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동식의 다섯 계절의 노래


 

이동식
1953년 생. 서울대학교 영어교육학과 졸업후 1977년 KBS에 입사하여 30여 년을 현장에서 보낸 언론인이다. 초대 북경특파원, 런던지국장, 과학부장, 국제부장, 보도제작국장, 문화담당....< 더보기 >

*제11회 - " 나무야 나무야 "

영광도서 0 577
올해는 나무를 안심는가요?

이런 질문을 하는 직장동료들이 있다. 왜 그런가 하고 생각해 보았더니, 지난해까지 공휴일로 쉬던 식목일이 공휴일에서 제외돼 평일처럼 지나가자 사람들이 식목일이 언제 있었냐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였기 때문일 것이다. 왜 식목일을 공휴일에서 제외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할 것이지만, 어쨌든 4월초 나른한 봄날에 기지개를 켜며 하루를 쉬던 달콤한 추억을 떠 올리며 섭섭해 하신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올해 식목일에는 예년처럼 전국에 매장할 땅이 없다는 둥, 수목장이 인기라는 둥의 장례에 관한 보도도 별로 본 기억이 없다. 말하자면 4월 초 연례행사처럼 되풀이되던 그 무엇이 슬그머니 사라진 셈이 되었다. 식목일과 청명, 한식이 대부분 겹치면서 한 쪽에서는 조상을 생각하고 한쪽에서는 나무를 심는, 그 두 가지 큰 일이 갑자기 별로 중요하지 않은 듯한 느낌으로 변한 것이다.

그러나 겨울 내내 회색에 둘러싸여 숨이 막힌 듯 하다가 요즈음 세상을 연분홍으로 보이게 하는 저 벚꽃의 향연이며, 파릇파릇해진 풀과 나뭇잎들을 보면서 역시 봄이란 것이 좋은 계절이며, 그러한 봄의 주인공은 나무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나무들을 생각한다.
한 톨의 작은 씨앗이 대지에 태어나 어린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려 가지가지 무성한 잎새들을
드리우기까지의 가을과 겨울과 봄과 여름의 시간들.
더운 여름 날 시원한 바람을 부르며
그늘을 만들어 땀을 씻게 하고 가을엔
저마다의 단풍을 들이며 땅으로 내려앉아 거름으로 돌아가서
대지를 살찌우게 하는 나무를 생각한다.

라고 시인인 박남준형은 그의 시 ‘햇빛처럼 온 편지’에서 외친다. 그 나무들은 “지친 새들의 쉴 곳이 되어주고 그 가지에 집을 틀거나 몸을 내주어 구멍 속에 둥지를 짓게 해주”거나, “향기로운 꽃을 피워서 벌 나비를 불러 단 꿀을 나누고 무르익은 열매를 맺어 누군가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는”게 아닌가? 그러니 그런 나무들은 곧 사랑의 대명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작은 성당의 나무 십자가가 되고
절간 대웅전의 배흘림기둥이 되고
한 채의 집이 되고 안과 밖으로 통하는 문이 되고
이쪽과 저쪽의 단절을 이어주는 외나무다리가 되고
따뜻한 불길로 타올라 언 몸을 녹여주고
불빛으로 반짝이며 어둠을 밝혀주는 나무를 생각한다.
한줌 재로 돌아가는, 허공중의 연기로 돌아가는 나무를 생각한다.
때가 되어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는 나무를 생각한다.
온통 사랑으로 가득 찬 나무를 생각한다.

그런 나무는,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고 한 자리에 서서 모든 운명을 감당할 수밖에 없는 그 신세를 탓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언제나 남에게 가장 유용한 그 자신의 삶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나무야!
너는 누구보다
절실한 삶을 산다.
해마다 거르지 않는
너의 조락(凋落),
너의 인고(忍苦)

밀면 밀리고,
자르면 잘리고,
긁으면 긁히는
나무야!
너는 반항을 모르고

나무야!
너는 어디에서나
너로 인하여 너를 있게 한다.
온통 살아가는 너의 용기

그러나 나무야!
너는 염원(念願)으로 살아간다.
그리하여
이곳에 나를 있게 하는걸.
................정석, ‘나무야’에서


그렇더라도 서울의 가로수들은 불쌍하지 않은가? 낮에는 이것저것 걸리는 것이 많고 특히 국회 앞의 가로수들은, 국회의원들의 활동을 알리는 그 많은 플래카드를 바꾸어 걸고 있느라고 기진맥진한 모습이다. 밤에는 사람들의 눈요기를 위해 작은 전구로 온 몸을 칭칭 감고 있어야 한다. 지난 연말에 가장 심했지만 이즈음에도 시내 중심가의 나무들은 밤에도 잠을 잘 수가 없다. 달걀을 인위적으로 많이 생산하도록 잠을 재우지 않는 닭장처럼 도심의 밤은 잠을 자지 않으니까 말이다. 시골의 은행나무보다 도심의 은행나무에 은행이 더 많이 열리는 것도 아시지요? 척박한 환경에 적응하느라보면 그리 될 수밖에 없다는..

그러나 나무들은 여전히 행복하단다.

“그래도 우린 행복해. 인간들처럼 치열하게 생존경쟁을 해야 될 때도 있지만, 경쟁에 지면 기꺼이 밥이 되어 상대방을 키워주지. 조경사업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 몸살이를 하는 나무도 더러 있지만 대부분의 나무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여행 한번 해 보지 못하고 그곳에서 살지만, 그래도 행복해. 매일 찾아와 속삭이는 햇살이 있고, 심심하면 가끔 찾아와 몸을 흔들어 깨워주는 산들바람이 있고, 목욕을 시켜주는 비는 맑은 정신도 주지, 그 밖에 노루, 고라니, 토끼, 다람쥐, 오소리 등 동물들과 온갖 종류의 새와 곤충과 미생물들...모두가 정겨운 이웃이지, 벌레들이 내 몸과 잎을 갈아먹어 몸이 아프기도 하고 그래서 죽는 친구도 있지만 그래도 우린 원망하지 않아.”
...........수필 ‘나무야 행복하니?’

그런데도 우리들은 집을 짓는다고, 새로운 건물을 짓는다고 동산을 헐고 나무를 벤다. 푸른 녹지는 다시 시멘트로 덮이고 그 자리에는 알량한 정원수들이 몇 그루 심어질 뿐이다. 우리들이 숨쉴 공간은 더욱 줄어들고, 우리의 공기는 더욱 산소결핍증을 앓고 있다. 우리들은, 아직도 나무의 소중함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나무란 그저 아무데고 있는 것이어서, 특별히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존재로만 아는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자르는 나무 한 그루가 무슨 대수냐고 생각하는 것 같다. 오죽하면 목사도 이런 말을 하는가?

“어쩐지 서울은 더 회색빛으로 바뀌고 대기오염은 더 짙어만 간다. 나무 한 그루의 소중함을 알 때 비로소 서울은 녹색마을이 될 것이다. 나무를 베어내고 만드는 주차공간이 어떻게 서울을 구할 수 있을까? 오히려 자동차를 버리고 나무 한 그루를 살릴 수 있는 길을 택하는 데서 서울의 희망은 찾아온다. 정말 그럴 수 있을까? 편리는 이미 우리의 희망을 다 삼켜버리지 않았을까? 하지만 다시 한 그루의 나무에서 희망을 본다. 집 주변과 교회 주변에 나무를 심자. 집안에도 화분을 가져다 놓자. 녹색공간을 많이 확보하자. 그 작은 것이 모여 서울을 녹색물결로 만들 것이다.
...............양재성 목사

서울에 공원이 많아졌다고 안심하지 말라. 지금도 당신의 집 주위 어딘가에서 나무가 잘려나가고 있을지 모른다. 그 나무 하나하나가 모여서 우리들의 맑은 숨을 지켜주던 것들이었다면, 우리들은 개발이라는 이름하에 나무가 잘려나가는 것을 또 다시 허용하면 안된다. 비록 식목일이 공휴일에서 제외되었지만 우리는 다시 나무의 가치를 생각하고 나무를 심는 것은 물론, 이미 있는 나무들이 더 잘려나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리해서 당신의 집 주위에서부터 초록을 되찾아야 한다. 그 초록이 도시를 덮고 삭막한 우리들의 마음을 덮을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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