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동식의 다섯 계절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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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 |
*제33회 - " 효도 "
영광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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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1 03:44
우리나라의 유학의 학통은 포은 정몽주에서부터 길재,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등으로 이어져서, 다시 조광조, 이언적, 이황에 이르러 거대한 봉우리를 이룬다. 그런데 이런 학맥에서 특이한 것은 김숙자와 김종직이다. 잘 알다시피 김종직은 김숙자의 아들이다. 유학의 학맥이 이처럼 부자로 바로 이어지는 경우는 다른 예가 없다는데서 김숙자와 김종직이라는 두 유학자는 특이한 경우가 된다.
김숙자(金叔滋, 1389~1456)는 고려 공양왕 원년에 태어나서 세조 2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12세 때부터 선산에 내려와 있던 길재(吉再)에게 《소학》과 경서를 배웠고 역학에 밝은 윤상(尹祥)이 황간 현감으로 내려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선산에서 황간까지 걸어가서 배움을 청하자, 그 열의를 보고 윤상이 《주역》의 깊은 뜻을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31살에 벼슬에 나가서 37년간 여섯 번의 주부(主簿), 두 번의 부령(部令), 세 번의 현감(縣監)에다 성균관 사예(司藝)를 지냈으나 그리 높은 자리는 아니었다. 그는 43살에 둘째 아들 종직(宗直)을 얻었으며, 그 해에 부친이 돌아가시자 3년 동안 묘소에 여막을 짓고서 조석을 받들어 올렸는데, 이 때 여막 곁에 서재를 만들어 여기에서 후진들의 가르침을 계속하여 큰 감동을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때 건강을 크게 상해 그 때문에 말년에 고생을 많이 했다.
그는 천성이 충후(忠厚)하여 모가 나지 않았으며 얼굴에 희로(喜怒)의 빛을 드러내지 않았고,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서는 원만하고 적당하여 사람마다 공을 사랑하고 공경하였다. 그는 평상시에 비록 손님이 없더라도 머리에서 관을 벗지 않았고, 허리에서 혁대를 풀지 않았다. 매일 이른 새벽이면 일어나서 세수하고 의관(衣冠)을 착용하고 단정히 앉아 임종할 때가지 이런 모습이었으므로 처자(妻子)나 노비(奴婢)들까지도 그 나태한 모습을 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김숙자의 이런 일생을 자세히 알게 된 것은, 그 아들인 김종직이 쓴 <이준록(彛尊錄)>이란 글 덕택이다. 김숙자는 종직이 스물 여섯 살이 되던 해에 돌아가셨다. 이 때에 종직은 아직 문과에 급제하지 못한 상태였다. 삼년 복을 마친 종직은 집에 있으면서, 선공(돌아가신 부친)이 지극한 덕과 훌륭한 행실이 있는데도 세상에 크게 드러나지 못함을 애통하게 여기어, 아버지의 일생을 정리한다. 먼저 집안 족보관계를 그리고, 편년체로 아버지의 일생을 정리한 뒤, 아버지와 교유한 분들의 이름과 사실을 다 적고, 아버지의 행실과 말씀, 글 등을 하나하나 찾아서 꼼꼼하게 기록한다. 그리고는 그 기록을 <이준록>이라고 명명해서 상자 속에 넣어두고 남에게는 공개하지 않았다. ‘이준(彛尊)’이란 말은 <예기(禮記)>의 “겨울 제사 때 이정에다 명문을 새긴다([施于烝彝鼎)”라는 데서 뜻을 취한 것으로 아버지에게 바치는 글의 뜻이라고 한다.
예로부터 부친을 칭송하고 싶은 것은 자식으로서 인지상정이라 하겠다. 요즈음에도 돌아가시기 전에 미리 회고록을 쓰게 하거나 돌아가신 뒤에도 회고록을 써서 세상에 자신의 아버지를 알리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아버지를 닮아 효성이 지극한 김종직이지만 생전에 아버님의 행적을 드러내 놓고 알리는 것은, 엄격한 유학자의 길을 걸은 자신의 입장에서 보면 낯 뜨거운 일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나중에 자연스럽게 알려질 것을 기대한 듯 공개하지 않았고, 선생이 작고한 후 6년째 되던 봄에 선생의 생질인 흥해 군수(興海郡守) 강자온(康子韞)이 어수선한 가운데서 이것을 찾아내어 장차 이를 간행(刊行)함으로서 알려지게 되었다.
선생은 선친의 행적을 적으면서 이렇게 시작한다;
아, 선공의 평일의 덕행과 사업은 기록할 만한 것이 매우 많다. 그러나 고(孤) 종직이 어찌 감히 남들에게 그것을 칭도(稱道)할 수 있겠는가. 자식으로서 선인의 선(善)을 칭양(稱揚)한다면 그 누가 믿어주겠는가. 그러나 선공이 조정에 벼슬할 적에는 모두 용관(冗官)만 지냈으므로, 태사씨(太史氏)가 그 행사(行事)를 기록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또 아름다운 학덕을 속에 쌓아 두고 스스로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남들은 그 한계를 엿볼 수가 없었다. 그러니 무릎 앞에 앉아 직접 얼굴을 뵈면서 한 번 찡그리고 한 번 웃고 하는 가운데서 친히 이목(耳目)에 유염(濡染)되어 조그마한 것도 빠뜨리지 않고 다 겪은 것이 그 누가 이 고(孤)만 하겠는가. 그러니 남들에게 믿음을 받지 못할 것을 걱정하여 기록하지 않는다면 선공의 아름다운 것들이 끝내 세상에 밝게 드러나지 못하겠기에, 고가 이 때문에 크게 두려워한 것이다. 삼가 생각건대, 고는 선공의 실상을 기록할 뿐이니, 남들에게 믿음을 받거나 못 받는 것이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마침내 눈물을 닦으며 기록하여 후세의 자손된 자들에게 끼쳐주는 바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이렇게 끝낸다;
이상은 선공의 세계 원류(世系源流), 역관(歷官)의 일월(日月), 사우(師友)의 성씨(姓氏), 덕행(德行)과 사업(事業)을 합해서 한 질(帙)로 만든 것이다. 아, 슬프도다. 선공께서 나를 낳으시고 가르쳐서 숫자와 방위를 알게 해 주었는데, 끝내 선공의 건강하던 때에 효도를 해서 보답하지 못하였다.
지난해 정월에 회시(會試)가 임박하여 백씨와 함께 당(堂) 아래서 선공께 하직을 고하자, 선공이 술잔을 들어 우리 두 사람을 축복하여 이르기를, “너희 형제가 고제(高第)를 취하여 돌아온다면 내가 또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 감히 이 술잔으로 너희들을 위해 축복하노라.” 하였다. 그런데 내가 평소에는 비록 큰 슬픔이 있더라도 어버이 마음이 상하게 될까 염려하여 일찍이 슬하(膝下)에서 눈물을 보인 적이 없었는데, 이 때에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래서 마침내 백씨와 함께 서울에 가서 백씨는 선공의 소망을 이루었고, 나는 패배하여 고향으로 돌아오다가, 이문(里門)에 미처 당도하기 전에 황간(黃澗)의 길 위에서 이 크나큰 비보를 들었으니, 하늘이여, 하늘이여,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선조여, 선조여,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술잔을 잡고 축복하던 말씀이 귀에 쟁쟁하니, 이것이 바로 선공의 영결(永訣)의 말씀이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니, 당시의 눈물은 또한 하늘이 내 마음을 달래어 선공의 좌우를 떠나지 말도록 한 것이었는데, 이록(利祿)에 얽매임을 면치 못하여 끝내 떠나가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극악스럽고 극역(極逆)스러워라, 누구에게 그 허물을 책임지우겠는가. 흉독스럽고 흉독스러워라, 인간 세상에 무슨 즐거움이 있어서 혼자 생명을 보전한단 말인가. 그런데도 오히려 무지하게 스스로 살아남아서 두 번째 한서(寒暑)를 만나 어느덧 상(祥), 담(禫)에 이르렀으니, 아, 슬프도다. 아, 슬프도다. 그 평생의 가언 선행(嘉言善行)에 대해서는 만분의 일도 다 말할 수 없으므로, 우선 나의 한(恨)에 뜻을 부치는 것만을 다행으로 삼을 뿐이다.
천순(天順) 2년 무인년(1458, 세조4) 4월 일에 종직은 기록한다.
우리는 효의 시작과 끝이 무엇인지를 옛 문장을 통해서 배웠다.
身體髮膚는 受之父母하니
不敢毁傷이 孝之始也라
立身而揚名於後世하야
以顯父母가 孝之終也라
우리 몸은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니 이를 다치거나 상하게 하면 부모의 마음이 아플 것이니 소중히 간직하는 것이 효의 시작이며, 나중에 출세해서 이름을 드날리어 부모를 드러내는 것이 효의 마지막이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점필재 김종직은 스스로 노력해서 큰 유학자가 되었으니 효를 다한 것이지만, 생전에 아버지로부터 보고 듣고 배운 그 모든 것을 엄정한 필치로 꼼꼼하게 되살림으로서 아버지의 면모가 그대로 후세에 전해지도록 함으로서 남들이 하지 못한 효를 더한 것이 된다.
오늘날 수많은 자서전과 전기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유학자 김종직이 아버지를 드러내고 이를 알린 방식은 빛이 바래지 않을까 생각도 해보지만, 생전에 알려 아버지의 업적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쓰지 않고, 자신이 지키고 있다가 사후에 자연스레 후대에 알려지게 한 것은 정말로 진정한 효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과연 어떠한 방식으로 부모를 빛내는가?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부모를 깎아내리고 부모를 안타깝게만 하는 것은 아닌가?
김숙자(金叔滋, 1389~1456)는 고려 공양왕 원년에 태어나서 세조 2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12세 때부터 선산에 내려와 있던 길재(吉再)에게 《소학》과 경서를 배웠고 역학에 밝은 윤상(尹祥)이 황간 현감으로 내려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선산에서 황간까지 걸어가서 배움을 청하자, 그 열의를 보고 윤상이 《주역》의 깊은 뜻을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31살에 벼슬에 나가서 37년간 여섯 번의 주부(主簿), 두 번의 부령(部令), 세 번의 현감(縣監)에다 성균관 사예(司藝)를 지냈으나 그리 높은 자리는 아니었다. 그는 43살에 둘째 아들 종직(宗直)을 얻었으며, 그 해에 부친이 돌아가시자 3년 동안 묘소에 여막을 짓고서 조석을 받들어 올렸는데, 이 때 여막 곁에 서재를 만들어 여기에서 후진들의 가르침을 계속하여 큰 감동을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때 건강을 크게 상해 그 때문에 말년에 고생을 많이 했다.
그는 천성이 충후(忠厚)하여 모가 나지 않았으며 얼굴에 희로(喜怒)의 빛을 드러내지 않았고,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서는 원만하고 적당하여 사람마다 공을 사랑하고 공경하였다. 그는 평상시에 비록 손님이 없더라도 머리에서 관을 벗지 않았고, 허리에서 혁대를 풀지 않았다. 매일 이른 새벽이면 일어나서 세수하고 의관(衣冠)을 착용하고 단정히 앉아 임종할 때가지 이런 모습이었으므로 처자(妻子)나 노비(奴婢)들까지도 그 나태한 모습을 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김숙자의 이런 일생을 자세히 알게 된 것은, 그 아들인 김종직이 쓴 <이준록(彛尊錄)>이란 글 덕택이다. 김숙자는 종직이 스물 여섯 살이 되던 해에 돌아가셨다. 이 때에 종직은 아직 문과에 급제하지 못한 상태였다. 삼년 복을 마친 종직은 집에 있으면서, 선공(돌아가신 부친)이 지극한 덕과 훌륭한 행실이 있는데도 세상에 크게 드러나지 못함을 애통하게 여기어, 아버지의 일생을 정리한다. 먼저 집안 족보관계를 그리고, 편년체로 아버지의 일생을 정리한 뒤, 아버지와 교유한 분들의 이름과 사실을 다 적고, 아버지의 행실과 말씀, 글 등을 하나하나 찾아서 꼼꼼하게 기록한다. 그리고는 그 기록을 <이준록>이라고 명명해서 상자 속에 넣어두고 남에게는 공개하지 않았다. ‘이준(彛尊)’이란 말은 <예기(禮記)>의 “겨울 제사 때 이정에다 명문을 새긴다([施于烝彝鼎)”라는 데서 뜻을 취한 것으로 아버지에게 바치는 글의 뜻이라고 한다.
예로부터 부친을 칭송하고 싶은 것은 자식으로서 인지상정이라 하겠다. 요즈음에도 돌아가시기 전에 미리 회고록을 쓰게 하거나 돌아가신 뒤에도 회고록을 써서 세상에 자신의 아버지를 알리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아버지를 닮아 효성이 지극한 김종직이지만 생전에 아버님의 행적을 드러내 놓고 알리는 것은, 엄격한 유학자의 길을 걸은 자신의 입장에서 보면 낯 뜨거운 일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나중에 자연스럽게 알려질 것을 기대한 듯 공개하지 않았고, 선생이 작고한 후 6년째 되던 봄에 선생의 생질인 흥해 군수(興海郡守) 강자온(康子韞)이 어수선한 가운데서 이것을 찾아내어 장차 이를 간행(刊行)함으로서 알려지게 되었다.
선생은 선친의 행적을 적으면서 이렇게 시작한다;
아, 선공의 평일의 덕행과 사업은 기록할 만한 것이 매우 많다. 그러나 고(孤) 종직이 어찌 감히 남들에게 그것을 칭도(稱道)할 수 있겠는가. 자식으로서 선인의 선(善)을 칭양(稱揚)한다면 그 누가 믿어주겠는가. 그러나 선공이 조정에 벼슬할 적에는 모두 용관(冗官)만 지냈으므로, 태사씨(太史氏)가 그 행사(行事)를 기록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또 아름다운 학덕을 속에 쌓아 두고 스스로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남들은 그 한계를 엿볼 수가 없었다. 그러니 무릎 앞에 앉아 직접 얼굴을 뵈면서 한 번 찡그리고 한 번 웃고 하는 가운데서 친히 이목(耳目)에 유염(濡染)되어 조그마한 것도 빠뜨리지 않고 다 겪은 것이 그 누가 이 고(孤)만 하겠는가. 그러니 남들에게 믿음을 받지 못할 것을 걱정하여 기록하지 않는다면 선공의 아름다운 것들이 끝내 세상에 밝게 드러나지 못하겠기에, 고가 이 때문에 크게 두려워한 것이다. 삼가 생각건대, 고는 선공의 실상을 기록할 뿐이니, 남들에게 믿음을 받거나 못 받는 것이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마침내 눈물을 닦으며 기록하여 후세의 자손된 자들에게 끼쳐주는 바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이렇게 끝낸다;
이상은 선공의 세계 원류(世系源流), 역관(歷官)의 일월(日月), 사우(師友)의 성씨(姓氏), 덕행(德行)과 사업(事業)을 합해서 한 질(帙)로 만든 것이다. 아, 슬프도다. 선공께서 나를 낳으시고 가르쳐서 숫자와 방위를 알게 해 주었는데, 끝내 선공의 건강하던 때에 효도를 해서 보답하지 못하였다.
지난해 정월에 회시(會試)가 임박하여 백씨와 함께 당(堂) 아래서 선공께 하직을 고하자, 선공이 술잔을 들어 우리 두 사람을 축복하여 이르기를, “너희 형제가 고제(高第)를 취하여 돌아온다면 내가 또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 감히 이 술잔으로 너희들을 위해 축복하노라.” 하였다. 그런데 내가 평소에는 비록 큰 슬픔이 있더라도 어버이 마음이 상하게 될까 염려하여 일찍이 슬하(膝下)에서 눈물을 보인 적이 없었는데, 이 때에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래서 마침내 백씨와 함께 서울에 가서 백씨는 선공의 소망을 이루었고, 나는 패배하여 고향으로 돌아오다가, 이문(里門)에 미처 당도하기 전에 황간(黃澗)의 길 위에서 이 크나큰 비보를 들었으니, 하늘이여, 하늘이여,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선조여, 선조여,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술잔을 잡고 축복하던 말씀이 귀에 쟁쟁하니, 이것이 바로 선공의 영결(永訣)의 말씀이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니, 당시의 눈물은 또한 하늘이 내 마음을 달래어 선공의 좌우를 떠나지 말도록 한 것이었는데, 이록(利祿)에 얽매임을 면치 못하여 끝내 떠나가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극악스럽고 극역(極逆)스러워라, 누구에게 그 허물을 책임지우겠는가. 흉독스럽고 흉독스러워라, 인간 세상에 무슨 즐거움이 있어서 혼자 생명을 보전한단 말인가. 그런데도 오히려 무지하게 스스로 살아남아서 두 번째 한서(寒暑)를 만나 어느덧 상(祥), 담(禫)에 이르렀으니, 아, 슬프도다. 아, 슬프도다. 그 평생의 가언 선행(嘉言善行)에 대해서는 만분의 일도 다 말할 수 없으므로, 우선 나의 한(恨)에 뜻을 부치는 것만을 다행으로 삼을 뿐이다.
천순(天順) 2년 무인년(1458, 세조4) 4월 일에 종직은 기록한다.
우리는 효의 시작과 끝이 무엇인지를 옛 문장을 통해서 배웠다.
身體髮膚는 受之父母하니
不敢毁傷이 孝之始也라
立身而揚名於後世하야
以顯父母가 孝之終也라
우리 몸은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니 이를 다치거나 상하게 하면 부모의 마음이 아플 것이니 소중히 간직하는 것이 효의 시작이며, 나중에 출세해서 이름을 드날리어 부모를 드러내는 것이 효의 마지막이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점필재 김종직은 스스로 노력해서 큰 유학자가 되었으니 효를 다한 것이지만, 생전에 아버지로부터 보고 듣고 배운 그 모든 것을 엄정한 필치로 꼼꼼하게 되살림으로서 아버지의 면모가 그대로 후세에 전해지도록 함으로서 남들이 하지 못한 효를 더한 것이 된다.
오늘날 수많은 자서전과 전기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유학자 김종직이 아버지를 드러내고 이를 알린 방식은 빛이 바래지 않을까 생각도 해보지만, 생전에 알려 아버지의 업적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쓰지 않고, 자신이 지키고 있다가 사후에 자연스레 후대에 알려지게 한 것은 정말로 진정한 효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과연 어떠한 방식으로 부모를 빛내는가?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부모를 깎아내리고 부모를 안타깝게만 하는 것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