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동식의 다섯 계절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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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 |
*제57회 - " 무정형에서 찾는 자유 "
영광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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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1 03:44
청중과 소통하는 음악
판소리와 산조, 사물놀이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음악의 특징은 음 높이나 길이, 음빛깔, 음의 감정을 악보에 적힌 대로 보고 배워서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입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진 것을 바탕으로 연주를 한다. 이런 것을 두고 서양 음악에 익숙한 사람들은 객관화, 계랑화가 안 되었기 때문에 채보법이 발달한 서양음악에 비해 열등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서양 음악의 경우는 악보에 따라 정확히 연주하기 때문에 누가 연주하더라도 평균적인 음악을 연주할 수 있다. 그러나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하는 사람이 제2악장의 제1주제를 연주하기 시작했을 때 청중이 재미없다고 느낀다 하더라도 적힌 대로 계속 연주해야 한다. 청중이 지루해한다고 제1주제를 하다가 끊고 제2주제로 넘어가거나 발전부나 재현부를 건너뛸 수 없다. 청중의 반응이 좋다고 어느 악장을 한 번 더 연주할 수도 없다.
국악 연구가인 전인평 선생은 그의 저서 <국악 감상, 한국 음악의 멋>에서 서양식의 이런 음악을 일방통행식 음악이라고 정의한다. 청중이 좋아하건 싫어하건 일단 시작하고 나면 정해진 코스대로 끝까지 갈 수밖에 없고, 끝이 나야 청중의 박수의 열기로 청중과의 교감 정도를 알 수 있다. 그야말로 일방통행이고, 음악이 연주되는 동안 청중들은 아무런 의사 표시도 못하고 무조건 듣고 있어야 하는 음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음악인 판소리나 사물놀이 등은 청중의 참여를 기본 전제로 한다. 예를 들어 춘향과 이몽룡의 애간장을 녹이는 기막힌 이별 장면이라면, 진한 슬픔을 잘 묘사하면 묘사할수록 청중은 연주자에게 칭찬의 표시를 진하게 한다. “좋다”, “얼씨구!” 등의 추임새는 음악가와 청중 모두를 음악에 몰입시키는 가교로 작용한다. 청중들의 추임새가 없으면 음악이 성립되지 않는다.
또한 악보를 그대로 따라하는 대신 음악을 마음으로 배우고 또한 매순간 새롭게 재해석해 내기 때문에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다. 우리 판소리는 배울 때부터 아무리 뛰어난 명창이 부르더라도 똑같이 따라하는 것은 금기로 해왔다. 그래서 자기 나름대로의 경지를 개척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왔고, 그렇기에 청중과의 교감 정도에 따라 소리나 장단을 취사선택할 수 있고 시간도 조절할 수 있으며 심지어 새로운 음을 첨가하거나 줄이거나 해서 청중들과 느낌을 나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음악의 만족도 면에서 어느 쪽이 더 낫다고 하겠는가?
기계적이고 일방통행식인 서양 음악이 한계에 다다르자 새롭게 주목한 것이 동양 음악의 바로 이러한 요소였다. 한 사람이 두 시간, 아니 원한다면 몇 시간이라도 할 수 있는 인도의 ‘라가’ 나 우리나라의 판소리 같은 것이 그렇다. 바로 공연자와 청중이 하나가 되는 방식이며, 판에 박힌 스타일이 아닌 유연하고도 청중과 함께 하는 음악이다.
한을 씻어내는 씻김굿으로서의 판소리
우리는 한이 많은 민족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 민족 개개인의 얼굴을 자세히 보라. 그 맑은 눈동자 어디에 어둡고 슬픈 구석이 있는가? 세계에서 한국 사람들처럼 술 잘 먹고 잘 떠들고 노래 잘하며 노는 민족이 어디 있는가? 그런 민족이 어떻게 한이 많은 민족인가? 그런 민족이 어떻게 슬픈 민족인가? 술 잘 마시는 사람 중에 마음이 어두운 사람이 있던가? 노래 잘 부르는 사람 중에 악인이 있던가?
물론 우리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의 존재를 완전히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숱한 고난을 겪어왔기 때문이다. 수많은 외침과 항전의 세월 속에서 백성들은 배가 고팠을 것이며, 권력의 방망이 앞에서 비통한 한숨을 쉬었을 것이고, 양반과 문벌의 위세 앞에서 고통의 피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것도 기름진 평야 지대에서 고된 노동으로 얻은 결실을 양반과 벼슬아치들에게 모조린 빼앗긴 경험을 가진 호남지방에서 가장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땅에 가면 빠르고 경쾌한 노래보다 길고 늘어진 노래가 많고 구성진 가락이 많다. 그들의 역사가 이 같은 가락을 끌어내었던 것이리라.
판소리의 발원이 되는 춘향가는 남원 지방의 씻김굿인 ‘춘향무굿’에서 시작됐다고 하는데, 씻김굿이야말로 그들의 한을 씻어내는 공동의 의식이었을 것이다. 춘향은 원래가 절세미인이 아니라 박색이었으며, 서울 간 이 도령은 마음이 변해서가 아니라 가세가 기울어 도저히 남원으로 춘향을 다시 찾아올 수 없었고, 기다리던 춘향은 애절한 한을 품고 세상을 떴으며, 그 뒤 그 한이 맺혀 남원 지방에 흉년이 계속 들어, 그 한을 씻기 위해 춘향무굿이 생겨났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씻음굿은 춘향을 절세미인으로 바꾸고, 이 도령을 금의환향하게 만들어 춘향과 영광의 재회를 하게 함으로써 춘향, 아니 모든 사람들의 한을 씻어내었던 것이다.
그러한 무속적인 씻음의 의식이 천재적인 재능인들에 의해 말로 바뀌고 보태지고 색깔이 덧칠해져 이번에는 무속이 아닌 소리로 씻어내는 이른바 ‘판소리’로 발전했을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재능인들이 호남이라는 땅에 많고, 호남이라는 땅이 그들을 길러왔다는 사실을 지나치면 안 된다.
단순히 씻음을 잘 한다는 측면만이 아니라 짧은 사설로 그치지 않고 길고 긴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끌고 가며 온갖 웃음과 눈물을 맛보게 하다가 마지막으로 속을 후련하게 만드는 그 기막힌 솜씨는 또 어뗘랴? 다른 지방의 노래들이 길어야 반 시간이 안 되는 데 비해 완창에 몇 시간이 소요되는 마치 대하소설과도 같은 이 판소리는 단편소설만이 횡행하던 문단에 갑자기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대하소설가가 나타난 것과도 같다.
그렇게 긴 시간 동안 모든 원이나 한을 씻고 나면 진실로 후련하고 속 시원해진다. 그 씻음, 완전한 씻음의 다음에는 지고, 지순의 경지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진짜 소리는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럴 때 그 소리는 진정한 예술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예술을 터득한 사람들은 영욕이 교차하는 운명의 갈림길에서조차 세속의 영화보다는 예술의 참 맛을 택해왔다.
판소리 춘향가를 두 번째로 이어준 명창 권삼득의 경우가 그 좋은 예이다. 양반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나 유학을 통한 입신양명의 길이 있었음에도 자신이 터득한 예술의 경지를 끝내 외면할 수 없어, 집안사람들이 양반 가문의 수치라며 죽인다고 하는데도 차라리 죽을지언정 소리를 그만둘 수 없다면 자신의 죽음 앞에서 마지막으로 부른 판소리 춘향가의 ‘십장가’, 그 비장한 애조가 집안 어른들 모두의 마음을 감동시켜, 죽이지 않고 문적에서 박탈하여 추방하는 것으로 대신했다는 그 일화에서, 우리는 다시 참 예술의 힘을 알게 된다.
한 판의 판소리 ‘서편제’의 힘
영화 ‘서편제’는 한 판의 판소리이다. 이 영화가 판소리를 다루고 있어서가 아니라 영화 자체가 한 판의 판소리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우선 기존의 한국 영화, 기존의 임권택 감독의 영화에 비해 재미있다. 여기서 재미있다는 말은 ‘장군의 아들’처럼 흥미가 만점이라는 뜻을 넘어 가슴에 파고드는 그 무엇,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들을 붙잡고 놓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상당히 끈적끈적한 어떤 것, 처음에는 아주 느릿느릿 진양조로 시작되어 점층되는 긴장으로, 마치 산조의 마지막 휘몰이에까지 이르는 과정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한을 넘어서야 한다는, 굉장히 쉬운 것 같으면서도 자칫 부처님 말씀에 그칠 수도 있는 그 메시지를 위해서, 전 줄거리가 김장감 있게 짜여 있기 때문이리라. 이 영화가 긴박감은 없으되 긴장이 있고, 급박함은 없으되 늘어지지 않고, 소리치지 않는데도 졸리지 않는 것은 그러한 극적인 짜임새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그 짜임새는 세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는데, 첫째는 원작의 문제요, 둘째는 각본의 문제, 세 번째는 영화로 구워냄의 문제이다.
이청준의 원작을 읽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겠지만 원작을 잃지 않아도 원작 자체가 짜임새가 있을 것이란 짐작은 그리 어렵지 않다. 영화에서 원작의 분위기나 구성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설이 아무리 짜임새가 있다고 해도 소설은 어디까지나 소설이다. 원작이 좋다고 영화도 좋다는 등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여기서 각색을 하고 주인공을 맡은 김명곤이란 인물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제법 길고 사설이 많았을 원작을 이만큼 순탄하고 군더더기 없이 영화로 재구성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김명곤은 주인공으로서도 만만치 않은 창 솜씨를 보여주어 그의 능력을 새삼 과시했는데, 이 영화는 확실히 김명곤이란 소리에 미친 한 ‘꾼’에 대한 스포트라이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공을 넘어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어떻게 영화로 구현해냈는가 하는 것이다. 우선 언급해 둘 것은 그동안 이상하게도 소리를 주제로 한 영화가 없었다는 점이다. 영화는 모든 예술 형태 가운데 가장 다양하고 감동이 큰 영상매체로서, 영화에서의 영상은 단순히 화면만이 아니라 음향, 음악 등 소리를 동반하는 것이라, 외국의 경우 이른바 뮤지컬이란 형태가 몇 년에 한 번씩 큰 히트를 하고 있다. 그런 사실을 감안하면, 우리 영화계가 소리를 정식으로 다룬 영화를 내놓지 않았다는 사실은 의외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서편제는 우리 영화계가 한 번쯤은 다루었어야 할 영역을 다룬 영화이다.
영화 서편제는 확실히 소리를 새로운 각도에서 보고, 새로운 마음으로 듣게 한다. 영화를 통해 듣는 판소리는 웅장하고 유장하고 강하고 부드럽고 억세고 질기고 포근하고 거칠고 흐느끼고 웃고 성내고 노여워하고 미소 짓는다. 그것은 시냇물이었다가 강물이었다가 폭포수였다가 도랑물이었다가 호수였다가 바다가 되며, 고요하다가 살랑이다가 찰랑대다가 일렁이다가 휘몰아치다가 다시 고요해진다. 평소 판소리를 지루하다고 생각하여 라디오에서 판소리가 나오면 일초다 안 돼 다이얼을 돌리던 사람들에게 영화 서편제의 판소리는 너무도 잘 들린다. 들리는 것뿐 아니라 어느새 조용히 귀를 뚫고 가슴가지 들어와 있다. 그리고는 오랫동안 잊었던 혈관 속의 뜨거운 피의 흐름을 다시금 느끼도록 해 주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전문적인 음악용어가 나오지 않지만 장단이라는 것, 목을 다스린다는 것,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는 것 등 판소리의 언어에 조금은 입문하는 느낌이 들게 만들고, 인간의 목소리가 가장 훌륭한 악기라는 사실을 남의 나라 노래가 아닌 우리의 노래로 인식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그 소리는 우리의 가슴을 시원하게 쓸어내려 준다. 그것은 어머니의 약손이고, 복통에 먹는 모르핀이다. 이 영화는 기존의 어떤 교육매체도 언론도 하지 못한 판소리 교육을 순식간에 해낸 것이다. 그러한 ‘소리’야 말로 이 영화를 기존의 임권택 영화보다 훨씬 재미있고 매력 있게 만든 요소이다.
이 영화는 여러 가지 면에서 임권택의 종전의 회심작이자 실패작인 ‘개벽’과 대조가 된다. ‘개벽’과 ‘서편제’는 감독도 촬영도 같다. 영화의 흐름도 비슷하다. ‘개벽’에서는 끊임없이 도망가는, 그러면서도 정신의 새벽을 열어가려고 몸부림치는 동학의 2대 교수 최해월의 발자취가 전편을 누빈다면, ‘서편제’에서는 소리의 최고 경지를 얻기 위해 편안함고 명예도 팽개치고 끊임없이 전국을 헤매며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심지어는 의붓딸의 눈까지 멀게 하는 비정의 인간상이 전편을 누빈다. 두 영화가 다 어디론가 끊임없이 떠나는 장면이 주조를 이루며 구원의 이상을 구현하는 인간의 몸부림을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개벽’은 흥행에 실패했고 ‘서편제’는 성공을 했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아무리 주제가 좋아도 그것을 전달하는 능숙한 이야기꾼의 솜씨가 없으면 어려운 것이 아닌가 싶다. ‘개벽’에서는 해월의 존재가 너무 절대화되어 일반인들의 심정적이니 접근과 이해를 막았다. 각본을 쓴 김용옥 교수가 자신의 이상에 너무 도취되었던 것은 아닌가 싶은데, 당시 해월을 따라다니며 잡으려 했던 포졸의 입과 눈을 통해 해월의 생애를 조명했더라면 관객이 접근하기가 훨씬 쉬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서편제’의 경우는 동호라는 사람이 아버지 유봉과 누나 송화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것이 관객들을 자연스럽게 판소리의 예인들에게 인도해준다. 유봉의 경우 자기 딸의 눈을 멀게 한다는 지극히 비인간적인 상황을 만들어 내는데도 불구하고 해월의 보편애보다 더 이해를 얻는데, 그 이유는 그 세계를 이해하고 설명해주고 연결해주는 무당 혹은 영매로서의 존재, 즉 동호가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중요한 것은 앞에서도 언급한 ‘소리’이다. 이것이 영화의 긴장의 끈을 잡아주고 있었기에, 스토리의 유장함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이 영화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소리’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김수철이란 또 하나의 재능인에 의해 만들어진 극히 절제된 두 곡의 음악이다. 그 두 곡의 음악이 영화 속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만들어내는 ‘소리’를 살려주고 받쳐주고 있었다. 서양 음악에 이미 귀가 굳어진 청중들을 위해 그가 관현악을 토대로 그 위에 대금, 소금, 아쟁 등 국악기의 소리를 얹어 국악의 범주 또는 한계를 넘어서는 ‘소리’를 만들어내었다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물론 너무 선율적이라든가 관악기의 효과적인 배합이 아쉽다는 등의 서운함이 있기는 하지만,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들려주는 단 두 곡의 음악이 짙은 인상과 함께 극중의 정서를 절묘하게 받쳐 주었다.
우리는 정녕 한이 많은 민족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한이 많다는 사실보다도 우리가 그 한을 넘어서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다는 것이다. 꼭 판소리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한의 씻음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네의 얼굴은 맑고 밝고 깨끗하다. 판소리를 들어서도 그렇고 좋은 영화 한 편을 보아서도 그렇다.
한의 고개를 넘어서 보면 거기에는 광명의 경지가 있다. 초월의 힘이 있다. 그 힘은 예술의 힘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서편제’ 같은 영화를 다시 기대하는 것이다. 우리의 가슴을 어루만져주는 위대한 영화를 말이다.
판소리와 산조, 사물놀이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음악의 특징은 음 높이나 길이, 음빛깔, 음의 감정을 악보에 적힌 대로 보고 배워서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입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진 것을 바탕으로 연주를 한다. 이런 것을 두고 서양 음악에 익숙한 사람들은 객관화, 계랑화가 안 되었기 때문에 채보법이 발달한 서양음악에 비해 열등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서양 음악의 경우는 악보에 따라 정확히 연주하기 때문에 누가 연주하더라도 평균적인 음악을 연주할 수 있다. 그러나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하는 사람이 제2악장의 제1주제를 연주하기 시작했을 때 청중이 재미없다고 느낀다 하더라도 적힌 대로 계속 연주해야 한다. 청중이 지루해한다고 제1주제를 하다가 끊고 제2주제로 넘어가거나 발전부나 재현부를 건너뛸 수 없다. 청중의 반응이 좋다고 어느 악장을 한 번 더 연주할 수도 없다.
국악 연구가인 전인평 선생은 그의 저서 <국악 감상, 한국 음악의 멋>에서 서양식의 이런 음악을 일방통행식 음악이라고 정의한다. 청중이 좋아하건 싫어하건 일단 시작하고 나면 정해진 코스대로 끝까지 갈 수밖에 없고, 끝이 나야 청중의 박수의 열기로 청중과의 교감 정도를 알 수 있다. 그야말로 일방통행이고, 음악이 연주되는 동안 청중들은 아무런 의사 표시도 못하고 무조건 듣고 있어야 하는 음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음악인 판소리나 사물놀이 등은 청중의 참여를 기본 전제로 한다. 예를 들어 춘향과 이몽룡의 애간장을 녹이는 기막힌 이별 장면이라면, 진한 슬픔을 잘 묘사하면 묘사할수록 청중은 연주자에게 칭찬의 표시를 진하게 한다. “좋다”, “얼씨구!” 등의 추임새는 음악가와 청중 모두를 음악에 몰입시키는 가교로 작용한다. 청중들의 추임새가 없으면 음악이 성립되지 않는다.
또한 악보를 그대로 따라하는 대신 음악을 마음으로 배우고 또한 매순간 새롭게 재해석해 내기 때문에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다. 우리 판소리는 배울 때부터 아무리 뛰어난 명창이 부르더라도 똑같이 따라하는 것은 금기로 해왔다. 그래서 자기 나름대로의 경지를 개척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왔고, 그렇기에 청중과의 교감 정도에 따라 소리나 장단을 취사선택할 수 있고 시간도 조절할 수 있으며 심지어 새로운 음을 첨가하거나 줄이거나 해서 청중들과 느낌을 나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음악의 만족도 면에서 어느 쪽이 더 낫다고 하겠는가?
기계적이고 일방통행식인 서양 음악이 한계에 다다르자 새롭게 주목한 것이 동양 음악의 바로 이러한 요소였다. 한 사람이 두 시간, 아니 원한다면 몇 시간이라도 할 수 있는 인도의 ‘라가’ 나 우리나라의 판소리 같은 것이 그렇다. 바로 공연자와 청중이 하나가 되는 방식이며, 판에 박힌 스타일이 아닌 유연하고도 청중과 함께 하는 음악이다.
한을 씻어내는 씻김굿으로서의 판소리
우리는 한이 많은 민족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 민족 개개인의 얼굴을 자세히 보라. 그 맑은 눈동자 어디에 어둡고 슬픈 구석이 있는가? 세계에서 한국 사람들처럼 술 잘 먹고 잘 떠들고 노래 잘하며 노는 민족이 어디 있는가? 그런 민족이 어떻게 한이 많은 민족인가? 그런 민족이 어떻게 슬픈 민족인가? 술 잘 마시는 사람 중에 마음이 어두운 사람이 있던가? 노래 잘 부르는 사람 중에 악인이 있던가?
물론 우리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의 존재를 완전히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숱한 고난을 겪어왔기 때문이다. 수많은 외침과 항전의 세월 속에서 백성들은 배가 고팠을 것이며, 권력의 방망이 앞에서 비통한 한숨을 쉬었을 것이고, 양반과 문벌의 위세 앞에서 고통의 피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것도 기름진 평야 지대에서 고된 노동으로 얻은 결실을 양반과 벼슬아치들에게 모조린 빼앗긴 경험을 가진 호남지방에서 가장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땅에 가면 빠르고 경쾌한 노래보다 길고 늘어진 노래가 많고 구성진 가락이 많다. 그들의 역사가 이 같은 가락을 끌어내었던 것이리라.
판소리의 발원이 되는 춘향가는 남원 지방의 씻김굿인 ‘춘향무굿’에서 시작됐다고 하는데, 씻김굿이야말로 그들의 한을 씻어내는 공동의 의식이었을 것이다. 춘향은 원래가 절세미인이 아니라 박색이었으며, 서울 간 이 도령은 마음이 변해서가 아니라 가세가 기울어 도저히 남원으로 춘향을 다시 찾아올 수 없었고, 기다리던 춘향은 애절한 한을 품고 세상을 떴으며, 그 뒤 그 한이 맺혀 남원 지방에 흉년이 계속 들어, 그 한을 씻기 위해 춘향무굿이 생겨났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씻음굿은 춘향을 절세미인으로 바꾸고, 이 도령을 금의환향하게 만들어 춘향과 영광의 재회를 하게 함으로써 춘향, 아니 모든 사람들의 한을 씻어내었던 것이다.
그러한 무속적인 씻음의 의식이 천재적인 재능인들에 의해 말로 바뀌고 보태지고 색깔이 덧칠해져 이번에는 무속이 아닌 소리로 씻어내는 이른바 ‘판소리’로 발전했을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재능인들이 호남이라는 땅에 많고, 호남이라는 땅이 그들을 길러왔다는 사실을 지나치면 안 된다.
단순히 씻음을 잘 한다는 측면만이 아니라 짧은 사설로 그치지 않고 길고 긴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끌고 가며 온갖 웃음과 눈물을 맛보게 하다가 마지막으로 속을 후련하게 만드는 그 기막힌 솜씨는 또 어뗘랴? 다른 지방의 노래들이 길어야 반 시간이 안 되는 데 비해 완창에 몇 시간이 소요되는 마치 대하소설과도 같은 이 판소리는 단편소설만이 횡행하던 문단에 갑자기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대하소설가가 나타난 것과도 같다.
그렇게 긴 시간 동안 모든 원이나 한을 씻고 나면 진실로 후련하고 속 시원해진다. 그 씻음, 완전한 씻음의 다음에는 지고, 지순의 경지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진짜 소리는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럴 때 그 소리는 진정한 예술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예술을 터득한 사람들은 영욕이 교차하는 운명의 갈림길에서조차 세속의 영화보다는 예술의 참 맛을 택해왔다.
판소리 춘향가를 두 번째로 이어준 명창 권삼득의 경우가 그 좋은 예이다. 양반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나 유학을 통한 입신양명의 길이 있었음에도 자신이 터득한 예술의 경지를 끝내 외면할 수 없어, 집안사람들이 양반 가문의 수치라며 죽인다고 하는데도 차라리 죽을지언정 소리를 그만둘 수 없다면 자신의 죽음 앞에서 마지막으로 부른 판소리 춘향가의 ‘십장가’, 그 비장한 애조가 집안 어른들 모두의 마음을 감동시켜, 죽이지 않고 문적에서 박탈하여 추방하는 것으로 대신했다는 그 일화에서, 우리는 다시 참 예술의 힘을 알게 된다.
한 판의 판소리 ‘서편제’의 힘
영화 ‘서편제’는 한 판의 판소리이다. 이 영화가 판소리를 다루고 있어서가 아니라 영화 자체가 한 판의 판소리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우선 기존의 한국 영화, 기존의 임권택 감독의 영화에 비해 재미있다. 여기서 재미있다는 말은 ‘장군의 아들’처럼 흥미가 만점이라는 뜻을 넘어 가슴에 파고드는 그 무엇,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들을 붙잡고 놓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상당히 끈적끈적한 어떤 것, 처음에는 아주 느릿느릿 진양조로 시작되어 점층되는 긴장으로, 마치 산조의 마지막 휘몰이에까지 이르는 과정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한을 넘어서야 한다는, 굉장히 쉬운 것 같으면서도 자칫 부처님 말씀에 그칠 수도 있는 그 메시지를 위해서, 전 줄거리가 김장감 있게 짜여 있기 때문이리라. 이 영화가 긴박감은 없으되 긴장이 있고, 급박함은 없으되 늘어지지 않고, 소리치지 않는데도 졸리지 않는 것은 그러한 극적인 짜임새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그 짜임새는 세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는데, 첫째는 원작의 문제요, 둘째는 각본의 문제, 세 번째는 영화로 구워냄의 문제이다.
이청준의 원작을 읽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겠지만 원작을 잃지 않아도 원작 자체가 짜임새가 있을 것이란 짐작은 그리 어렵지 않다. 영화에서 원작의 분위기나 구성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설이 아무리 짜임새가 있다고 해도 소설은 어디까지나 소설이다. 원작이 좋다고 영화도 좋다는 등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여기서 각색을 하고 주인공을 맡은 김명곤이란 인물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제법 길고 사설이 많았을 원작을 이만큼 순탄하고 군더더기 없이 영화로 재구성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김명곤은 주인공으로서도 만만치 않은 창 솜씨를 보여주어 그의 능력을 새삼 과시했는데, 이 영화는 확실히 김명곤이란 소리에 미친 한 ‘꾼’에 대한 스포트라이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공을 넘어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어떻게 영화로 구현해냈는가 하는 것이다. 우선 언급해 둘 것은 그동안 이상하게도 소리를 주제로 한 영화가 없었다는 점이다. 영화는 모든 예술 형태 가운데 가장 다양하고 감동이 큰 영상매체로서, 영화에서의 영상은 단순히 화면만이 아니라 음향, 음악 등 소리를 동반하는 것이라, 외국의 경우 이른바 뮤지컬이란 형태가 몇 년에 한 번씩 큰 히트를 하고 있다. 그런 사실을 감안하면, 우리 영화계가 소리를 정식으로 다룬 영화를 내놓지 않았다는 사실은 의외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서편제는 우리 영화계가 한 번쯤은 다루었어야 할 영역을 다룬 영화이다.
영화 서편제는 확실히 소리를 새로운 각도에서 보고, 새로운 마음으로 듣게 한다. 영화를 통해 듣는 판소리는 웅장하고 유장하고 강하고 부드럽고 억세고 질기고 포근하고 거칠고 흐느끼고 웃고 성내고 노여워하고 미소 짓는다. 그것은 시냇물이었다가 강물이었다가 폭포수였다가 도랑물이었다가 호수였다가 바다가 되며, 고요하다가 살랑이다가 찰랑대다가 일렁이다가 휘몰아치다가 다시 고요해진다. 평소 판소리를 지루하다고 생각하여 라디오에서 판소리가 나오면 일초다 안 돼 다이얼을 돌리던 사람들에게 영화 서편제의 판소리는 너무도 잘 들린다. 들리는 것뿐 아니라 어느새 조용히 귀를 뚫고 가슴가지 들어와 있다. 그리고는 오랫동안 잊었던 혈관 속의 뜨거운 피의 흐름을 다시금 느끼도록 해 주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전문적인 음악용어가 나오지 않지만 장단이라는 것, 목을 다스린다는 것,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는 것 등 판소리의 언어에 조금은 입문하는 느낌이 들게 만들고, 인간의 목소리가 가장 훌륭한 악기라는 사실을 남의 나라 노래가 아닌 우리의 노래로 인식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그 소리는 우리의 가슴을 시원하게 쓸어내려 준다. 그것은 어머니의 약손이고, 복통에 먹는 모르핀이다. 이 영화는 기존의 어떤 교육매체도 언론도 하지 못한 판소리 교육을 순식간에 해낸 것이다. 그러한 ‘소리’야 말로 이 영화를 기존의 임권택 영화보다 훨씬 재미있고 매력 있게 만든 요소이다.
이 영화는 여러 가지 면에서 임권택의 종전의 회심작이자 실패작인 ‘개벽’과 대조가 된다. ‘개벽’과 ‘서편제’는 감독도 촬영도 같다. 영화의 흐름도 비슷하다. ‘개벽’에서는 끊임없이 도망가는, 그러면서도 정신의 새벽을 열어가려고 몸부림치는 동학의 2대 교수 최해월의 발자취가 전편을 누빈다면, ‘서편제’에서는 소리의 최고 경지를 얻기 위해 편안함고 명예도 팽개치고 끊임없이 전국을 헤매며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심지어는 의붓딸의 눈까지 멀게 하는 비정의 인간상이 전편을 누빈다. 두 영화가 다 어디론가 끊임없이 떠나는 장면이 주조를 이루며 구원의 이상을 구현하는 인간의 몸부림을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개벽’은 흥행에 실패했고 ‘서편제’는 성공을 했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아무리 주제가 좋아도 그것을 전달하는 능숙한 이야기꾼의 솜씨가 없으면 어려운 것이 아닌가 싶다. ‘개벽’에서는 해월의 존재가 너무 절대화되어 일반인들의 심정적이니 접근과 이해를 막았다. 각본을 쓴 김용옥 교수가 자신의 이상에 너무 도취되었던 것은 아닌가 싶은데, 당시 해월을 따라다니며 잡으려 했던 포졸의 입과 눈을 통해 해월의 생애를 조명했더라면 관객이 접근하기가 훨씬 쉬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서편제’의 경우는 동호라는 사람이 아버지 유봉과 누나 송화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것이 관객들을 자연스럽게 판소리의 예인들에게 인도해준다. 유봉의 경우 자기 딸의 눈을 멀게 한다는 지극히 비인간적인 상황을 만들어 내는데도 불구하고 해월의 보편애보다 더 이해를 얻는데, 그 이유는 그 세계를 이해하고 설명해주고 연결해주는 무당 혹은 영매로서의 존재, 즉 동호가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중요한 것은 앞에서도 언급한 ‘소리’이다. 이것이 영화의 긴장의 끈을 잡아주고 있었기에, 스토리의 유장함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이 영화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소리’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김수철이란 또 하나의 재능인에 의해 만들어진 극히 절제된 두 곡의 음악이다. 그 두 곡의 음악이 영화 속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만들어내는 ‘소리’를 살려주고 받쳐주고 있었다. 서양 음악에 이미 귀가 굳어진 청중들을 위해 그가 관현악을 토대로 그 위에 대금, 소금, 아쟁 등 국악기의 소리를 얹어 국악의 범주 또는 한계를 넘어서는 ‘소리’를 만들어내었다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물론 너무 선율적이라든가 관악기의 효과적인 배합이 아쉽다는 등의 서운함이 있기는 하지만,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들려주는 단 두 곡의 음악이 짙은 인상과 함께 극중의 정서를 절묘하게 받쳐 주었다.
우리는 정녕 한이 많은 민족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한이 많다는 사실보다도 우리가 그 한을 넘어서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다는 것이다. 꼭 판소리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한의 씻음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네의 얼굴은 맑고 밝고 깨끗하다. 판소리를 들어서도 그렇고 좋은 영화 한 편을 보아서도 그렇다.
한의 고개를 넘어서 보면 거기에는 광명의 경지가 있다. 초월의 힘이 있다. 그 힘은 예술의 힘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서편제’ 같은 영화를 다시 기대하는 것이다. 우리의 가슴을 어루만져주는 위대한 영화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