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동식의 다섯 계절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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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 |
*제14회 - " 백송 "
영광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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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1 03:44
1990년 7월 17일 한밤중에 돌풍이 불었다. 그리 센 바람은 아닌 듯 했지만 다음날 아침 청와대는 난리가 났다. 청와대 남서쪽 통의동에 서 있던 수 백 년 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백송이 맥없이 쓰러져 버린 것이다. 당시 문화부에 근무하던 나는, 전화로 제보를 받고 이것은 얘기가 된다고 해서 즉시 카메라기자를 대동하고 현장으로 갔다. 나무는 일부 가지를 남긴 채 거대한 용과 같은 흰 배를 드러내며, 이웃집 계단에 기대어 비스듬히 누워있었다. 나는 당시 이 뉴스를 화면으로는 단독으로 보도했고 그것은, 당시 장두원 문화부장의 표현을 빌면 “소도 뒷걸음질하다가 뭐 한다더니 어줍잖게 특종을 한 것이다”.
가뭄이 너무 심해도 국왕의 덕이 모자란 탓, 심한 자연재해가 나도 부덕을 탓해야하는 왕조의 전통이 엄연히 살아있는 한국, 그러기에 이 통의동 백송이 쓰러진 것을 뉴스에서 본 청와대의 주인(당시는 노태우 대통령)은 이 백송을 살려내라고 엄명을 내렸다. 그래서 나무에 대한 영양제 주사 등 갖가지 노력을 쏟았지만 백송은 야속하게도(?) 생을 마감했다. 그리 강한 바람도 아닌데 넘어간 것은, 나이 많은 노인들에게서 가끔 볼 수 있듯이, 이미 천수를 다한 것으로 봐야한다.
천연기념물 4호인 이 통의동 백송은, 흔히들 수령이 6백년이 됐다고 전해져 왔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숙종 때에 누군가가 중국에서 가져와 심은 것이었다. 이 백송이 서있던 자리는 원래 영조대왕이 임금이 되기 전에 살던 곳이다. 그러다가 추사 김정희 선생의 증조 할아버지인 김한신이 영조의 둘째 사위가 되면서 이 저택을 하사 받았다고 한다. 추사도 이 집에서 있으면서 열 살쯤 전후에 할아버지와 양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해 종손이 된다. 이 통의동 백송은, 그러므로, 추사와 인연을 담고 있다. 잣나무의 기개를 통해 어려울 때일수록 빛이 나는 우정을 묘사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 나오는 잣나무처럼, 이 백송도 집주인이었던 추사의 강직함을 닮았던 모양이다. 1990년 쓰러지고 나서 나이테를 조사해 본 결과 1690년 때 심은 것으로 확인돼 넘어질 당시 나이가 300살이었음을 알 수 있었지만, 공교롭게도 일제에 우리나라가 강점당한 36년 동안에는 나이테가 전혀 자라지 않았다는 속설이 전해져 온다. 그만큼 우리나라 최고의 백송으로서, 국민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통의동 백송이 쓰러지고 나서 이제는 재동 헌법재판소 안에 있는 백송이 가장 오래된 백송이라는 영예를 이어받았다. 지하철 3호선 안국역 2번 출구로 나가면 바로 있는 높다란 건물이 헌법재판소이다. 본관 건물의 왼편 뒤쪽에 서 있는 백송은 키가 14미터이고 밑부분 줄기 둘레가 4미터에 이르며, 서로 보기 싫다고 사이가 멀어지는 것처럼, 영어로 V자 모양으로 벌어지고 있다.
이 재동 백송이 서 있는 자리는 원래 영조 때 유명한 재상이었던 조상경의 집이었다고 한다. 이 나무는 통의동 백송보다는 조금 어리기 때문에 영조 때에 심어진 것이 아닌가 보인다. 이 백송은 주인인 조상경이 7번이나 판서를 하면서 조선조 후기 풍양 조씨들의 세도정치가 이 곳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것을 보아왔다. 순조대왕 19년, 곧 1819년에 이 조씨 집안 중의 하나인 조민영의 12살 된 어린 딸이 이 곳에서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창덕궁으로 들어가는데, 이 여자가 나중에 대왕대비가 되어, 철종이 승하한 뒤에 고종이 즉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것은 대원군 이하응이 파락호로 할 일 없이 건달노릇을 하면서 웅비를 꿈꿀 때에 이 집에 자주 드나들어, 조 대왕대비와도 깊은 관계를 맺어놓았기 때문이다.
대원군이 된 이하응은 이 곳을 더욱 자주 드나들며 조씨들과 함께 언동 김씨의 세도를 종식시키는 작업을 추진했다. 이 무렵 백송은 그 껍질이 더욱 희어져, 대원군은 자신의 성공을 확신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이 집은 개화파의 거두로 일컬어지는 박규수의 집으로 변했다. 박규수가 평안감사로 있던 1866년 대동강에 들어왔다가 갇힌 미국의 제네랄 셔먼호를 성공리(?)에 제압한 공으로 3년 뒤에 한성판윤에 임명됐을 때에 이사를 온 것으로 보여진다.
백송은 이 박규수 대감의 중사랑 뜰에 있었다. 이 사랑방에는 유대치나 오경석, 이동인 등 개화를 열망하던 중인들을 비롯해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박영효 등 젊은이 드나들며 밀려오는 외세 속에서 조선의 살길은 자주적인 개항밖에 없다며 개항의 방법론을 두고 고민을 해 왔다. 특히 홍영식은 스승인 박규수와 담을 마주하고 살았다고 한다. 이들 젊은이들이 훗날 갑신정변을 통해 강제적인 개항과 자주정부 수립을 도모했지만 3일만에 실패로 끝나고 주역들은 해외로 망명하다가 쓸쓸한 최후를 맞는다.
개화파의 산실이었던 이 일대는 그 후 1880년대에 외교통상업무를 맡아보던 외아문이 설치됐고, 홍영식의 집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이 문을 열었고, 일제하에서는 한성고등여학교라고 경기여고의 전신(나중에 경기고등여학교로 바뀜)이 이 곳에 세워졌다. 31운동의 주역인 최린의 집과 월남 이상재 선생의 집도 헌법재판소 구내 지하주차장 입구에 있었다고 한다. 해방직후에는 이 곳에 있던 경기고등여학교 강당에서 1945년 9월에 여운형과 박헌영을 비롯한 좌익세력들이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개최하고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기도 했다.
그런 역사를 재동의 백송은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재동이란 동네이름도 왕위를 노리던 수양대군이 당시 이 일대에 살던 김종서의 집으로 직접 찾아가 그를 죽이자, 피바다가 된 그의 집 일대의 피비린내를 없애기 위해 사람들이 재를 갖다가 뿌린 것에서 연유됐다고 하는데, 결국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정치적인 변화의 소용돌이의 현장이 돼 온 것이다. 최근에는 헌법재판소가 이곳에 들어섬으로서 수많은 회오리를 잠재우는 역할을 하고 있지만 헌법재판소의 판결내용을 보더라도 여전히 변화와 갈등의 진원지이라고도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헌법재판소 구내에 서 있는 백송 한그루와, 양쪽으로 갈라져 자라고 있는 가지를 보면서 백송에 얽힌 우리의 근대사가 참으로 파란만장하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가뭄이 너무 심해도 국왕의 덕이 모자란 탓, 심한 자연재해가 나도 부덕을 탓해야하는 왕조의 전통이 엄연히 살아있는 한국, 그러기에 이 통의동 백송이 쓰러진 것을 뉴스에서 본 청와대의 주인(당시는 노태우 대통령)은 이 백송을 살려내라고 엄명을 내렸다. 그래서 나무에 대한 영양제 주사 등 갖가지 노력을 쏟았지만 백송은 야속하게도(?) 생을 마감했다. 그리 강한 바람도 아닌데 넘어간 것은, 나이 많은 노인들에게서 가끔 볼 수 있듯이, 이미 천수를 다한 것으로 봐야한다.
천연기념물 4호인 이 통의동 백송은, 흔히들 수령이 6백년이 됐다고 전해져 왔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숙종 때에 누군가가 중국에서 가져와 심은 것이었다. 이 백송이 서있던 자리는 원래 영조대왕이 임금이 되기 전에 살던 곳이다. 그러다가 추사 김정희 선생의 증조 할아버지인 김한신이 영조의 둘째 사위가 되면서 이 저택을 하사 받았다고 한다. 추사도 이 집에서 있으면서 열 살쯤 전후에 할아버지와 양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해 종손이 된다. 이 통의동 백송은, 그러므로, 추사와 인연을 담고 있다. 잣나무의 기개를 통해 어려울 때일수록 빛이 나는 우정을 묘사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 나오는 잣나무처럼, 이 백송도 집주인이었던 추사의 강직함을 닮았던 모양이다. 1990년 쓰러지고 나서 나이테를 조사해 본 결과 1690년 때 심은 것으로 확인돼 넘어질 당시 나이가 300살이었음을 알 수 있었지만, 공교롭게도 일제에 우리나라가 강점당한 36년 동안에는 나이테가 전혀 자라지 않았다는 속설이 전해져 온다. 그만큼 우리나라 최고의 백송으로서, 국민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통의동 백송이 쓰러지고 나서 이제는 재동 헌법재판소 안에 있는 백송이 가장 오래된 백송이라는 영예를 이어받았다. 지하철 3호선 안국역 2번 출구로 나가면 바로 있는 높다란 건물이 헌법재판소이다. 본관 건물의 왼편 뒤쪽에 서 있는 백송은 키가 14미터이고 밑부분 줄기 둘레가 4미터에 이르며, 서로 보기 싫다고 사이가 멀어지는 것처럼, 영어로 V자 모양으로 벌어지고 있다.
이 재동 백송이 서 있는 자리는 원래 영조 때 유명한 재상이었던 조상경의 집이었다고 한다. 이 나무는 통의동 백송보다는 조금 어리기 때문에 영조 때에 심어진 것이 아닌가 보인다. 이 백송은 주인인 조상경이 7번이나 판서를 하면서 조선조 후기 풍양 조씨들의 세도정치가 이 곳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것을 보아왔다. 순조대왕 19년, 곧 1819년에 이 조씨 집안 중의 하나인 조민영의 12살 된 어린 딸이 이 곳에서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창덕궁으로 들어가는데, 이 여자가 나중에 대왕대비가 되어, 철종이 승하한 뒤에 고종이 즉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것은 대원군 이하응이 파락호로 할 일 없이 건달노릇을 하면서 웅비를 꿈꿀 때에 이 집에 자주 드나들어, 조 대왕대비와도 깊은 관계를 맺어놓았기 때문이다.
대원군이 된 이하응은 이 곳을 더욱 자주 드나들며 조씨들과 함께 언동 김씨의 세도를 종식시키는 작업을 추진했다. 이 무렵 백송은 그 껍질이 더욱 희어져, 대원군은 자신의 성공을 확신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이 집은 개화파의 거두로 일컬어지는 박규수의 집으로 변했다. 박규수가 평안감사로 있던 1866년 대동강에 들어왔다가 갇힌 미국의 제네랄 셔먼호를 성공리(?)에 제압한 공으로 3년 뒤에 한성판윤에 임명됐을 때에 이사를 온 것으로 보여진다.
백송은 이 박규수 대감의 중사랑 뜰에 있었다. 이 사랑방에는 유대치나 오경석, 이동인 등 개화를 열망하던 중인들을 비롯해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박영효 등 젊은이 드나들며 밀려오는 외세 속에서 조선의 살길은 자주적인 개항밖에 없다며 개항의 방법론을 두고 고민을 해 왔다. 특히 홍영식은 스승인 박규수와 담을 마주하고 살았다고 한다. 이들 젊은이들이 훗날 갑신정변을 통해 강제적인 개항과 자주정부 수립을 도모했지만 3일만에 실패로 끝나고 주역들은 해외로 망명하다가 쓸쓸한 최후를 맞는다.
개화파의 산실이었던 이 일대는 그 후 1880년대에 외교통상업무를 맡아보던 외아문이 설치됐고, 홍영식의 집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이 문을 열었고, 일제하에서는 한성고등여학교라고 경기여고의 전신(나중에 경기고등여학교로 바뀜)이 이 곳에 세워졌다. 31운동의 주역인 최린의 집과 월남 이상재 선생의 집도 헌법재판소 구내 지하주차장 입구에 있었다고 한다. 해방직후에는 이 곳에 있던 경기고등여학교 강당에서 1945년 9월에 여운형과 박헌영을 비롯한 좌익세력들이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개최하고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기도 했다.
그런 역사를 재동의 백송은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재동이란 동네이름도 왕위를 노리던 수양대군이 당시 이 일대에 살던 김종서의 집으로 직접 찾아가 그를 죽이자, 피바다가 된 그의 집 일대의 피비린내를 없애기 위해 사람들이 재를 갖다가 뿌린 것에서 연유됐다고 하는데, 결국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정치적인 변화의 소용돌이의 현장이 돼 온 것이다. 최근에는 헌법재판소가 이곳에 들어섬으로서 수많은 회오리를 잠재우는 역할을 하고 있지만 헌법재판소의 판결내용을 보더라도 여전히 변화와 갈등의 진원지이라고도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헌법재판소 구내에 서 있는 백송 한그루와, 양쪽으로 갈라져 자라고 있는 가지를 보면서 백송에 얽힌 우리의 근대사가 참으로 파란만장하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