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동식의 다섯 계절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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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 |
*제32회 - " 곤쟁이 "
영광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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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2
2016.12.01 03:44
흔히 젓을 담가 먹는 조그만 새우종류로 ‘곤쟁이’라는 것이 있다. 길이 1센티미터쯤 되는 작은 새우종류인데, 원래 제대로 된 이름은 곤정이었던 것이 부르기 쉽게 곤쟁이로 된 모양이다. ‘곤정’이란 말은 조선조 중종 때 조광조를 모함해 죽인 남곤과 심정이란 두 간신을 두고두고 조롱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남곤도 원래는 유명한 김종직 문하에서 수학하여 일찍부터 재주가 뛰어난 기대주였다. 18살에 생원, 진사를 거쳐 23살에 별시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검열을 거쳐 연산군으로부터 ‘사가독서(賜暇讀書:왕이 유능한 신빈관리에게 공부에 전념하라고 주는 휴가)’를 받을 정도로 문장과 학식을 인정받았다. 연산군 때 일어난 갑자사화로 유배생활을 하던 남곤은 중종이 반정을 성공하자 박경(朴耕)의 모반을 고변한 공로로 중종의 눈에 들어 계속 승진과 출세의 가도를 걷는다. 그러다가 조광조가 등장하여 원로대신들의 권력을 견제하자 1519년 심정과 더불어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란 글을 써서 벌레들이 파먹게 하고 그것으로서 조광조의 역심의 증거로 삼아 그를 유배하고 살해함으로서 마침내는 하찮은 새우에 그 이름이 붙어 영원히 수모를 받아야 하는 간신배의 영예(?)를 안게 된다.
그 남곤은 권력의 정상에 오르기 전에도 돈에 욕심이 많아서, 삼청동에 큰 돈을 들여 새로 집을 멋있게 지었다. 집 앞에는 맑은 시냇물이 산에서부터 흐르고 뒤에는 큰 바위가 있었다. 그런데 이 집 근처에 자주 놀러 온 한 시인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박은(朴誾)인데, 남곤보다는 8살 아래지만 남곤이 연산군으로부터 독서를 받을 때에 함께 사가독서를 받음으로서 친구가 된다. 그래서 형편이 어려울 때에는 남곤이 종이랑 붓이랑 주곤 한 모양이다. 박온은 남곤이 지은 이 ‘호화주택’을 보고는 불편한 마음이 생겨 이 시냇물에 ‘만리뢰(萬里瀨:말리 밖에 있는 여울)’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큰 바위는 대은암(大隱岩 숨어있는 바위)이라고 불러주었다. 당시 승지였던 남곤이 왕을 모시느라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 늦게 돌아오므로 자기 집 문 앞에 있는 시냇물도 만 리나 떨어진 여울처럼 멀지 않느냐는 뜻이고, 그러니 집 뒤에 있는 큰 바위도 몰라보니 바위도 사실상 꼭꼭 숨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그리고는 술에 취해서 호탕하게 시를 지어 조롱하기를
주인이 벼슬이 높고 세력이 불꽃처럼 타오르니 / 主人官高勢薰灼
문 앞에 문안드리는 거마들이 많도다 / 門前車馬多伺候
3년에 하루도 동산을 돌보지 않으니 / 三年一日不窺園
만약에 산신령이 있다면 응당 허물을 받으리라 / 倘有山靈應受詬
라고 하였다.
또 돈을 많이 밝히는 것을 보고는 이를 비꼬아서
주인이 재물이 많으니 / 主人有金玉
세간인들 어찌 함부로 두겠는가 / 什襲豈輕授
단단히 잠가 놓고 밤중에 지켜도 / 緘縢固鐍守夜半
내와 산을 대낮에 옮겨 가지 않을까 의심스럽도다 / 未信溪山移白晝
라며 시냇물이나 바위는 잃어버리지 않겠느냐고 조롱한다.
언젠가는 남곤이 이 가난한 친구에게 관청에서 쓰던 종이를 선물한 모양이다. 종이는 귀한 선물이라 박온은 고맙기는 하지만, 염치없는 마음을 시로 남기고 있다;
나는 욕심내지 않음을 보배로 삼으니 / 我持不貪以爲寶
마음 속에 한 물건도 걸림이 없네 / 了無一物掛心膈
금과 구슬이 앞에 있어도 흙처럼 보니 / 金珠在前視如泥
보아도 못 본 체, 하물며 집어 던지리 / 視猶不見況更擲
그런데 먹과 종이만은 무엇이 좋길래 / 松煤楮膚有何好
나로 하여금 손에서 줄곧 못 놓게 하는지 / 乃獨令吾手未釋
마음에 욕망 있으면 다 청렴하지 못하나 / 此心有欲皆不廉
이것들에 연연함은 벽이라 어쩔 수 없네 / 於此戀戀無奈癖
그처럼 돈을 모르고 시를 지으며 청빈한 생활을 한 박온이기에, 궁궐에서는 언제나 바른 소리를 하며 잘못을 바로잡기를 서슴치 않았다. 그러다가 연산군 10년인 1504년, 전에 홍문관에 있을 때에 경연(經筵)에서 논계한 일이 빌미가 되어 동래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서울로 끌려와 고문을 받은 뒤에 사형을 당한다. 불과 26살의 젊은 나이에 애꿎게 맞은 죽음이었다.
이 때에 남곤도 유배를 당했지만 남곤은 2년 뒤 새로 등극한 중종에게 고변해서 다른 사람에게 역모의 혐의를 거짓으로 씌우고는 중앙무대에 복귀해서 화려한 출세의 길을 걷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그대로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보면 박은과 남곤은. 친구로서 비슷하게 잘 나가다가 박은은 연산군에 의해 애석하게 목숨을 잃었고, 남곤은 거기서 일대 변신을 해서 조정의 권력 속에 깊이 들어가 드디어는 조광조를 죽이고 영의정까지 하는 호사를 누린다.
그래도 남곤은, 중앙무대로 돌아와서는 죽은 친구 박은을 위해서 그의 글을 모아서 문집을 간행하여 준다. 그렇게 해서 박은의 시는 얼마간 살아남았다. 그의 시는 후세 사람들에 의해 가장 잘 지은 시로 칭송을 받았으며 특히 정조대왕은 일찍이 세자일 때부터 박은의 시를
좋아해서, 박은을 우리나라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하면서, 왕이 된 뒤에는 그의 유고집을 다시 내도록 한 뒤에 직접 서문까지 써 준다;
“대체로 후세의 시를 잘한다는 사람들은 거의가 자신을 높이 표방하면서 스스로 문단을 주도한다고 하는데, 읍취(挹翠 : 박은의 호)의 시만은 그냥 읍취의 시일 뿐이다. 그러나 성조를 깊이 음미하고 격률을 곱씹어 생각이 발로되는 데 미치면, 그 정신의 감응과 조화의 융합이 꾸밈없이 이어져 한없이 쌓이고 엉기고 막힘이 없어 쉬지 않고 흘러, 마치 통창한 거문고 소리와도 같고 간을 맞출 필요가 없는 고깃국과도 같으니, 이것이 과연 누가 시켜서 그러하겠는가. 생각건대 이 시를 지은 이도 그렇게 지어지는 것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결국 정조는 성조와 뜻이 잘 어울어지고 막히고꾸밈이 없이 물 흘러가듯 자연스러우며 그 상쾌한 느낌을 높이 보고 읍취 박은을 조선역사상 최대의 시인이라고 평가한 것이다. 그런 그의 시 가운데 나도 좋아하는 시를 꼽으라면 ‘효망(曉望)’이란 시를 꼽겠다;
曉望星垂海 바다는 새벽 별빛인데
樓高寒襲人 높은 누는 차갑고나
乾坤身外大 하늘은 높고 큰데
鼓角坐來頻 세상은 시끄러워라
遠岫看如霧 먼 산은 안개 낀 듯
喧禽覺已春 새소리에 봄이로군
宿酲應自解 문득 다시 깨닫고
詩興謾相因 시흥을 불러 본다
돌이켜보면 조선제일의 시인으로 평가받는 박은과 조선 제일의 소인배로 평가받는 남곤, 두 친구가 그렇게 가는 길이 달랐던 것이다. 권세를 탐하지 않고 청빈하게 살며 자기의 올흠을 굽히지 않다가 불귀의 객이 된 박은, 비슷한 길에서 갑자기 권력의 화신으로 변한 남곤, 그 두 친구의 사후에 붙는 명예는 극과 극이다. 영의정에 오른 남곤은 잘 살다가 죽었지만 말년에 자신의 행적에 대한 반성과 함께 자신의 글로 해서 화를 당할까 우려해서 자신이 쓴 글을 모두 불태웠다고 한다. 그렇지만 결국 자신에게 오는 비난의 화살은 피하지 못해 그가 죽은 지 30년 만에 그의 화려한 관직과 명예는 모두 몰수되고 천하의 소인배로 낙인이 찍혀버린다.
“죽어서 사후의 명예가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살아생전의 부귀영화가 최고지! ”라고 하면서 당대의 권세에 눈이 어두우면 결국 나중에 후손들이 그 아픔을 당한다. 곤쟁이란 이름을 받은 사람을 생각해보라. 우리가 나를 사랑하는 만큼 나의 가족과 후손들을 생각한다면 사후의 명예도 생각해야 하고, 그러러면 살아 있을 동안에 바른 길을 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리라.
곤쟁이젓을 먹으려다 별 생각을 다 해본다.
남곤도 원래는 유명한 김종직 문하에서 수학하여 일찍부터 재주가 뛰어난 기대주였다. 18살에 생원, 진사를 거쳐 23살에 별시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검열을 거쳐 연산군으로부터 ‘사가독서(賜暇讀書:왕이 유능한 신빈관리에게 공부에 전념하라고 주는 휴가)’를 받을 정도로 문장과 학식을 인정받았다. 연산군 때 일어난 갑자사화로 유배생활을 하던 남곤은 중종이 반정을 성공하자 박경(朴耕)의 모반을 고변한 공로로 중종의 눈에 들어 계속 승진과 출세의 가도를 걷는다. 그러다가 조광조가 등장하여 원로대신들의 권력을 견제하자 1519년 심정과 더불어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란 글을 써서 벌레들이 파먹게 하고 그것으로서 조광조의 역심의 증거로 삼아 그를 유배하고 살해함으로서 마침내는 하찮은 새우에 그 이름이 붙어 영원히 수모를 받아야 하는 간신배의 영예(?)를 안게 된다.
그 남곤은 권력의 정상에 오르기 전에도 돈에 욕심이 많아서, 삼청동에 큰 돈을 들여 새로 집을 멋있게 지었다. 집 앞에는 맑은 시냇물이 산에서부터 흐르고 뒤에는 큰 바위가 있었다. 그런데 이 집 근처에 자주 놀러 온 한 시인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박은(朴誾)인데, 남곤보다는 8살 아래지만 남곤이 연산군으로부터 독서를 받을 때에 함께 사가독서를 받음으로서 친구가 된다. 그래서 형편이 어려울 때에는 남곤이 종이랑 붓이랑 주곤 한 모양이다. 박온은 남곤이 지은 이 ‘호화주택’을 보고는 불편한 마음이 생겨 이 시냇물에 ‘만리뢰(萬里瀨:말리 밖에 있는 여울)’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큰 바위는 대은암(大隱岩 숨어있는 바위)이라고 불러주었다. 당시 승지였던 남곤이 왕을 모시느라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 늦게 돌아오므로 자기 집 문 앞에 있는 시냇물도 만 리나 떨어진 여울처럼 멀지 않느냐는 뜻이고, 그러니 집 뒤에 있는 큰 바위도 몰라보니 바위도 사실상 꼭꼭 숨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그리고는 술에 취해서 호탕하게 시를 지어 조롱하기를
주인이 벼슬이 높고 세력이 불꽃처럼 타오르니 / 主人官高勢薰灼
문 앞에 문안드리는 거마들이 많도다 / 門前車馬多伺候
3년에 하루도 동산을 돌보지 않으니 / 三年一日不窺園
만약에 산신령이 있다면 응당 허물을 받으리라 / 倘有山靈應受詬
라고 하였다.
또 돈을 많이 밝히는 것을 보고는 이를 비꼬아서
주인이 재물이 많으니 / 主人有金玉
세간인들 어찌 함부로 두겠는가 / 什襲豈輕授
단단히 잠가 놓고 밤중에 지켜도 / 緘縢固鐍守夜半
내와 산을 대낮에 옮겨 가지 않을까 의심스럽도다 / 未信溪山移白晝
라며 시냇물이나 바위는 잃어버리지 않겠느냐고 조롱한다.
언젠가는 남곤이 이 가난한 친구에게 관청에서 쓰던 종이를 선물한 모양이다. 종이는 귀한 선물이라 박온은 고맙기는 하지만, 염치없는 마음을 시로 남기고 있다;
나는 욕심내지 않음을 보배로 삼으니 / 我持不貪以爲寶
마음 속에 한 물건도 걸림이 없네 / 了無一物掛心膈
금과 구슬이 앞에 있어도 흙처럼 보니 / 金珠在前視如泥
보아도 못 본 체, 하물며 집어 던지리 / 視猶不見況更擲
그런데 먹과 종이만은 무엇이 좋길래 / 松煤楮膚有何好
나로 하여금 손에서 줄곧 못 놓게 하는지 / 乃獨令吾手未釋
마음에 욕망 있으면 다 청렴하지 못하나 / 此心有欲皆不廉
이것들에 연연함은 벽이라 어쩔 수 없네 / 於此戀戀無奈癖
그처럼 돈을 모르고 시를 지으며 청빈한 생활을 한 박온이기에, 궁궐에서는 언제나 바른 소리를 하며 잘못을 바로잡기를 서슴치 않았다. 그러다가 연산군 10년인 1504년, 전에 홍문관에 있을 때에 경연(經筵)에서 논계한 일이 빌미가 되어 동래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서울로 끌려와 고문을 받은 뒤에 사형을 당한다. 불과 26살의 젊은 나이에 애꿎게 맞은 죽음이었다.
이 때에 남곤도 유배를 당했지만 남곤은 2년 뒤 새로 등극한 중종에게 고변해서 다른 사람에게 역모의 혐의를 거짓으로 씌우고는 중앙무대에 복귀해서 화려한 출세의 길을 걷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그대로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보면 박은과 남곤은. 친구로서 비슷하게 잘 나가다가 박은은 연산군에 의해 애석하게 목숨을 잃었고, 남곤은 거기서 일대 변신을 해서 조정의 권력 속에 깊이 들어가 드디어는 조광조를 죽이고 영의정까지 하는 호사를 누린다.
그래도 남곤은, 중앙무대로 돌아와서는 죽은 친구 박은을 위해서 그의 글을 모아서 문집을 간행하여 준다. 그렇게 해서 박은의 시는 얼마간 살아남았다. 그의 시는 후세 사람들에 의해 가장 잘 지은 시로 칭송을 받았으며 특히 정조대왕은 일찍이 세자일 때부터 박은의 시를
좋아해서, 박은을 우리나라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하면서, 왕이 된 뒤에는 그의 유고집을 다시 내도록 한 뒤에 직접 서문까지 써 준다;
“대체로 후세의 시를 잘한다는 사람들은 거의가 자신을 높이 표방하면서 스스로 문단을 주도한다고 하는데, 읍취(挹翠 : 박은의 호)의 시만은 그냥 읍취의 시일 뿐이다. 그러나 성조를 깊이 음미하고 격률을 곱씹어 생각이 발로되는 데 미치면, 그 정신의 감응과 조화의 융합이 꾸밈없이 이어져 한없이 쌓이고 엉기고 막힘이 없어 쉬지 않고 흘러, 마치 통창한 거문고 소리와도 같고 간을 맞출 필요가 없는 고깃국과도 같으니, 이것이 과연 누가 시켜서 그러하겠는가. 생각건대 이 시를 지은 이도 그렇게 지어지는 것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결국 정조는 성조와 뜻이 잘 어울어지고 막히고꾸밈이 없이 물 흘러가듯 자연스러우며 그 상쾌한 느낌을 높이 보고 읍취 박은을 조선역사상 최대의 시인이라고 평가한 것이다. 그런 그의 시 가운데 나도 좋아하는 시를 꼽으라면 ‘효망(曉望)’이란 시를 꼽겠다;
曉望星垂海 바다는 새벽 별빛인데
樓高寒襲人 높은 누는 차갑고나
乾坤身外大 하늘은 높고 큰데
鼓角坐來頻 세상은 시끄러워라
遠岫看如霧 먼 산은 안개 낀 듯
喧禽覺已春 새소리에 봄이로군
宿酲應自解 문득 다시 깨닫고
詩興謾相因 시흥을 불러 본다
돌이켜보면 조선제일의 시인으로 평가받는 박은과 조선 제일의 소인배로 평가받는 남곤, 두 친구가 그렇게 가는 길이 달랐던 것이다. 권세를 탐하지 않고 청빈하게 살며 자기의 올흠을 굽히지 않다가 불귀의 객이 된 박은, 비슷한 길에서 갑자기 권력의 화신으로 변한 남곤, 그 두 친구의 사후에 붙는 명예는 극과 극이다. 영의정에 오른 남곤은 잘 살다가 죽었지만 말년에 자신의 행적에 대한 반성과 함께 자신의 글로 해서 화를 당할까 우려해서 자신이 쓴 글을 모두 불태웠다고 한다. 그렇지만 결국 자신에게 오는 비난의 화살은 피하지 못해 그가 죽은 지 30년 만에 그의 화려한 관직과 명예는 모두 몰수되고 천하의 소인배로 낙인이 찍혀버린다.
“죽어서 사후의 명예가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살아생전의 부귀영화가 최고지! ”라고 하면서 당대의 권세에 눈이 어두우면 결국 나중에 후손들이 그 아픔을 당한다. 곤쟁이란 이름을 받은 사람을 생각해보라. 우리가 나를 사랑하는 만큼 나의 가족과 후손들을 생각한다면 사후의 명예도 생각해야 하고, 그러러면 살아 있을 동안에 바른 길을 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리라.
곤쟁이젓을 먹으려다 별 생각을 다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