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동식의 다섯 계절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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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 |
*제27회 - " 버림 "
영광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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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1 03:44
출근해서 늘 그러듯이 회사내외의 일을 체크하고 있는데, 한 직원이 뭘 들고 와 내려놓는다. ‘Jesus loves you'라는 글귀가 있는 포장지로 둘러싼 그것은 계란이었다. “아니! 벌써 부활절이에요?” 이런 물음에 그 직원은 “우리들 식입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오늘이 금요일이니, 아! 그것은 사내에서 금요일마다 예배를 드리는 기독신우회 회원들이 준비한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일요일이 부활절 주일인 모양이다. 일요일에는 부활절 연합예배가 기독교계의 큰 행사로서 열릴 것이다. 기사 나온 것을 보니까 올해는 전통적으로 부활절 예배를 드려왔던 새벽으로 시간을 옮겨서 거행하고, 초대교회의 부활절 예배방식이 재현된다고 한다. 부활절의 초가 점화되고, 죄씻음을 상징하는 ‘물의 예전’이 있고 그리고 하늘나라 잔치를 상징하는 성찬성례전이 부활돼 각 교회의 목사들이 소속 교회 신도들에게 집례하는 식으로 치러진다고 한다. 특히 100년 전 평양에서 대부흥운동으로 한국교회에 불 붙었던 대각성 운동을 되살리기 위해 ‘영적 각성과 한국교회의 갱신’이란 주제를 정했다고 전하고 있어 그런 주제아래 한국 교회가 과연 앞으로 어떠한 각성을 보일지도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 교인이 아니 나는 오늘 아침 특이한 경험을 했다. 여의도에 벚꽃축제가 오늘부터 시작된 관계로 퇴근할 때에 승용차가 밀릴 것에 대비해 버스를 타고 출근하기로 하고 버스 안에서 볼만한 책이 뭐가 없을까 하다가 나도 모르게 손이 간 것이 영국에서 산 책인데, "A joyful pilgrimage'라는 제목의 책이다. 먼지가 들어가지 말라고 덮어놓은 셀로판 포장지가 그냥 그대로 있는 것을 보니 사놓고 신경도 안 쓰던 것인 모양이다. 이 책은 '브루더호프(Bruderhof)'의 창시자인 에버하르트 아놀드의 부인 에미 아놀드가 쓴 것으로 남편과 함께 어떻게 브루더호프 운동을 시작했는지 그 이야기를 쓴 책이다. 기억을 더듬어보니까 영국에 특파원으로 있을 때 런던 남쪽의 브릿지스톤이란 데를 방문해서 다벨 브루더호프 공동체를 취재했는데, 그 때에 산 책이었다. 그 취재를 마치고 나오면서 나중에 언젠가 시간이 되면 읽어보리라고 마음먹었었는데, 6년이 지난 부활절에 그 책이 손에 잡히다니, 인연이라면 묘한 인연이고 섭리라면 묘한 섭리라는 생각이 든다.
브루더호프는 독일의 저명한 강사이자 작가인 에버하르트 아놀드가 1920년 독일의 산네르츠에 세운 공동체가 모태가 됐다. 이 공동체는1차대전이 끝난 뒤 정신적으로 공허해진 독일의 청소년, 청년들이 전통적인 생활방식이나 전통교회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생활방식으로 공동체의 가치를 재발견한 운동인데, 30년대 말 나치정권이 박해를 시작하자 독일을 떠나 영국으로 옮겨와 활동을 시작했고 그것이 오늘 날 전 세계 여러 군데에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필자는 그 때 한국인 여학생들이 이 공동체에 들어간다는 보도를 보고 이 곳을 찾아가 그들의 생활을 한국에 소개한 바 있다.
다벨 브루더호프는 영국의 어디나 그렇듯이 언덕으로 된 초원사이를 달려가서 만날 수 있다. 입구를 들어서면 아이들의 숲 속 놀이터가 예쁘게 자리하고 있고 작은 도로를 따라 공동체의 건물들이 이곳저곳에 편하게 놓여져 있다. 이 건물들은 학교, 어린이 놀잇감 공장, 공동식당 등이고 여기에 농경지가 있어 자연스런 마을이 된다. 이 곳에 함께 사는 사람들은 약 200여 명 정도로 기억되는데, 이곳에서 아이들과 어른들은 누구나 학생이 되고 선생이 된다. 학생과 선생님들은 함께 텃밭을 가꾸고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호수에서 낚시와 수영도 하며, 숲으로 놀러가기도 한다. 공동체의 일터(공장, 세탁실, 농장, 식당 따위)에 가서 일을 하며 가끔 먼 곳으로 도보여행을 하거나 캠프를 떠난다. 이곳의 사람들은 어른이나 아이나 할 것 없이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책임감을 키우게 된다.
기억에 새로운 것은 아침식사는 식구들과 하고, 점심과 저녁은 공동체 식당에서 모두가 함께 먹는다는 것이다. 함께 먹고, 함께 일하고, 함께 시간을 누리는 환경에서 아이들에게는 선생님도 식구요, 자연도 식구인 셈이다. 그렇게 해서 여기서 나온 공예품이나 농산물을 밖으로 내다파는데 어떤 것은 수출도 된다고 한다. 그런 공동체의 삶이 곧 1920년대 초 독일에서 에버하르트와 에미 아놀드 두 부부가 시작한 공동체 운동이다. 이 책에는 그런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그 과정은 재미만이 아니라 고생과 고통의 기록이지만 자연 속에서 나를 버리고 우리가 되어 함께 삶을 일군 과정이기에 그것은 희망과 위안과 기쁨의 기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오늘 아침 한 직원이 가져다 분 부활절 계란 하나는 그런 기억을 되살려준다. 마침 오늘 아침에 우연히 빼들은 그 책과 거기에 얽힌 이야기까지 말이다.
부활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예수의 부활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이 육체적으로는 사망하지만 정신적으로는 영원한 삶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음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우리의 영혼의 창을 열고 나만을 생각하는 것에서 우리 모두의 생을 다시 생각하고 그들의 삶의 고귀함을 나의 삶과 같이 생각할 수 있을 때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나의 아기심을 버릴 수있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욕심과 때에 묻었던 우리의 영혼이 다시 살아나면서 우리의 육체적는 한계가 있지만 정신은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각성이 들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려는 부활이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다가 한국에서도 ‘맨발의 성자’로 유명한 이현필이 다시 생각이 났다.
이현필은 전남 화순군 도암면에서 태어났다. 10대부터 기독교를 접해 전도사 생활을 하던 그는 ‘도암의 성자’ 이세종을 만난 뒤 인생이 바뀌었다. 이세종은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살았던 사람이었다. 자기 아내를 누님이라 부르며 부부가 남매처럼 살았고 일제시대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깊은 산 속에서 지내면서 가까운 마을의 처녀 총각을 모아 성경공부를 시켰다. 이현필은 남다르게 거룩한 삶을 동경하며 실천하려고 애썼기 때문에 이세종의 수제자가 되었다.
이현필은 25세 때부터 28세까지 전남 화순군 도암면 화학산에 들어가 기도생활을 하였고, 나이 30세 전후로 지리산의 오감산이나 서리내에서 깊이 기도하였다. 산에 파묻혀 금식과 명상생활을 하였고, 10여명의 소년 소녀들을 제자로 삼아 성경을 가르치고 훈련하였다. 항상 기도하는 경건한 생활과 노동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현필은 스승처럼 아내와 육적인 관계를 단절하고 정절의 수도자가 되었다. 그 때부터 그의 눈은 육안에서 영안으로 바뀌었다. 그는 제자들에게 자주독립 정신 청빈과 검소의 삶을 훈련시켰다. 그 자신 스스로 짚신을 신었고, 산중 길을 걸을 때에는 추운 겨울에도 맨발로 다녔으며 단벌 옷과 불을 때지 않은 차가운 방에서 지내며 청빈하고 가난하게 사셨던 예수의 삶을 본받고자 몸소 모범을 보였다. 그는 식생활에 있어서 일식주의자였고 철저한 채식주의자였다. 걸인이나 창녀를 대할 때도 그는 천사처럼 귀히 대했다.
그에겐 기도시간이 따로 없었다. 삶이 곧 기도요. 일이 곧 기도였다. 모든 것은 자급자족이었다. 실내로 들어갈 때도 언제든 나올 때를 대비해 바깥쪽을 향해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고 들어갔다. 밥을 먹을 때 한 숟가락씩 덜어 굶주리는 사람을 돕자는 일작운동을 펼쳤다. 광주와 무등산 일대에서 여순반란사건과 6.25 뒤 거리를 떠돌던 수많은 고아들과 폐병 환자들을 거두었다. 맨발로 눈길을 걸으며 탁발을 해서 고아와 환자들을 먹이면서 돌보다 결국 자신도 폐병에 걸려 51살에 귀천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를 예수 그리스도 이후 최고의 성인으로 추앙받는 프란체스코와 비교하기도 한다. 이현필을 평생 탐구해온 은성수도원 창립자 엄두섭 목사는 “이현필은 프란체스코와 비교해 봐도 누가 더 우월하다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인물”이라고 평했다. 또 함석헌의 스승 유영모는 아들 뻘인 그한테서 빛을 본 뒤 광주(光州)를 빛고을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이를 들은 함석헌에 의해 빛고을이란 말이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가 이현필처럼 살기는 어렵고, 그렇게 살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우리 사회에 던진 가르침은 분명하다. ‘나’가 아니라 ‘우리’라는 것이다. 나 혼자 호의호식하며 잘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같이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성자의 길이지만, 동시에 우리 누구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할 수 있는, 걸어갈 수 있는 길이다. 그 가르침을 이해하고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에게는 기쁨이 있을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아마도 예수가 목숨을 바쳐 보여준 부활의 가르침이 아닐까?
부활절을 앞두고 한 사우가 가져다 준 부활절 계란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해본다. 우리도 버릴 수 있을까? 우리도 '나'를 버리고 '우리'를 찾을 수 있을까?
그러고 보니 이번 일요일이 부활절 주일인 모양이다. 일요일에는 부활절 연합예배가 기독교계의 큰 행사로서 열릴 것이다. 기사 나온 것을 보니까 올해는 전통적으로 부활절 예배를 드려왔던 새벽으로 시간을 옮겨서 거행하고, 초대교회의 부활절 예배방식이 재현된다고 한다. 부활절의 초가 점화되고, 죄씻음을 상징하는 ‘물의 예전’이 있고 그리고 하늘나라 잔치를 상징하는 성찬성례전이 부활돼 각 교회의 목사들이 소속 교회 신도들에게 집례하는 식으로 치러진다고 한다. 특히 100년 전 평양에서 대부흥운동으로 한국교회에 불 붙었던 대각성 운동을 되살리기 위해 ‘영적 각성과 한국교회의 갱신’이란 주제를 정했다고 전하고 있어 그런 주제아래 한국 교회가 과연 앞으로 어떠한 각성을 보일지도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 교인이 아니 나는 오늘 아침 특이한 경험을 했다. 여의도에 벚꽃축제가 오늘부터 시작된 관계로 퇴근할 때에 승용차가 밀릴 것에 대비해 버스를 타고 출근하기로 하고 버스 안에서 볼만한 책이 뭐가 없을까 하다가 나도 모르게 손이 간 것이 영국에서 산 책인데, "A joyful pilgrimage'라는 제목의 책이다. 먼지가 들어가지 말라고 덮어놓은 셀로판 포장지가 그냥 그대로 있는 것을 보니 사놓고 신경도 안 쓰던 것인 모양이다. 이 책은 '브루더호프(Bruderhof)'의 창시자인 에버하르트 아놀드의 부인 에미 아놀드가 쓴 것으로 남편과 함께 어떻게 브루더호프 운동을 시작했는지 그 이야기를 쓴 책이다. 기억을 더듬어보니까 영국에 특파원으로 있을 때 런던 남쪽의 브릿지스톤이란 데를 방문해서 다벨 브루더호프 공동체를 취재했는데, 그 때에 산 책이었다. 그 취재를 마치고 나오면서 나중에 언젠가 시간이 되면 읽어보리라고 마음먹었었는데, 6년이 지난 부활절에 그 책이 손에 잡히다니, 인연이라면 묘한 인연이고 섭리라면 묘한 섭리라는 생각이 든다.
브루더호프는 독일의 저명한 강사이자 작가인 에버하르트 아놀드가 1920년 독일의 산네르츠에 세운 공동체가 모태가 됐다. 이 공동체는1차대전이 끝난 뒤 정신적으로 공허해진 독일의 청소년, 청년들이 전통적인 생활방식이나 전통교회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생활방식으로 공동체의 가치를 재발견한 운동인데, 30년대 말 나치정권이 박해를 시작하자 독일을 떠나 영국으로 옮겨와 활동을 시작했고 그것이 오늘 날 전 세계 여러 군데에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필자는 그 때 한국인 여학생들이 이 공동체에 들어간다는 보도를 보고 이 곳을 찾아가 그들의 생활을 한국에 소개한 바 있다.
다벨 브루더호프는 영국의 어디나 그렇듯이 언덕으로 된 초원사이를 달려가서 만날 수 있다. 입구를 들어서면 아이들의 숲 속 놀이터가 예쁘게 자리하고 있고 작은 도로를 따라 공동체의 건물들이 이곳저곳에 편하게 놓여져 있다. 이 건물들은 학교, 어린이 놀잇감 공장, 공동식당 등이고 여기에 농경지가 있어 자연스런 마을이 된다. 이 곳에 함께 사는 사람들은 약 200여 명 정도로 기억되는데, 이곳에서 아이들과 어른들은 누구나 학생이 되고 선생이 된다. 학생과 선생님들은 함께 텃밭을 가꾸고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호수에서 낚시와 수영도 하며, 숲으로 놀러가기도 한다. 공동체의 일터(공장, 세탁실, 농장, 식당 따위)에 가서 일을 하며 가끔 먼 곳으로 도보여행을 하거나 캠프를 떠난다. 이곳의 사람들은 어른이나 아이나 할 것 없이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책임감을 키우게 된다.
기억에 새로운 것은 아침식사는 식구들과 하고, 점심과 저녁은 공동체 식당에서 모두가 함께 먹는다는 것이다. 함께 먹고, 함께 일하고, 함께 시간을 누리는 환경에서 아이들에게는 선생님도 식구요, 자연도 식구인 셈이다. 그렇게 해서 여기서 나온 공예품이나 농산물을 밖으로 내다파는데 어떤 것은 수출도 된다고 한다. 그런 공동체의 삶이 곧 1920년대 초 독일에서 에버하르트와 에미 아놀드 두 부부가 시작한 공동체 운동이다. 이 책에는 그런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그 과정은 재미만이 아니라 고생과 고통의 기록이지만 자연 속에서 나를 버리고 우리가 되어 함께 삶을 일군 과정이기에 그것은 희망과 위안과 기쁨의 기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오늘 아침 한 직원이 가져다 분 부활절 계란 하나는 그런 기억을 되살려준다. 마침 오늘 아침에 우연히 빼들은 그 책과 거기에 얽힌 이야기까지 말이다.
부활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예수의 부활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이 육체적으로는 사망하지만 정신적으로는 영원한 삶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음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우리의 영혼의 창을 열고 나만을 생각하는 것에서 우리 모두의 생을 다시 생각하고 그들의 삶의 고귀함을 나의 삶과 같이 생각할 수 있을 때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나의 아기심을 버릴 수있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욕심과 때에 묻었던 우리의 영혼이 다시 살아나면서 우리의 육체적는 한계가 있지만 정신은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각성이 들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려는 부활이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다가 한국에서도 ‘맨발의 성자’로 유명한 이현필이 다시 생각이 났다.
이현필은 전남 화순군 도암면에서 태어났다. 10대부터 기독교를 접해 전도사 생활을 하던 그는 ‘도암의 성자’ 이세종을 만난 뒤 인생이 바뀌었다. 이세종은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살았던 사람이었다. 자기 아내를 누님이라 부르며 부부가 남매처럼 살았고 일제시대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깊은 산 속에서 지내면서 가까운 마을의 처녀 총각을 모아 성경공부를 시켰다. 이현필은 남다르게 거룩한 삶을 동경하며 실천하려고 애썼기 때문에 이세종의 수제자가 되었다.
이현필은 25세 때부터 28세까지 전남 화순군 도암면 화학산에 들어가 기도생활을 하였고, 나이 30세 전후로 지리산의 오감산이나 서리내에서 깊이 기도하였다. 산에 파묻혀 금식과 명상생활을 하였고, 10여명의 소년 소녀들을 제자로 삼아 성경을 가르치고 훈련하였다. 항상 기도하는 경건한 생활과 노동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현필은 스승처럼 아내와 육적인 관계를 단절하고 정절의 수도자가 되었다. 그 때부터 그의 눈은 육안에서 영안으로 바뀌었다. 그는 제자들에게 자주독립 정신 청빈과 검소의 삶을 훈련시켰다. 그 자신 스스로 짚신을 신었고, 산중 길을 걸을 때에는 추운 겨울에도 맨발로 다녔으며 단벌 옷과 불을 때지 않은 차가운 방에서 지내며 청빈하고 가난하게 사셨던 예수의 삶을 본받고자 몸소 모범을 보였다. 그는 식생활에 있어서 일식주의자였고 철저한 채식주의자였다. 걸인이나 창녀를 대할 때도 그는 천사처럼 귀히 대했다.
그에겐 기도시간이 따로 없었다. 삶이 곧 기도요. 일이 곧 기도였다. 모든 것은 자급자족이었다. 실내로 들어갈 때도 언제든 나올 때를 대비해 바깥쪽을 향해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고 들어갔다. 밥을 먹을 때 한 숟가락씩 덜어 굶주리는 사람을 돕자는 일작운동을 펼쳤다. 광주와 무등산 일대에서 여순반란사건과 6.25 뒤 거리를 떠돌던 수많은 고아들과 폐병 환자들을 거두었다. 맨발로 눈길을 걸으며 탁발을 해서 고아와 환자들을 먹이면서 돌보다 결국 자신도 폐병에 걸려 51살에 귀천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를 예수 그리스도 이후 최고의 성인으로 추앙받는 프란체스코와 비교하기도 한다. 이현필을 평생 탐구해온 은성수도원 창립자 엄두섭 목사는 “이현필은 프란체스코와 비교해 봐도 누가 더 우월하다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인물”이라고 평했다. 또 함석헌의 스승 유영모는 아들 뻘인 그한테서 빛을 본 뒤 광주(光州)를 빛고을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이를 들은 함석헌에 의해 빛고을이란 말이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가 이현필처럼 살기는 어렵고, 그렇게 살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우리 사회에 던진 가르침은 분명하다. ‘나’가 아니라 ‘우리’라는 것이다. 나 혼자 호의호식하며 잘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같이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성자의 길이지만, 동시에 우리 누구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할 수 있는, 걸어갈 수 있는 길이다. 그 가르침을 이해하고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에게는 기쁨이 있을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아마도 예수가 목숨을 바쳐 보여준 부활의 가르침이 아닐까?
부활절을 앞두고 한 사우가 가져다 준 부활절 계란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해본다. 우리도 버릴 수 있을까? 우리도 '나'를 버리고 '우리'를 찾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