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동식의 다섯 계절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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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 |
*제38회 - " 이렇게 늙어도 "
영광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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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1 03:44
모처럼 수원에 계신 부모님 댁을 찾아 밤을 보낸 뒤 새벽에 일찍 잠이 깨어 뭔가 읽을 것을 찾는다고 뒤적이다보니 아버님 책장에 책이 한 권 있었다. 책 제목은 『나는 이렇게 나이 들고 싶다』. 일본의 여류 작가 겸 사회활동가인 소노 아야코(曾野綾子)씨가 쓴 것이다. “아니 아버님이 이런 책을 보신단 말인가?” 이런 생각을 하며 펴보니, 일본에서의 책의 원래 제목은 『계로록(戒老錄)』이니까, 늙음을 경계하는 글, 또는 노인들에게 주는 글로 풀 수 있는데, 저자가 41살 때인 1972년에 첫 출판된 이후 계속 인기를 얻고 있는 책이란다. 책에는 재미있는 글들이 많이 있다;
누가 이런 늙음의 모습을 만들었을까? 그것은 당신도 아니고 나도 아니다. 눈은 둘, 코는 하나로 만들어져 있듯이 이유도 없이 늙는다는 것도 어떤 하나의 모습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가 이런 모습을 선택했다고 한다면 수치스러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연스레 주어진 늙음의 모습에 하등의 저항할 필요가 없다. p224
노년은 인간의 일생 중 연속된 하나의 과정에 지나지 않으며, 이런 모습을 총괄적으로 파악하지 못하면 인생도, 노년도 파악할 수 없다. 노년은 반드시 지나야 할 하나의 과정인 것이다. 처음부터 노인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특수한 환자가 아닌 한 보통은 있을 수 없다. 이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노년만을 떼어내 문제를 삼으려고 할 때 거기서 인간은 자기를 상실하고 노년의 절망과 분노가 생겨나게 된다. p261
이 글에서 보듯 저자는 늙음에 대해 절망하거나 분노를 느끼지 말기를 권유하고 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노인이란 것은 자격도 지위도 아니다. 남이 ‘해주는 것’에 대한 당연함, 또는 노인이라고 해서 남의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생각이 착각이라고 말해 준다. 그렇게 생각해야 노인이라는 고독감이나 자괴감에 빠져들지 않고, 타인과의 어우러짐 속에서 멋진 노년을 보낼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를 위해 경계해야 할 것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남이 ‘주는 것’, ‘해주는 것’에 대한 기대를 버린다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일은 일단 포기할 것
*자신의 고통이 이 세상에서 가장 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생활 방법을 왈가왈부하지 말고 그대로 인정할 것
*무슨 일이든 스스로 하려고 노력할 것
*젊었을 때보다 자신에게 더욱 엄격해질 것
*젊은 세대는 나보다 바쁘다는 것을 명심할 것
*생활의 외로움은 아무도 해결해줄 수 없다
*같은 연배끼리 사귀는 것이 노후를 충실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즐거움을 얻고 싶다면 돈을 아끼지 말 것.....
이런 권유사항들을 읽어 내려가다 보니 어떻게 보면 현대의 노인들에게 꼭 필요한 내용이란 생각이 든다. 놀라운 것은, 이런 글을 저자인 소노 아야코 씨는 나이 마흔 초반에 썼다는 것이다. 그 때가 1972년이니 그로부터 30여 년이 더 지난 현대에도 이 책의 내용이 공감을 주고 있다면, 40대 초반의 한 여성의 예지가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나의 눈을 책에 붙들어 맨 것은, 이 책의 내용이 상당부분 자식에게 기대를 하지 말고 노년을 스스로의 힘으로 열어 나가라는 것인데, 아버님이 이런 책을 혼자서 보신다는 것이고, 또한 이미 그것을 실천하고 계신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 생각나서였다. 막내딸이 출가를 한 뒤 두 분만이 생활을 해오신지 벌써 20년 가까이 되는데, 아버님은, 이미 이런 저런 책을 통해서건, 경험에서건, 노인으로서의 의타심이나 기대를 일찌감치 정리하고 스스로의 생활을 잘 이끌고 계시다는 생각이다. 왜 그렇게 되셨냐 하면 역시 장성한 아들이 셋이나 있지만, 부모를 함께 모시려고 하는 아들이 나타나지 않으실 것으로 예견하고 그런 생활을 준비하고 실행하고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한 생각은 특히 맏이인 나에게는 아픔으로 다가왔다.
사실 나이가 많아지는 부모님들은, 자식이 며느리와 함께 정성껏 봉양을 해 주면 얼마나 좋으실 것인가? 설 아침 식사를 끝내고는 “참 잘 먹었다. 이렇게 잘 차려주는 음식을 먹으니 저 좋구나”라고 하신 어머님 말씀은 은연중에 그런 기대를 내비친 것이리라. 그러나 부모님도 알고 계실 것이고 나도 또한 안다. 나도 아들이나 며느리한테 내 노후를 의지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모님도 자식들에게 노후를 의지하는 것은, 서로에게 힘든 일임을 알고 계신 듯하다. 맏이건 기차건 부모를 모시는 것은, 자식의 마음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고, 억지로 시도하다가 더 큰 문제가 생길 여지도 배제할 수 없다.
결국, 부모님께는 죄송한 일이지만, 아버님이 그런 책을 보시며 일찍부터 노후를 그런 쪽으로 준비를 해 오신 것을 보니 마음이 꼭 아픈 것만은 아니다. 당신들이 퇴직을 앞당기시고 시골에 조그만 텃밭이 달린 농가를 사서, 채소와 과수 등을 키우시며 자식들에게 그것을 나눠주는 재미로 노년을 잘 경영하고 계시는 것이 바로 그런 뜻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 책의 저자는 십년 뒤 나이 오십이 넘은 1982년 2판 후기(後記)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는 요즈음 만년에 있어서 필요한 네 가지를 허용(許容), 납득(納得), 단념(斷念) 그리고 회귀(回歸)라고 생각하게끔 되었다..... 즉 이 세상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선과 악이 어떤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 허용이며, 내 자신에게 일어난 여러 가지 상황을 정성을 다해 의미를 부여하려는 것이 납득이다. 종교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신의 의지를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것에서 보고자 하는 노력이다. 갈망했으나 이루지 못했던 것은 어떠한 인간의 생애에도 있으며, 그때 집착하지 않고 슬그머니 물러날 수 있다면 오히려 여유 있고 온화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단념이다. 그리고 회귀란 사후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생각하는 것이다.”
특이하게도 소노 아야코 씨는 자신이 노년이 될 때까지 세 번이나 이 책의 후기를 고쳐 쓰면서도 책의 내용은 수정하지 않는다. 그만큼 자신이 노인이 되면서 느끼는 것을, 이미 자신이 잘 썼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일흔이 넘어서 『중년이후(中年以後)』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이 몇 년 전 우리나라에 번역되면서 인기를 끌었다. 아마도 저자는 노년이 되어서야 노년의 준비를 위한 중년의 중요성을 체감하고 이를 글로써 알린 것이리라. 저자는 50대까지의 중년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비록 중년기에 체력 지수는 하강하지만 정신 지수는 상승하기 때문에, 중년은 용서의 시기이며 존재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시기이다. 이 때에는 인생의 켜켜에 숨겨져 있는 사연을 중층적으로 보면서 물러설 때를 늘 염두에 두고 살아가야 한다. 또한 남은 인생 동안 가지고 있던 것들을 하나씩 잃어버리며 살게 된다는 진리를 깨닫고, 그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끌어안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저자는 먼저 노년에 대해 쓰고 중년에 대해서는 그 다음에 썼지만, 우리 같은 중년이나 혹은 노년에도 관심이 있는 젊은 층들은 먼저 『중년이후』라는 책을 읽고 나중에 『나는 이렇게 나이 들고 싶다』라는 책을 읽을 것을 권하고 싶다. “아니 젊은이들에게 음력 새해 벽두부터 무슨 노년준비람?”하고 퉁을 주실 분들이 많이 있겠지만 원래 설이라는 게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간절히 생각해보는 시기이기에 그런 생각을 늙었다고 꾸지람을 받을 일만은 아닌 것 같다. 그리고 늙지 않을 사람 있으면 어디 나와 보라!
누가 이런 늙음의 모습을 만들었을까? 그것은 당신도 아니고 나도 아니다. 눈은 둘, 코는 하나로 만들어져 있듯이 이유도 없이 늙는다는 것도 어떤 하나의 모습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가 이런 모습을 선택했다고 한다면 수치스러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연스레 주어진 늙음의 모습에 하등의 저항할 필요가 없다. p224
노년은 인간의 일생 중 연속된 하나의 과정에 지나지 않으며, 이런 모습을 총괄적으로 파악하지 못하면 인생도, 노년도 파악할 수 없다. 노년은 반드시 지나야 할 하나의 과정인 것이다. 처음부터 노인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특수한 환자가 아닌 한 보통은 있을 수 없다. 이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노년만을 떼어내 문제를 삼으려고 할 때 거기서 인간은 자기를 상실하고 노년의 절망과 분노가 생겨나게 된다. p261
이 글에서 보듯 저자는 늙음에 대해 절망하거나 분노를 느끼지 말기를 권유하고 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노인이란 것은 자격도 지위도 아니다. 남이 ‘해주는 것’에 대한 당연함, 또는 노인이라고 해서 남의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생각이 착각이라고 말해 준다. 그렇게 생각해야 노인이라는 고독감이나 자괴감에 빠져들지 않고, 타인과의 어우러짐 속에서 멋진 노년을 보낼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를 위해 경계해야 할 것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남이 ‘주는 것’, ‘해주는 것’에 대한 기대를 버린다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일은 일단 포기할 것
*자신의 고통이 이 세상에서 가장 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생활 방법을 왈가왈부하지 말고 그대로 인정할 것
*무슨 일이든 스스로 하려고 노력할 것
*젊었을 때보다 자신에게 더욱 엄격해질 것
*젊은 세대는 나보다 바쁘다는 것을 명심할 것
*생활의 외로움은 아무도 해결해줄 수 없다
*같은 연배끼리 사귀는 것이 노후를 충실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즐거움을 얻고 싶다면 돈을 아끼지 말 것.....
이런 권유사항들을 읽어 내려가다 보니 어떻게 보면 현대의 노인들에게 꼭 필요한 내용이란 생각이 든다. 놀라운 것은, 이런 글을 저자인 소노 아야코 씨는 나이 마흔 초반에 썼다는 것이다. 그 때가 1972년이니 그로부터 30여 년이 더 지난 현대에도 이 책의 내용이 공감을 주고 있다면, 40대 초반의 한 여성의 예지가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나의 눈을 책에 붙들어 맨 것은, 이 책의 내용이 상당부분 자식에게 기대를 하지 말고 노년을 스스로의 힘으로 열어 나가라는 것인데, 아버님이 이런 책을 혼자서 보신다는 것이고, 또한 이미 그것을 실천하고 계신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 생각나서였다. 막내딸이 출가를 한 뒤 두 분만이 생활을 해오신지 벌써 20년 가까이 되는데, 아버님은, 이미 이런 저런 책을 통해서건, 경험에서건, 노인으로서의 의타심이나 기대를 일찌감치 정리하고 스스로의 생활을 잘 이끌고 계시다는 생각이다. 왜 그렇게 되셨냐 하면 역시 장성한 아들이 셋이나 있지만, 부모를 함께 모시려고 하는 아들이 나타나지 않으실 것으로 예견하고 그런 생활을 준비하고 실행하고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한 생각은 특히 맏이인 나에게는 아픔으로 다가왔다.
사실 나이가 많아지는 부모님들은, 자식이 며느리와 함께 정성껏 봉양을 해 주면 얼마나 좋으실 것인가? 설 아침 식사를 끝내고는 “참 잘 먹었다. 이렇게 잘 차려주는 음식을 먹으니 저 좋구나”라고 하신 어머님 말씀은 은연중에 그런 기대를 내비친 것이리라. 그러나 부모님도 알고 계실 것이고 나도 또한 안다. 나도 아들이나 며느리한테 내 노후를 의지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모님도 자식들에게 노후를 의지하는 것은, 서로에게 힘든 일임을 알고 계신 듯하다. 맏이건 기차건 부모를 모시는 것은, 자식의 마음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고, 억지로 시도하다가 더 큰 문제가 생길 여지도 배제할 수 없다.
결국, 부모님께는 죄송한 일이지만, 아버님이 그런 책을 보시며 일찍부터 노후를 그런 쪽으로 준비를 해 오신 것을 보니 마음이 꼭 아픈 것만은 아니다. 당신들이 퇴직을 앞당기시고 시골에 조그만 텃밭이 달린 농가를 사서, 채소와 과수 등을 키우시며 자식들에게 그것을 나눠주는 재미로 노년을 잘 경영하고 계시는 것이 바로 그런 뜻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 책의 저자는 십년 뒤 나이 오십이 넘은 1982년 2판 후기(後記)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는 요즈음 만년에 있어서 필요한 네 가지를 허용(許容), 납득(納得), 단념(斷念) 그리고 회귀(回歸)라고 생각하게끔 되었다..... 즉 이 세상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선과 악이 어떤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 허용이며, 내 자신에게 일어난 여러 가지 상황을 정성을 다해 의미를 부여하려는 것이 납득이다. 종교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신의 의지를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것에서 보고자 하는 노력이다. 갈망했으나 이루지 못했던 것은 어떠한 인간의 생애에도 있으며, 그때 집착하지 않고 슬그머니 물러날 수 있다면 오히려 여유 있고 온화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단념이다. 그리고 회귀란 사후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생각하는 것이다.”
특이하게도 소노 아야코 씨는 자신이 노년이 될 때까지 세 번이나 이 책의 후기를 고쳐 쓰면서도 책의 내용은 수정하지 않는다. 그만큼 자신이 노인이 되면서 느끼는 것을, 이미 자신이 잘 썼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일흔이 넘어서 『중년이후(中年以後)』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이 몇 년 전 우리나라에 번역되면서 인기를 끌었다. 아마도 저자는 노년이 되어서야 노년의 준비를 위한 중년의 중요성을 체감하고 이를 글로써 알린 것이리라. 저자는 50대까지의 중년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비록 중년기에 체력 지수는 하강하지만 정신 지수는 상승하기 때문에, 중년은 용서의 시기이며 존재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시기이다. 이 때에는 인생의 켜켜에 숨겨져 있는 사연을 중층적으로 보면서 물러설 때를 늘 염두에 두고 살아가야 한다. 또한 남은 인생 동안 가지고 있던 것들을 하나씩 잃어버리며 살게 된다는 진리를 깨닫고, 그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끌어안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저자는 먼저 노년에 대해 쓰고 중년에 대해서는 그 다음에 썼지만, 우리 같은 중년이나 혹은 노년에도 관심이 있는 젊은 층들은 먼저 『중년이후』라는 책을 읽고 나중에 『나는 이렇게 나이 들고 싶다』라는 책을 읽을 것을 권하고 싶다. “아니 젊은이들에게 음력 새해 벽두부터 무슨 노년준비람?”하고 퉁을 주실 분들이 많이 있겠지만 원래 설이라는 게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간절히 생각해보는 시기이기에 그런 생각을 늙었다고 꾸지람을 받을 일만은 아닌 것 같다. 그리고 늙지 않을 사람 있으면 어디 나와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