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동식의 다섯 계절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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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 |
*제62회 - " 황병기 선생님께 "
영광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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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1 03:44
모순을 명상하는 선의 경지
황병기 선생님!
지난 목요일 밤 근 20년 만에 다시 뵈었습니다. 선생님의 모습에선 시간과 세월의 흔적을 볼 수 있었지만, 서글픔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다만, 선생님이 강의 중에 던진 모순이라는 화두, 육체적 생명은 영원하지 않기에 정신적인 생명으로 영원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이란 존재의 모순이라는 말을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시간, 곧 세월이란 것이 생명을 꽃피울 때는 마냥 좋아 보이다가 그 생명을 거두어 갈 때는 원망의 대상이 되지요. 그리고 바로 그 육체적 생명의 유한성 때문에 사람들은 사는 동안 열심을 다하게 되고, 그것이 한 인간의 삶을 영원으로 이어지게 한다는 점을 생각하며, 참으로 우리 인간도 무정하고 매정한 시간의 유한성 때문에 오히려 그 존재의 의미가 드러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 1999년, 2주나 걸린 대장암 수술을 받고 막 죽음에서 깨어난 선생님이 링거 병을 꽂은 채 병원을 걸으면서 느낀 생명의 유한함과 허무감과 절박감, 그것이 없었다면 어떻게 베토벤의 마지막 소나타 2악장처럼 반딧불이 춤추는 환상이 가야금의 선율을 통해 나타날 수 있었겠습니까? 자신의 가슴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때로는 형체로, 때로는 소리로, 때로는 몸짓으로 토해내지 않고 못 배기는 예술가들의 열정도 바로 그 생명의 유한성이란 존재의 모순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날 선생님은, 황병기의 음악은 ‘모순을 명상하는 선의 경지’라고 한 영국 셰필드대 앤드루 킬릭 교수의 말이 자신의 음악세계를 가장 잘 대변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인간이나 우주의 가장 큰 모순이 바로 존재의 유한성이고, 그 모순과 싸우는 존재가 인간이라면, 선생님은 의식하셨든 않으셨든 음악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가장 열심히 싸워온 분이 아닌가 합니다.
존재의 유한성이란 모순과 싸워서 인간이 얻어낼 수 있는 것은 ‘유한의 극복’ 또는 ‘유한의 초월’ 이겠지요.
선생님이 1951년 피난살이 부산의 간이 천막으로 만들어진 학교에서 돌아오다 길 옆 건물에서 들려오던 김철옥 할아버지의 가야금 소리를 들은 것이 일종의 운명이었다면, 그것은 가야금으로서는 우륵 이후 1500년이 지나 쇠잔해진 자신의 생명의 유한성을 선생님을 통해 되살리기 위한 다가섬이었고, 결국 선생님의 음악을 통해 자신의 존재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 이후에야 가야금은 비로소 국악, 아니, 우리 음악을 전공하지 않고 배우지도 않은 현대인들에게 뿌리를 내릴 수 있었으니까요. 가야금으로서는 제2의 생명을 얻은 셈이었지요. 선생을 통해 가야금은 비로소 ‘김치 냄새’도, ‘버터 냄새’도 아닌 절대 소리로서의 가야금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으니까요. 물론 가야금에 배어 있는 절절한 ‘김치 냄새’가 나쁘다는 애기는 아닙니다.
전통을 파괴한 가장 전통적인 작품
우리의 전통문화예술을 보존하기 위해 무형문화재 제도가 처음 만들어진 해인 1962년, 선생님은 전통을 벗어난 첫 가야금 독주곡 ‘숲’을 발표하셨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처럼 그것도 일종의 모순이지요. 하지만 그것보다는 “어떻게 보면 전통을 파괴한 선생님의 작품들이 어떻겡 우리의 전통을 가장 잘 표현하는 고전으로 인식되는가?”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모순이야말로 현대의 후학들이 새겨보아야 할 화두이겠지요.
선생님은 우륵이 창시한 가야금 음악은 남아 있는 게 없고 현재까지의 가야금 음악은 모두 조선 시대의 것이라며, 그것을 깨기 위해 멀리 신라로 올라 가보자는 생각에서 발표하신 것이 1974년의 ‘침향무’라고 하셨지요. 전통적인 장단과 선율로 된 1장에 이어 2장에서는 분산화음으로 서역의 이국적인 정취를 불러일으킨 후, 오른손의 스타카토 반주에 왼손에 의한 서정적인 가락이 노래하듯이 흐르고, 3장에서는 정열적으로 진행되던 선율이 갑자기 멈춘 다음 이어지는 트레몰로, 피아니시모에서 프로테로 점차 커지며 긴장감을 주다가 다시 피아니시모로 약해지는 기법, 그 여음이 사라질 즈음에 이어지는 영롱한 분산화음... 그 이전까지는 우리 음악에 없었던 이런 류의 음악이 국립국악원 전통음악 연주회의 주요 곡목이 된 것은 어떻게 설명이 가능할까요? 선생님은 때로는 서양의 음악 스타일을 채용하고 서양의 기보법을 쓰며, 서양의 음악언어를 채용하기도 하지만, 그 바탕엔 한국의 전통음악, 선생님이 성장해온 과정과 그에 대한 깊은 이해가 깔려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렇기에 한국 전통 음악의 세계를 훌쩍 뛰어넘으면서도 언제나 분명하게 한국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요? 선생님이 설명하시듯, 세계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음악을 만들어냈지만, 그 바탕은 한국의 전통이기에, 오히려 더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우리 음악, 우리 국악의 대중화와 세계화, 상품화를 위해 오히려 거꾸로 가고 싶었다는 선생님의 생각이 곧 가장 유망한 세계화의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아쉬운 것은, 선생님의 음악세계가 좀 더 일찍 대중들에게 알려졌더라면 선생님에게 영감을 받은 후학들이 더 많이 나올 수 있었을 텐데 하는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이미 1965년에 선생님의 연주가 LP로 나와 절찬을 받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1962년에 작곡한 ‘숲’이나, 74년에 작곡된 ‘침향무’가 70년대 후반에 되어서야 알려졌고, 73년에 공연된 ‘미궁’도 80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음반으로 나와 그 존재가 알려졌습니다. 선생님을 받아들이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지요. 선생님이 1968년 백남준의 문제작 ‘오페라 섹스트로니크’의 주인공이었다는 사실도 사람들은 지나쳐 보았습니다. 샬롯 무어맨이 백남준과 함께 퍼포먼스를 하던 그 자리에서 선생님이 가야금을 연주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제대로 의식하지 못한 것이지요. ‘전위’라는 말도 모르던 그 시대에 선생님은 이미 전위를 실천하고 있었고, 그것이 1973년 무용가 홍신자와의 공연 ‘미궁’으로까지 이어진 것이었지요. 그러나 정작 선생님의 음악 세계가 일반에 알려진 것은 1980년도 훨씬 지나서이니, 우리는 예술을 받아들이는 데 너무 인색한 것일까요?
아니, 그보다는 우리가 우리의 예술세계에 대해 확신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예술에 대한 기준은 우리 스스로의 것이 아니라 서양인들이 만들어놓은 것이기에, 우리 스스로의 기준으로 우열을 논하지 못하고, 외국의 무슨 대회에서 입상을 하고 그 사회에서 평가를 받은 다음에야 역수입하느라 수선을 떠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사물놀이도 세계타악인회에 소개되어 절찬을 받은 뒤에야 그 가치에 눈을 뜨고 키우기 시작한 것과 마찬가지지요. 그만큼 우리의 문화예술은 자력성장이 아니라 타력에 의한 반사성장이었다는 데 우리의 아픔이 있음을 선생님을 통해서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오로지 세계무대에서 활동한 백남준 선생만이 선생님의 예술을 일찍부터 알아보고 86 아시안 게임, 88 서울 올림픽 기념 범지구촌 축제에서 선생님의 예술을 세계에 소개하려고 애를 쓰신 게지요.
선생님이 열어놓으신 가야금의 세계
선생님의 음악에 대해 ‘수채화’라는 표현이 많은 것을 보면 가야금 소리의 영롱함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기실 선생님의 가야금은 영롱하거나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슴 속에서 울려나오는 신음소리, 곧 사라져가야 할 운명에 몸부림치는 소리의 탄식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옛날 신라 시대 백결 선생이 방앗소리를 거문고로 처음 묘사했다고 한다면, 가야금 소리로 뻐꾹새를 만들고 쏟아지는 빗방울이 춤추게 하며, 나른한 숲의 오수를 느끼게 하는가 하면, 가슴 속의 쥐어짜는 고통을 찾아내어 가야금 12줄로 울게 한것도 바로 선생님입니다. 선생님이야말로 현대의 백결이며, 죽으면서도 광릉산 연주를 남긴 중국 진나라의 혜강이며, 친구가 연주를 듣고 “아, 멋지도다. 마치 태산준령 같도다” 하며 감탄한 백야입니다.
흔히 가야금은 화려하고 섬세하고 경쾌하고 표현력이 풍부해서 여성에 비유되고, 거문고는 담담하고 웅장하며 막힘이 없어 남성에 비유되지만, 선생님의 가야금은 남성적인 웅장함과 호방함, 장엄함과 시원함까지를 표현해냄으로써 그 표현력을 극대화했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과거 거문고가 선비 시대의 으뜸가는 음악이었다면, 현대 우리 음악에서는 가야금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니, 그것도 다 선생님 덕이라고 할 수 있지요.
선생님이 열어놓으신 가야금의 세계는 과연 무변광대의 세계에서 마침내 하늘을 꿰뚫으며 울리는 천상의 소리이며, 한스럽고 지루한 가락에서 벗어난 음악으로 그린 수채화이며, 무한한 꿈과 환상, 환희와 동경, 슬픔과 기쁨이 교차하는 고차원의 세계입니다. 그 세계로 인도하기 위해 선생님은 때로는 자르고 때로는 늘이고 때로는 부수고 때로는 펼치며 때로는 뒤집고 때로는 쓸어 담고 때로는 쏟아내고 때로는 삼키고 때로는 토하며 때로는 참고 때로는 폭발하는 소리를 만들어내었습니다. 그 소리는 과연 우리의 긴 명상으로 이끌고, 무아경으로 초대하며, 근심과 고통까지도 멈추게 하기에 현대와 같은 ‘초스피드 시대의 해독제’로서 평가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난 70년대 후반부터 선생님의 음악이 음반으로 나오기만 하면 항상 판매 1위라는 신화를 창조하는 이유이겠지요.
그날 선생님은 13년 만에 새로 나온 음반 ‘달하 노피곰’ 을 선물로 주시면서 역사상 모든 사랑 노래는 이루지 못할 사랑이나 불륜이라는 용감한 정의를 내려주셔서 좌중이 웃다가 넘어졌지요.
그렇군요. 대부분의 사랑 노래가 자기 마누라가 이쁘다고 부르는 경우는 드물고 다 이웃집, 남의 여자, 떠나가서 남과 같이 사는 남자나 여자가 이쁘다는 것이라는 말을 듣고 새삼 그 혜안에 충격을 받습니다. 다만 선생님이 ‘달하 노피곰’ 으로 시작되는 정읍사에 대해 유일하게 여자가 자기 남편 이쁘다고, 잘 돌아오라고 비는 노래인 만큼 맑고 아름답고 깨끗하다고 하신 말씀에 대해서는 완전히 동의하지는 못하겠습니다. 설마 여인이 자기 남편에 대해 그립고 보고 싶고 안전하게 돌아오기를 기원하는 노래가 아무렴 이 정읍사 하나이려고요. 그러나 저러나 이번 독집도 벌써 차가워지는 음반시장에서 새로운 열기로 국악 판매고 1위를 기록한다고 하니 다시 반가운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옛 선비들은 ‘좌서우금’ 이라고, 열심히 책을 보다 시간이 나면 금을 연주하며 머리를 식히고 마음의 수양을 했다고요. 그러고 보면 가야금이나 거문고는 심심함을 깨는 파적의 방편일 뿐만 아니라 우주의 철리, 삶의 대도를 터득해 가는 신비의 영매가 아니었을지요. 선생님이 연주를 하실 때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단정한 표정으로 12줄, 17줄을 희롱하며 음악속에 함몰하시는 모습을 보면, 그 진지함에 우리는 다시 경건해지면서 음악의 힘, 선빈의 길을 배우게 됩니다. 논어에서 공자가 말씀하신 ‘흥어시입어예 성어악’ 이라는 말처럼 음악이 인간의 완성을 위한 가장 중요한 방편이 된다는 점에서, 일찍부터 가야금이라는 한 산을 넘어 음악이라는 산맥을 찾아간 선생님의 노력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봅니다.
사실 우리의 전통음악은 음의 농현이라든가 박자와 장단의 자유로운 변형, 다양한 변주, 시나위 같은 즉흥성으로 인해 다른 어느 나라 음악보다 연주가의 기량에 따라 자유로움의 여지가 많아 어느 작곡가 개인의 작품이 남아 있지 않은 특이한 전통을 고수해왔습니다. 그렇게 볼 때 새로운 우리 음악의 전통을 만든 선생님이야말로 근대적인 의미의 최초의 국악 작곡가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근래 우리 국악에 창작 열풍이 몰아닥친 것도 다 선생님 덕분이지요. 창의성 없는 전통의 보전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전통도 새로운 시대에 맞게 새롭게 태어나야 전통으로 유지되는 것이니까요.
선생님이 15살에 가야금 소리에 이끌려 우리 음악을 시작하신 지 이제 56년, 얼마 있지 않으면 음악 인생 60년이군요. 선생님이 열어 보이신 음악은 시간과 존재의 유한성, 곧 존재의 모순을 극복한 영원함 그것입니다. 녹아내리는 이슬이 사라지지만 이슬이란 존재는 영원한 것이며 그 아름다움 또한 영원한 것이라며, 어차피 끊어지고 죽어가는 여운이지만 소리는 그 순간의 존재를 넘어 혹은 악보로 혹은 음반으로 혹은 화면 속에서 영원의 존재로 다시 태어납니다.
독집 ‘달하 노피곰’의 발매를 축하드리며, 그것이 완결이 아니라 앞으로도 무한히 이어질 작품의 또 하나의 징검다리로서, 또한 많은 사람들의 삶을 유한한 차안에서 영원한 피안으로 인도하는 다리로서 많은 이들에게 안도와 기쁨과 희망을 전해주기를 기대해봅니다. 선생님이 열어 보이신 우리 음악의 세계는 아직도 세계 음악에 비하면 ‘미효’, 곧 새벽이지만 아직 해가 뜨지 않고 먼 동쪽에 기별만 보이는 새벽입니다. 우리 음악이 새벽을 지나 해가 뜨는 진정한 아침이 될 수 있도록 선생님께서 더 많은 후학들에게 깨우침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더욱 건강하소서!
황병기 선생님!
지난 목요일 밤 근 20년 만에 다시 뵈었습니다. 선생님의 모습에선 시간과 세월의 흔적을 볼 수 있었지만, 서글픔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다만, 선생님이 강의 중에 던진 모순이라는 화두, 육체적 생명은 영원하지 않기에 정신적인 생명으로 영원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이란 존재의 모순이라는 말을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시간, 곧 세월이란 것이 생명을 꽃피울 때는 마냥 좋아 보이다가 그 생명을 거두어 갈 때는 원망의 대상이 되지요. 그리고 바로 그 육체적 생명의 유한성 때문에 사람들은 사는 동안 열심을 다하게 되고, 그것이 한 인간의 삶을 영원으로 이어지게 한다는 점을 생각하며, 참으로 우리 인간도 무정하고 매정한 시간의 유한성 때문에 오히려 그 존재의 의미가 드러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 1999년, 2주나 걸린 대장암 수술을 받고 막 죽음에서 깨어난 선생님이 링거 병을 꽂은 채 병원을 걸으면서 느낀 생명의 유한함과 허무감과 절박감, 그것이 없었다면 어떻게 베토벤의 마지막 소나타 2악장처럼 반딧불이 춤추는 환상이 가야금의 선율을 통해 나타날 수 있었겠습니까? 자신의 가슴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때로는 형체로, 때로는 소리로, 때로는 몸짓으로 토해내지 않고 못 배기는 예술가들의 열정도 바로 그 생명의 유한성이란 존재의 모순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날 선생님은, 황병기의 음악은 ‘모순을 명상하는 선의 경지’라고 한 영국 셰필드대 앤드루 킬릭 교수의 말이 자신의 음악세계를 가장 잘 대변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인간이나 우주의 가장 큰 모순이 바로 존재의 유한성이고, 그 모순과 싸우는 존재가 인간이라면, 선생님은 의식하셨든 않으셨든 음악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가장 열심히 싸워온 분이 아닌가 합니다.
존재의 유한성이란 모순과 싸워서 인간이 얻어낼 수 있는 것은 ‘유한의 극복’ 또는 ‘유한의 초월’ 이겠지요.
선생님이 1951년 피난살이 부산의 간이 천막으로 만들어진 학교에서 돌아오다 길 옆 건물에서 들려오던 김철옥 할아버지의 가야금 소리를 들은 것이 일종의 운명이었다면, 그것은 가야금으로서는 우륵 이후 1500년이 지나 쇠잔해진 자신의 생명의 유한성을 선생님을 통해 되살리기 위한 다가섬이었고, 결국 선생님의 음악을 통해 자신의 존재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 이후에야 가야금은 비로소 국악, 아니, 우리 음악을 전공하지 않고 배우지도 않은 현대인들에게 뿌리를 내릴 수 있었으니까요. 가야금으로서는 제2의 생명을 얻은 셈이었지요. 선생을 통해 가야금은 비로소 ‘김치 냄새’도, ‘버터 냄새’도 아닌 절대 소리로서의 가야금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으니까요. 물론 가야금에 배어 있는 절절한 ‘김치 냄새’가 나쁘다는 애기는 아닙니다.
전통을 파괴한 가장 전통적인 작품
우리의 전통문화예술을 보존하기 위해 무형문화재 제도가 처음 만들어진 해인 1962년, 선생님은 전통을 벗어난 첫 가야금 독주곡 ‘숲’을 발표하셨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처럼 그것도 일종의 모순이지요. 하지만 그것보다는 “어떻게 보면 전통을 파괴한 선생님의 작품들이 어떻겡 우리의 전통을 가장 잘 표현하는 고전으로 인식되는가?”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모순이야말로 현대의 후학들이 새겨보아야 할 화두이겠지요.
선생님은 우륵이 창시한 가야금 음악은 남아 있는 게 없고 현재까지의 가야금 음악은 모두 조선 시대의 것이라며, 그것을 깨기 위해 멀리 신라로 올라 가보자는 생각에서 발표하신 것이 1974년의 ‘침향무’라고 하셨지요. 전통적인 장단과 선율로 된 1장에 이어 2장에서는 분산화음으로 서역의 이국적인 정취를 불러일으킨 후, 오른손의 스타카토 반주에 왼손에 의한 서정적인 가락이 노래하듯이 흐르고, 3장에서는 정열적으로 진행되던 선율이 갑자기 멈춘 다음 이어지는 트레몰로, 피아니시모에서 프로테로 점차 커지며 긴장감을 주다가 다시 피아니시모로 약해지는 기법, 그 여음이 사라질 즈음에 이어지는 영롱한 분산화음... 그 이전까지는 우리 음악에 없었던 이런 류의 음악이 국립국악원 전통음악 연주회의 주요 곡목이 된 것은 어떻게 설명이 가능할까요? 선생님은 때로는 서양의 음악 스타일을 채용하고 서양의 기보법을 쓰며, 서양의 음악언어를 채용하기도 하지만, 그 바탕엔 한국의 전통음악, 선생님이 성장해온 과정과 그에 대한 깊은 이해가 깔려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렇기에 한국 전통 음악의 세계를 훌쩍 뛰어넘으면서도 언제나 분명하게 한국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요? 선생님이 설명하시듯, 세계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음악을 만들어냈지만, 그 바탕은 한국의 전통이기에, 오히려 더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우리 음악, 우리 국악의 대중화와 세계화, 상품화를 위해 오히려 거꾸로 가고 싶었다는 선생님의 생각이 곧 가장 유망한 세계화의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아쉬운 것은, 선생님의 음악세계가 좀 더 일찍 대중들에게 알려졌더라면 선생님에게 영감을 받은 후학들이 더 많이 나올 수 있었을 텐데 하는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이미 1965년에 선생님의 연주가 LP로 나와 절찬을 받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1962년에 작곡한 ‘숲’이나, 74년에 작곡된 ‘침향무’가 70년대 후반에 되어서야 알려졌고, 73년에 공연된 ‘미궁’도 80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음반으로 나와 그 존재가 알려졌습니다. 선생님을 받아들이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지요. 선생님이 1968년 백남준의 문제작 ‘오페라 섹스트로니크’의 주인공이었다는 사실도 사람들은 지나쳐 보았습니다. 샬롯 무어맨이 백남준과 함께 퍼포먼스를 하던 그 자리에서 선생님이 가야금을 연주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제대로 의식하지 못한 것이지요. ‘전위’라는 말도 모르던 그 시대에 선생님은 이미 전위를 실천하고 있었고, 그것이 1973년 무용가 홍신자와의 공연 ‘미궁’으로까지 이어진 것이었지요. 그러나 정작 선생님의 음악 세계가 일반에 알려진 것은 1980년도 훨씬 지나서이니, 우리는 예술을 받아들이는 데 너무 인색한 것일까요?
아니, 그보다는 우리가 우리의 예술세계에 대해 확신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예술에 대한 기준은 우리 스스로의 것이 아니라 서양인들이 만들어놓은 것이기에, 우리 스스로의 기준으로 우열을 논하지 못하고, 외국의 무슨 대회에서 입상을 하고 그 사회에서 평가를 받은 다음에야 역수입하느라 수선을 떠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사물놀이도 세계타악인회에 소개되어 절찬을 받은 뒤에야 그 가치에 눈을 뜨고 키우기 시작한 것과 마찬가지지요. 그만큼 우리의 문화예술은 자력성장이 아니라 타력에 의한 반사성장이었다는 데 우리의 아픔이 있음을 선생님을 통해서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오로지 세계무대에서 활동한 백남준 선생만이 선생님의 예술을 일찍부터 알아보고 86 아시안 게임, 88 서울 올림픽 기념 범지구촌 축제에서 선생님의 예술을 세계에 소개하려고 애를 쓰신 게지요.
선생님이 열어놓으신 가야금의 세계
선생님의 음악에 대해 ‘수채화’라는 표현이 많은 것을 보면 가야금 소리의 영롱함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기실 선생님의 가야금은 영롱하거나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슴 속에서 울려나오는 신음소리, 곧 사라져가야 할 운명에 몸부림치는 소리의 탄식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옛날 신라 시대 백결 선생이 방앗소리를 거문고로 처음 묘사했다고 한다면, 가야금 소리로 뻐꾹새를 만들고 쏟아지는 빗방울이 춤추게 하며, 나른한 숲의 오수를 느끼게 하는가 하면, 가슴 속의 쥐어짜는 고통을 찾아내어 가야금 12줄로 울게 한것도 바로 선생님입니다. 선생님이야말로 현대의 백결이며, 죽으면서도 광릉산 연주를 남긴 중국 진나라의 혜강이며, 친구가 연주를 듣고 “아, 멋지도다. 마치 태산준령 같도다” 하며 감탄한 백야입니다.
흔히 가야금은 화려하고 섬세하고 경쾌하고 표현력이 풍부해서 여성에 비유되고, 거문고는 담담하고 웅장하며 막힘이 없어 남성에 비유되지만, 선생님의 가야금은 남성적인 웅장함과 호방함, 장엄함과 시원함까지를 표현해냄으로써 그 표현력을 극대화했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과거 거문고가 선비 시대의 으뜸가는 음악이었다면, 현대 우리 음악에서는 가야금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니, 그것도 다 선생님 덕이라고 할 수 있지요.
선생님이 열어놓으신 가야금의 세계는 과연 무변광대의 세계에서 마침내 하늘을 꿰뚫으며 울리는 천상의 소리이며, 한스럽고 지루한 가락에서 벗어난 음악으로 그린 수채화이며, 무한한 꿈과 환상, 환희와 동경, 슬픔과 기쁨이 교차하는 고차원의 세계입니다. 그 세계로 인도하기 위해 선생님은 때로는 자르고 때로는 늘이고 때로는 부수고 때로는 펼치며 때로는 뒤집고 때로는 쓸어 담고 때로는 쏟아내고 때로는 삼키고 때로는 토하며 때로는 참고 때로는 폭발하는 소리를 만들어내었습니다. 그 소리는 과연 우리의 긴 명상으로 이끌고, 무아경으로 초대하며, 근심과 고통까지도 멈추게 하기에 현대와 같은 ‘초스피드 시대의 해독제’로서 평가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난 70년대 후반부터 선생님의 음악이 음반으로 나오기만 하면 항상 판매 1위라는 신화를 창조하는 이유이겠지요.
그날 선생님은 13년 만에 새로 나온 음반 ‘달하 노피곰’ 을 선물로 주시면서 역사상 모든 사랑 노래는 이루지 못할 사랑이나 불륜이라는 용감한 정의를 내려주셔서 좌중이 웃다가 넘어졌지요.
그렇군요. 대부분의 사랑 노래가 자기 마누라가 이쁘다고 부르는 경우는 드물고 다 이웃집, 남의 여자, 떠나가서 남과 같이 사는 남자나 여자가 이쁘다는 것이라는 말을 듣고 새삼 그 혜안에 충격을 받습니다. 다만 선생님이 ‘달하 노피곰’ 으로 시작되는 정읍사에 대해 유일하게 여자가 자기 남편 이쁘다고, 잘 돌아오라고 비는 노래인 만큼 맑고 아름답고 깨끗하다고 하신 말씀에 대해서는 완전히 동의하지는 못하겠습니다. 설마 여인이 자기 남편에 대해 그립고 보고 싶고 안전하게 돌아오기를 기원하는 노래가 아무렴 이 정읍사 하나이려고요. 그러나 저러나 이번 독집도 벌써 차가워지는 음반시장에서 새로운 열기로 국악 판매고 1위를 기록한다고 하니 다시 반가운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옛 선비들은 ‘좌서우금’ 이라고, 열심히 책을 보다 시간이 나면 금을 연주하며 머리를 식히고 마음의 수양을 했다고요. 그러고 보면 가야금이나 거문고는 심심함을 깨는 파적의 방편일 뿐만 아니라 우주의 철리, 삶의 대도를 터득해 가는 신비의 영매가 아니었을지요. 선생님이 연주를 하실 때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단정한 표정으로 12줄, 17줄을 희롱하며 음악속에 함몰하시는 모습을 보면, 그 진지함에 우리는 다시 경건해지면서 음악의 힘, 선빈의 길을 배우게 됩니다. 논어에서 공자가 말씀하신 ‘흥어시입어예 성어악’ 이라는 말처럼 음악이 인간의 완성을 위한 가장 중요한 방편이 된다는 점에서, 일찍부터 가야금이라는 한 산을 넘어 음악이라는 산맥을 찾아간 선생님의 노력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봅니다.
사실 우리의 전통음악은 음의 농현이라든가 박자와 장단의 자유로운 변형, 다양한 변주, 시나위 같은 즉흥성으로 인해 다른 어느 나라 음악보다 연주가의 기량에 따라 자유로움의 여지가 많아 어느 작곡가 개인의 작품이 남아 있지 않은 특이한 전통을 고수해왔습니다. 그렇게 볼 때 새로운 우리 음악의 전통을 만든 선생님이야말로 근대적인 의미의 최초의 국악 작곡가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근래 우리 국악에 창작 열풍이 몰아닥친 것도 다 선생님 덕분이지요. 창의성 없는 전통의 보전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전통도 새로운 시대에 맞게 새롭게 태어나야 전통으로 유지되는 것이니까요.
선생님이 15살에 가야금 소리에 이끌려 우리 음악을 시작하신 지 이제 56년, 얼마 있지 않으면 음악 인생 60년이군요. 선생님이 열어 보이신 음악은 시간과 존재의 유한성, 곧 존재의 모순을 극복한 영원함 그것입니다. 녹아내리는 이슬이 사라지지만 이슬이란 존재는 영원한 것이며 그 아름다움 또한 영원한 것이라며, 어차피 끊어지고 죽어가는 여운이지만 소리는 그 순간의 존재를 넘어 혹은 악보로 혹은 음반으로 혹은 화면 속에서 영원의 존재로 다시 태어납니다.
독집 ‘달하 노피곰’의 발매를 축하드리며, 그것이 완결이 아니라 앞으로도 무한히 이어질 작품의 또 하나의 징검다리로서, 또한 많은 사람들의 삶을 유한한 차안에서 영원한 피안으로 인도하는 다리로서 많은 이들에게 안도와 기쁨과 희망을 전해주기를 기대해봅니다. 선생님이 열어 보이신 우리 음악의 세계는 아직도 세계 음악에 비하면 ‘미효’, 곧 새벽이지만 아직 해가 뜨지 않고 먼 동쪽에 기별만 보이는 새벽입니다. 우리 음악이 새벽을 지나 해가 뜨는 진정한 아침이 될 수 있도록 선생님께서 더 많은 후학들에게 깨우침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더욱 건강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