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동식의 다섯 계절의 노래


 

이동식
1953년 생. 서울대학교 영어교육학과 졸업후 1977년 KBS에 입사하여 30여 년을 현장에서 보낸 언론인이다. 초대 북경특파원, 런던지국장, 과학부장, 국제부장, 보도제작국장, 문화담당....< 더보기 >

*제18회 - " 비 "

영광도서 0 534
비가 오면 사람들은 분주해진다.

무슨 소리야? 비 오면 집안에 갇혀있는데 분주하다니?

이런 소리를 듣는다고 괜히 기 죽지 말고 가만히 생각해보라 . 비 오는 날 생각은 천리 길을 헤매이며 마음은 공연히 싱숭생숭, 어쩌다 예전에 길에서 스친 여자의 얼굴까지 별 게 다 생각이 나지 않던가? 그만큼 분주한 것이다.

그리고 비가 올 때 가만히 밖을 내다보면 온갖 소리가 다 들린다. 비를 타고 그만큼 전달이 잘되는 것이다. 그러니 마음이야 얼마나 더 빨리 갈 수 있겠는가?

그런 생각은 특히 시인들에게 많은 것 같다

비 오는 날에 나 희덕

내 우산살이 너를 찌른다면, 미안하다.
비닐 우산이여
나의 우산은 팽팽하고
단단한 강철의 부리를 지니고 있어
비 오는 날에도 걱정이 없었거니
이제는 걱정이 된다.
빗속을 함께 걸어가면서 행여
댓살 몇 개가 엉성하게 받치고 선

네 약한 푸른 살을 찢게 될까 두렵구나
나의 단단함이 가시가 되고
나의 팽팽함이 너를 주눅들게 한다면
차라리 이 우산을 접어 두겠다.
몸이 젖으면 어떠랴
만물이 눅눅한 슬픔에 녹고 있는데
빗발이 드세기로
우리의 살끼리 부대낌만 하랴
비를 나누어 맞는 기쁨,
젖은 어깨에 손을 얹어
따뜻한 체온이 되어줄 수도 있는
이 비 오는 날에
내 손에 들린 우산이 무겁기만 하다.

사실 비에 젖어도 몸만 궁상스럽지 않다면 굳이 우산을 쓰고 싶은 사람이 있을 것인가? 그런데 비가 웬만큼 오는 날 우산을 쓰고 여의도 숲길을 한 번 걸어가 보라! 머리 위를 쳐다보지 말고 땅을 보면서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어보라

땅 땅 땅 ...
이것은 아마 느티나무 밑일 것이다. 빗방울이 조금씩 합쳐져서 잎을 미끌어져 우산 위로 떨어지는 소리이니까.

뚱 뚱 ....
이것은 아마도 떡갈나무 밑을 지나는 소리일 것이다. 그만큼 빗방울이 조금 더 굵어져 떨어지는 빈도가 뜸한 것이다.

후두두두두...
이 소리는 소나무 밑 쯤 될 것이다. 가는 잎들이 빗방울을 잡아주지 못하니까 비가 오는 그대로 우산에 박히는 소리다.

이런 식으로 비오는 날 우산을 쓰고 공원을 걸으면 길에 어떤 나무들이 심어져 자라고 있는지를 땅만 보고도 알 수 있다. 바로 그 빗소리로 해서...

이런 얘기를 해주니까 사람들이 나를 보고 참으로 마음이 젊다고 한다. 50이 한참 넘은 사람이 할 일 없이 우산 쓰고 빗소리로 무슨 나무인지를 맞추는 생각을 하다니 한심하다는 투다.

그런데 한심한 인생을 산 사람은 나만이 아니었다,

바로 다산 정약용 선생이다. 칠순이 지난 어느 날 문득 한가하게 연못가에서 비를 맞다가 비가 그치자 갑자기 시심이 발동해 세밀한 관찰력으로 연못가를 대상으로 멋진 풍경화를 그려낸다;

가까운 봉우린 깨끗한데 먼 산은 껌껌하고 / 近峯晴洗遠峯陰
가랑비 속 지당에는 버들빛이 짙어라 / 小雨池塘柳色深
취기는 점점 깨고 일이라곤 통 없는데 / 薄醉漸醒無一事
두어 소리 새가 울며 꽃 스치고 지나가네 / 數聲啼過掠花禽
꽃 가꾸기 참으로 애 기르기 같아서 / 養花眞似育孩嬰
비 오나 개나 추우나 더우나 정신이 늘 쓰인다 / 晴雨暄涼盡可驚
칠순을 지나고야 겨우 마음 놓았는데 / 經了七旬纔放意
열 주를 심었다가 아홉 주가 살았다네 / 十株栽得九株生
꽃을 심는 사람들은 꽃만을 볼 줄 알지 / 種花人只解看花
꽃 진 후의 화사한 잎 그것은 볼 줄 몰라 / 不解花衰葉更奢
퍽 예쁘지 한 차례 장마비가 걷힌 후에 / 頗愛一番霖雨後
연약한 가지마다 돋아나는 노란 싹들이 / 弱枝齊吐嫩黃芽
큰 산 아래 구불구불 서려 있는 작은 산들 / 山下群山細屈蟠
여느 때는 한 덩어리 산으로만 보이지만 / 當時只作一山看
아침 되어 한 자락 구름이 걷힐 때는 / 朝來一段雲遮往
뾰족뾰족한 봉우리들 여덟 아홉이 분명하다 / 矗矗尖稜八九巒
.............. 지각(池閣)

다산이 우리 역사상 가장 많은 한시를 지은 시인이었다는 점을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그는 몇 수레나 될 그 많은 저서를 지으시면서도 3천 수가 넘는 시를 남겼으니, 글을 쓰다 잠깐 머리를 식히려 시를 쓰고 또 글을 쓰고 하는, 그런 생활의 연속이었던 것 같다.

석주 권필이 쓴 소나무라는 시에서도 그렇지만 옛 사람들은 한자를 하나 하나 추가하면서 문장을 지어 시를 완성하는 것을 큰 멋으로 알았던 듯, 인조 때의 명신이자 문인인 계곡(鷄谷) 장유(張維 1587~1638)선생도 봄날에 지겹게 내리는 비를 소재로 시를 짓는다;

지겹고 / 苦
지겹도다 / 苦
최근 열흘 내내 / 一旬
구질구질 내리는 비 / 陰雨
음산하게 뒤덮인 구름 덩어리 / 雲晻曀
성내어 부르짖는 저 바람 소리 / 風號怒
석연이 번갈아 날아다니고 / 石燕交飛
상양이 뒤엉켜 춤을 추는다 / 商羊亂舞
밝은 태양도 그 빛을 감췄나니 / 白日隱光曜
푸른 하늘을 어떻게 보리 / 靑天那得睹
가련토다 이 봄날 반이나 지나도록 / 可憐一春强半
맑은 정경 한 번도 끌어 안지 못하다니 / 未逢晴景媚嫵
풀 잎새며 싹 트는 눈 진흙탕에 범벅 되고 / 細草織芽亂泥塗
버들잎 복사꽃 입 다문 채 못 피누나 / 嫩柳夭桃噤不吐.......


이렇게 해서 열 자까지 시가 이어지면서 이 걱정 저 걱정 다한다. 참으로 옛날 분들도 비가 오면 그저 창밖을 내다보며 궁상맞은 생각이나 하고 있는 모양이다.

남부와 동해안 지방에 비가 많이 와서 일부 피해가 나고 있기는 하지만 이번 장마는 아직까지 큰 난리는 나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다. 갈수록 날씨가 성질을 부려, 어떨 때에는 가뭄이, 어떨 때에는 호우와 홍수가, 어떨 때에는 땡볕이 장기간 계속되는 현상을 보이는데, 다행히 올해는 하늘이 고약한 성질을 내지 않아서 우리 불쌍한 인간들로서는 고맙기만 하다.

어쨌든 장마는 우리들에게 지겹지만 곧 장마가 그치면 또 무더위가 오니까 이래저래 우리들은 힘이 들 것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하늘을 덮을 학식과 경륜을 품고도 유배지에서 눈물과 한숨의 삶을 보내야 했던 다산만큼이야 힘들었겠는가? 오죽하면 다산이 이런 시를 지었겠는가?

그 얼마나 유쾌할까? 不亦快哉

달포 넘게 찌는 장마 오나 가나 곰팡냄새 / 跨月蒸淋積穢氛
사지에 맥이 없이 아침 저녁 보내다가 / 四肢無力度朝曛
가을 되어 푸른 하늘 맑고도 넓으면서 / 新秋碧落澄寥廓
하늘 땅 어디에도 구름 한 점 없으면 / 端軒都無一點雲
그 얼마나 상쾌할까 / 不亦快哉

산골 시내 굽이진 곳 돌무더기 가로막혀 / 疊石橫堤碧澗隈
가득히 고인 물이 빙빙 돌고 있는 곳을 / 盈盈滀水鬱盤迴
막고 있는 모래주머니 긴 삽으로 툭 터서 / 長鑱起作囊沙決
우레처럼 소리 내며 쏜살같이 흘러가면 / 澎湃奔流勢若雷
그 얼마나 통쾌할까 / 不亦快哉

날개를 묵히면서 굶고 있는 푸른 매가 / 蒼鷹鎖翮困長饑
숲 끝에서 날개쳐도 갈 곳 별로 없다가 / 林末毰毸倦却歸
매서운 북풍에 처음으로 줄을 풀고 / 好就朔風初解緤
바다 같은 푸른 하늘 마음껏 날아갈 때면 / 碧天如水盡情飛
그 얼마나 유쾌할까 / 不亦快哉

삐걱삐걱 노 저으며 청강에 배 띄우고 / 客舟咿嘎汎晴江
쌍쌍이 무자맥질하는 물새들을 보다가 / 閒看盤渦浴鳥雙
쏜살같이 내닫는 여울목에 배가 와서 / 正到急湍投下處
시원한 강바람이 뱃전을 스쳐 가면 / 涼颸拂拂洒篷牕
그 얼마나 상쾌할까 / 不亦快哉

깎아지른 절정을 힘겨웁게 올랐을 때 / 岧嶢絶頂倦游筇
구름 안개 겹겹으로 시야를 막았다가 / 雲霧重重下界封
이윽고 서풍 결에 태양이 눈부시고 / 向晩西風吹白日
천봉만학 있는 대로 일시에 다 보이면 / 一時呈露萬千峯
그 얼마나 상쾌할까 / 不亦快哉


다산은 무려 이런 “그 얼마나 상쾌할까?”를 스무 가지나 묘사하는데, 맨 마지막이 우리를 울린다:

먼 지방 귀양살이 대궐 못내 그리워서 / 異方遷謪戀觚稜
여관 한 등 잠 못 이루고 등불만 만지작거린다 / 旅館無眠獨剪燈
뜻밖에 금계의 기쁜 소식 전하는 말 듣고 / 忽聽金鷄傳喜報
집에서 보낸 편지를 손으로 직접 뜯었을 때 / 家書手自啓緘縢
그 얼마나 흔쾌할까 / 不亦快哉

멀리 귀양살이를 하면서 가족으로부터 오는 편지 한 장이 그리워 잠을 못 이루는 노인의 심사가 그대로 전해진다. 그에 비하면 우리들은 정말 “그 얼마나 잘 있는 것인가? ”

우리들도 오늘 장맛비에 마음이 무겁더라도 비 그친 푸른 하늘을 생각하며, 그리고 다산의 그 큰 고초를 생각하며 이 장마를 이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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