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동식의 다섯 계절의 노래
|
이동식 |
*제23회 - " 그 섬 "
영광도서
0
571
2016.12.01 03:44
"아침저녁 홀로 초원을 돌아다니다 보면 오르가슴을 느낀다. 신선한 공기, 황홀한 여명, 새들의 지저귐, 풀 냄새, 꽃향기, 실바람... 그 모든 것들이 인위적으로 만들 수 없는 절묘한 조화를 부린다. 소와 말들이 한가로이 노닐고, 새들은 제 흥에 겨워 조잘거리고, 풀잎에 몸을 감춘 벌레들은 사랑을 속삭인다. 벌 나비는 꽃향기를 따라 날개짓 한다. 자연이 인간에게 베푸는 축복이다."
그랬다. 제주를 담은 사진작가 김영갑씨의 말 그대로였다. 그 곳을 올라가니 오르면서부터 '오르가슴'이 느껴졌다. 그냥 쓰기는 껄끄럽지만 우리 말로 풀기가 어려운 이 '오르가슴'이란 단어가 이 경우엔 왜 적합할까? 경사도가 30도를 넘는 가파른 야산이지만 막 태어난 파릇파릇한 풀들이 노란 꽃을 머리 위로 처 들며 생명의 환희를 노래하고 있다. 오월이지만 여전히 강한 바람은 나무가 크는 것을 허용하지 않아, 산등성이에는 온통 풀만이 있다. 그 풀잎과 뿌리에는 또 작은 생명들이 붙어있다. 저 멀리 보이는 산기슭에는 소와 말들이 천천히 그들만의 천국을 즐기고 있다. 여기에는 모든 것이 한가롭고 자유롭고 편안하고 느긋하다. 산 정상 곳곳에 남아있는 소와 말의 배설물들도 그런 생명과 자유의 증거로 반갑다. 저 멀리 한라산이 위엄을 드러내는 그 자태 밑으로 수많은 군봉들이 거대한 한 가족을 형성하며 '여기가 제주도요' 라고 손님들에게 말해준다.
5월에 찾은 용눈이 오름은 그렇게 인간들에게 생명과 자유의 환희를 느끼게 해주었다. '오름'이란 자그마한 기생화산을 일컫는 제주말이란다. 나는 이 말을 "화산으로 인해 땅이 솟아 올랐다"라는 뜻에서 '오름'이란 말이 생겨난 것으로 생각되었다. 제주에는 이런 오름이 360여 개나 있다고 한다. 저마다 크기와 형태가 다르고, 신비한 전설과 사연을 갖고 있다. 대부분 강한 바람 때문에 나무가 거의 없지만 때로는 원시림을 자랑하는 곳도 있다. 그 많은 오름 중에 용눈이 오름 하나만으로도 그렇게 편하고 좋을 수가 없었다. 마침 제주에 살게 된 친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냥 해안이나 경치를 죽 둘러보고 바닷가에 쭈그리고 앉아 해산물 회나 한 두 점 집어먹고, 갈치찜이나 한 접시 시켜먹고 제주를 다 봤다고 했을 터인데, 그야말로 친구의 안내가 있었기에 이런 오름을 오를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번 짧은 제주여행에서 가장 뜻깊은 체험이었다.
그런데 아직 내려온 지 반 년 밖에 안되었지만 제주에 사는 그 친구는, 오름에서 내려오고 싶지 않은 우리들에게 다시 들릴 데가 있다고 발걸음을 재촉하며 강제로 끌어내린다. 서울에서 같이 온 친구도 그 이름을 안다며 반긴다. 거기서 남쪽으로 조금 더 내려가서 어느 허름한 시골동네로 차를 몬다. 거기 돌담이 둘러 쌓인 한 학교 터에 차를 세운다. 갤러리란다. 검은 현무암 돌을 가슴 높이로 미로처럼 쌓아놓은 사이를 지나니 누런 계란색으로 전면이 뒤덮인 나지막한 단층 건물이 나타난다. 첫 눈에 예전에 학교였던 것 같다. 맞다. 삼달국민학교라는 조그만 돌비석이 보인다.
입구에 들어갈 때만 해도 우리나라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렇고 그런 전시장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갤러리 안에는 정말 우리가 못 보던, 생각도 못하던 제주라는 섬이 있었다. 조금 전에 본 용눈이 오름을 비롯한 제주의 오름들이 그 안에 숨어서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주고 싶어 안달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눈을 시원하게 열어주는 파노라마 사진들의 밑에는 이런 목소리가 실려있다:
"눈으로 보아도 보이지 않고, 귀로 들어도 들리지 않고,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는 것, 형상도 없는데 사람을 황홀하게 하는 그 무엇이 중산간 광활한 초원에 존재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최고의 것은, 사람을 황홀하게 하는 그 무엇이다. 그것을 깨닫기 위해 나는 중산간을 떠나지 못한다."
부끄럽게도 이 곳에 와서야 나는 비로소 김영갑이란 사진작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결혼도 하지 않고 제주도에 내려와 무진 고생 끝에 제주도 중산간에 자리를 잡고 그의 모든 것을 이 섬을 찍어내는데 바친 사실을 접하게 되었다:
"날마다 사진을 찍는 나는 날마다 사진만을 생각합니다. 사진 찍는 일에 몰입해 홀로 지내는 동안, 그리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내가 잊혀져 갈지라도 나의 사진작업은 계속될 것입니다. 하늘의 변화에 따라 내 마음은 변하고 마음의 변화에 따라 어느 한 곳을 찾아갑니다. 같은 곳을 수십 번, 수백 번 반복해서 찾아가지만 늘 새로움으로 다가옵니다. 같은 곳을 삼백 예순 다섯 날 하루도 거르지 않고 찾아도 갈 때마다 새롭기만 합니다."
그는 지난 1982년 처음 제주도에 발을 딛었다. 그 후 3년 만에 짐을 싸들고 내려와 꼬박 20년 제주와 뒹굴었다. 처음에는 외지에서 온 이 사진작가에게 주민도 제주도도 차가왔다. 날마다 사진만을 찍으니 간첩이 아니냐며 몇 번씩 불려가기도 했다.
그러나 제주라는 자연은 결국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태풍이 치면 바다로 나갔고, 낮이면 중산간 오름을 쏘다니며 마음껏 제주를 찍었다. 비가 오면 구름을 벗삼아 움직이는 모양을 담고, 맑은 날에는 꽃향기에 취해 흐느적거렸다. 바람과 풀잎, 돌과 바다는 늘 그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었다. 땡전 한 푼 없어서 들판을 거닐다 밭에 떨어진 당근을 씹어먹고, 라면이 떨어지면 냉수 한 사발로 배를 채우면서 제주와 사랑에 빠졌단다. 끼니는 걸러도 인화지와 필름 없이 살수는 없었다. 한 컷 셔터를 누르지 않으면 라면 한끼가 보장되지만, 그는 주저 없이 셔터를 눌러댔다.
밥을 굶어가면서 만들어 낸 20만장의 필름은, 제주의 그 많은 돌과 바람, 풀 속에 투영된 김영갑이란 한 인간의 혼이 찾아 헤매던 자유의 흔적이었다. 아무도 바람을 본 사람은 없었다. 단지 바람이 지나가는 것을 볼뿐이다. 그러나 김영갑은 바람을 보았다. 그가 담아낸 제주의 자연풍경에는 자유의 상징인 바람이 있었다. 예전 서양화가 안병석 씨가 그의 그림에 표현했던 그 '바람결'이다. 거기에는 인간의 짧은 수명을 비웃기라도 하듯 수 천 년 수 만 년 버티어 온 돌과 흙이 있었다. 그리고 인간의 탐욕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한 풀과 나무가 있었다. 욕심을 벗어버린 김영갑에게만 그런 제주의 참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나는 사진에 순교하기로 작정한 사람이다."
배가 고플 때마다 생각했던 그런 그의 핑계 아닌 자기암시와 신념이 실현되는 것일까? 어느 날 갑자기 팔에 힘이 빠지고 아무런 것도 할 수 없는 때가 찾아 와 병원에 가 보니 '루게릭병(근위축성 측삭경화증)'이란다. 이미 너무 많이 진행돼 길어야 5년이란 진단을 받았다. 그것이 7년 전이었다. 이제는 손가락을 움직이지도 못하게 된다고 한다. 정작 사진을 찍을 수 없게 됐을 때, 당연하지만, 절망감이 몰려왔다. 손이 마비된다는 것은, 사진작가에게는 사형선고가 아니던가? 한동안 고민과 방황의 시간을 보내면서 자신이 죽으면 이 필름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다 태울까 생각도 했었다. 그러다 생각을 했다. 갤러리를 만들자!
남은 시간들을 허비할 수 없었다. 가장 먼저 남제주군 성산읍 삼달리의 폐교(초등학교) 건물을 임대해 갤러리를 만들었다. 이름은 한라산의 옛 이름을 따서 두모악갤러리라고 했다. 몸이 성한 사람도 하기 어렵다는 공사를 그가 했다. 학교 앞 운동장에는 근처에서 돌을 날라 와 하나 둘 씩 쌓기 시작했다. 병마에 몸을 내줄 수 없다는 신념이 그에게 엄청난 힘을 주었다. 운동장에는 또 다른 제주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공사 중에는 몸이 점차 야위어 70kg가 넘던 몸이 47kg으로 줄어들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자신의 작품들을 정리해서 개인전을 열었고 사진집을 발간했다. 사람들이 김영갑이란 작가를 보다 잘 알게 된 것은 그 즈음이었다.
그러나 그의 집념도 신념도 병마를 이기지는 못했다. 길가의 작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중상이 됐다. 휴지 한 장 제 손으로 들어올리지 못하게 됐다. 6년을 버틴 것은 그래도 그 집념의 힘이었을까? 2005년 5월 29일 아침, 제주의 그 많은 오름과 고개를 넘엇던 김영감 씨는 정작 자신은 인생의 오십 고개도 넘어보지 못하고 제주 한마음 병원에서 제주의 하늘로 올라갔다. 그가 사랑한 제주를 20여 만장의 필름에 담아 두모악 갤러리에 남겨놓고.
몸이 성했을 때에 그의 삶과 작품세계는 '기다림'의 연속이다. 풍경사진 하나도 우연히 찍힌 게 없다. 절벽에 몸을 매달고 사진을 찍는가 하면, 세월의 흐름을 표현하기 위해 매년 같은 장소에서 찍기도 했다. 그러다 보면 일년이 금방 지나갔다. 몸이 망가진 이후에도 그는 결코 병에 굴복하거나 지지 않았다:
"나에게 내일이란 기약할 수 없는 시간이다. 허락된 것은 오늘 하루, 그 하루를 평화롭게 보낼 수 있으면 된다. 그러다 보면 아픔도 잊혀진다. 하나에 몰입해 있는 동안은 통증을 의식하지 못한다. 통증을 잊으려고 몰입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 또 다른 하루가 허락되면 또 다른 일을 찾는다. 몰입할 수 있는 일은 끝이 없어서 찾으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300여 평 남짓한 옛 학교 교실들을 개조한 갤러리를 돌아보면서 우리 일행은 그러한 김영갑의 혼이 느껴졌다. 시원한 파노라마에 담긴 그의 작품들에서, 교실 바닥에 깔린 제주의 돌에서, 그리고 그가 앉던 의자와 카메라 등 유물들에서 제주에 미친, 제주를 사랑한, 그리고 그를 시기한 병마에도 지지 않고 버틴 김영갑의 혼을 느낄 수 있었다. 더욱 놀란 것은, 그 병마와 싸운 김영갑 씨의 의지가 어떠했기에 아픈 몸으로 운동장에 그처럼 대단한 규모로 돌을 쌓을 수 있었냐는 것이었다.
그는 매일매일 생활이라는, 생존이라는 핑계로 한없이 스스로를 가두고 남에게 담을 쌓고 진정한 삶에 눈을 감는 우리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갤러리는 관람료를 받지 않고 자율에 맡긴다. 우리는 누가 하나 먼저 제안하지도 않았지만 지갑을 열었다 아주 작은 돈이지만 함 속에 넣었다. 갤러리가 얼마나 잘 유지될까 걱정을 했지만 다행히 제주의 뜻있는 분들에 의해 정부의 재정지원도 받으며 현 상태라도 유지할 수 있는 길이 생겼다고 한다. 다행한 일이다. 여기에 오면 언제든 김영갑씨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랬다. 제주를 담은 사진작가 김영갑씨의 말 그대로였다. 그 곳을 올라가니 오르면서부터 '오르가슴'이 느껴졌다. 그냥 쓰기는 껄끄럽지만 우리 말로 풀기가 어려운 이 '오르가슴'이란 단어가 이 경우엔 왜 적합할까? 경사도가 30도를 넘는 가파른 야산이지만 막 태어난 파릇파릇한 풀들이 노란 꽃을 머리 위로 처 들며 생명의 환희를 노래하고 있다. 오월이지만 여전히 강한 바람은 나무가 크는 것을 허용하지 않아, 산등성이에는 온통 풀만이 있다. 그 풀잎과 뿌리에는 또 작은 생명들이 붙어있다. 저 멀리 보이는 산기슭에는 소와 말들이 천천히 그들만의 천국을 즐기고 있다. 여기에는 모든 것이 한가롭고 자유롭고 편안하고 느긋하다. 산 정상 곳곳에 남아있는 소와 말의 배설물들도 그런 생명과 자유의 증거로 반갑다. 저 멀리 한라산이 위엄을 드러내는 그 자태 밑으로 수많은 군봉들이 거대한 한 가족을 형성하며 '여기가 제주도요' 라고 손님들에게 말해준다.
5월에 찾은 용눈이 오름은 그렇게 인간들에게 생명과 자유의 환희를 느끼게 해주었다. '오름'이란 자그마한 기생화산을 일컫는 제주말이란다. 나는 이 말을 "화산으로 인해 땅이 솟아 올랐다"라는 뜻에서 '오름'이란 말이 생겨난 것으로 생각되었다. 제주에는 이런 오름이 360여 개나 있다고 한다. 저마다 크기와 형태가 다르고, 신비한 전설과 사연을 갖고 있다. 대부분 강한 바람 때문에 나무가 거의 없지만 때로는 원시림을 자랑하는 곳도 있다. 그 많은 오름 중에 용눈이 오름 하나만으로도 그렇게 편하고 좋을 수가 없었다. 마침 제주에 살게 된 친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냥 해안이나 경치를 죽 둘러보고 바닷가에 쭈그리고 앉아 해산물 회나 한 두 점 집어먹고, 갈치찜이나 한 접시 시켜먹고 제주를 다 봤다고 했을 터인데, 그야말로 친구의 안내가 있었기에 이런 오름을 오를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번 짧은 제주여행에서 가장 뜻깊은 체험이었다.
그런데 아직 내려온 지 반 년 밖에 안되었지만 제주에 사는 그 친구는, 오름에서 내려오고 싶지 않은 우리들에게 다시 들릴 데가 있다고 발걸음을 재촉하며 강제로 끌어내린다. 서울에서 같이 온 친구도 그 이름을 안다며 반긴다. 거기서 남쪽으로 조금 더 내려가서 어느 허름한 시골동네로 차를 몬다. 거기 돌담이 둘러 쌓인 한 학교 터에 차를 세운다. 갤러리란다. 검은 현무암 돌을 가슴 높이로 미로처럼 쌓아놓은 사이를 지나니 누런 계란색으로 전면이 뒤덮인 나지막한 단층 건물이 나타난다. 첫 눈에 예전에 학교였던 것 같다. 맞다. 삼달국민학교라는 조그만 돌비석이 보인다.
입구에 들어갈 때만 해도 우리나라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렇고 그런 전시장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갤러리 안에는 정말 우리가 못 보던, 생각도 못하던 제주라는 섬이 있었다. 조금 전에 본 용눈이 오름을 비롯한 제주의 오름들이 그 안에 숨어서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주고 싶어 안달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눈을 시원하게 열어주는 파노라마 사진들의 밑에는 이런 목소리가 실려있다:
"눈으로 보아도 보이지 않고, 귀로 들어도 들리지 않고,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는 것, 형상도 없는데 사람을 황홀하게 하는 그 무엇이 중산간 광활한 초원에 존재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최고의 것은, 사람을 황홀하게 하는 그 무엇이다. 그것을 깨닫기 위해 나는 중산간을 떠나지 못한다."
부끄럽게도 이 곳에 와서야 나는 비로소 김영갑이란 사진작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결혼도 하지 않고 제주도에 내려와 무진 고생 끝에 제주도 중산간에 자리를 잡고 그의 모든 것을 이 섬을 찍어내는데 바친 사실을 접하게 되었다:
"날마다 사진을 찍는 나는 날마다 사진만을 생각합니다. 사진 찍는 일에 몰입해 홀로 지내는 동안, 그리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내가 잊혀져 갈지라도 나의 사진작업은 계속될 것입니다. 하늘의 변화에 따라 내 마음은 변하고 마음의 변화에 따라 어느 한 곳을 찾아갑니다. 같은 곳을 수십 번, 수백 번 반복해서 찾아가지만 늘 새로움으로 다가옵니다. 같은 곳을 삼백 예순 다섯 날 하루도 거르지 않고 찾아도 갈 때마다 새롭기만 합니다."
그는 지난 1982년 처음 제주도에 발을 딛었다. 그 후 3년 만에 짐을 싸들고 내려와 꼬박 20년 제주와 뒹굴었다. 처음에는 외지에서 온 이 사진작가에게 주민도 제주도도 차가왔다. 날마다 사진만을 찍으니 간첩이 아니냐며 몇 번씩 불려가기도 했다.
그러나 제주라는 자연은 결국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태풍이 치면 바다로 나갔고, 낮이면 중산간 오름을 쏘다니며 마음껏 제주를 찍었다. 비가 오면 구름을 벗삼아 움직이는 모양을 담고, 맑은 날에는 꽃향기에 취해 흐느적거렸다. 바람과 풀잎, 돌과 바다는 늘 그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었다. 땡전 한 푼 없어서 들판을 거닐다 밭에 떨어진 당근을 씹어먹고, 라면이 떨어지면 냉수 한 사발로 배를 채우면서 제주와 사랑에 빠졌단다. 끼니는 걸러도 인화지와 필름 없이 살수는 없었다. 한 컷 셔터를 누르지 않으면 라면 한끼가 보장되지만, 그는 주저 없이 셔터를 눌러댔다.
밥을 굶어가면서 만들어 낸 20만장의 필름은, 제주의 그 많은 돌과 바람, 풀 속에 투영된 김영갑이란 한 인간의 혼이 찾아 헤매던 자유의 흔적이었다. 아무도 바람을 본 사람은 없었다. 단지 바람이 지나가는 것을 볼뿐이다. 그러나 김영갑은 바람을 보았다. 그가 담아낸 제주의 자연풍경에는 자유의 상징인 바람이 있었다. 예전 서양화가 안병석 씨가 그의 그림에 표현했던 그 '바람결'이다. 거기에는 인간의 짧은 수명을 비웃기라도 하듯 수 천 년 수 만 년 버티어 온 돌과 흙이 있었다. 그리고 인간의 탐욕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한 풀과 나무가 있었다. 욕심을 벗어버린 김영갑에게만 그런 제주의 참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나는 사진에 순교하기로 작정한 사람이다."
배가 고플 때마다 생각했던 그런 그의 핑계 아닌 자기암시와 신념이 실현되는 것일까? 어느 날 갑자기 팔에 힘이 빠지고 아무런 것도 할 수 없는 때가 찾아 와 병원에 가 보니 '루게릭병(근위축성 측삭경화증)'이란다. 이미 너무 많이 진행돼 길어야 5년이란 진단을 받았다. 그것이 7년 전이었다. 이제는 손가락을 움직이지도 못하게 된다고 한다. 정작 사진을 찍을 수 없게 됐을 때, 당연하지만, 절망감이 몰려왔다. 손이 마비된다는 것은, 사진작가에게는 사형선고가 아니던가? 한동안 고민과 방황의 시간을 보내면서 자신이 죽으면 이 필름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다 태울까 생각도 했었다. 그러다 생각을 했다. 갤러리를 만들자!
남은 시간들을 허비할 수 없었다. 가장 먼저 남제주군 성산읍 삼달리의 폐교(초등학교) 건물을 임대해 갤러리를 만들었다. 이름은 한라산의 옛 이름을 따서 두모악갤러리라고 했다. 몸이 성한 사람도 하기 어렵다는 공사를 그가 했다. 학교 앞 운동장에는 근처에서 돌을 날라 와 하나 둘 씩 쌓기 시작했다. 병마에 몸을 내줄 수 없다는 신념이 그에게 엄청난 힘을 주었다. 운동장에는 또 다른 제주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공사 중에는 몸이 점차 야위어 70kg가 넘던 몸이 47kg으로 줄어들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자신의 작품들을 정리해서 개인전을 열었고 사진집을 발간했다. 사람들이 김영갑이란 작가를 보다 잘 알게 된 것은 그 즈음이었다.
그러나 그의 집념도 신념도 병마를 이기지는 못했다. 길가의 작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중상이 됐다. 휴지 한 장 제 손으로 들어올리지 못하게 됐다. 6년을 버틴 것은 그래도 그 집념의 힘이었을까? 2005년 5월 29일 아침, 제주의 그 많은 오름과 고개를 넘엇던 김영감 씨는 정작 자신은 인생의 오십 고개도 넘어보지 못하고 제주 한마음 병원에서 제주의 하늘로 올라갔다. 그가 사랑한 제주를 20여 만장의 필름에 담아 두모악 갤러리에 남겨놓고.
몸이 성했을 때에 그의 삶과 작품세계는 '기다림'의 연속이다. 풍경사진 하나도 우연히 찍힌 게 없다. 절벽에 몸을 매달고 사진을 찍는가 하면, 세월의 흐름을 표현하기 위해 매년 같은 장소에서 찍기도 했다. 그러다 보면 일년이 금방 지나갔다. 몸이 망가진 이후에도 그는 결코 병에 굴복하거나 지지 않았다:
"나에게 내일이란 기약할 수 없는 시간이다. 허락된 것은 오늘 하루, 그 하루를 평화롭게 보낼 수 있으면 된다. 그러다 보면 아픔도 잊혀진다. 하나에 몰입해 있는 동안은 통증을 의식하지 못한다. 통증을 잊으려고 몰입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 또 다른 하루가 허락되면 또 다른 일을 찾는다. 몰입할 수 있는 일은 끝이 없어서 찾으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300여 평 남짓한 옛 학교 교실들을 개조한 갤러리를 돌아보면서 우리 일행은 그러한 김영갑의 혼이 느껴졌다. 시원한 파노라마에 담긴 그의 작품들에서, 교실 바닥에 깔린 제주의 돌에서, 그리고 그가 앉던 의자와 카메라 등 유물들에서 제주에 미친, 제주를 사랑한, 그리고 그를 시기한 병마에도 지지 않고 버틴 김영갑의 혼을 느낄 수 있었다. 더욱 놀란 것은, 그 병마와 싸운 김영갑 씨의 의지가 어떠했기에 아픈 몸으로 운동장에 그처럼 대단한 규모로 돌을 쌓을 수 있었냐는 것이었다.
그는 매일매일 생활이라는, 생존이라는 핑계로 한없이 스스로를 가두고 남에게 담을 쌓고 진정한 삶에 눈을 감는 우리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갤러리는 관람료를 받지 않고 자율에 맡긴다. 우리는 누가 하나 먼저 제안하지도 않았지만 지갑을 열었다 아주 작은 돈이지만 함 속에 넣었다. 갤러리가 얼마나 잘 유지될까 걱정을 했지만 다행히 제주의 뜻있는 분들에 의해 정부의 재정지원도 받으며 현 상태라도 유지할 수 있는 길이 생겼다고 한다. 다행한 일이다. 여기에 오면 언제든 김영갑씨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