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동식의 다섯 계절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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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 |
*제55회 - " 웃음이 많은 민족 "
영광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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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1 03:44
야나기가 묘사한 한국인의 얼굴
"언제던가 긴 수염이 가슴을 덮는 노인이 길을 가다가 한 어린아이를 만난다. 어린아이는 할아버지에게 이렇게 묻는다. '할아버지는 주무실 때 그 긴 수염을 이불 속에 넣고 주무십니까, 아니면 이불 밖에 내놓고 주무십니까?' 노인은 이 말에 금방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인은 다음날 가르쳐주겠노라고 대답한 뒤, 그날 밤 집으로 돌아가서 수염을 이불 속에 넣고 자보기도 하고, 이불 밖에 내놓고 자보기도 하지만 잠을 이룰 수 없었따. 왜냐하면 이불 속에 넣고 자보면 아무래도 내놓고 잤던 것 같고, 또 내놓고 자려고 하면 이불 속에 넣고 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결국 노인은 그 다음날에도 어린아이에게 자기가 수염을 어떻게 하고 자는지를 애기해주지 못했다."
- 이어령, <한국인의 재발견>중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자기가 누구인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잘 모르고 있다. 아니 의식하지 않고 있다고나 할까? 누군가가 자신에게 물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모습에 대해 생각을 해보고는 내가 누구인가를 자문하게 되는 게 사람이다.
“조선의 불상을 보라. 약간 숙인 듯한 머리에게 어깨를 따라 몸에서 다리로 흐르는 늘씬한 키의 모습을 눈앞에 보아라. 그것은 하나의 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선이다. 늘어져 있는 의복까지도 함께 흘러 내리고 있다. ...
나는 조선의 예술, 특히 그 중의 요소라고도 볼 수 있는 선의 아름다움은 실로 그들이 애정에 굶주린 마음의 상징이라고 생각한다. 아름답고 길고 길게 긋는 조선의 선은 실로 연연하게 호소하는 마음, 그 자치에다. ...
그들의 원한도, 그들의 기도도, 그들의 희구도, 그들의 눈물도 그 선을 따라서 흘러내리는 것처럼 늘어진다. ... 쫓기고 억압된 그들의 운명은 할 수 없이 쓸쓸함과 외로움 속에 위로를 찾았다.“
- 야나기 소오에스, <한민족과 그 예술>중에서
일본인 야나기 소오에스가 발표한 이 글은 한국 사람이 비로소 자신이 누구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우리 민족의 주권의 상징인 광화문이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기 위해 허물어지던 1922년, 분연히 일어나 조선총독부의 우리 문화 말살정책을 비판한 야나기 선생은 일제의 압박에 신음하던 우리 민족에게 유일한 일본인 친구였다. 그의 통찰은 조선인에 대한 섬세한 관찰을 근거로 하였고 그의 발언은 조선인에 대한 진한 사랑을 깔고 있다.
그는 우리 예술의 아름다움의 원천을 선에서 발견했다. 그 선이 우리 민족의 외로움과 슬픔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주장은 식민 치하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왜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도 모른 채 신음하던 조선인들에게 그 무엇보다도 큰 위안이요 힘이었다. 그랬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주장에 공감하고 그에게 머리 숙여 감사를 표시했다.
우리는 진정 슬픈 민족인가?
그런 야나기였기에 그가 주장한 우리의 얼굴은 오랫동안 우리 민족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박물관에서 고려청자를 보고, 흰 구름 저편으로 보이는 비색의 하늘을 보면서, 그 속에 우리 민족의 괴로움과 고통을 벗어나려는 간절한 마음이 깃들어 있는 것이라 생각했고, 직선이 아니라 곡선으로 활처럼 휘어 내려가는 도자기의 어깨와 허리, 숟가락과 고무신의 곡선을 보면서 우리는 연약한 민족, 슬픈 민족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 때 우리의 산은 어떠했는가? 일본인들이 좋은 목재를 마구 베어내는 바람에 민둥산이 되어가고 있었다. 여름이면 시뻘건 황토물이 휩쓸어 내려갔다. 들판에도 집에도 먹을 것이 부족했다. 우리의 마음을 황량할 때로 황량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민족을 생각하고 예술을 생각하던 사람들은 야나기의 조선예술론, 조선민족론을 진실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박물관에 가서 우리의 청자를 다시 보라. 미끈한 어깨는 현대인의 무딘 눈과 손으로는 도저히 재현할 수 없는 기막힌 경지가 아닌가? 푸른색도 아니고 파란색도 아닌 그 깊고 깊은 비색의 청자, 그 속을 떠다니는 구름은 속세를 떠난, 신선의 경지가 아닌가?
조선 시대의 백자 항아리는 또 어떤가? 청자처럼 여성적인 아름다운은 아니더라도 묵직한 자태에 푸른색으로 선명하게 그려놓은 무늬들이 듬직하고 건강해 보인다. 거기에 여의주를 움켜쥐고 하늘로 솟아오르는 용이 철화로 그려진 항아리를 보라. 거기에는 오히려 남성적인 힘이 넘치고 있지 않은가?
신라 시대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에서 보는 저 지극한 미소, 경주 석굴암 본존불이 구현하고 있는 높은 정신세계의 법열...거기에 깃든 정신 세계는 또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의문은 우리의 얼굴을 다시 보고 자문하게 한다. 우리가 과연 힘없고 약해서 슬픈 민족인가? 노천명 시인의 노래한 사슴과 같이 목을 길게 내밀고 슬프게 우는 짐승인가, 그래서 늘 호랑이나 이리의 공격을 당하고만 사는 민족인가, 그래서 애정에 굶주린 나머지 그러한 선의 예술을 남긴 것인가? 우리의 예술이 슬픔과 고통을 벗어나려는 의지의 구현이라면, 이와 같은 많은 예술품에서 나타나는 성격들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충청남도 서산군 운산면 용현리에 가면 가야협이라는 계곡이 있다. 그 계곡의 맑은 시내를 건너 조금 오르면 나무 사이로 높이 2.8미터의 석가여래입상과 1.7 미터의 보살입상, 1.66미터의 반가사유상이 나란히 서 있다. 이름하여 서산 마애불. 바위에 돋워 새긴 불상이다.
이 불상의 주불인 석가여래는 아무리 보아도 근엄한 석가가 아니다. 양볼에는 살이 통통 쪘고, 입술도 도톰하다. 그 입은 웃고 있다. 입만이 아니다. 눈도 크게 웃고 있고 얼굴 전체가 웃고 있다. 참으로 웃는 불상으로서는 우리나라에서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렇게 촌스럽게(?) 가장 쾌활하고 밝고 신나는 웃음을 웃고 있다.
이 불상을 만든 조각가는 누구였을까? 현재까지 조사된 바로는 백제 시대의 조각인 만큼 분명 백제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파키스탄의 간다라 지방에서 시작돼 중국을 거쳐 오면서 대부분 근엄한 표정을 지켜오던 석가모니를 이곳 사람들은 왜 이처럼 활짝 웃게 했을까? 우리는 이 의문에 대한 답을 얻어야 한다.
눈이 크고 풍채 좋은 모습으로 유쾌하게 웃고 있는 백제의 장자를 부처의 표본으로 생각하고 그를 돌에 새긴 백제인들, 그들의 마음이 곧 부처였을 것이다. 그들의 마음이 밝고 명랑하지 않았다면 결코 이러한 조각을 남길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얼굴이 곧 그들의 마음인 것이다.
서산 마애삼존불이 백제인의 웃음이라고 한다면, 신라인의 웃음은 불상뿐 아니라 여러 가지 형태로 남아 있다. 흔히 석굴암 본존불의 법열을 거론하지만 보다 엄밀히 말하면 석굴암 본존불은 통일신라 시대의 작품이기에 보다 원형적인 신라인의 얼굴이라고 할 수 없다. 신라인의 얼굴은 오히려 경주시 농리에 있는 삼불사의 삼존불이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이 불상 역시 웃고 있는데, 약간 덜 풀어진 듯하기는 하지만 소년 같은 순진하고 복스러운 웃음이 서산마애삼존불과는 다른 맛을 느끼게 한다.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우리나라에는 이렇게 웃고 있는 불상이 유별나게 많다.
웃음과 관련된 표현이 풍부한 나라
불상이라는 것이 원래 자비를 구현한 것이고 중생을 제도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이니 미소나 웃음을 머금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느냐고? 아니다. 같은 시기의 일본이나 중국의 불상 가운데는 우리처럼 천진난만하게, 복스럽게, 행복하게, 소탈하게 웃는 불상이 보이지 않는다. 모두 틀에 박힌 표정이거나 아니면 겁을 주기 위한 것인 듯 근엄한 얼굴 뿐이다.
우리의 웃음은 불상에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다. 불상이 종교적인 염원을 승화시켜 표출한 인간상이라면 이른바 속각이라고 부르는 비종교적인 유물에서는 더 많은 웃음을 발견할 수 있다. 서울대 박물관에 보존돼 있는 신석기 시대의 유물인 흙으로 빚은 얼굴상과 뼈에 새긴 얼굴은 3천년 전 선조들의 얼굴을 엿보게 하는데, 더 재미있는 것은 흙으로 빚어 놓은 인물상이다. 국립중앙박물관과 경주박물관에 나뉘어 소장돼 있는 토우들은 거친 손끝으로 덤성덤성 빚었지만 완연하게 웃고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이라든가 남매가 함께 있는 모습, 농경과 생식, 남녀간의 사랑의 열락을 숨김없이 진솔하게 빚어 놓아, 보는 이들을 감탄케 한다.
연대를 더 내려오면 경주 영묘사 터에서 발견된 깨어진 막새기와에 새겨진 웃음이 있고, 안압지 발굴 공사 때 쏟아진 유물 가운데 조그만 토기 잔에 아주 작은 얼굴을 장식해놓은 것이라든지, 4센티미터 정도의 14면체 나무 주사위의 한 면에 쓰여진 ‘음진대소’, 마치 사람이 크게 웃는 듯이 만들어져 있는 큰 말방울 등이 계속 이어진다. 그 외에도 공주 무령왕릉에서 나온 조그만 유리동자상의 웃음, 부여 정림사지에서 출토된 흙으로 빚은 인면상의 웃음... 등 웃음과 관련된 유물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나온다.
경주의 향토사학자 윤경렬 씨는 “신라인들은 부처가 이 세상에 내려와 바위 속에 모습을 감춘다고 생각했는데, 그 부처는 엄숙한 부처가 아니라, 흉허물 없이 익살을 떠는 재미있는 모습의 부처이다”라고 말하면서, 그래서 경주 남산에 새겨진 수많은 돌부처 중에는 불국토의 경지를 표현한 것도 있지만 마치 손자를 놀리는 할아버지의 모습처럼 인간적인 표정과 익살이 엿보이는 부차가 많다고 설명한다.
과거 선조들의 삶 속에서 이처럼 웃는 모습이 많이 발견되는 것은 우리의 본래 모습이 그처럼 밝고, 맑고, 명랑하고, 낙천적이고, 건전했기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일찍이 고구려, 부여 시대부터 우리 민족은 중국 민족에 의해 가무음곡을 잘 하는 민족으로 인정받은 바 있다. 그들의 눈에 비친 우리 민족은 술을 잘 마시고 춤추고 놀기 좋아하는 민족이었던 것이다.
또한 우리말에는 의성, 의태어가 많이 발달했는데, 그 중에서도 웃음을 표현하는 말이 너무도 많다. 방글, 방실, 벙긋, 빙긋, 키득키득, 껄껄, 깔깔, 해해, 호호, 후후, 허허, 하하.. 언뜻 생각해도 이렇게 많은데, 실제로 다 세어보면 얼마나 많은 것인가?
왜 이렇게 웃음에 관한 의성, 의태어가 많은가? 이제 우리는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한국인의 특징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웃음
마음이 웃지 않는데 얼굴만 웃을 수는 없다. 초등학교 어린이들에게 사람을 그려보라고 하면 대개 몸통과 다리는 중요하지 않으니까 작게 그리고 얼굴만 크게 그리는데 보통 거울을 통해 본 자기 얼굴을 그린다. 그런데 그 얼굴들은 하나같이 웃고 있다. 그들의 마음이 웃고 있기 때문이다. 그 천진난만함, 그러한 때 묻지 않은 밝음이 우리 선조들의 마음속에도 있었기에 우리의 유물에 그렇게 웃음이 많은 것이 아닐까?
또한 석굴암의 본존불이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의 세계를 표현했다면, 그것은 그것을 만든 사람이 그 경지를 체득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한국인들은 과거에 가장 높은 수준의 웃음을 경험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한국인의 웃음이 억압과 허탈 속에 생활하면서 숨을 쉬기 위해 어쩔 수 없는 방편으로 웃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일체 모난 말을 하지 않고, 대답하기 곤란하면 익살과 웃음으로 얼버무리고...”라든가, “한국인의 웃음은 치욕과 비굴이 범벅이 돼 웃음과 울음의 한계가 묘연한 그런 웃음으로 체질화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라는 식이다. 그러나 우리의 웃음이 정말 그런가?
일본인들은 사무라이들의 피비린내 진동하는 전장의 세월을 몇백 년 이상 살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막부정치, 그리고 2차 대전 끝까지 칼과 총의 풍토 속에서 살았다. 그 사회에서는 생명이 들판의 풀잎만도 못했다. 그런 세월 속에서 일본인들은 ‘인생은 지는 꽃잎보다도 더 짧고 허무한 것인 만큼 살아 있을 때 벚꽃처럼 활짝 피었다가 벚꽃처럼 한꺼번에 가버린다’는 경험철학이 뇌리에 강하게 박혀 마음껏 웃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웃음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웃음이다.
그런가 하면 서양인의 웃음은 보들레르가 “절대자는 웃지 않는다. 인간만이 중간적 존재인 악마들처럼 자신보다 열등한 것을 보고는 그 우월감에 웃는다”라고 정의했듯이 남을 멸시함으로써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웃음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웃음은 남을 눌러 이긴 다음의 웃음이다. 그런 웃음은 ‘이화의 웃음’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웃음은 현세에서 즐거워 웃는 웃음, 인생이 재미있어서 웃는 웃음이며, 비록 먹고 살기에 풍족하지는 않아도 정신적으로 흡족해서 웃는 웃음이요, 그렇기에 억지웃음이 아니라 미소가 많고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벙긋한 웃음이다. 남을 누르고 웃는 억압자의 웃음이 아닌, 주위를 내 품안으로 포용하는 웃음, 누가 더 잘 나고 못 나고를 따지지 않는 ‘동화의 웃음’이다.
이런 웃음의 확장을 우리는 진도 다시래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전라남도 진도에 전해 내려오는 ‘다시래기’라는 민속은 초상난 집에 찾아가서 육친을 여읜 슬픔에 빠져 있는 상주를 웃기는 놀이이다. 그 내용은 탈춤에 흔히 등장하는 소재인 마누라가 서방질을 해서 중과의 사이에 몰래 애를 낳는 애기이지만, 그런 세속적이고 우스운 내용의 연희를 하필 상주의 집에 찾아가서 한바탕 소란스럽게 놀아주는 것은, 그것은 상주의 슬픔을 잊어버리게 하는 해탈과 승화의 웃음, 저승과 이승을 연결시켜주는 웃음, 생활에서 나오는 웃음 가운데 가장 고차원의 웃음을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다.
한국인의 특징을 분석할 때 흔히 자연과의 친밀함, 그리고 관조미, 비애미를 드는데, 거기에 해학과 통하는 웃음을 빼놓는다면 한국인의 특징을 제대로 짚었다고 할 수 없다. 아니, 빼놓으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웃음이 가장 중요한 특질이자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의 건축에도 나타난다. 조선 시대 건축의 추녀선은 날아갈 듯 하늘로 올라가는 곡선이다. 직선의 엄격한 규율과 규칙이 아니라 그 규칙의 엄격성이 주는 긴장을 풀어주고 인간화시키는 양념으로서의 곡선, 바로 이 곡선은 한국인들의 성격, 곧 밝은 웃음과 다르지 않다. 이것은 일본인 야나기가 말한 슬픔과 체념, 외로움의 선이 아니라 꿈과 희망과 낙천의 율동이며, 상승의 곡선이다.
일정한 격식이나 특정한 경향 또는 일반적인 질서와 규칙을 깨뜨릴 때 ‘멋’이 생긴다고 이어령 교수는 지적했다. 그런 면에서는 한국인은 최고의 멋쟁이, 웃을 줄 아는 멋쟁이이다. 일본인들은 집을 지을 때 기둥이란 기둥은 모조리 대패로 밀어서 각이 지게 만들지만, 우리나라의 옛 건축을 보면 뒤틀린 기둥을 그대로 사용해서 자연적인 아름다움을 그대로 살리고 있다. 부여에 있는 유명한 정림사지 5층 석탑만 해도 그렇다. 탑신은 어쩔 수 없이 직선을 사용해 엄격한 비례에 따라 하늘로 올라가지만 그 탑신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은 그 직선의 중압감을 해소한다. 이것이 바로 기둥 중간을 눈에 뜨이지 안헥 배가 살짝 나오도록 하는 배불림기법이 아닌가? 직선 속에 살짝 감추어진 곡선이 직선을 하늘 위로 들어올리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문화요 예술이며, 얼굴이 아니었던가.
우리는 그 동안 우리의 얼굴을 잊어버리고 살아왔다. 한 일본인이 심어준 식민지 시대의 잘못된 인상, 동정심에서 발로한 불쌍한 민족이라는 인상을 우리는 우리의 진짜 얼굴인 양 착각하고 살아왔다. 그러나 우리는 웃음이 많은 민족이요, 항상 웃으며 살아온 민족이었다. 자신의 여유와 포용과 중용, 해탈의 웃음이 우리의 생활 속에, 우리의 예술 속에 면면히 살아 있었는데도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지나쳐왔다.
태극은 음과 양이 곡선으로 만나고, 활은 곡선을 그리며 날아간다. 한국인이 이뤄 놓은 곡선의 문화는 바로 이러한 자연의 섭리에서 나온 것이며, 우리가 창조해온 웃음의 문화는 이런 곡선적 사고의 현세화이다. 오늘날 우리의 생활속에 스며 있는 온갖 부정적인 의미의 단어들, 시기, 갈등, 파쟁, 음모, 모략, 나태, 격정, 암투 비애, 원망, 의혹, 불신,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민족에게 많다고 믿어온 가장 대표적인 잘못된 개념인 한까지도 모두 우리 민족에게 본래부터 있던 가장 큰 덕인 웃음으로 덮어버릴 수 있지 않을까?
오늘 우리는 잃어버린 우리의 웃음을 되찾지 않으면 안 된다.
"언제던가 긴 수염이 가슴을 덮는 노인이 길을 가다가 한 어린아이를 만난다. 어린아이는 할아버지에게 이렇게 묻는다. '할아버지는 주무실 때 그 긴 수염을 이불 속에 넣고 주무십니까, 아니면 이불 밖에 내놓고 주무십니까?' 노인은 이 말에 금방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인은 다음날 가르쳐주겠노라고 대답한 뒤, 그날 밤 집으로 돌아가서 수염을 이불 속에 넣고 자보기도 하고, 이불 밖에 내놓고 자보기도 하지만 잠을 이룰 수 없었따. 왜냐하면 이불 속에 넣고 자보면 아무래도 내놓고 잤던 것 같고, 또 내놓고 자려고 하면 이불 속에 넣고 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결국 노인은 그 다음날에도 어린아이에게 자기가 수염을 어떻게 하고 자는지를 애기해주지 못했다."
- 이어령, <한국인의 재발견>중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자기가 누구인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잘 모르고 있다. 아니 의식하지 않고 있다고나 할까? 누군가가 자신에게 물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모습에 대해 생각을 해보고는 내가 누구인가를 자문하게 되는 게 사람이다.
“조선의 불상을 보라. 약간 숙인 듯한 머리에게 어깨를 따라 몸에서 다리로 흐르는 늘씬한 키의 모습을 눈앞에 보아라. 그것은 하나의 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선이다. 늘어져 있는 의복까지도 함께 흘러 내리고 있다. ...
나는 조선의 예술, 특히 그 중의 요소라고도 볼 수 있는 선의 아름다움은 실로 그들이 애정에 굶주린 마음의 상징이라고 생각한다. 아름답고 길고 길게 긋는 조선의 선은 실로 연연하게 호소하는 마음, 그 자치에다. ...
그들의 원한도, 그들의 기도도, 그들의 희구도, 그들의 눈물도 그 선을 따라서 흘러내리는 것처럼 늘어진다. ... 쫓기고 억압된 그들의 운명은 할 수 없이 쓸쓸함과 외로움 속에 위로를 찾았다.“
- 야나기 소오에스, <한민족과 그 예술>중에서
일본인 야나기 소오에스가 발표한 이 글은 한국 사람이 비로소 자신이 누구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우리 민족의 주권의 상징인 광화문이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기 위해 허물어지던 1922년, 분연히 일어나 조선총독부의 우리 문화 말살정책을 비판한 야나기 선생은 일제의 압박에 신음하던 우리 민족에게 유일한 일본인 친구였다. 그의 통찰은 조선인에 대한 섬세한 관찰을 근거로 하였고 그의 발언은 조선인에 대한 진한 사랑을 깔고 있다.
그는 우리 예술의 아름다움의 원천을 선에서 발견했다. 그 선이 우리 민족의 외로움과 슬픔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주장은 식민 치하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왜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도 모른 채 신음하던 조선인들에게 그 무엇보다도 큰 위안이요 힘이었다. 그랬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주장에 공감하고 그에게 머리 숙여 감사를 표시했다.
우리는 진정 슬픈 민족인가?
그런 야나기였기에 그가 주장한 우리의 얼굴은 오랫동안 우리 민족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박물관에서 고려청자를 보고, 흰 구름 저편으로 보이는 비색의 하늘을 보면서, 그 속에 우리 민족의 괴로움과 고통을 벗어나려는 간절한 마음이 깃들어 있는 것이라 생각했고, 직선이 아니라 곡선으로 활처럼 휘어 내려가는 도자기의 어깨와 허리, 숟가락과 고무신의 곡선을 보면서 우리는 연약한 민족, 슬픈 민족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 때 우리의 산은 어떠했는가? 일본인들이 좋은 목재를 마구 베어내는 바람에 민둥산이 되어가고 있었다. 여름이면 시뻘건 황토물이 휩쓸어 내려갔다. 들판에도 집에도 먹을 것이 부족했다. 우리의 마음을 황량할 때로 황량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민족을 생각하고 예술을 생각하던 사람들은 야나기의 조선예술론, 조선민족론을 진실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박물관에 가서 우리의 청자를 다시 보라. 미끈한 어깨는 현대인의 무딘 눈과 손으로는 도저히 재현할 수 없는 기막힌 경지가 아닌가? 푸른색도 아니고 파란색도 아닌 그 깊고 깊은 비색의 청자, 그 속을 떠다니는 구름은 속세를 떠난, 신선의 경지가 아닌가?
조선 시대의 백자 항아리는 또 어떤가? 청자처럼 여성적인 아름다운은 아니더라도 묵직한 자태에 푸른색으로 선명하게 그려놓은 무늬들이 듬직하고 건강해 보인다. 거기에 여의주를 움켜쥐고 하늘로 솟아오르는 용이 철화로 그려진 항아리를 보라. 거기에는 오히려 남성적인 힘이 넘치고 있지 않은가?
신라 시대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에서 보는 저 지극한 미소, 경주 석굴암 본존불이 구현하고 있는 높은 정신세계의 법열...거기에 깃든 정신 세계는 또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의문은 우리의 얼굴을 다시 보고 자문하게 한다. 우리가 과연 힘없고 약해서 슬픈 민족인가? 노천명 시인의 노래한 사슴과 같이 목을 길게 내밀고 슬프게 우는 짐승인가, 그래서 늘 호랑이나 이리의 공격을 당하고만 사는 민족인가, 그래서 애정에 굶주린 나머지 그러한 선의 예술을 남긴 것인가? 우리의 예술이 슬픔과 고통을 벗어나려는 의지의 구현이라면, 이와 같은 많은 예술품에서 나타나는 성격들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충청남도 서산군 운산면 용현리에 가면 가야협이라는 계곡이 있다. 그 계곡의 맑은 시내를 건너 조금 오르면 나무 사이로 높이 2.8미터의 석가여래입상과 1.7 미터의 보살입상, 1.66미터의 반가사유상이 나란히 서 있다. 이름하여 서산 마애불. 바위에 돋워 새긴 불상이다.
이 불상의 주불인 석가여래는 아무리 보아도 근엄한 석가가 아니다. 양볼에는 살이 통통 쪘고, 입술도 도톰하다. 그 입은 웃고 있다. 입만이 아니다. 눈도 크게 웃고 있고 얼굴 전체가 웃고 있다. 참으로 웃는 불상으로서는 우리나라에서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렇게 촌스럽게(?) 가장 쾌활하고 밝고 신나는 웃음을 웃고 있다.
이 불상을 만든 조각가는 누구였을까? 현재까지 조사된 바로는 백제 시대의 조각인 만큼 분명 백제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파키스탄의 간다라 지방에서 시작돼 중국을 거쳐 오면서 대부분 근엄한 표정을 지켜오던 석가모니를 이곳 사람들은 왜 이처럼 활짝 웃게 했을까? 우리는 이 의문에 대한 답을 얻어야 한다.
눈이 크고 풍채 좋은 모습으로 유쾌하게 웃고 있는 백제의 장자를 부처의 표본으로 생각하고 그를 돌에 새긴 백제인들, 그들의 마음이 곧 부처였을 것이다. 그들의 마음이 밝고 명랑하지 않았다면 결코 이러한 조각을 남길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얼굴이 곧 그들의 마음인 것이다.
서산 마애삼존불이 백제인의 웃음이라고 한다면, 신라인의 웃음은 불상뿐 아니라 여러 가지 형태로 남아 있다. 흔히 석굴암 본존불의 법열을 거론하지만 보다 엄밀히 말하면 석굴암 본존불은 통일신라 시대의 작품이기에 보다 원형적인 신라인의 얼굴이라고 할 수 없다. 신라인의 얼굴은 오히려 경주시 농리에 있는 삼불사의 삼존불이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이 불상 역시 웃고 있는데, 약간 덜 풀어진 듯하기는 하지만 소년 같은 순진하고 복스러운 웃음이 서산마애삼존불과는 다른 맛을 느끼게 한다.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우리나라에는 이렇게 웃고 있는 불상이 유별나게 많다.
웃음과 관련된 표현이 풍부한 나라
불상이라는 것이 원래 자비를 구현한 것이고 중생을 제도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이니 미소나 웃음을 머금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느냐고? 아니다. 같은 시기의 일본이나 중국의 불상 가운데는 우리처럼 천진난만하게, 복스럽게, 행복하게, 소탈하게 웃는 불상이 보이지 않는다. 모두 틀에 박힌 표정이거나 아니면 겁을 주기 위한 것인 듯 근엄한 얼굴 뿐이다.
우리의 웃음은 불상에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다. 불상이 종교적인 염원을 승화시켜 표출한 인간상이라면 이른바 속각이라고 부르는 비종교적인 유물에서는 더 많은 웃음을 발견할 수 있다. 서울대 박물관에 보존돼 있는 신석기 시대의 유물인 흙으로 빚은 얼굴상과 뼈에 새긴 얼굴은 3천년 전 선조들의 얼굴을 엿보게 하는데, 더 재미있는 것은 흙으로 빚어 놓은 인물상이다. 국립중앙박물관과 경주박물관에 나뉘어 소장돼 있는 토우들은 거친 손끝으로 덤성덤성 빚었지만 완연하게 웃고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이라든가 남매가 함께 있는 모습, 농경과 생식, 남녀간의 사랑의 열락을 숨김없이 진솔하게 빚어 놓아, 보는 이들을 감탄케 한다.
연대를 더 내려오면 경주 영묘사 터에서 발견된 깨어진 막새기와에 새겨진 웃음이 있고, 안압지 발굴 공사 때 쏟아진 유물 가운데 조그만 토기 잔에 아주 작은 얼굴을 장식해놓은 것이라든지, 4센티미터 정도의 14면체 나무 주사위의 한 면에 쓰여진 ‘음진대소’, 마치 사람이 크게 웃는 듯이 만들어져 있는 큰 말방울 등이 계속 이어진다. 그 외에도 공주 무령왕릉에서 나온 조그만 유리동자상의 웃음, 부여 정림사지에서 출토된 흙으로 빚은 인면상의 웃음... 등 웃음과 관련된 유물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나온다.
경주의 향토사학자 윤경렬 씨는 “신라인들은 부처가 이 세상에 내려와 바위 속에 모습을 감춘다고 생각했는데, 그 부처는 엄숙한 부처가 아니라, 흉허물 없이 익살을 떠는 재미있는 모습의 부처이다”라고 말하면서, 그래서 경주 남산에 새겨진 수많은 돌부처 중에는 불국토의 경지를 표현한 것도 있지만 마치 손자를 놀리는 할아버지의 모습처럼 인간적인 표정과 익살이 엿보이는 부차가 많다고 설명한다.
과거 선조들의 삶 속에서 이처럼 웃는 모습이 많이 발견되는 것은 우리의 본래 모습이 그처럼 밝고, 맑고, 명랑하고, 낙천적이고, 건전했기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일찍이 고구려, 부여 시대부터 우리 민족은 중국 민족에 의해 가무음곡을 잘 하는 민족으로 인정받은 바 있다. 그들의 눈에 비친 우리 민족은 술을 잘 마시고 춤추고 놀기 좋아하는 민족이었던 것이다.
또한 우리말에는 의성, 의태어가 많이 발달했는데, 그 중에서도 웃음을 표현하는 말이 너무도 많다. 방글, 방실, 벙긋, 빙긋, 키득키득, 껄껄, 깔깔, 해해, 호호, 후후, 허허, 하하.. 언뜻 생각해도 이렇게 많은데, 실제로 다 세어보면 얼마나 많은 것인가?
왜 이렇게 웃음에 관한 의성, 의태어가 많은가? 이제 우리는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한국인의 특징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웃음
마음이 웃지 않는데 얼굴만 웃을 수는 없다. 초등학교 어린이들에게 사람을 그려보라고 하면 대개 몸통과 다리는 중요하지 않으니까 작게 그리고 얼굴만 크게 그리는데 보통 거울을 통해 본 자기 얼굴을 그린다. 그런데 그 얼굴들은 하나같이 웃고 있다. 그들의 마음이 웃고 있기 때문이다. 그 천진난만함, 그러한 때 묻지 않은 밝음이 우리 선조들의 마음속에도 있었기에 우리의 유물에 그렇게 웃음이 많은 것이 아닐까?
또한 석굴암의 본존불이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의 세계를 표현했다면, 그것은 그것을 만든 사람이 그 경지를 체득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한국인들은 과거에 가장 높은 수준의 웃음을 경험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한국인의 웃음이 억압과 허탈 속에 생활하면서 숨을 쉬기 위해 어쩔 수 없는 방편으로 웃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일체 모난 말을 하지 않고, 대답하기 곤란하면 익살과 웃음으로 얼버무리고...”라든가, “한국인의 웃음은 치욕과 비굴이 범벅이 돼 웃음과 울음의 한계가 묘연한 그런 웃음으로 체질화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라는 식이다. 그러나 우리의 웃음이 정말 그런가?
일본인들은 사무라이들의 피비린내 진동하는 전장의 세월을 몇백 년 이상 살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막부정치, 그리고 2차 대전 끝까지 칼과 총의 풍토 속에서 살았다. 그 사회에서는 생명이 들판의 풀잎만도 못했다. 그런 세월 속에서 일본인들은 ‘인생은 지는 꽃잎보다도 더 짧고 허무한 것인 만큼 살아 있을 때 벚꽃처럼 활짝 피었다가 벚꽃처럼 한꺼번에 가버린다’는 경험철학이 뇌리에 강하게 박혀 마음껏 웃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웃음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웃음이다.
그런가 하면 서양인의 웃음은 보들레르가 “절대자는 웃지 않는다. 인간만이 중간적 존재인 악마들처럼 자신보다 열등한 것을 보고는 그 우월감에 웃는다”라고 정의했듯이 남을 멸시함으로써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웃음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웃음은 남을 눌러 이긴 다음의 웃음이다. 그런 웃음은 ‘이화의 웃음’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웃음은 현세에서 즐거워 웃는 웃음, 인생이 재미있어서 웃는 웃음이며, 비록 먹고 살기에 풍족하지는 않아도 정신적으로 흡족해서 웃는 웃음이요, 그렇기에 억지웃음이 아니라 미소가 많고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벙긋한 웃음이다. 남을 누르고 웃는 억압자의 웃음이 아닌, 주위를 내 품안으로 포용하는 웃음, 누가 더 잘 나고 못 나고를 따지지 않는 ‘동화의 웃음’이다.
이런 웃음의 확장을 우리는 진도 다시래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전라남도 진도에 전해 내려오는 ‘다시래기’라는 민속은 초상난 집에 찾아가서 육친을 여읜 슬픔에 빠져 있는 상주를 웃기는 놀이이다. 그 내용은 탈춤에 흔히 등장하는 소재인 마누라가 서방질을 해서 중과의 사이에 몰래 애를 낳는 애기이지만, 그런 세속적이고 우스운 내용의 연희를 하필 상주의 집에 찾아가서 한바탕 소란스럽게 놀아주는 것은, 그것은 상주의 슬픔을 잊어버리게 하는 해탈과 승화의 웃음, 저승과 이승을 연결시켜주는 웃음, 생활에서 나오는 웃음 가운데 가장 고차원의 웃음을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다.
한국인의 특징을 분석할 때 흔히 자연과의 친밀함, 그리고 관조미, 비애미를 드는데, 거기에 해학과 통하는 웃음을 빼놓는다면 한국인의 특징을 제대로 짚었다고 할 수 없다. 아니, 빼놓으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웃음이 가장 중요한 특질이자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의 건축에도 나타난다. 조선 시대 건축의 추녀선은 날아갈 듯 하늘로 올라가는 곡선이다. 직선의 엄격한 규율과 규칙이 아니라 그 규칙의 엄격성이 주는 긴장을 풀어주고 인간화시키는 양념으로서의 곡선, 바로 이 곡선은 한국인들의 성격, 곧 밝은 웃음과 다르지 않다. 이것은 일본인 야나기가 말한 슬픔과 체념, 외로움의 선이 아니라 꿈과 희망과 낙천의 율동이며, 상승의 곡선이다.
일정한 격식이나 특정한 경향 또는 일반적인 질서와 규칙을 깨뜨릴 때 ‘멋’이 생긴다고 이어령 교수는 지적했다. 그런 면에서는 한국인은 최고의 멋쟁이, 웃을 줄 아는 멋쟁이이다. 일본인들은 집을 지을 때 기둥이란 기둥은 모조리 대패로 밀어서 각이 지게 만들지만, 우리나라의 옛 건축을 보면 뒤틀린 기둥을 그대로 사용해서 자연적인 아름다움을 그대로 살리고 있다. 부여에 있는 유명한 정림사지 5층 석탑만 해도 그렇다. 탑신은 어쩔 수 없이 직선을 사용해 엄격한 비례에 따라 하늘로 올라가지만 그 탑신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은 그 직선의 중압감을 해소한다. 이것이 바로 기둥 중간을 눈에 뜨이지 안헥 배가 살짝 나오도록 하는 배불림기법이 아닌가? 직선 속에 살짝 감추어진 곡선이 직선을 하늘 위로 들어올리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문화요 예술이며, 얼굴이 아니었던가.
우리는 그 동안 우리의 얼굴을 잊어버리고 살아왔다. 한 일본인이 심어준 식민지 시대의 잘못된 인상, 동정심에서 발로한 불쌍한 민족이라는 인상을 우리는 우리의 진짜 얼굴인 양 착각하고 살아왔다. 그러나 우리는 웃음이 많은 민족이요, 항상 웃으며 살아온 민족이었다. 자신의 여유와 포용과 중용, 해탈의 웃음이 우리의 생활 속에, 우리의 예술 속에 면면히 살아 있었는데도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지나쳐왔다.
태극은 음과 양이 곡선으로 만나고, 활은 곡선을 그리며 날아간다. 한국인이 이뤄 놓은 곡선의 문화는 바로 이러한 자연의 섭리에서 나온 것이며, 우리가 창조해온 웃음의 문화는 이런 곡선적 사고의 현세화이다. 오늘날 우리의 생활속에 스며 있는 온갖 부정적인 의미의 단어들, 시기, 갈등, 파쟁, 음모, 모략, 나태, 격정, 암투 비애, 원망, 의혹, 불신,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민족에게 많다고 믿어온 가장 대표적인 잘못된 개념인 한까지도 모두 우리 민족에게 본래부터 있던 가장 큰 덕인 웃음으로 덮어버릴 수 있지 않을까?
오늘 우리는 잃어버린 우리의 웃음을 되찾지 않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