거리를 걷노라면 모든 더러운 것들이 그 속에 갇히고 온 세상은 이 한없이 착한 흰 영혼으로 가득차게 되고, 사람들은 이 순수한 영혼의 군무를 함께 추게 될 것이다. 흰 눈이 좋아서 춤추는 모든 영혼들은 이 때만큼은 삶의 무게를 완전히 벗어버리고 마치 솜털처럼, 양털처럼, 무중력의 존재가 되어 힘든 이 세상을 벗어나 푸른 우주로 날아가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세상을 덮는 흰 눈은 바로 우주의 사랑이다. 절대자가 인간에게 보내주는 가장 확실한 사랑이 다. 흰 눈 속에 인간의 모든 고통과 슬픔과 원망을 덮어 눈 속에 녹여버리고 깨끗한 영혼으로 다시 태어나라는 하늘의 명령이 아닐 수 없다.
텔레비전을 켜니 영화채널에서 색다른 제목이 영화가 나온다. '제8요일'. 이미 시작한 지는 조금 된 듯 하지만 "제목이 그럴 듯 한데, 무슨 영화더라?" 하며 계속 보아가니 10년 전인 1996년에 우리나라에서도 개봉한 프랑스 영화였다. 성공한 세일즈기법 강사이지만 너무 일만 밝히다 가족으로부터 따돌림당하게 된 아리(Harry)라는 회사원이 요양원을 탈출한 조지(George)라는 다운증후군 환자를 만난다. 조지는 이미 사망한 어머니를 못 잊어 힘이 들 때마다 어머니를 만나고 싶어한다. 때묻지 않은 순진한 영혼을 가진 조지는 아리에게 큰 감동을 주며 벌어졌던 가족과 다시 결합하게 하지만, 자신은 금지된 음식인 초콜렛을 먹다가 발작상태가 되어 어머니의 환상을 보게 되고 그 환상의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마치 한 마리의 새처럼 고층건물을 뛰어내리게 된다.
그런데 왜 8요일인가? 영화의 맨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끝이 난다:
"신은 첫째 날 태양을 만들고, 두 번째 날에 바다를 만들었다. 셋째 날에 풀을 만들고, 넷째 날에는 소를 만들었다. 다섯 째 날에는 비행기를 만들고 여섯째 날에 인간을 만들었다. 일곱째 날엔 쉬기 위해 구름을 만들었고, 하느님이 보시더니 뭔가 빠진 것이 있어 여덟째 날 조지를 만드셨는데, 보기에 참 좋았더라."
이 영화는 정신박약인들에게 바치는 사랑의 헌시이다. 신이 이들을 위해 특별히 하루를 더 내었다는 발상은 신선하다. 아니 정신박약인들 뿐 아니라 생활에서 사랑을 잃고 오로지 일에 노예가 되어 가족과 이웃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에게 보내는 사랑의 경고장이었다. 이 영화를 보고 난 뒤에 우리 아파트 9층에 사는 한 청년이 생각났다. 그 청년도 비슷한 증상인 것 같은데,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집에만 있으면서 가끔 담배를 피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내려온다. 그 엄마도 생각이 났다. 이 영화를 보면서 자폐증의 아이를 가진 후배가 생각이 났다. 정상이 아닌 자녀들을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지는 엄마들이 생각이 났다. 이 영화는 그들에게 바치는 찬양이기도 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진리를 일깨우려는 메시지였다.
하필이면 서울에서의 사실상의 첫 눈이 내리는 날 10년 전에 개봉된 이 영화를 보게 되었을까? 편성이 최소 며칠 전 사전에 되어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것은 그 조지라는 청년이 보여주는 사랑이 흰 눈과 통한다는 점을 가르쳐주려고 한 것이 아닐까? 우리도 이 조지라는 청년을 통해 모든 인간에 대한 사랑을 깨닫고 실천하라는 뜻이 아닐까?
"보라! 우리가 절망 속에서 기다리고 동경하던 계시는 참으로 여기 우리 앞에 와서 있지는 않는가? 어제까지도 침울한 암흑 속에 잠겨 있던 모든 것이 이제는 백설의 은총에 의하여 문득 빛나고 번쩍이고 약동하고 웃음치기를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라붙은 풀 포기, 앙상한 나뭇가지들조차 풍만한 백화(白花)를 달고 있음은 물론이요 꾀 벗은 전야(田野)는 성자(聖者)의 영지(領地)가 되고 공허한 정원은 아름다운 선물로 가득하다. 모든 것은 성화(聖化)되어 새롭고 정결하고 젊고 정숙한 가운데 소생되는데, 그 질서, 그 정밀은 우리에게 안식을 주며, 영원의 해조(諧調)에 대하여 말하다. 이 때 우리의 회의는 사라지고, 우리의 두 눈은 빛나며, 우리의 가슴은 말할 수 없는 무엇을 느끼면서 위에서 온 축복을 향해서 오직 감사와 찬탄을 노래할 뿐이다."
그렇다!
오늘 눈 내리는 날은 이 세상에 없는 제9요일이다. 흰 눈처럼 모든 더러움과 잘못과 미움과 원망을 덮고 이 세상이 순수한 영혼의 축제의 마당이 될 수 있도록 눈의 덕을 배우라는 것이다. 그래서 신은 일주일 7일 안에 이 9요일을 넣지 않고 별도로 느끼도록 한 것이리라. 일주일에 없는 제 8요일이 다운증후군의 조지를 만들어 모든 비정상인들을 사랑하라고 가르친 날이라면, 눈이 내리는 제9요일은 흰 눈처럼 모든 이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포용하라고 가르친 큰 사랑의 날이다.
오늘은 제9요일인 것이다.
집사람의 탄성이 일요일 아침의 고요를 깬다. 올 겨울 들어 첫 눈은 아니지만 서울에서는 사실상의 첫 눈이 큰 눈이 되어 온 동네를 하얗게 덮어놓았다. 창틀에 눈이 소복하게 쌓이는 것도 쉽지는 않은데 저 멀리 창문 아래로 보이는 공원의 나무들도 서울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물게 완전히 하얀 옷으로 전신을 덮고 있었다.
"무어라 해도 겨울이 겨울다운 서정시(敍情詩)는 백설(白雪), 이것이 정숙히 읊조리는 것이니, 겨울이 익어 가면 최초의 강설(强雪)에 의해서 멀고 먼 동경의 나라는 비로소 도회에까지 고요히 고요히 들어오는 것인데, 눈이 와서 도회가 잠시 문명의 구각(舊殼)을 탈(脫)하고 현란한 백의(白衣)를 갈아입을 때, 눈과 같이 온, 이 넓고 힘세고 성스러운 나라 때문에 도회는 문득 얼마나 조용해지고 자그만해지고 정숙해지는지 알 수 없지만, 이 때 집이란 집은 모두가 먼 꿈속에 포근히 안기고 사람들 역시 희귀한 자연의 아들이 되어 모든 것은 일시에 원시 시대의 풍속을 탈환한 상태를 정(呈)한다."
학교 때에 배운 김진섭(金晋燮)의 <백설부(白雪賦)>가 생각나지 않는가? 하얗게 덮인 서울거리를 걷노라면 모든 더러운 것들이 그 속에 갇히고 온 세상은 이 한없이 착한 흰 영혼으로 가득차게 되고, 사람들은 이 순수한 영혼의 군무를 함께 추게 될 것이다. 흰 눈이 좋아서 춤추는 모든 영혼들은 이 때만큼은 삶의 무게를 완전히 벗어버리고 마치 솜털처럼, 양털처럼, 무중력의 존재가 되어 힘든 이 세상을 벗어나 푸른 우주로 날아가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세상을 덮는 흰 눈은 바로 우주의 사랑이다. 절대자가 인간에게 보내주는 가장 확실한 사랑이 다. 흰 눈 속에 인간의 모든 고통과 슬픔과 원망을 덮어 눈 속에 녹여버리고 깨끗한 영혼으로 다시 태어나라는 하늘의 명령이 아닐 수 없다.
텔레비전을 켜니 영화채널에서 색다른 제목이 영화가 나온다. '제8요일'. 이미 시작한 지는 조금 된 듯 하지만 "제목이 그럴 듯 한데, 무슨 영화더라?" 하며 계속 보아가니 10년 전인 1996년에 우리나라에서도 개봉한 프랑스 영화였다. 성공한 세일즈기법 강사이지만 너무 일만 밝히다 가족으로부터 따돌림당하게 된 아리(Harry)라는 회사원이 요양원을 탈출한 조지(George)라는 다운증후군 환자를 만난다. 조지는 이미 사망한 어머니를 못 잊어 힘이 들 때마다 어머니를 만나고 싶어한다. 때묻지 않은 순진한 영혼을 가진 조지는 아리에게 큰 감동을 주며 벌어졌던 가족과 다시 결합하게 하지만, 자신은 금지된 음식인 초콜렛을 먹다가 발작상태가 되어 어머니의 환상을 보게 되고 그 환상의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마치 한 마리의 새처럼 고층건물을 뛰어내리게 된다.
그런데 왜 8요일인가? 영화의 맨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끝이 난다:
"신은 첫째 날 태양을 만들고, 두 번째 날에 바다를 만들었다. 셋째 날에 풀을 만들고, 넷째 날에는 소를 만들었다. 다섯 째 날에는 비행기를 만들고 여섯째 날에 인간을 만들었다. 일곱째 날엔 쉬기 위해 구름을 만들었고, 하느님이 보시더니 뭔가 빠진 것이 있어 여덟째 날 조지를 만드셨는데, 보기에 참 좋았더라."
이 영화는 정신박약인들에게 바치는 사랑의 헌시이다. 신이 이들을 위해 특별히 하루를 더 내었다는 발상은 신선하다. 아니 정신박약인들 뿐 아니라 생활에서 사랑을 잃고 오로지 일에 노예가 되어 가족과 이웃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에게 보내는 사랑의 경고장이었다. 이 영화를 보고 난 뒤에 우리 아파트 9층에 사는 한 청년이 생각났다. 그 청년도 비슷한 증상인 것 같은데,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집에만 있으면서 가끔 담배를 피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내려온다. 그 엄마도 생각이 났다. 이 영화를 보면서 자폐증의 아이를 가진 후배가 생각이 났다. 정상이 아닌 자녀들을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지는 엄마들이 생각이 났다. 이 영화는 그들에게 바치는 찬양이기도 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진리를 일깨우려는 메시지였다.
하필이면 서울에서의 사실상의 첫 눈이 내리는 날 10년 전에 개봉된 이 영화를 보게 되었을까? 편성이 최소 며칠 전 사전에 되어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것은 그 조지라는 청년이 보여주는 사랑이 흰 눈과 통한다는 점을 가르쳐주려고 한 것이 아닐까? 우리도 이 조지라는 청년을 통해 모든 인간에 대한 사랑을 깨닫고 실천하라는 뜻이 아닐까?
"보라! 우리가 절망 속에서 기다리고 동경하던 계시는 참으로 여기 우리 앞에 와서 있지는 않는가? 어제까지도 침울한 암흑 속에 잠겨 있던 모든 것이 이제는 백설의 은총에 의하여 문득 빛나고 번쩍이고 약동하고 웃음치기를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라붙은 풀 포기, 앙상한 나뭇가지들조차 풍만한 백화(白花)를 달고 있음은 물론이요 꾀 벗은 전야(田野)는 성자(聖者)의 영지(領地)가 되고 공허한 정원은 아름다운 선물로 가득하다. 모든 것은 성화(聖化)되어 새롭고 정결하고 젊고 정숙한 가운데 소생되는데, 그 질서, 그 정밀은 우리에게 안식을 주며, 영원의 해조(諧調)에 대하여 말하다. 이 때 우리의 회의는 사라지고, 우리의 두 눈은 빛나며, 우리의 가슴은 말할 수 없는 무엇을 느끼면서 위에서 온 축복을 향해서 오직 감사와 찬탄을 노래할 뿐이다."
그렇다!
오늘 눈 내리는 날은 이 세상에 없는 제9요일이다. 흰 눈처럼 모든 더러움과 잘못과 미움과 원망을 덮고 이 세상이 순수한 영혼의 축제의 마당이 될 수 있도록 눈의 덕을 배우라는 것이다. 그래서 신은 일주일 7일 안에 이 9요일을 넣지 않고 별도로 느끼도록 한 것이리라. 일주일에 없는 제 8요일이 다운증후군의 조지를 만들어 모든 비정상인들을 사랑하라고 가르친 날이라면, 눈이 내리는 제9요일은 흰 눈처럼 모든 이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포용하라고 가르친 큰 사랑의 날이다.
오늘은 제9요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