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동식의 다섯 계절의 노래


 

이동식
1953년 생. 서울대학교 영어교육학과 졸업후 1977년 KBS에 입사하여 30여 년을 현장에서 보낸 언론인이다. 초대 북경특파원, 런던지국장, 과학부장, 국제부장, 보도제작국장, 문화담당....< 더보기 >

*제22회 - " 미인 "

영광도서 0 702
중국의 역대 미인 중에 최고로 꼽는 4대 미인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을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서시(西施), 왕소군(王昭君), 초선(貂蟬), 양귀비(楊貴妃) 4명을 4대 미인으로 꼽는다. 서시는 춘추 시대 말, 월나라의 여인으로 어느 날 그녀는 강변에 있었는데 맑고 투명한 강물이 서시의 아름다운 모습을 비추자 그 모습을 본 물속의 물고기가 수영하는 것을 잊고 천천히 강바닥으로 가라앉았다 하여 침어<浸魚>라는 별명을 얻은 미녀인데, 오(吳)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한 월나라의 충신 범려가 서시를 오왕 부차에게 바쳐, 부차가 서시만 쳐다보고 있느라 정사를 내팽개쳐 마침내 오나라를 멸망시켰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왕소군은 흉노에 대신 바쳐져 멀리 흉노 땅에서 한나라를 그리다 죽은 비극의 여인인데, 흉노로 갈 때에 말 위에서 비파를 연주했는데, 마침 남쪽으로 날아가던 기러기가 아름다운 비파소리를 듣고 말위에 앉은 왕소군의 미모를 보느라 날개 짓 하는 것도 잊고 있다가 그만 땅에 떨어져 버려 ‘낙안(落雁)’이라는 별명을 받은 미인이다. 초선은 삼국지에 나오는 그대로 한나라 말기 황제를 대신해서 조정을 휘두르는 동탁을 죽이기 위해 우직한 장군 여포에게 바쳐진 여성이다. 양귀비야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고.... 이런 4명의 미인가운데 중국인들은 역시 나라를 보다 확실하게 망하게 한 서시를 최고의 미인으로 꼽는다고 한다.
그 서시가 항주 출신이라는 데서, 중국의 항주는 미녀의 고향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서시만큼은 평가를 받지 못하지만 오늘날까지 항주를 비롯한 중국 남부에서 사랑을 받는 항주미인이 있으니 그의 이름이 바로 소소소(蘇小小)이다. 아마도 몸집이 크지 않고 아담해서 소소(小小)라는 이름을 얻었을 이 아가씨가 살던 시기는 남제(南齊 479-502)시대로서. 당나라가 망한 뒤에 양자강 남쪽에서 수많은 왕국들이 교대하던 그런 시기였다.

그녀는 어려서 부모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서령교(西泠橋) 부근의 이모집에서 자랐는데, 궁핍한 생활을 견디지 못해 기생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 지방에서 가장 아름답고 총명한 데다, 시와 노래를 잘 불렀던 재기가 넘치는 여자였기에 곧 수많은 남성들의 연모의 대상이 된다. 하루는 소소가 수레를 타고 서호 부근을 구경하다가 호방한 풍모를 갖춘 청년을 만났다. 그는 한 필의 푸른 준마(청총마:靑驄馬)에 올라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소소는 그의 빼어난 모습에 한 눈에 마음을 빼앗겼다. 청년도 수레(油壁香車)에 앉아 있는 아름다운 소소를 보자마자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 청총마를 타고 수레를 쫓아왔다. 소소는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

첩승유벽거(妾乘油壁車) 첩은 유벽거를 타고 있고,
랑과청총마(郞跨靑驄馬) 낭군은 청총마에 올라 계시니
하처결동심(何處結同心) 어느 곳에서 마음을 함께 나눌까요?
서릉송백하(西陵松栢下) 서릉의 송백 아래에서나.

자기 집이 서릉 숲에 있으니 알아서 찾아오라는 유혹의 노래였다. 소소는 노래를 부른 후 수레를 타고 가버렸다. 그 청년도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져 예물을 준비하고 서령교 입구로 소소를 찾아왔다. 청년은 재상이었던 완도(阮道)의 아들 완욱(阮郁)으로, 두 사람은 깊은 사랑을 나누고 결혼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여자의 신분이 기생임을 안 완욱의 집안에서 결혼을 반대하며 그를 서울로 불러들이자, 소소는 그 이후부터 온종일 외출을 삼간 채 집안에서 슬퍼하기만 한다.


세월이 흘러 소소가 울적한 마음을 달래려고 수레를 타고 나섰다가 연하령(烟霞嶺) 아래 무너진 사당 옆에서 한 청년이 글을 읽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 청년은 옷차림은 남루했지만 비범하게 보여 반드시 功名을 날릴 사람으로 생각되었다. 그녀는 달려가 이름을 물었다. 서생은 갑자기 생면부지의 젊은 여자가 물어 오자 아주 불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는 포인(鮑仁)이라고 합니다.” 소소가 말했다; "당신에 비록 이곳에 계시지만 반드시 스스로 공명을 얻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제대로 공부를 하시려면 서울로 가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렇게 해서 그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 은자 100량을 여비로 주고 서울로 가도록 하였다.

시를 잘 짓고 노래를 잘하는 소소의 명성은 계속 솟아올랐지만 그녀는 아무나 부른다고 응하지 않았다. 하루는 맹랑(孟浪)이라는 다른 지방의 관찰사(觀察使)가 이 지역을 지나다가 소소의 명성을 듣고는 서호에 큰 배를 띄우고 술과 안주를 준비한 다음 소소를 불렀다. 그러나 소소는 핑계를 대고 가지 않았다. 그 다음 날 아침 일찍 다시 부르자 이번에는 지난밤 잔치에 갔다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며 피했다. 3일째 되는 날, 심부름꾼이 다시 가자 이번에는 아직도 술이 깨지 않아 일어나지 않았다고 했다.

세 번이나 퇴짜를 맞은 맹랑은 그녀를 혼내줄 방법을 찾고 있었다. 걱정이 된 주위사람들의 권고로 마지못해 맹랑을 찾아갔다. 맹랑은 여러 손님들과 매화를 바라보며 술을 마시다가 아주 기분이 나쁜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오늘 여기에 온 것은 살려고 온 것인가? 아니면 죽으려고 온 것인가?"

소소가 웃으며 "살고 싶지 죽고 싶을 리가 있습니까? 그러나 살리고 죽이는 것이 어르신에게 달려 있으니 소녀가 어찌 마음대로 하겠습니까? "라고 대답하자 마음이 누그러진 맹랑이 벌로 매화를 제목으로 한 시를 한 수 지으라고 명한다. 소소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시를 읊었다.

매화수오골(梅花雖傲骨) 매화가 비록 오만하다 하여도,
즘감적춘한(怎敢敵春寒) 어찌 감히 봄이 춥다고 덤비겠는가?
약환분홍백(若還分紅白) 만약에 홍백으로 나누어졌다면,
환수청안간(還須靑眼看) 하물며 푸른 눈으로 바라보겠는가?

“연약한 자기가 어떻게 감히 관리에게 덤비며, 딴 마음이 있다면 어찌 눈을 흘기지 않고 제대로 바로 보겠느냐 ?”하는 내용을 짧은 시로 나타낸 것이다. 죽림칠현의 하나인 진(晉)의 완적(阮籍)이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보면 푸른 눈동자로 바로 보고, 보기 싫은 사람을 보면 눈동자를 뒤집어 흰자위가 보이게 했다는 이야기(여기서 백안시白眼視라는 말이 나왔다)를 교묘히 활용한 것이다. 결국 맹랑은 푸짐한 상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본래 몸이 허약한데다 완욱이 떠난 후 상심이 커지면서 결국 병이 깊어져 겨우 열아홉의 나이에 세상을 뜨게 된다. 그는 유언을 통해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서호 변 서령교(西泠橋) 옆에 묻어달라고 한다. 그런데 소소가 죽고 나서 3일 후 갑자기 심부름꾼이 말을 타고 나타나 소소를 찾는데, 활주자사(滑州刺史) 포상공(鮑相公)이 그녀를 찾는다는 것이었다. 소소가 사흘 전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포인(鮑仁)은 소복을 입고 황급히 달려와 그녀의 관을 잡고 울면서 말했다; "소소소여! 당신은 진정으로 혜안을 지닌 여자였습니다. 나 포인이 세상에 나올 수가 있었던 것은 당신과 같은 지기가 아니었으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나의 지기가 없으니 누구에게 공명을 이룬 것을 자랑하겠습니까?" 포인은 비통한 마음을 안고 그녀의 유언에 따라 서령교 옆에 좋은 땅을 골라 그녀를 묻고 묘비명을 써주었다. 후세 사람들은 그녀의 묘 위에 "모재정(慕才亭:재주를 연모하는 정자)"을 건립하고 기둥에 다음과 같은 대련을 남겼다;

천재방명류고적(千載芳名留古迹) 수많은 아름다운 이름들이 옛 자취가 되었지만
육조운사저서령(六朝韻事著西泠) 육조의 노랫소리는 서령에서 아직도 맴도네.

이 일이 알려진 이후 내노라 하는 시인들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시를 짓느라 너무 고민을 많이 해서 24살 때에 머리가 백발이 된 뒤에 27살에 요절한 당나라의 천재시인 이하(李賀: 장진주將進酒라는 시가 유명함)는,


幽蘭露(유란로) 그윽한 난초에 맺힌 이슬은,
如啼眼(여제안) 눈물 머금은 눈망울 같다.
無物結同心(무물결동심) 무엇으로 마음 맺어주랴
煙花不堪剪(연화부감전) 아련한 봄꽃 꺾을 수도 없고.
草如茵(초여인) 잔디는 보료가 되고,
松如蓋(송여개) 소나무 그늘은 덮개가 되며
風爲裳(풍위상) 바람으로 치마를 삼고,
水爲珮(수위패) 물은 옥패가 된다.
油壁車(유벽거) 그대가 타던 유벽거 수레
夕相待(석상대) 저녁까지 기다리지만
冷翠燭(냉취촉) 차가운 도깨비 불,
勞光彩(로광채) 헛되이 광채도 약해지고.
西陵下(서능하) 그대 무덤 아래로
風吹雨(풍취우) 바람이 비만 흩뿌리네.
..................蘇小小墓(소소소묘)


번역이 다소 생경스럽지만 어쨌든 생전에 소소가 타던 마차하며 그의 시에 나오는 결동심(結同心:마음을 하나로 맺어주랴)이란 어귀하며 이런 것들을 살려서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숨져간 한 여인을 처연하게 조문하고 있다.

유명한 백거이(白居易)도 시를 지어 소소를 그리워하였다.

蘇州楊柳任君誇(소주양류임군과) 소주의 수양버들 자랑하고파
更有錢塘勝館娃(갱유전당승관와) 다시 전당에 오니 역시 멋있군
若解多情尋小小(약해다정심소소) 옛 정 풀려고 소소를 찾는다면
綠楊深處是蘇家(녹양심처시소가) 버드나무 우거진 곳이 거기라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소소의 무덤도 무너져 내리자 지난 2004년 항주시에서는 소소의 무덤을 다시 보수했다. 봉분을 가지런히 하고 비석도 세웠다. 그러자 교신생(喬新生)이란 한 대학교수가 볼멘소리를 인터넷에 올렸다. 옛날 기녀들이 (몸을 팔든 팔지 않든) 돈 많은 문인묵객들의 비위를 맞춰가며 자신의 무덤을 남겼는데, 그것을 보수하고 현창한다면 요즈음 인터넷에서 음란문학을 단속한다고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 글로 한 때 중국에서는 기생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다. 며칠 뒤 반론이 떴다. 소소라는 기녀는 어제 오늘이 아니라 수 천년 동안 중국인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중국처럼 예를 따지는 나라에서 그 기녀가 그렇게 오랫동안 사랑을 받았다면 그것이 “몸장사”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기녀도 기녀이기 이전에 먼저 인간이며, 박해를 받은 하층민이었다는 점, 그런데 기녀라는 이유만으로 비난할 수는 없다는 것이며, 기녀들이 중국의 제도아래서 사랑을 위해, 체제를 위해 스스로를 핍박하고 고통 받은 점을 인정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또한 그녀 자신도 몸을 마구 파는 그런 식이 아니라 스스로의 사랑을 위해 일생을 기다리고 고통을 감수한 유미주의자로서, 서양으로 치면 프랑스 작가 알렉산드르 뒤마피스의 소설 <동백꽃 여인(흔히 춘희로 알려짐)>에 나오는 비극의 주인공과 같다고 말한다.

아무튼 그런 저런 역사와 논란을 안고 우리의 멋진 기녀 소소소(蘇小小)는 지금도 항주 서호의 서령교 부근 모재정이란 정자 밑에 잠자고 있다. 우리 관광객들이 수없이 항주를 찾지만 이 다리와 무덤의 주인공 소소소는 우리 관광코스에 들어가 있지 않아서인지, 많은 분들이 아무 것도 모르고 서령교를 걸어넘고 모재정도 지나치는 것 같다.

그런데 왜 갑자기 천 5백년도 더 옛날 중국기녀 소소소 이야기인가?

아마도 그것은 영화 <황진이> 때문일 것이다.

지난해 한 텔레비전의 드라마에 이어 이달부터 영화 황진이가 개봉하면서 황진이 바람이 다시 일고 있다. 지난 번 드라마가 우리들이 알고 있는 기녀 황진이에서 춤이라는 예술의 완성을 위해 노력하는 예인의 경지를 그렸다면 이번의 영화는 황진이의 인간적이고 내면적인 사랑을 섬세하게 표현했다는 데서 차이가 있고, 그러다 보니 전통적으로 생각해 온 조선역사상 최고의 기녀 황진이에 대한 기대와 다르다는 점이 지적되는 것 같다.



실제로 황진이는 뛰어난 시인이었다. 널리 알려진 “청산리 벽계수야~”라는 시조는 물론, 겨울밤을 노래한 시조;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 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신 날 밤이어드란 굽이굽이 펴리라.

그리고 반달을 노래한 한시;

誰斷崑山玉 누가 곤륜산 옥을 잘라내어
裁成織女梳 직녀의 빗을 만들어 주었나?
牽牛離別後 견우신랑과 이별한 후
愁擲壁空虛 시름에 겨워 허공에 던진 게지

등은 그녀의 뛰어난 시재(詩才)를 보여주는 걸작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런 재주와 해학이 마음껏 드러나지 않으면 조선시대 최고의 예능인이자 문학인인 황진이에 대한 우리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것이 된다.

우리 역사상 기생, 또는 기녀라는 직업은, 앞서 중국인이 지적했듯이, 몸을 파는 상황을 빼고 생각할 수는 없지만, 그녀들 또한 어려운 상황에서 기녀가 되었고 그들의 순수한 사랑을 위해 일생을 바친 사례가 수도 없이 많은 데서 보듯, 그들의 아픔과 고통에 연민과 이해를 보낼지언정, 그들을 비난만 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한국의 남성들이 황진이라는 조선 최고의 기녀에게서 기대하는 것은, 아마도 다른 많은 한국이나 중국의 기녀보다는 항주의 소소소와 같이, 아름답고 재주 있고 멋있고, 자신의 사랑을 위해 아파하면서도 어려운 남자들을 발탁하기도 하는, 다시 말하면 때로는 연인이면서도 때로는 어머니 같은 그런 복합된 상(像)이 아닐까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것은 한국이란 사회에서 키워진 한국 남성들만의 이기주의적인 생각일 수도 있지만, 요는 그런 기녀상에 대한 기대가 충분히 채워지지 않으면 영화를 보는 한국 남성들은 뭔가 아쉬움을 많이 느낄 것이다. 한국 남자들은 어린애처럼 어머니에서 느끼는 포근하고 아늑하고 항상 자신의 의견을 옳다고 믿어주는 여성상을 그리워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도 한국은 그런 사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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