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동식의 다섯 계절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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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 |
*제46회 - " 사랑 "
영광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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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1 03:44
“우선 자네들이 제일 먼저 배워야 할 것은 인간의 본성이 무엇이고 그 본성이 겪었던 것들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라네. 사실 아주 먼 옛날에 우리의 본성은 오늘날 인간의 본성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네. 첫째로 인간은 오늘날처럼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성이 아니라 세 종류로 나뉘어 있었음을 알아야 하네. 그런데 이 세 번째 종류의 인간은 남성과 여성 모두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네. 그것을 지칭하는 이름은 오늘날에도 남아있지만 그 실재 자체는 사라졌다네”
그리스의 희극시인인 아리스토파네스는 의사인 에릭시마코스에게 이렇게 얘기해준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플라톤의 <향연(饗宴)>이라는 책에 기록된 내용이다. 희극시인이 의사에게 말해주는 형식이어서 마치 공상가가 과학자에게 설명해 주는 꼴이 되었지만, 그 개념자체는 모든 것을 음과 양의 두 존재로 설명하는 동양적인 인간관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새로운 충격이다. 과연 인간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종류 외에 남과 녀를 공유하는 제 3의 종류가 있었겠는가?
플라톤에 있어서 이런 제3의 종류의 인간은 androgynon이라고 부른다. 남성을 뜻하는 andron과 여성을 뜻하는 gynon이 합쳐진 단어이다. 요컨대 아주 중립적인 단어는 아니고 남성과 여성이란 말의 합성어이다. 이를 통해볼 때에 이 개념도 원래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고 아마도 당시 플라톤이나 그 이전 시대에 이러한 개념이 필요해서 일부러 만들어진 것일 터이지만, 그런 개념 자체를 상상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당시 그리스 사회가 얼마나 상상력이 풍부한 사회였는지를 더듬어볼 수 있게 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남성과 여성을 공유하는 이러한 존재를 요즈음에는 성전환자들이나 동성연애자들과 동일시하려는 경향이 많아지고 있어서, 새롭게 플라톤의 『향연』이란 책을 다시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누구의 입을 빌어서 얘기를 했건 결국은 이 『향연』이란 책은 플라톤의 생각을 전하는 것으로서, 플라톤에 따르면 원시시대 인간은 남과 여, 양성인의 세 가지 종이 있었다. 그중 양성을 가진 인간은 몸이 동그랬다. 같은 몸체에 얼굴이 두개였고 손발은 각각 4개였다. 요즘 인간의 모습이지만 두 사람이 등이 맞붙어 있는 모습을 가지고 있어서, 완전한 원을 이룰 수 있기에 굴러다니기도 하였다. 이들은 지구상의 생물 중에서 가장 영특하고 강한 힘과 재주를 가지고 있었기에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었다. 그래서 이윽고 신에게 도전을 하게 되었는데 이를 괘씸히 여긴 제우스가 아폴론을 시켜 이들을 반쪽으로 잘라 버렸다. 둘로 나누어진 양성인은 가끔 다른 한쪽을 그리워하게 되었고 다시 하나로 합체하고 싶은 욕망이 가끔 일게 된다. 그들은 합쳐야 비로소 완전한 하나가 된다는 것을 느낀다. 그것이 사랑의 원천 '에로스'라는 것이다.
플라톤의 이러한 사랑론(論)을 읽고 반가워한 사람들이 있다. 곧 남성도 여성도 아니고 그 둘을 몸에 공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곧 남성이면서 여성의 특질을 갖고 있거나 여성이면서 남성의 특질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플라톤이 말하는 양성인과 동일시하고 자신들의 실재를 세상에서 인정해달라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뮤지컬과 영화로 유명해진 ‘헤드윅 (hedwig and the angry inch)’이 바로 이러한 얘기를 모티브로 한 것으로서, ‘반쪽을 찾아 헤맨다’는 아이디어를 남자와 여자, 게이, 레즈비언 등 여러 性의 모습에서 그려낸다.
이같은 플라톤의 주장은 음양이론에 의한 이분법에 익숙한 우리 동양인들에게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고, 지금 우리들이 아는 과학의 눈으로 보면 공상과 같이 보인다. 그런데, 생물학에서 모든 생물의 조상은 자웅동체, 또는 무성이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러한 플라톤의 생각이 완전한 허구가 아니라 아마도 종의 발달에 따라 우리들의 기억의 유전자 어디에 남아있는 경험이 작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원래 하나였던 양성인의 상태로 돌아가야 온전해질 수 있다는 생각은 어머니의 양수를 그리워하는 현대인들의 심성에도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근원에의 회귀의식이라고 할 것이다.
플라톤의 '에로스' 이론은 의학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세기 까지만 해도 의사들은 태아기의 일정한 단계까지는 모든 성이 똑같다고 믿었다고 한다. 그 단계가 지난 후 3가지 성, 즉 남성, 여성, 아직 분화되지 않은 중성으로 구분된다고 하였고 중성은 양성애적 기질을 가진다고 믿었다. 태아의 성은 5주가 지나야 알 수 있지만 그 이후에도 성의 분화가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성의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나아가서, 성의 분화가 이루어진 후에도 인간은 누구나 양성적인 흔적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페니스와 음핵, 대음순과 음낭, 난소와 고환, 질과 음낭의 절개선 등은 아직도 남아있는 흔적으로서의 서로 대칭되는 인간의 양성적 기관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현대에서 양성적 이미지를 소유한 대상은 대중에게 매혹적으로 작용하는데, 그 표상으로는 순정만화의 씩씩한 여주인공, 근육이 튀어나와서 울끈 불끈한 여자 운동선수나 예쁘장한 남자 배우, 여자 목소리를 내는 남자 가수 등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무속을 하는 사람에게도 신이 내리는 동안에 성전환이나 양성애 같은 양성동체의 성향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플라톤의 생각은 이러한 양성동체란 제3의 종류를 가정하면서도 그것을 참다운 사랑을 위한 배경으로서 상정하는 것이지, 그것 자체가 목적일 수는 없다는 것이 오늘날 양성애자들의 생각과 다른 것 같다. 계속해서 향연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사실 그 때까지는 그 수치스런 부분들이 밖에 있었기 때문에, 인간들은 상대방 몸 속에 생식을 하여 아이를 낳는 것이 아니라, 매미처럼 땅 속에 생식을 하여 아이를 낳아왔다네. 그래서 제우스는 인간의 수치스런 그 부분들을 앞으로 옮겨 놓음으로써 인간들이 생식기관을 이용하여, 즉 남성의 그것을 여성의 그것 속에 삽입함으로써 자식을 낳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네. 이러한 일련의 작업들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네. 즉 남성과 여성이 만날 경우에는 그 결합을 통해 아이를 낳음으로써 종의 재생산이 일어나도록 하고, 남성과 남성이 만날 경우에는 그 결합으로부터 서로 함께 있음에 대한 포만감에 질려 그 자체를 중단하고 오히려 어떤 보람된 행위를 향하여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에 전념하도록 만들어주는 데 있었지”
결국은 생식은 남성과 여성의 결합에 의해서 이뤄지는 것이 당연하고 좋다는 것이다. 남성이 남성과, 여성이 여성과 만나는 동성연애는 그것을 중단하고 다른 가치 있는 삶에 전념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여러 가지 변형된 형태의 사랑의 존재에 대한 우리들의 이해의 폭을 넓혀주고 있다. 왜 지나치게 색을 밝히는 색광(色狂)이 있는지, 남자를 밝히고 간통지를 저지르는 여자들이 있는지, 남성보다는 여성만을 좋아하는 여성이 있는지, 또 남자만을 따라다니려고 하는 남자들은 왜 있는지를 설명한다. 당연히 그들의 존재를 인정해주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을 불순하다고 이야기하기도 하나 그 말은 틀린 것이네! 왜냐하면 그들은 불순한 동기에서가 아니라 자기 확인과 용기 그리고 남성다움 때문에 자신들과 비슷한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지.”
플라톤의 <향연(饗宴)>은 기원전 380년쯤에 씌어졌다고 한다. 향연은 그리스어로 '심포지엄(symposium)' 이라 하며 '함께 마신다'라는 뜻이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어떤 사랑의 형태들이 존재했고 그것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이 책은 전해준다. 인류의 사랑(에로스)과 욕망이 갖는 불가분의 관계를 비롯해서, 동성애나 양성애, 남녀가 서로에게 이끌리는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을 하고 있다. 그 속에서 플라톤은 아리스토파네스의 입을 빌어 사랑은 '과거의 완전했던 본체를 회복하려는 열망과 노력'이라고 정의하고, 인간의 사랑은 그 먼 옛날부터 자리잡고 있었던 인간의 본성이란 점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고 오직 사랑만이 '과거의 우리를 회복시켜줄 수 있으며, 두 존재를 하나로 용해시켜서 현재의 잘못된 인간의 상태를 치유시켜줄 수 있다'고 하고 있다.
각박한 현대세상, 돈에 눈이 멀어 친구나 가족까지도 마구 살해하고 연약한 어린 아이들까지 해치는 21세기 초 한국에서 우리들은 기원전 그리스를 살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파네스를 이 시대 이 곳에 불러와서 사랑학, 아니 인간학 강의를 들어야 할 것 같다. 그리해서 전 국민들이 나만이 아니라 남까지도 다 사랑하는 새 사람으로 거듭나야 할 것 같다.
그리스의 희극시인인 아리스토파네스는 의사인 에릭시마코스에게 이렇게 얘기해준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플라톤의 <향연(饗宴)>이라는 책에 기록된 내용이다. 희극시인이 의사에게 말해주는 형식이어서 마치 공상가가 과학자에게 설명해 주는 꼴이 되었지만, 그 개념자체는 모든 것을 음과 양의 두 존재로 설명하는 동양적인 인간관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새로운 충격이다. 과연 인간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종류 외에 남과 녀를 공유하는 제 3의 종류가 있었겠는가?
플라톤에 있어서 이런 제3의 종류의 인간은 androgynon이라고 부른다. 남성을 뜻하는 andron과 여성을 뜻하는 gynon이 합쳐진 단어이다. 요컨대 아주 중립적인 단어는 아니고 남성과 여성이란 말의 합성어이다. 이를 통해볼 때에 이 개념도 원래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고 아마도 당시 플라톤이나 그 이전 시대에 이러한 개념이 필요해서 일부러 만들어진 것일 터이지만, 그런 개념 자체를 상상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당시 그리스 사회가 얼마나 상상력이 풍부한 사회였는지를 더듬어볼 수 있게 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남성과 여성을 공유하는 이러한 존재를 요즈음에는 성전환자들이나 동성연애자들과 동일시하려는 경향이 많아지고 있어서, 새롭게 플라톤의 『향연』이란 책을 다시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누구의 입을 빌어서 얘기를 했건 결국은 이 『향연』이란 책은 플라톤의 생각을 전하는 것으로서, 플라톤에 따르면 원시시대 인간은 남과 여, 양성인의 세 가지 종이 있었다. 그중 양성을 가진 인간은 몸이 동그랬다. 같은 몸체에 얼굴이 두개였고 손발은 각각 4개였다. 요즘 인간의 모습이지만 두 사람이 등이 맞붙어 있는 모습을 가지고 있어서, 완전한 원을 이룰 수 있기에 굴러다니기도 하였다. 이들은 지구상의 생물 중에서 가장 영특하고 강한 힘과 재주를 가지고 있었기에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었다. 그래서 이윽고 신에게 도전을 하게 되었는데 이를 괘씸히 여긴 제우스가 아폴론을 시켜 이들을 반쪽으로 잘라 버렸다. 둘로 나누어진 양성인은 가끔 다른 한쪽을 그리워하게 되었고 다시 하나로 합체하고 싶은 욕망이 가끔 일게 된다. 그들은 합쳐야 비로소 완전한 하나가 된다는 것을 느낀다. 그것이 사랑의 원천 '에로스'라는 것이다.
플라톤의 이러한 사랑론(論)을 읽고 반가워한 사람들이 있다. 곧 남성도 여성도 아니고 그 둘을 몸에 공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곧 남성이면서 여성의 특질을 갖고 있거나 여성이면서 남성의 특질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플라톤이 말하는 양성인과 동일시하고 자신들의 실재를 세상에서 인정해달라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뮤지컬과 영화로 유명해진 ‘헤드윅 (hedwig and the angry inch)’이 바로 이러한 얘기를 모티브로 한 것으로서, ‘반쪽을 찾아 헤맨다’는 아이디어를 남자와 여자, 게이, 레즈비언 등 여러 性의 모습에서 그려낸다.
이같은 플라톤의 주장은 음양이론에 의한 이분법에 익숙한 우리 동양인들에게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고, 지금 우리들이 아는 과학의 눈으로 보면 공상과 같이 보인다. 그런데, 생물학에서 모든 생물의 조상은 자웅동체, 또는 무성이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러한 플라톤의 생각이 완전한 허구가 아니라 아마도 종의 발달에 따라 우리들의 기억의 유전자 어디에 남아있는 경험이 작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원래 하나였던 양성인의 상태로 돌아가야 온전해질 수 있다는 생각은 어머니의 양수를 그리워하는 현대인들의 심성에도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근원에의 회귀의식이라고 할 것이다.
플라톤의 '에로스' 이론은 의학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세기 까지만 해도 의사들은 태아기의 일정한 단계까지는 모든 성이 똑같다고 믿었다고 한다. 그 단계가 지난 후 3가지 성, 즉 남성, 여성, 아직 분화되지 않은 중성으로 구분된다고 하였고 중성은 양성애적 기질을 가진다고 믿었다. 태아의 성은 5주가 지나야 알 수 있지만 그 이후에도 성의 분화가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성의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나아가서, 성의 분화가 이루어진 후에도 인간은 누구나 양성적인 흔적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페니스와 음핵, 대음순과 음낭, 난소와 고환, 질과 음낭의 절개선 등은 아직도 남아있는 흔적으로서의 서로 대칭되는 인간의 양성적 기관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현대에서 양성적 이미지를 소유한 대상은 대중에게 매혹적으로 작용하는데, 그 표상으로는 순정만화의 씩씩한 여주인공, 근육이 튀어나와서 울끈 불끈한 여자 운동선수나 예쁘장한 남자 배우, 여자 목소리를 내는 남자 가수 등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무속을 하는 사람에게도 신이 내리는 동안에 성전환이나 양성애 같은 양성동체의 성향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플라톤의 생각은 이러한 양성동체란 제3의 종류를 가정하면서도 그것을 참다운 사랑을 위한 배경으로서 상정하는 것이지, 그것 자체가 목적일 수는 없다는 것이 오늘날 양성애자들의 생각과 다른 것 같다. 계속해서 향연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사실 그 때까지는 그 수치스런 부분들이 밖에 있었기 때문에, 인간들은 상대방 몸 속에 생식을 하여 아이를 낳는 것이 아니라, 매미처럼 땅 속에 생식을 하여 아이를 낳아왔다네. 그래서 제우스는 인간의 수치스런 그 부분들을 앞으로 옮겨 놓음으로써 인간들이 생식기관을 이용하여, 즉 남성의 그것을 여성의 그것 속에 삽입함으로써 자식을 낳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네. 이러한 일련의 작업들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네. 즉 남성과 여성이 만날 경우에는 그 결합을 통해 아이를 낳음으로써 종의 재생산이 일어나도록 하고, 남성과 남성이 만날 경우에는 그 결합으로부터 서로 함께 있음에 대한 포만감에 질려 그 자체를 중단하고 오히려 어떤 보람된 행위를 향하여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에 전념하도록 만들어주는 데 있었지”
결국은 생식은 남성과 여성의 결합에 의해서 이뤄지는 것이 당연하고 좋다는 것이다. 남성이 남성과, 여성이 여성과 만나는 동성연애는 그것을 중단하고 다른 가치 있는 삶에 전념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여러 가지 변형된 형태의 사랑의 존재에 대한 우리들의 이해의 폭을 넓혀주고 있다. 왜 지나치게 색을 밝히는 색광(色狂)이 있는지, 남자를 밝히고 간통지를 저지르는 여자들이 있는지, 남성보다는 여성만을 좋아하는 여성이 있는지, 또 남자만을 따라다니려고 하는 남자들은 왜 있는지를 설명한다. 당연히 그들의 존재를 인정해주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을 불순하다고 이야기하기도 하나 그 말은 틀린 것이네! 왜냐하면 그들은 불순한 동기에서가 아니라 자기 확인과 용기 그리고 남성다움 때문에 자신들과 비슷한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지.”
플라톤의 <향연(饗宴)>은 기원전 380년쯤에 씌어졌다고 한다. 향연은 그리스어로 '심포지엄(symposium)' 이라 하며 '함께 마신다'라는 뜻이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어떤 사랑의 형태들이 존재했고 그것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이 책은 전해준다. 인류의 사랑(에로스)과 욕망이 갖는 불가분의 관계를 비롯해서, 동성애나 양성애, 남녀가 서로에게 이끌리는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을 하고 있다. 그 속에서 플라톤은 아리스토파네스의 입을 빌어 사랑은 '과거의 완전했던 본체를 회복하려는 열망과 노력'이라고 정의하고, 인간의 사랑은 그 먼 옛날부터 자리잡고 있었던 인간의 본성이란 점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고 오직 사랑만이 '과거의 우리를 회복시켜줄 수 있으며, 두 존재를 하나로 용해시켜서 현재의 잘못된 인간의 상태를 치유시켜줄 수 있다'고 하고 있다.
각박한 현대세상, 돈에 눈이 멀어 친구나 가족까지도 마구 살해하고 연약한 어린 아이들까지 해치는 21세기 초 한국에서 우리들은 기원전 그리스를 살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파네스를 이 시대 이 곳에 불러와서 사랑학, 아니 인간학 강의를 들어야 할 것 같다. 그리해서 전 국민들이 나만이 아니라 남까지도 다 사랑하는 새 사람으로 거듭나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