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동식의 다섯 계절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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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 |
*제31회 - " 부엉새 "
영광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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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1 03:44
정말로 손을 놓고 돌아서는 순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에 부엉새도 울었다네 나도 울었어~”로 시작되는 뽕짝 비 내리는 고모령‘의 그 기분 그대로이다.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형제 조카들과 함께 내려가면서 억지로 벽만 보고 있었다. 명절이라고 우루루 몰려왔다가 따로 더 남아있기가 서로 부담스러워 자식, 손자들이 한꺼번에 일어서서 또 우루루 몰려 내려가는 중이었다. 조금 있다가 다시 텅 빈 집에 들어서야 하는 두 어른의 심사가 어떠하리오? 다시 뉘엿뉘엿 넘어가는 저녁 해를 바라보며 또 하루하루를 쓸쓸히 보내야 하는 두 분. 이제는 어느 정도 습관이 되셨겠지만, 평일에는 그렇다고 쳐도 이렇게 명절이 끝나고 나면 그 허전함은 더욱 가슴을 더욱 텅 비게 만들고 문득문득 눈 앞에 지나가는 시간이 더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다른 자식들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하였을까 하는 것은 확실치 않지만 내가 가슴을 아프게 생각하는 것은, 설에서부터 2주일이 채 안 되는 날이 어머니 생신이신데, 지금 가면 다시 뵈러오기 힘든 까닭에 틀림없이 올 생신 아침은 두 분이 외롭게 드셔야 할 것 같아서이다. 지난 해만 같아서도 그리 큰 걱정을 안했는데, 이제 8순으로 빠르게 내려가는 언덕길에 서 계신 어머니가 무릎이 아파서 잘 걷지도 못하시게 되어 더 걱정이다. 이번 설에 손자들의 세배를 받으면서도 그냥 편히 앉아있지를 못해 간이의자를 깔고 앉으셨다가 음식을 담아 나눠주려고 억지로 일어서시는 모습이 영 예전 같지 않다. 확실히 이젠 노쇠해지신 것이다.
어떻게 된 것이 최근에는 아들 셋이 모두 외지로 나가 있게 돼, 두 부모님이 예전보다 더욱 외롭게 지내시게 되었다. 물론 아들들이 서울에 있다고 해서 생일상을 아침에 차려드리는 것은 아니고 미리 휴일에 만나서 식사를 나누는 것이 고작이지만. 그래도 전에는 아들 셋 중 적어도 하나는 가까이에 있었는데, 이번에는 정말 같이 식사를 하기도 어려울 것 같다. 물론 가까이 있는 둘째 며느리와 딸이 정성껏 하고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지만 아무래도 아들 딸, 사위 며느리 함께 받는 생일상만 하겠는가?
그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부모님 집을 나와 서울 집으로 가는데 올 설에 ‘쑥부쟁이’라는 드라마가 안방을 매우 울렸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모 방송국에서 설 특집 4부작으로 마련한 것인데, 힘든 세상을 살면서 돈 때문에 도리를 잊은 자식들을 원망하지 않고 남아있는 모든 것을 마지막까지 주고 떠나는 한 아버지의 이야기란다. 드라마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인터넷에 올라온 시청자들의 반응이 정말 눈물겹다.
"정말 가슴을 파고드는 감동적인 드라마였습니다. 시골에 계신 우리 부모님과 또 우리 형제들과의 관계의 모습이 어떤지 돌아보고 반성도 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보는 내내 눈물을 많이 흘렸어요." [KONG6578]
"어머니, 아버지 생각에 많이 울었고 그리고 평소에 못해드려서 더욱 많이 가슴 아팠습니다. 잊고 있었던 부모님의 감사함을 그리고 살아생전에 잘해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저의 인생을 반성하게 하는 감동적인 드라마였습니다." [SYP3312 ]
"많이 울었습니다. 부모님에 대해 너무 내 욕심만 채우려고 했던 것은 아닌지 반성했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제대로 된 드라마 한편을 본 것 같습니다."[CTRYCHOI]
이런 반응을 보면 자식들이 부모를 상당히 찬밥처럼 대했던 모양이다. 저마다 자기 잇속을 차리기 위해 부모의 마음이나 고통은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것이리라. 그런 것이 어디 드라마 뿐이랴? 실 생활에서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는 다 그런 이기적인 자식이지 않는가?
그런데 그 드라마 제목이 왜 ‘쑥부쟁이’일까? 그 방송국 측 설명으로는 들판에 흔히 피는 꽃 `쑥부쟁이`를 빗대어 너무 가까이 있어 쉽게 지나치기 쉬운 부모의 소중함과 사랑을 표현했다는 것인데, 부모와 관련해서 ‘쑥’을 쓰게 되었다면 ‘쑥부쟁이’가 아니라 ‘제비쑥’이어야 보다 정확하다. 왜 그런가 하면 바로 부모의 사랑을 표현하는 가장 오래된 시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공자가 편찬한 《시경(詩經)》 소아(小雅)에 나오는 “육아(蓼莪)”라는 시(詩)이다. 그 시는
“길고 큰 다북쑥이라 여겼더니, 제비쑥이로다 蓼蓼者莪 匪莪伊蔚
애통할 사 부모님이여 날 낳고 고생하셨네 哀哀父母,生我劬勞
로 시작한다. 여기서 다북쑥은 길고 아름다운 쑥, 곧 뛰어난 인재나 잘 난 아들을 의미하고 제비쑥은 키도 크지 않고 보잘 것 없는 쑥, 곧 출세도 못하고 제대로 행세도 못하는 아들을 의미한다. 윗 구절을 다시 풀면 부모님이 날 나으시고 기르시느라 온갖 고생을 다 하셨는데, 제대로 된 아들로서 번듯한 효도도 못하고 보잘 것 없는 아들이 되어있다는 한탄인 것이다.
이 시는 자신이 부모를 제대로 봉양하지 못하여 돌아가시게 한 뒤에 슬퍼하는 시인데, 다만 아들이 농땡이를 친 것이 아니라 그 옛날 중국에서 흔하던 부역을 나가는 바람에 그리 된 것임에도 갔다 와보니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애통하는 마음을 그린 것이다. 공자가 시경(詩經)을 편찬 것이 2천 5백년도 더 되는 아득한 옛날이지만 공자는 각 나라에 전해오는 노래를 채취해서 시집으로 엮은 것이므로, 이 시는 어쩌면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효자시일 것이다. 그러기에 중국인들은 이 시를 “千古孝思之作”이라고 부른단다.
복잡한 한자를 빼고 뜻으로만 더 읽어본다면
아버님 안계시면 누구를 믿고
어머님 안계시면 또 누구를 믿을까
밖에 나가도 부모님 걱정
안에 들어와도 몸 둘 곳 없어라
아버지는 나의 삶, 나를 있게 하셨고
어머니는 고생하며 키워 주셨지
쓰다듬어 주시고 먹여 주시고
키우시고 감싸 주셨네
언제나 돌보시고 보살피셨지
들고나며 따뜻이 보살피셨지
크나큰 그 은덕 갚으려 해도
무정한 저 하늘은 막막하구나.
뭐 이런 내용이다. 그거야 뭐 쑥부쟁이면 어떻고 다북쑥이면 어떻고 제비쑥이면 어떠랴. 다만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 저런 생각을 하니 서울을 떠나 임지인 부산으로 내려오는 차 안에서 나는 창밖을 쳐다보며 한숨을 지었다. 이 한 몸 세상 일에 묶인 만큼 부모를 가까이에서 모시며 살 수도 없고, 다른 아들들도 모두 외국에 나가서 각자의 생업을 이끌고 가느라 부모는 자식을 키운 공도 되돌려 받지 못하고 쓸쓸히 두 분만 계실 수밖에 없구나 하며 가슴이 무거워진다. 그러다가 또 2천5백 년 전의 그 중국인처럼 부모님을 여의는 고통에 가슴을 쳐야하는 것인가?
그러나 어찌하리오. 자식을 키우면 떠나보내는 것이 부모이고, 부모는 자식을 키우는 것으로서 소임을 다하는 것인 만큼 그 뒤의 것이야 일부러 기대할 수도 없는 것이 아니겠나?
그러나 내가 우리 자식들에게서 기대할 필요가 없다고 해서, 우리 부모에게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싶은 이 간사한 마음이 나는 밉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하지 못하는 이 처지가 한스럽다.
그런 생각으로 하루 종일 무겁다가 겨우 한 꾀가 생각이 났다. “그래 직접 가서 아침 수저를 떠드리지는 못하지만 요즈음 택배가 잘 되어있으니까 뭔가 보내드리자.” 그래서 전화로 조그만 떡 상자를 주문하니 생신날 점심때까지는 도착할 수 있다고 한다. 그 알량한 소포로 괴로운 마음구멍을 막아버리고 나는 또 생업이라는 핑계를 당당하게 내세우기로 했다.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에 부엉새도 울었다네 나도 울었어~”로 시작되는 뽕짝 비 내리는 고모령‘의 그 기분 그대로이다.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형제 조카들과 함께 내려가면서 억지로 벽만 보고 있었다. 명절이라고 우루루 몰려왔다가 따로 더 남아있기가 서로 부담스러워 자식, 손자들이 한꺼번에 일어서서 또 우루루 몰려 내려가는 중이었다. 조금 있다가 다시 텅 빈 집에 들어서야 하는 두 어른의 심사가 어떠하리오? 다시 뉘엿뉘엿 넘어가는 저녁 해를 바라보며 또 하루하루를 쓸쓸히 보내야 하는 두 분. 이제는 어느 정도 습관이 되셨겠지만, 평일에는 그렇다고 쳐도 이렇게 명절이 끝나고 나면 그 허전함은 더욱 가슴을 더욱 텅 비게 만들고 문득문득 눈 앞에 지나가는 시간이 더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다른 자식들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하였을까 하는 것은 확실치 않지만 내가 가슴을 아프게 생각하는 것은, 설에서부터 2주일이 채 안 되는 날이 어머니 생신이신데, 지금 가면 다시 뵈러오기 힘든 까닭에 틀림없이 올 생신 아침은 두 분이 외롭게 드셔야 할 것 같아서이다. 지난 해만 같아서도 그리 큰 걱정을 안했는데, 이제 8순으로 빠르게 내려가는 언덕길에 서 계신 어머니가 무릎이 아파서 잘 걷지도 못하시게 되어 더 걱정이다. 이번 설에 손자들의 세배를 받으면서도 그냥 편히 앉아있지를 못해 간이의자를 깔고 앉으셨다가 음식을 담아 나눠주려고 억지로 일어서시는 모습이 영 예전 같지 않다. 확실히 이젠 노쇠해지신 것이다.
어떻게 된 것이 최근에는 아들 셋이 모두 외지로 나가 있게 돼, 두 부모님이 예전보다 더욱 외롭게 지내시게 되었다. 물론 아들들이 서울에 있다고 해서 생일상을 아침에 차려드리는 것은 아니고 미리 휴일에 만나서 식사를 나누는 것이 고작이지만. 그래도 전에는 아들 셋 중 적어도 하나는 가까이에 있었는데, 이번에는 정말 같이 식사를 하기도 어려울 것 같다. 물론 가까이 있는 둘째 며느리와 딸이 정성껏 하고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지만 아무래도 아들 딸, 사위 며느리 함께 받는 생일상만 하겠는가?
그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부모님 집을 나와 서울 집으로 가는데 올 설에 ‘쑥부쟁이’라는 드라마가 안방을 매우 울렸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모 방송국에서 설 특집 4부작으로 마련한 것인데, 힘든 세상을 살면서 돈 때문에 도리를 잊은 자식들을 원망하지 않고 남아있는 모든 것을 마지막까지 주고 떠나는 한 아버지의 이야기란다. 드라마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인터넷에 올라온 시청자들의 반응이 정말 눈물겹다.
"정말 가슴을 파고드는 감동적인 드라마였습니다. 시골에 계신 우리 부모님과 또 우리 형제들과의 관계의 모습이 어떤지 돌아보고 반성도 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보는 내내 눈물을 많이 흘렸어요." [KONG6578]
"어머니, 아버지 생각에 많이 울었고 그리고 평소에 못해드려서 더욱 많이 가슴 아팠습니다. 잊고 있었던 부모님의 감사함을 그리고 살아생전에 잘해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저의 인생을 반성하게 하는 감동적인 드라마였습니다." [SYP3312 ]
"많이 울었습니다. 부모님에 대해 너무 내 욕심만 채우려고 했던 것은 아닌지 반성했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제대로 된 드라마 한편을 본 것 같습니다."[CTRYCHOI]
이런 반응을 보면 자식들이 부모를 상당히 찬밥처럼 대했던 모양이다. 저마다 자기 잇속을 차리기 위해 부모의 마음이나 고통은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것이리라. 그런 것이 어디 드라마 뿐이랴? 실 생활에서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는 다 그런 이기적인 자식이지 않는가?
그런데 그 드라마 제목이 왜 ‘쑥부쟁이’일까? 그 방송국 측 설명으로는 들판에 흔히 피는 꽃 `쑥부쟁이`를 빗대어 너무 가까이 있어 쉽게 지나치기 쉬운 부모의 소중함과 사랑을 표현했다는 것인데, 부모와 관련해서 ‘쑥’을 쓰게 되었다면 ‘쑥부쟁이’가 아니라 ‘제비쑥’이어야 보다 정확하다. 왜 그런가 하면 바로 부모의 사랑을 표현하는 가장 오래된 시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공자가 편찬한 《시경(詩經)》 소아(小雅)에 나오는 “육아(蓼莪)”라는 시(詩)이다. 그 시는
“길고 큰 다북쑥이라 여겼더니, 제비쑥이로다 蓼蓼者莪 匪莪伊蔚
애통할 사 부모님이여 날 낳고 고생하셨네 哀哀父母,生我劬勞
로 시작한다. 여기서 다북쑥은 길고 아름다운 쑥, 곧 뛰어난 인재나 잘 난 아들을 의미하고 제비쑥은 키도 크지 않고 보잘 것 없는 쑥, 곧 출세도 못하고 제대로 행세도 못하는 아들을 의미한다. 윗 구절을 다시 풀면 부모님이 날 나으시고 기르시느라 온갖 고생을 다 하셨는데, 제대로 된 아들로서 번듯한 효도도 못하고 보잘 것 없는 아들이 되어있다는 한탄인 것이다.
이 시는 자신이 부모를 제대로 봉양하지 못하여 돌아가시게 한 뒤에 슬퍼하는 시인데, 다만 아들이 농땡이를 친 것이 아니라 그 옛날 중국에서 흔하던 부역을 나가는 바람에 그리 된 것임에도 갔다 와보니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애통하는 마음을 그린 것이다. 공자가 시경(詩經)을 편찬 것이 2천 5백년도 더 되는 아득한 옛날이지만 공자는 각 나라에 전해오는 노래를 채취해서 시집으로 엮은 것이므로, 이 시는 어쩌면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효자시일 것이다. 그러기에 중국인들은 이 시를 “千古孝思之作”이라고 부른단다.
복잡한 한자를 빼고 뜻으로만 더 읽어본다면
아버님 안계시면 누구를 믿고
어머님 안계시면 또 누구를 믿을까
밖에 나가도 부모님 걱정
안에 들어와도 몸 둘 곳 없어라
아버지는 나의 삶, 나를 있게 하셨고
어머니는 고생하며 키워 주셨지
쓰다듬어 주시고 먹여 주시고
키우시고 감싸 주셨네
언제나 돌보시고 보살피셨지
들고나며 따뜻이 보살피셨지
크나큰 그 은덕 갚으려 해도
무정한 저 하늘은 막막하구나.
뭐 이런 내용이다. 그거야 뭐 쑥부쟁이면 어떻고 다북쑥이면 어떻고 제비쑥이면 어떠랴. 다만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 저런 생각을 하니 서울을 떠나 임지인 부산으로 내려오는 차 안에서 나는 창밖을 쳐다보며 한숨을 지었다. 이 한 몸 세상 일에 묶인 만큼 부모를 가까이에서 모시며 살 수도 없고, 다른 아들들도 모두 외국에 나가서 각자의 생업을 이끌고 가느라 부모는 자식을 키운 공도 되돌려 받지 못하고 쓸쓸히 두 분만 계실 수밖에 없구나 하며 가슴이 무거워진다. 그러다가 또 2천5백 년 전의 그 중국인처럼 부모님을 여의는 고통에 가슴을 쳐야하는 것인가?
그러나 어찌하리오. 자식을 키우면 떠나보내는 것이 부모이고, 부모는 자식을 키우는 것으로서 소임을 다하는 것인 만큼 그 뒤의 것이야 일부러 기대할 수도 없는 것이 아니겠나?
그러나 내가 우리 자식들에게서 기대할 필요가 없다고 해서, 우리 부모에게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싶은 이 간사한 마음이 나는 밉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하지 못하는 이 처지가 한스럽다.
그런 생각으로 하루 종일 무겁다가 겨우 한 꾀가 생각이 났다. “그래 직접 가서 아침 수저를 떠드리지는 못하지만 요즈음 택배가 잘 되어있으니까 뭔가 보내드리자.” 그래서 전화로 조그만 떡 상자를 주문하니 생신날 점심때까지는 도착할 수 있다고 한다. 그 알량한 소포로 괴로운 마음구멍을 막아버리고 나는 또 생업이라는 핑계를 당당하게 내세우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