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동식의 다섯 계절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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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 |
*제69회 - " 애이불비의 신승훈 "
영광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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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1 03:44
신승훈의 노래 ‘애이불비’
신승훈의 노래 중에 ‘애이불비’ 라는 노래가 있다. 처음엔 노래 제목이었지만, 지금은 자신의 음악세계를 대표하는 말로 여기고 있는 말이다.
누군가에게로 가던 길이었나요.
잠시 내 곁에서 머물렀나요.
이제야 겨우 보내주세요.
그댈 기다리는 사람에게로
나에게 미안해 떠나지 못했나요.
미뤄둔 이별이 오늘인가요.
눈물겨움 헤어짐을 알면서
조금 더 내 곁에 있길 바랬죠. ...
애이불비, 그냥 한그롤만 써놓으면 무슨 뜻인지 금방 파악되지 않지만 한자어 哀而不悲의 의미를 새겨보면 그 은근하고 깊은 의미가 다가온다. “가슴이 아리도록 슬프지만 비통해하지 않는다”, 곧 슬픈을 드러내지 않는다. 여기사 한자 哀는 슬프다는 듯, 悲도 슬프다는 뜻이지만 앞의 슬픔은 슬픈 상태를, 뒤의 슬픔은 이를 드러낸다는 뜻으로 쓰였다.
원래 임 말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말이다. 가야의 음악인인 우륵은 12곡의 가야금곡을 만들었는데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신라로 망명했다. 당시 신라의 왕인 진흥왕은 우륵을 국원성, 곧 충주에 살게 하고 제자들에게 그 곳을 전수하도록 했다. 제자들은 그 중 11곡을 배운 다음 ‘곡들이 너무 번거롭고 조잡, 음란하여 아정치 못하다’ 며 다섯 곡으로 줄였다. 당대 최고의 음악인이었던 우륵은 제자들이 연주하는 곳을 듣고는 처음에는 기분이 몹시 상했으나 다섯 곳을 다 듣고는 눈물을 흘리며 했다는 말이 바로 이 말이다.
“즐거우면서도 무절제하지 않고 슬프면서도 비통하지 않으니, 바르다고 할 만하다.”
사실 이 말은 진짜로 우륵이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원래는 공자가 당시까지 전해지던 각곡의 노래를 모아 <시경>을 편찬하면서 그 첫머리에 유명한 연애시인 ‘관저’를 올려놓고 그 시를 편하면서 한 말이기 때문이다.
“관저는 즐거우면서도 음탕하지 않고, 슬프면서도 상하지 않는다.”
아마도 김부식은 가야금 음악이 신라에 전해지는 과정을 기록하면서 공자의 음악관을 받아들여 마치 우륵이 말한 것처럼 기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기원이야 어찌 되었든 이 표현은 당시 우리 민족의 음악관을 전해주고 있다. 즉, 음악은 듣기에 즐거우면서도 너무 지나치게 풀어지면 안 되고, 슬프다고 해서 너무 심하게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글 세대인 신승훈이 어떻게 이런 어려운 한자어를 골라썼을까? 알고 보니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가르치면서 이 시의 사상을 ‘애이불비’ 라고 가르치고 있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의 약산
진달래 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은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이 시의 저변을 흐르는 정서인 애이불비- 슬프지만 슬퍼하지 않는 것, 참고 견디는 것, 이것은 바로 전통적 한국 여인들의 정서이자 우리 문학의 주요한 특질 중의 하나가 아니었던가. 그것은 ‘은근과 끈기’ 라는 특질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으로서, 희로애락을 겉으로 요란하게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속으로 삭이면서 은근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그것은 곧 찔레꽃의 은은한 향기이며, 된장의 텁텁하면서도 구수한 맛이다.
신승훈도 바로 이 정서가 자신과 통한다고 생각해 이를 음악으로 표현해 보고자 노력을 쏟아 부었던 것으로 보인다.
“저는 ‘애이불비’ 정서가 강해요. ‘미소 속에 비친 그대’ 에서도 ‘울고 싶지 않아 다시 웃고 싶어졌지’ 같은 표현이 그런 거죠. 가는 사람 붙잡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웃으면서 보내주는 것 같은 거요. 김소월 님의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같은 정서는 웬만해서는 나올 수 없는 정서거든요. 간다고 하면 화도 날 텐데, 자기 몸까지 밟고서 가라고 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죠. 전 어려서부터 그런 정서가 강했어요. 그게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정서 같아요. 미국에서는 ‘새가 노래한다’ 고 하지만 우리는 ‘새가 운다’ 라고 하잖아요. 저에게는 그런 정서가 강해요. ‘애이불비’ 에 이어서 이번에 ‘애이불비 2’를 만들었는데, 여기서도 신승훈에게는 이런 정서가 있다는 것을 보이지 싶었어요.”
- 2004. 4. 사운드 온 에어와의 인터뷰에서
과연! 발라드의 황제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진정한 자신의 정서를 찾아내고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오랫동안 노랫말을 만들고 곡을 붙이기 위해 고민했던 것이다.
우리 민족의 정서 ‘애이불비’
사실 ‘애이불비’의 정서는 김소월만의 것도 아니요, 신승훈만의 것도 아닌, 우리 민족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정서이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한 슬픔의 정서와는 다르다.
흔히 우리 민족을 가르켜 슬픔과 한의 민족이라고 하는데, 그런 주장이 맞다면 우리 음악, 곧 국악도 청승맞은 음악이어야 한다. 그런데 국악에는 슬픈 곡, 청승맞은 곡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애이불비의 정서, 곧 슬픔을 결코 슬픔으로 표현하지 않는 음악이 많은 것이다. 서양의 단조에 해당하는 계면조로 된 곡조차도 꿋꿋하고 화평정대한 느낌을 준다.
물론 슬픔을 표현한 곡들도 있다. 수심가, 육자배기, 흥타령, 산조, 시나위 등. 그러나 이 곡들도 겉으로는 애간장을 긁는 비곡인 것 같지만 실상은 슬픈 느낌 속에서도 오히려 위로가 되고 힘이 나는 그런 정서를 담고 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정서의 본질이 한이 아니라 흥이라는 사실을 웅변해준다.
신승훈은 1990년 데뷔한 이래 15년 동안 모두 1,400만 장의 음반을 판매했다. 50만 장만 넘어도 ‘대박이 터졌다’ 고 환호하는 우리 가요계에서 일년에 100만 장씩 음반을 팔았다는 애기다. ‘미소 속에 비친 그대’ 가 수록된 1집이 140만 장, ‘보이지 않는 사랑’, 이 수록된 2집은 158만 장, 3집 ‘널 사랑하니까’ 가 170만 장, 4집 ‘그 후로 오랫동안’ 과 베스트 앨범을 합쳐 247만 장, 5집 ‘나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니가 있을 뿐’ 이 180만 장, 그리고 6집 ‘지킬 수 없는 약속’ 이 105만 장등 발표하는 앨범마다 10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그에게는 ‘전 앨범이 가요 차트 1위를 기록한 가수’, ‘가요 차트 1위를 가장 많이 한 가수’, ‘가요 차트 1위 곡을 가장 많이 작곡한 가수’ 등의 화려한 수식어가 따른다. 가요 전문가들은 신승훈을 두고 “건국 이래 최대 불황에 허덕이는 음반 시장을 거침없이 돌파한 유일한 뮤지션” 이라고 애기한다. 이러한 그의 성과 뒤에는 김소월의 ‘진달래꽃’에서 느낄 수 있는 한국 여인의 정서를 음악 속에 담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갈고 닦는 그의 노력이 있었다. 그래서 그의 노래들이 우리 국민들의 마음에 착착 감기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늘 새로운 시도를 하되 그 바탕에 우리의 정서, 우리의 음악을 깔아준다.
“중국, 홍콩, 일본을 많이 가봤는데 음악적 수준을 보면 우리가 뒤질 게 없어요. 음악이나 사운드 면에서 뒤지는 부분이 전혀 없는데, 음악 자체가 팝 문화에 너무 젖어 있다는 것을 많이 느껴요. 말씀드린 다른나라에 가보면 그 나라의 독특한 특생이 강하다는 것을 느꼈어요. 중견 가수로서 제가 우리 음악을 알리는 데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했어요. 중국의 전통악기는 우리 악기와 많이 비슷하지만, 우리 대중음악에서 가야금을 사용한 경우는 별로 없더라구요. 아시아 시장이 열렸기 때문에 우리의 악기 소리로 우리의 특색을 담고 싶었어요.”
- 신승훈 2004. 4.
이렇게 우리의 전통을 현대에 살리려는 젊은이들의 노력은 신승훈 하나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이른바 세계화의 시대에 우리의 문화 예술이 강점을 가질 수 있는 길은 우리만의 것을 찾고 살리는 길일 것이기 때문이다.
신승훈의 ‘애이불비2’ 만이 아니라 ‘애이불비1’ 도 들으며 멀리 고려 시대 서경별곡에서부터 김소월, 신승훈으로 이어지는 한국의 정서를 느껴보리라. 그리고 그 음악들이 우리나라를 넘어 일본과 중국, 그리고 아시아로 퍼져나가는 것을 지켜보리라.
그대 나를 떠나려는 이유를 굳이 알려 하지 않으렵니다.
그저 나 그대 가시는 그 길에 그대의 행복이 있길 바랄 뿐
눈물로도 그댈 잡아봤지만 그대를 많이 미워도 했지만
더 이상 내가 아니라 하기에 이제는 편히 보내주려 합니다.
신이 내게 주신 행복이 여기가 끝이라 한다면
이제 눈물만 남았다 해도 그만큼 행복했으면 된 거죠. ...
- 애이불비
신승훈의 노래 중에 ‘애이불비’ 라는 노래가 있다. 처음엔 노래 제목이었지만, 지금은 자신의 음악세계를 대표하는 말로 여기고 있는 말이다.
누군가에게로 가던 길이었나요.
잠시 내 곁에서 머물렀나요.
이제야 겨우 보내주세요.
그댈 기다리는 사람에게로
나에게 미안해 떠나지 못했나요.
미뤄둔 이별이 오늘인가요.
눈물겨움 헤어짐을 알면서
조금 더 내 곁에 있길 바랬죠. ...
애이불비, 그냥 한그롤만 써놓으면 무슨 뜻인지 금방 파악되지 않지만 한자어 哀而不悲의 의미를 새겨보면 그 은근하고 깊은 의미가 다가온다. “가슴이 아리도록 슬프지만 비통해하지 않는다”, 곧 슬픈을 드러내지 않는다. 여기사 한자 哀는 슬프다는 듯, 悲도 슬프다는 뜻이지만 앞의 슬픔은 슬픈 상태를, 뒤의 슬픔은 이를 드러낸다는 뜻으로 쓰였다.
원래 임 말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말이다. 가야의 음악인인 우륵은 12곡의 가야금곡을 만들었는데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신라로 망명했다. 당시 신라의 왕인 진흥왕은 우륵을 국원성, 곧 충주에 살게 하고 제자들에게 그 곳을 전수하도록 했다. 제자들은 그 중 11곡을 배운 다음 ‘곡들이 너무 번거롭고 조잡, 음란하여 아정치 못하다’ 며 다섯 곡으로 줄였다. 당대 최고의 음악인이었던 우륵은 제자들이 연주하는 곳을 듣고는 처음에는 기분이 몹시 상했으나 다섯 곳을 다 듣고는 눈물을 흘리며 했다는 말이 바로 이 말이다.
“즐거우면서도 무절제하지 않고 슬프면서도 비통하지 않으니, 바르다고 할 만하다.”
사실 이 말은 진짜로 우륵이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원래는 공자가 당시까지 전해지던 각곡의 노래를 모아 <시경>을 편찬하면서 그 첫머리에 유명한 연애시인 ‘관저’를 올려놓고 그 시를 편하면서 한 말이기 때문이다.
“관저는 즐거우면서도 음탕하지 않고, 슬프면서도 상하지 않는다.”
아마도 김부식은 가야금 음악이 신라에 전해지는 과정을 기록하면서 공자의 음악관을 받아들여 마치 우륵이 말한 것처럼 기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기원이야 어찌 되었든 이 표현은 당시 우리 민족의 음악관을 전해주고 있다. 즉, 음악은 듣기에 즐거우면서도 너무 지나치게 풀어지면 안 되고, 슬프다고 해서 너무 심하게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글 세대인 신승훈이 어떻게 이런 어려운 한자어를 골라썼을까? 알고 보니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가르치면서 이 시의 사상을 ‘애이불비’ 라고 가르치고 있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의 약산
진달래 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은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이 시의 저변을 흐르는 정서인 애이불비- 슬프지만 슬퍼하지 않는 것, 참고 견디는 것, 이것은 바로 전통적 한국 여인들의 정서이자 우리 문학의 주요한 특질 중의 하나가 아니었던가. 그것은 ‘은근과 끈기’ 라는 특질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으로서, 희로애락을 겉으로 요란하게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속으로 삭이면서 은근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그것은 곧 찔레꽃의 은은한 향기이며, 된장의 텁텁하면서도 구수한 맛이다.
신승훈도 바로 이 정서가 자신과 통한다고 생각해 이를 음악으로 표현해 보고자 노력을 쏟아 부었던 것으로 보인다.
“저는 ‘애이불비’ 정서가 강해요. ‘미소 속에 비친 그대’ 에서도 ‘울고 싶지 않아 다시 웃고 싶어졌지’ 같은 표현이 그런 거죠. 가는 사람 붙잡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웃으면서 보내주는 것 같은 거요. 김소월 님의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같은 정서는 웬만해서는 나올 수 없는 정서거든요. 간다고 하면 화도 날 텐데, 자기 몸까지 밟고서 가라고 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죠. 전 어려서부터 그런 정서가 강했어요. 그게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정서 같아요. 미국에서는 ‘새가 노래한다’ 고 하지만 우리는 ‘새가 운다’ 라고 하잖아요. 저에게는 그런 정서가 강해요. ‘애이불비’ 에 이어서 이번에 ‘애이불비 2’를 만들었는데, 여기서도 신승훈에게는 이런 정서가 있다는 것을 보이지 싶었어요.”
- 2004. 4. 사운드 온 에어와의 인터뷰에서
과연! 발라드의 황제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진정한 자신의 정서를 찾아내고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오랫동안 노랫말을 만들고 곡을 붙이기 위해 고민했던 것이다.
우리 민족의 정서 ‘애이불비’
사실 ‘애이불비’의 정서는 김소월만의 것도 아니요, 신승훈만의 것도 아닌, 우리 민족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정서이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한 슬픔의 정서와는 다르다.
흔히 우리 민족을 가르켜 슬픔과 한의 민족이라고 하는데, 그런 주장이 맞다면 우리 음악, 곧 국악도 청승맞은 음악이어야 한다. 그런데 국악에는 슬픈 곡, 청승맞은 곡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애이불비의 정서, 곧 슬픔을 결코 슬픔으로 표현하지 않는 음악이 많은 것이다. 서양의 단조에 해당하는 계면조로 된 곡조차도 꿋꿋하고 화평정대한 느낌을 준다.
물론 슬픔을 표현한 곡들도 있다. 수심가, 육자배기, 흥타령, 산조, 시나위 등. 그러나 이 곡들도 겉으로는 애간장을 긁는 비곡인 것 같지만 실상은 슬픈 느낌 속에서도 오히려 위로가 되고 힘이 나는 그런 정서를 담고 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정서의 본질이 한이 아니라 흥이라는 사실을 웅변해준다.
신승훈은 1990년 데뷔한 이래 15년 동안 모두 1,400만 장의 음반을 판매했다. 50만 장만 넘어도 ‘대박이 터졌다’ 고 환호하는 우리 가요계에서 일년에 100만 장씩 음반을 팔았다는 애기다. ‘미소 속에 비친 그대’ 가 수록된 1집이 140만 장, ‘보이지 않는 사랑’, 이 수록된 2집은 158만 장, 3집 ‘널 사랑하니까’ 가 170만 장, 4집 ‘그 후로 오랫동안’ 과 베스트 앨범을 합쳐 247만 장, 5집 ‘나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니가 있을 뿐’ 이 180만 장, 그리고 6집 ‘지킬 수 없는 약속’ 이 105만 장등 발표하는 앨범마다 10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그에게는 ‘전 앨범이 가요 차트 1위를 기록한 가수’, ‘가요 차트 1위를 가장 많이 한 가수’, ‘가요 차트 1위 곡을 가장 많이 작곡한 가수’ 등의 화려한 수식어가 따른다. 가요 전문가들은 신승훈을 두고 “건국 이래 최대 불황에 허덕이는 음반 시장을 거침없이 돌파한 유일한 뮤지션” 이라고 애기한다. 이러한 그의 성과 뒤에는 김소월의 ‘진달래꽃’에서 느낄 수 있는 한국 여인의 정서를 음악 속에 담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갈고 닦는 그의 노력이 있었다. 그래서 그의 노래들이 우리 국민들의 마음에 착착 감기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늘 새로운 시도를 하되 그 바탕에 우리의 정서, 우리의 음악을 깔아준다.
“중국, 홍콩, 일본을 많이 가봤는데 음악적 수준을 보면 우리가 뒤질 게 없어요. 음악이나 사운드 면에서 뒤지는 부분이 전혀 없는데, 음악 자체가 팝 문화에 너무 젖어 있다는 것을 많이 느껴요. 말씀드린 다른나라에 가보면 그 나라의 독특한 특생이 강하다는 것을 느꼈어요. 중견 가수로서 제가 우리 음악을 알리는 데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했어요. 중국의 전통악기는 우리 악기와 많이 비슷하지만, 우리 대중음악에서 가야금을 사용한 경우는 별로 없더라구요. 아시아 시장이 열렸기 때문에 우리의 악기 소리로 우리의 특색을 담고 싶었어요.”
- 신승훈 2004. 4.
이렇게 우리의 전통을 현대에 살리려는 젊은이들의 노력은 신승훈 하나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이른바 세계화의 시대에 우리의 문화 예술이 강점을 가질 수 있는 길은 우리만의 것을 찾고 살리는 길일 것이기 때문이다.
신승훈의 ‘애이불비2’ 만이 아니라 ‘애이불비1’ 도 들으며 멀리 고려 시대 서경별곡에서부터 김소월, 신승훈으로 이어지는 한국의 정서를 느껴보리라. 그리고 그 음악들이 우리나라를 넘어 일본과 중국, 그리고 아시아로 퍼져나가는 것을 지켜보리라.
그대 나를 떠나려는 이유를 굳이 알려 하지 않으렵니다.
그저 나 그대 가시는 그 길에 그대의 행복이 있길 바랄 뿐
눈물로도 그댈 잡아봤지만 그대를 많이 미워도 했지만
더 이상 내가 아니라 하기에 이제는 편히 보내주려 합니다.
신이 내게 주신 행복이 여기가 끝이라 한다면
이제 눈물만 남았다 해도 그만큼 행복했으면 된 거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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