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동식의 다섯 계절의 노래


 

이동식
1953년 생. 서울대학교 영어교육학과 졸업후 1977년 KBS에 입사하여 30여 년을 현장에서 보낸 언론인이다. 초대 북경특파원, 런던지국장, 과학부장, 국제부장, 보도제작국장, 문화담당....< 더보기 >

*제41회 - " 더울 때는 "

영광도서 0 564
“입추가 지나 며칠 동안 제법 서늘한 기운이 돌더니 이윽고 혹독한 무더위가 점차 기승을 부려 한여름보다도 더욱 심하였다. 더위를 먹어 마음을 다잡을 수 없기에 마침내 2백 자의 시를 짓게 되었다.”

이 말은 내가 한 말이 아니다. 무더위에 지친 계곡(谿谷) 장유(張維, 1587~1638)선생이 뭔가 더위를 잊을 일이 없을까 하고 시를 지으면서 시 앞에도 붙인 글이다. 원시는 오언(五言)으로 된 고시(古詩)이지만 우리 말로 해도 한 편의 멋진 시가 된다.

“가을철 접어들며 조금 서늘한 기운
며칠 동안 가을바람 불어오기에
숙살지기(肅殺之氣) 엄습하는 계절인 만큼
교만한 노염(老炎) 이제는 막 내렸다 여겼는데
끄떡없이 다시금 기승을 부려
갈수록 꼼짝없이 답답하게 만들면서
어둠침침 안개 비 흩뿌리는가 하면
작렬하는 태양 사정없이 불태우네
물결 하나 일지 않는 텅 빈 연못
높은 나뭇가지에도 바람 한 점 안 부나니
모시 옷 걸쳐도 마치 갑옷 입은 듯
높은 집에 있어도 마치 가마 굽는 듯
게다가 나의 처소 낮고 비좁아
빈한한 생활 감수하며 사는 처지에
붉은 해 하루 종일 곧추 내리쬐니
온몸이 녹아나며 기름 땀 범벅이라
옛날 병 발작할까 따질 사이 또 있으랴
숨이 턱턱 막히면서 소갈증(消渴症) 생겼나니
마치도 가마솥 물고기처럼
이리 뒹굴 저리 뒹굴 삶기기만 기다리네
땀을 훔치고 창틀에 기대어도
몰아쉬는 숨소리 헉헉거릴 뿐
밤에 더욱 극성인 이 놈의 찜통 더위
언제쯤 늦더위가 사라질런고...“

영락없이 요즈음 우리들이 당하는 고통을 이미 400여 년 전에 여실하게 묘사해놓았다. 옛날의 피서도구래야 부채와 돗자리밖에는 없었을 시대에 살던 그런 사람 앞에서 냉장고와 선풍기, 에어컨까지 갖고 있는 우리들이 지금 무더위 타령을 한다는 것이 어찌 보면 너무 사치스럽기까지 하지만, 그래도 덥기는 덥다. 그래서 사람들은 계절을 빨리 앞당기고 싶어지는 것이요, 그 마음은 옛 사람이라고 다를 바 없다. 계곡 장유선생은 그 시에서 계속 말한다;

“돗자리 펴 보지만 정말 그냥 해 보는 일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짧은 밤 지새우며
머리들어 밤 하늘에 하소연해서
국자 모양 북두칠성 되돌려놓게 하고 싶네“

라고 하소연한다.
이런 무더운 때에는 친구도 귀찮다. 그저 시원한 계곡에 발을 담그고 세상사 잊고 싶다. 갖은 세상풍파 속에서 평생 연구와 저술에만 전념한 다산 정약용도 그렇게 보면 평범한 우리 이웃 아저씨이다.

한 해 한 번 더위를 견뎌왔으나
금년에는 견뎌내기 너무 어렵네
툭 트인 난간이야 있긴 하지만
물가 정자 오르고픈 마음 간절해
샘물도 말라 마을이 시름겨운데
시든 전답 작물이 일어났으면
사마상여 소갈병 가련코 말고
서늘한 좌승 누대 그립구나
옷을 풀어헤쳐서 손님 거절코
걸상 높이 매달아 놓고 친구도 사절
맑고 시원한 야윈 학 부끄럽다면
어리벙벙 배부른 매 다름없어라
.........무더위 삼십 운[苦熱三十韻]

시 속에 나오는 좌승 누대는 중국 당 나라 때에 중서령을 지낸 배도(裵度)라는 사람이 벼슬에서 물러나 낙양(洛陽) 남쪽의 오교(午橋)에 지은 정자를 얘기하는데, 꽃나무 만 그루를 심고서 그 중앙에 여름에 더위를 식힐 누대와 겨울에 따뜻하게 지낼 집을 짓고 녹야당(綠野堂)이라 이름을 붙인 뒤에 백거이(白居易)·유우석(劉禹錫) 등 문인들과 모여 시주(詩酒)로 소일하였다고 한다. 우리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거니와 유배 생활 등으로 곤궁한 삶을 살았던 다산에게도 이런 이루지 못할 꿈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아무리 무더워도 출세를 해서 에상의 인정을 받거나 사업이 잘 돼 신나는 일이 있으면 그렇게 더위를 의식하지 않게 되고, 뭔가 일이 잘 안풀릴 때에 더 더운 모양이다. 나중에 재상까지 지낸 고려의 대시인 이규보도 젊을 때 유배를 가서는 더위에 대해 신경질이 많이 났는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무더위에 불 같은 수심이 겹쳐서
서로 장부(臟腑) 속을 삶는구나
온몸엔 붉은 땀띠가 일어나고 힘들어
난간에 바람 쐬며 누웠도다
바람이 불어도 무덥고
불에 부채질하듯 덥구나
목말라 물 한 잔 마시니
물 또한 끓는 물 같구나“
..... 더위를 괴로워하며

반대로 운수가 잘 풀리면 더워도 휴가를 마음놓고 가서 더 신나게 편하게 쉴 수 있는 모양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서 영의정까지 오른 상촌(象村) 신흠(申欽, 1566~1628)은 무더위에 휴가를 내어 유유자적하면서 시를 한 편 남긴다;

“무더위 속에 사람이 술 취한 듯 지치는데
짙은 구름이 비 빚으니 하늘빛이 검도다
요사이 휴가 얻으니 자못 마음 즐거워라
조복 벗고 입궐준비도 그만 두었네
마음 속 기약이 청정한 인연과 맞아 기뻐라
맨머리로 엎드려 누워 긴 낮을 보내노니
짙은 그늘 땅에 드리워 회나무 그림자 둥글고
붉은 꽃 뜰에 흩어져 석류꽃 투명도 하다
더위에 시달리지 않아 마음 편안하고
사는 곳 외지니 도회지의 먼지 걱정 없다...“
....무더위에 휴가를 내다[溽暑休告]

사상최악의 폭우를 동반한 장맛비에 밀려 올해 휴가철은 입추가 지난 다음에도 계속되고 있다. 더구나 올해는 음력으로 윤칠월이라 무더위가 더 지속될 것이란 전망이어서 모두다 시원한 곳으로 피서를 가고 싶지만 피서지로 가는 길에는 지난 폭우가 할킨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서 피서길 기분을 움츠리게 한다. 피서를 하면서도 죄스러운 기분이란다. 그런 가운데 이런 무더위 속에서도 수재민들을 위한 봉사활동에 나서는 분들도 많아 집에서만 쉬고 있는 우리 같은 사람을 부끄럽게 한다.

아무튼 이번에 강원도를 중심으로 내린 폭우가 유별났던 만큼 뒤늦은 무더위도 유별나서, 입추가 지나 조금 꺾이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잠을 잘 이루지 못해 몇 번씩 잠을 깬다. 집에 에어컨이 있다고 해도 밤새 틀 수 없는 일이요, 원래가 에어컨을 싫어하는 체질이라서 애꿎은 부채와 밤새 씨름을 한다. 그러면서 들여다보는 옛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이런 고통을 지금 우리만 당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선조들은 그보다도 더 심하게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조금 위안이 된다. 고생도 같이하는 것이라면 그깟 조금 더 못 참을 것인가? 그리고 집에서 이런 푸념이나 하고 있는 사람들은 행복한 줄 알진저. 무더위 속에서도 쉬지 못하고 일을 하며 땀과 싸워야 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은가?

그러니 짜증나는 무더위도 짜증내지 말고 참아보자. 다만 정치니 외교니 국방이니 경제니 하는 문제는 잠시만이라도 제쳐놓자. 생각하면 할수록 더 짜증이 날 테니까......

그러나 그렇더라도 우리 집 창문에 불어오는 바람은 오늘 왜 이렇게 인색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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