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동식의 다섯 계절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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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 |
*제12회 - " 죽어서도 "
영광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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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1 03:44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며 북풍한설을 견디던 우리의 나무들이 이윽고 부끄러움을 느끼고 새파란 새 순과 새 잎으로 몸을 가리기 시작할 때에 우리들은 학생 때 읽은 이양하 선생의 <신록예찬>을 떠 올리리라.
나날이 푸르러가는 이 산 저 산, 나날이 경이를 가져오는 이 언덕, 저 언덕, 그리고 하늘을 달리고 녹음을 스쳐오는 맑고 향기로운 바람---우리가 비록 가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러한 때에 모든 것을 가진 듯하고, 우리의 마음이 비록 가난하여 바라는 바 기대하는 바가 없다 할지라도, 하늘을 달리고 녹음을 스쳐 오는 바람은 다음 순간에라도 모든 것을 가져올 듯 하지 않은가?.........<신록예찬>중에서
영문학자이면서도 이양하 선생의 글은 막힘이 없고 어렵지 않고 갇혀있지 않다. 봄이 되어 신록이 점점 짙어지면서 일어나는 미묘한 변화를 섬세하고 감각적인 필치로 잘도 표현해낸다;
그러기에 초록에 한하여 나에게는 청탁(淸濁)이 없다. 가장 연한 초록에서 가장 짙은 초록에 이르기까지 나는 모든 초록을 사랑한다. 그러나 초록에도 짧으나마 일생이 있다.봄바람을 타 새 움과 어린 잎이 돋아나올 때를 신록의 유년이라고 하면, 삼복염천아래 울창한 잎으로 그늘을 빗는 때를 그의 장년 또는 노년이라고 하겠다. 유년에는 유년의 아름다움이 있고 장년에는 장년의 아름다움이 있어 취사하고 선택할 여지가 없지마는, 신록에 이써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그의 청춘시대--움 가운데 숨어있던 잎의 하나하나가 모두 형태를 갖추어 완전한 잎이 되는 동시에 처음 태양의 세례를 받아 청신하고 발랄한 담록(淡綠)을 띠는 시절이라고 하겠다.........<신록예찬>중에서
이처럼 나무의 변화에 관해 소상하게 세심하게 표현해 낼 수 있었던 것은 결국에는 이양하 선생이 나무의 심성을 타고났기 때문이라고 보아 무방할 것이다. 선생이 나무에 대해서 묘사한 것을 보면 마치 자신이 나무가 되어 몇 년 동안 숲에 서 있어본 것 같다;
나무는 고독하다. 나무는 모든 고독을 안다. 안개에 잠긴 아침의 고독을 알고, 구름에 덮인 저녁의 고독을 안다.
부슬비 내리는 가을 저녁의 고독도 알고, 함박눈 펄펄 내리는 겨울 아침의 고독도 안다. 나무는 파리 옴짝 않는 한여름 대낮의 고독도 알고, 별 얼고 돌 우는 동짓달 한밤의 고독도 안다. 그러나 나무는 어디까지든지 고독에 견디고 고독을 이기고 또 고독을 즐긴다 ................ 수필 <나무> 중에서
글에서 나무라는 표현을 일인칭의 '나'로 바꾸어보면 이양하 선생이 결국은 나무였다는 점을 짐작케 한다. 그러기에 이양하 선생이란 나무는 그의 표현대로 오히려 외롭지 않고 많은 친구들로 해서 즐거웠다.
나무에 아주 친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달이 있고 바람이 있고, 새가 있다. 달은 때를 어기지 아니하고 찾고 고독한 여름밤을 같이 지내고 가는 의리 있고 다정한 친구다. 웃을 뿐 말이 없으나 이심전심 의사가 잘 소통되고 아주 비위에 맞는 친구다. 바람은 달과 달라 아주 변덕많고 수다스럽고 믿지 못할 친구다. 그야말로 바람잡이 친구다. 자기 마음에 내키는 때 찾아올 뿐 아니라, 어떤 때는 쏘삭쏘삭 알랑대고, 어떤 때는 난데없이 휘갈리고, 또 어떤 때는 공연히 뒤틀려 우악스럽게 남의 팔다리에 생채기를 내놓고 달아난다. 새 역시 바람같이 믿지못할 친구다. 역시 자기 마음 내키는 때에 찾아오고 마음 내키는 때에 달아난다. 그러나 가다 말고 와 둥지를 틀고, 지쳤을 때에 찾아와 쉬며 푸념하는 것이 귀엽다. 그리고 가다 흥겨워 노래를 할 때 노래들을 수 있는 것이 또한 기쁨이다.... 나무는 이 모든 것을 잘 가릴 줄 안다. 그러나 좋은 친구라고 하여 달만을 반기고, 믿지 못할 친구라고 하여 새와 바람을 물리치는 일은 없다............... 수필 <나무> 중에서
우리가 이 땅에서 할아버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뿌리내려 살아오듯이 나무들도 할아버지, 아버ㅗ지 나무를 거쳐 이 땅에 살고 있다. 나무는 결국 우리들이다. 이 땅에서 함께 살아오는 이웃이다. 이 땅의 나무도 우리처럼 이 땅에 사는 것이 좋은 모양이다. 그러기에 이 땅을 떠나지 않는다.
“여보게, 나무, 그동안 애 많이 썼네.....”
할아버지나무의 깊은 잠 속에 하늘의 길이 열리고, 멀리서 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 사람은 나무를 나무라 말하고, 나무를 친구라 부르던 사람이었다.
할아버지나무도 나무로 한 평생을 살며 스스로 나무라는 것이, 그리고 나무라는 이름이 한없이 좋았다. 그래서 더없이 편안한 잠결 속에 마지막으로 자기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나무....”
.............이순원 소설<나무>
그러기에 우리들은 이 땅을 떠날 수 없다. 이 땅의 나무로 다시 태어나야 할 운명을 지니고 있다.
나무에 하나 더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천명(天命)을 다한 뒤에 하늘 뜻대로 다시 흙과 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가다 장난삼아 칼로 제 이름을 새겨보고, 흔히는 자기 소용 닿는 대로 가지를 쳐 가고,송두리째 베어 가고 한다. 나무는 그래도 원망하지 않는다...나무는 훌륭한 견인주의자(堅忍主義者)요, 고독의 철인이요, 안분지족의 현인이다. 불교의 소위 윤회설이 참말이라면 나는 죽어서 나무가 되고 싶다..................수필 <나무> 중에서
신록이 돌아오는 이 계절에, 돌아온다는 의미를 다시 유념한다. 돌아오는 것은, 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이 좋은 신록이 돌아오기 위해서는 낙엽을 떨구고 계절의 냉혹한 현실 속으로 돌아가는 것이 전제가 되고 있다. 이 좋은 계절을 우리의 아들, 딸들에게 주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돌아가야 한다. 이 철리(哲理)는 부정할 수 없고 거역할 수도 없다.
나도 이제 죽어서 나무가 되련다. 산비탈을 억지로 깎아 만든 차가운 화강암 속에 갇히지 말고 그냥 한 줌의 비료가 되어 나무 밑에 묻혀서 한 그루의 나무를 자라게 하고 싶다. 그리고 만약 내가 묻힌 그 자리에 그 나무로부터 씨앗이 떨어져 조그만 나무가 자란다면 그 나무를 타고 다시 새로운 나무가 되어 이 세상을 작은 푸르름으로 덮어 나의 후손과 세상의 미물들에게 조그만 그늘로 인한 즐거움과 기쁨이 되고 싶다.
나날이 푸르러가는 이 산 저 산, 나날이 경이를 가져오는 이 언덕, 저 언덕, 그리고 하늘을 달리고 녹음을 스쳐오는 맑고 향기로운 바람---우리가 비록 가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러한 때에 모든 것을 가진 듯하고, 우리의 마음이 비록 가난하여 바라는 바 기대하는 바가 없다 할지라도, 하늘을 달리고 녹음을 스쳐 오는 바람은 다음 순간에라도 모든 것을 가져올 듯 하지 않은가?.........<신록예찬>중에서
영문학자이면서도 이양하 선생의 글은 막힘이 없고 어렵지 않고 갇혀있지 않다. 봄이 되어 신록이 점점 짙어지면서 일어나는 미묘한 변화를 섬세하고 감각적인 필치로 잘도 표현해낸다;
그러기에 초록에 한하여 나에게는 청탁(淸濁)이 없다. 가장 연한 초록에서 가장 짙은 초록에 이르기까지 나는 모든 초록을 사랑한다. 그러나 초록에도 짧으나마 일생이 있다.봄바람을 타 새 움과 어린 잎이 돋아나올 때를 신록의 유년이라고 하면, 삼복염천아래 울창한 잎으로 그늘을 빗는 때를 그의 장년 또는 노년이라고 하겠다. 유년에는 유년의 아름다움이 있고 장년에는 장년의 아름다움이 있어 취사하고 선택할 여지가 없지마는, 신록에 이써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그의 청춘시대--움 가운데 숨어있던 잎의 하나하나가 모두 형태를 갖추어 완전한 잎이 되는 동시에 처음 태양의 세례를 받아 청신하고 발랄한 담록(淡綠)을 띠는 시절이라고 하겠다.........<신록예찬>중에서
이처럼 나무의 변화에 관해 소상하게 세심하게 표현해 낼 수 있었던 것은 결국에는 이양하 선생이 나무의 심성을 타고났기 때문이라고 보아 무방할 것이다. 선생이 나무에 대해서 묘사한 것을 보면 마치 자신이 나무가 되어 몇 년 동안 숲에 서 있어본 것 같다;
나무는 고독하다. 나무는 모든 고독을 안다. 안개에 잠긴 아침의 고독을 알고, 구름에 덮인 저녁의 고독을 안다.
부슬비 내리는 가을 저녁의 고독도 알고, 함박눈 펄펄 내리는 겨울 아침의 고독도 안다. 나무는 파리 옴짝 않는 한여름 대낮의 고독도 알고, 별 얼고 돌 우는 동짓달 한밤의 고독도 안다. 그러나 나무는 어디까지든지 고독에 견디고 고독을 이기고 또 고독을 즐긴다 ................ 수필 <나무> 중에서
글에서 나무라는 표현을 일인칭의 '나'로 바꾸어보면 이양하 선생이 결국은 나무였다는 점을 짐작케 한다. 그러기에 이양하 선생이란 나무는 그의 표현대로 오히려 외롭지 않고 많은 친구들로 해서 즐거웠다.
나무에 아주 친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달이 있고 바람이 있고, 새가 있다. 달은 때를 어기지 아니하고 찾고 고독한 여름밤을 같이 지내고 가는 의리 있고 다정한 친구다. 웃을 뿐 말이 없으나 이심전심 의사가 잘 소통되고 아주 비위에 맞는 친구다. 바람은 달과 달라 아주 변덕많고 수다스럽고 믿지 못할 친구다. 그야말로 바람잡이 친구다. 자기 마음에 내키는 때 찾아올 뿐 아니라, 어떤 때는 쏘삭쏘삭 알랑대고, 어떤 때는 난데없이 휘갈리고, 또 어떤 때는 공연히 뒤틀려 우악스럽게 남의 팔다리에 생채기를 내놓고 달아난다. 새 역시 바람같이 믿지못할 친구다. 역시 자기 마음 내키는 때에 찾아오고 마음 내키는 때에 달아난다. 그러나 가다 말고 와 둥지를 틀고, 지쳤을 때에 찾아와 쉬며 푸념하는 것이 귀엽다. 그리고 가다 흥겨워 노래를 할 때 노래들을 수 있는 것이 또한 기쁨이다.... 나무는 이 모든 것을 잘 가릴 줄 안다. 그러나 좋은 친구라고 하여 달만을 반기고, 믿지 못할 친구라고 하여 새와 바람을 물리치는 일은 없다............... 수필 <나무> 중에서
우리가 이 땅에서 할아버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뿌리내려 살아오듯이 나무들도 할아버지, 아버ㅗ지 나무를 거쳐 이 땅에 살고 있다. 나무는 결국 우리들이다. 이 땅에서 함께 살아오는 이웃이다. 이 땅의 나무도 우리처럼 이 땅에 사는 것이 좋은 모양이다. 그러기에 이 땅을 떠나지 않는다.
“여보게, 나무, 그동안 애 많이 썼네.....”
할아버지나무의 깊은 잠 속에 하늘의 길이 열리고, 멀리서 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 사람은 나무를 나무라 말하고, 나무를 친구라 부르던 사람이었다.
할아버지나무도 나무로 한 평생을 살며 스스로 나무라는 것이, 그리고 나무라는 이름이 한없이 좋았다. 그래서 더없이 편안한 잠결 속에 마지막으로 자기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나무....”
.............이순원 소설<나무>
그러기에 우리들은 이 땅을 떠날 수 없다. 이 땅의 나무로 다시 태어나야 할 운명을 지니고 있다.
나무에 하나 더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천명(天命)을 다한 뒤에 하늘 뜻대로 다시 흙과 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가다 장난삼아 칼로 제 이름을 새겨보고, 흔히는 자기 소용 닿는 대로 가지를 쳐 가고,송두리째 베어 가고 한다. 나무는 그래도 원망하지 않는다...나무는 훌륭한 견인주의자(堅忍主義者)요, 고독의 철인이요, 안분지족의 현인이다. 불교의 소위 윤회설이 참말이라면 나는 죽어서 나무가 되고 싶다..................수필 <나무> 중에서
신록이 돌아오는 이 계절에, 돌아온다는 의미를 다시 유념한다. 돌아오는 것은, 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이 좋은 신록이 돌아오기 위해서는 낙엽을 떨구고 계절의 냉혹한 현실 속으로 돌아가는 것이 전제가 되고 있다. 이 좋은 계절을 우리의 아들, 딸들에게 주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돌아가야 한다. 이 철리(哲理)는 부정할 수 없고 거역할 수도 없다.
나도 이제 죽어서 나무가 되련다. 산비탈을 억지로 깎아 만든 차가운 화강암 속에 갇히지 말고 그냥 한 줌의 비료가 되어 나무 밑에 묻혀서 한 그루의 나무를 자라게 하고 싶다. 그리고 만약 내가 묻힌 그 자리에 그 나무로부터 씨앗이 떨어져 조그만 나무가 자란다면 그 나무를 타고 다시 새로운 나무가 되어 이 세상을 작은 푸르름으로 덮어 나의 후손과 세상의 미물들에게 조그만 그늘로 인한 즐거움과 기쁨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