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동식의 다섯 계절의 노래


 

이동식
1953년 생. 서울대학교 영어교육학과 졸업후 1977년 KBS에 입사하여 30여 년을 현장에서 보낸 언론인이다. 초대 북경특파원, 런던지국장, 과학부장, 국제부장, 보도제작국장, 문화담당....< 더보기 >

*제70회 - " 찔레꽃, 된장, 블루스 - 장사익 "

영광도서 0 719
그의 노래를 슬펐다.
1996년 11월 24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열린 장사익의 소리판 ‘하늘가는 길’ 공연을 친구의 권유로 보게 되었다. 관람후 정신이 아득해져서 서둘러 구입한 동명의 CD를 자동차에 꽂아놓고 출퇴근 길마다 틀었다. 그 CD의 첫 곡인 찔레꽃, 그 노래는 가사만큼이나 슬펐다.

하얀 꽃 찔레꽃
순박한 꽃 찔레꽃
별처럼 슬픈 찔레꽃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목 놓아 울었지

마치 접시 위에 담긴 듯 떼구루 눈 가에서 눈물이 구르는 장면을 임동창의 피아노가 퉁겨내면 장사익은 그 눈물을 기어코 얼굴 밑으로 흐르게 만든다. 힘든 세상을 산 우리들의 한숨과 눈물이 담긴 목소리로 박자도 느릿느릿, 소리도 흐느적 흐느적, 그러면서 기어코 우리를 쥐어짜고 있었다. 그 CD를 지겹게 지겹게 듣고는 이어 2집, 3집으로 넘어가면서 결국엔 그의 5집 곡을 다 사서 듣게 되었고 그러면서 10년이 흘렀다. 그 10년 동안 나도 아침 일찍 출근해서 밤 10시가 넘어 퇴근하는 아주 힘든 생활이 많았지만, 지난 10년의 세월을 보내는 힘은 결국 장사익의 노래가 담아서 준 막걸리의 힘이었다.

왜 첫 곡이 하필 찔레꽃이었는가요?
그러한 물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지난 번 어느 강연장에서 만난 장사익은 마치 한 장 한 장 떨어져 빗물에 흩어져가는 찔레꽃 잎을 세듯이 지나온 자취를 더듬어주었다. 46살의 나이에도 일정한 직업없이 태평소를 불며 사물놀이패를 따라다니던 1994년 6월 잠실 5단지 옆을 지나는데 아주 향기로운 냄새가 코를 찌르더란다. 당시 아파트 담장에는 장미가 많이 심어져 있었기에 당연히 장미꽃이겠거니 하고 냄새를 따라가 보니 장미에서는 전혀 냄새가 없고 어느 잘 보이지 않는 한 구석에 하얀 찔레꽃이 피어있는데 거기서 그렇게 향기가 나는 것이 아니던가? 그것을 보고 울컥했단다. ‘야! 아무도 안보는 이 보잘 것 없는 찔레꽃에서 이런 좋은 향기가 나다니. 그래. 고대광실에 번쩍거리는 승용차를 자랑하며 잘 사는 사람이 아니라도 우리 서민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이 아니겠나? 속으로 진항 향기를 담고 각자 자기의 삶을 사는 ... ’ 그래서 만든 것이 이 노래란다. 결국은 자신의 이야기이고 자신의 노래이다. 그래서인지 그 뒤부터 이 노래만 부르면 개운하고 모든 고통을 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 어디에 가나 이 노래는 꼭 부른단다.

94년 11월, 46살에 노래를 시작해 곧바로 주목을 받고 하루아침에 유명해졌지만. 반대로 보면 40대 후반까지 어떻게 지냈는지 그야말로 눈물의 스토리이다. 그 자신 ‘자발이 없어’ 직장, 직업을 열다섯 번이나 바꾸었고, 그러다보니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맨 마지막 직장이 매제가 하는 카센터, 거기에서 그 때 한참 잘 나가는 가수의 막 새로 나온 그랜저 승용차에 광택을 입혀준다고 나섰다가 기스를 내고 한 달 동안이나 봐달라고 무릎을 꿇고 빌었다고 한다.

“노래는 인생과 자연의 기록입니다.”

10년 동안 애청하던 장사익을 가까이서 보고 그의 말을 직접 듣는 순간 그는 이 말을 가장 처음으로 던졌다. 그래. 그만큼 인생이 힘들었다는 뜻이고 그만큼 힘들었던 그의 인생과 그런 가운데 보고 느낀 자연을 그의 노래 속에 담았다는 뜻이었다. 그의 노래를 보고 그의 삶을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기진한 몸
텅 빈 가슴으로
돌아와 문을 열면
부스스 잠깨어
강아지들처럼
기어나오는 아이들을 보고야
텅 빈 가슴이
출렁 채워집니다.

그 자신의 노랫말은 아니더라도 바로 젊은 시절, 돈 벌기가 힘들어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오는 장사익, 아니 우리들의 삶이 이 노래에 담겨있다. 그러니 서민들이 이 노래를 듣고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가 노래를 시작한 지 불과 1~2년 만에 그는 막 IMF위기에 휩쓸려 들어가는 어려운 상황에서 지친 우리 아버지들의 불같은 호응을 받았다. 그 뒤의 노래인생은 이미 익히 우리가 아는 그대로이다.

“자네는 왜 노래를 그런 식으로 부르나? 박자도 자기 마음대로이고. 도대체 장르가 뭐요?” 라고 선배가수인 조영남이 머리를 갸우뚱할 정도로 장사익의 노래는 얼척없다. 박자도 안 고 가락도 늘어지기 일쑤고 반주가 힘들다. 교향곡을 들을 때 마지막으로 “꽝 꽝 광 과아아앙...” 하며 장렬하게 끝나지도 않는다. 손으로 박자를 따라서 쳐볼 량이면 영낙 없이 어긋나서 손바닥이 무안해진다. 그런데 장르를 굳이 말하자면 국악, 가요, 재즈... 뭐 이런 것 중의 하나일 수도 있고 둘일 수도 있고 다 아닐 수도 있단다. 또는 다 합친 것일 수도 있단다. 결국은 어느 형식으로 굳이 이름 가르기가 어렵다는 애기이다. 그럼 그것은 무엇인가?

한국 사람이 부르는 한국의 노래일 뿐이다.
2004년 일흔 한 살로 타계한 김대환이란 분을 기억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6개의 스틱을 쥐고 연주하는 드러머로 세계에 유명한 타악기 연주자이며, 쌀 한 톨에 반야심경 283자를 새겨 넣어 세계 기네스북에 오른 세서의 달인이고, 오로지 음악으로만 이야기하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겠다고 두 번이나 혀끝을 잘랐던 고집불통의 이 아저씨가 생전에 연습실에서 장사익을 보고는 “산토끼 노래 알지? 그 노래를 박자 없이 불러봐!” 라고 했단다. 가사를 따라서 노래를 부르니 몇 번이고 노래를 세우고는 “너 속으로 박자를 세고 있잖아?” 라고 호통을 치더란다. 그 뒤로부터 장사익은 박자를 잃어버렸다고 한다. 호흡이 되는 대로 기분이 내키는 대로 부르는 것이다.

결국 노래도 호흡인 것이다. 일년 사계절이 24절기로 엄격히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시간의 끊임없는 흐름이듯 우리의 노래도 굳이 박자로 나눠질 이유가 없는 우리 삶의 연장이고 삶의 호흡이고 기쁨과 슬픔의 자연스런 발로이기에 기쁠 때에는 소리를 지르고 슬플 때에는 느리게 부르면 되는 것이다. 외국의 특히 서양의 음악에서의 비트처럼 반드시 박자를 일정 시간에 맞추는 것은 노래라고 할 수 없다.

그러기에 장사익은 지나간 옛날 가요도 곧잘 자기 식으로 부른다. 그는 오랜 유랑생활동안 늘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남보다 유난히 목청이 좋아서 구성진 가락을 뽑으면 중도에 멈출 수가 없는데,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를 아마도 이미자씨보다도 더 많이 더 열심히 불렀을 것이라고 한다. 그 동백아가씨를 장사기의 노래로 들으면 원곡보다도 두 배쯤 더 시간이 걸린다. “헤일 수 없이~” 라고 하는 첫 시작에서부터 뭔가를 세고 있는 듯 도무지 앞으로 나갈 기색이 없는 듯하기 때문이다. “헤 자 하나에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다 들어있습니다. 사시장철 불렀으니까 그럴 수밖에요. 그러니 요즈음 계속 중얼거리는 랩과는 다르지요. 우리 잘 아는 세한도를 보면 바짝 마른 나무 두 그루하고 판자집 하나인데, 그 속은 엄청 꼭 차 있잖아요? 우리 말도, 우리 노래도 그런 것 같아요. 빨리 부르면 뭔가 속이 비는 것이고 느리게 부르는 가운데 그 속이 채워지는 것 말이죠? 이 대목에서 그는 음악과 미술과 철학을 몸으로 깨우친 철학자 같았다.

그러니 그가 부르는 유행가는 원곡과는 다른 장사익의 노래이어서 또 재미있다. 최희준 선생과 패티 킴이 즐겨 부르던 ‘빛과 그림자’ 라는 노래의 중간에서는 “사랑은 나의_천국/ 사랑은 나의 지옥” 이렇게 부르고는 원작에 없는 “으흐~” 라는 신음소리를 넣는다. “비 내리는 고모령” 은 정말 비 맞으며 고모령을 넘는 듯 느릿느릿 슬프다. 김추자의 ‘봄비’ 가 사이다 마시고 맞는 비이고 박인수의 ‘봄비’가 맥주 마시고 맞는 비라면 장사익의 ‘봄비’ 는 막걸리 마시고 맞는 비이다. 그런데 원래 한국 사람들은 사이다나 맥주를 마시고는 비를 맞으려 하지 않는다. 막걸리를 마시면 즐겨 비를 맞는다. 베적삼이 다 젖어도 좋다. 그러기에 베적삼과 같은 장사익의 ‘봄비’가 좋은 것이다.

노래를 시작하고 노래하는 행복에 겨워 세월이 지나가는 지도 모르던 2004년 초, 장사익은 미국 순회공연에 참가한다. 서울팝스오케스트라 창설 30주년을 기념한 순회공연으로 전자바이올린 연주자 유진 박, 소프라노 김희정과 테너 김철호가 동행하는, 클래식과 팝을 아우르는 무대였다. 첫 연주회에서 지휘자의 나국 비하발언으로 국내에서 물의를 빚기도 했지만 장사익의 음악은 처음으로 세계무대로 나아간다. 그 때는 물론 한국 청중이 많았지만 미국 청중들의 반응에서도 가능성을 확인했었다.

그것이 이번 올 6월 미국 4개 도시 순회 단독 콘서트의 밑걸음이 되었다. 뉴욕과 워싱턴, 시카고, LA등 4개 도시에서는 다른 스폰서 없이 맨손으로 기획과 홍보를 했는데 자리의 90%이상이 유료청중으로 메워졌다. 우리 동포들의 마음은 굳이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더 의미가 있는 것은 미국 음악계의 반응이었다.

각 도시의 연주홀의 음악관계자들은 처음 한국에서 온 대중음악가에 대해 흔히 그렇듯이 탐탁해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공연 연습시간도 제대로 내주지 않아서 무척 어렵게 연습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연이 끝나자 그 관계자들은 태도를 바꾸어 악수를 청하며 장사익의 공연포스터를 자기네 홀에 영구히 게시하겠다면 포스터를 달라고 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 노래의 뜻은 모르겠지만 당신 노래를 들으니 바로 한국의 노래임을 알겠습니다.”

미국의 음악 관계자들은 음악만으로 먹고 사는 전문가들이다. 그들이 장사익의 노래를 인정하고 그것이 한국의 노래임을 알아준 것이다. 징과 꽹과리, 북 등 한국의 타악기가 이끌어내는 분위기도 한 몫을 했으리라. 또 다른 공연장에서는 장사익의 노래에서 블루스와 같은 인생을 받았다는 평을 미국인들로부터 들었단다. 그것은 장사익의 노래야말로 한국인들의 심성이 담긴, 한국인만의 음악이라는 말이 된다. 그 음악을 미국인들이 평가함으로서 앞으로 세계무대에 나갈 관문을 통과한 것이다.

오늘날 음악이 국경을 넘어선지는 오래이다. 대중음악도 미국발의 수많은 형식과 리듬과 창법이 세계를 풍미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에도 지역적으로 일본은 일본, 중국은 중국, 필리핀은 필리핀대로 나름대로의 음악을 만들어가고 있다. 한국도 그렇지 않은 것 같지만 한국만의 음악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러면 한국의 대중음악, 한국의 노래는 무엇이 중국이나 일본과 다른가? 그것은 바로 된장이 아니겠는가? 된장과 마늘과 고추를 즐겨먹는 한국 사람들, 그들이 이 땅에서 나고 자라고 죽으며 보고 듣고 느끼고 함께 사는 이 땅, 그것이 바로 한국의 노래인 것이리라. 그러기에 우리 국악에는 징이 있고 북이 있고 꽹과리가 있고 꺾음과 풀림과 추임새가 있다. 그것들이 바로 한국의 음악이자 한국의 노래이다. 장사익의 노래에 이런 것들이 많은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장사익의 노래를 즐겨 반주해주는 피아니스트 임동창도 걸물중의 걸물이다. 달포 전 EBS의 다큐멘터리가 임동창을 다루었는데 거기서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왜 20세기, 21세기를 사는 한국인들이 18세기, 19세기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만든 음악을 콩나물 하나 안 틀리고 그대로 연주하려고 하나? 왜 그래야만 하나? 왜 우리는 서양악기라고 해도 우리 식으로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연주하면 안 되는가?”

그러기에 임동창은 피아노로 우리 가락을 연주하고 임동창의 마음에 일어나는 곡조를 형식에 구애 없이 연주한다. 마찬가지로 장사익도 당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대로 스스럼없이 불러낸다. 그것은 미국의 흑인들이 그들의 역사 속에서 생겨난 아픔과 고통을 아무런 형식의 구애 없이 음악으로 만들어 오늘날 흑인영가나 블루스나 재즈라는 위대한 음악이 탄생한 것과 같은 원리이다. 우리는 된장 냄새가 나는 블루스, 재즈를 만들 수 있다. 우리의 마음속에 태어난 감정과 희로애락을 우리 식으로 편하게 표현해내면 그것이 곧 한국의 블루스가 되는 것이다. 가슴 비가 세계무대에 노크하고 있지만 그의 음악은 우리의 마음과 혼보다는 미국식의 음악, 미국식의 무대를 추구한다는 데서 장사익과는 전혀 다른 길이다.

“한국의 예술은 동아시아에서, 아니 세계에서도 특별한 점이 있지만, 가장 두드러진 것은 아마도 음악이라고 생각합니다. 도대체 목소리 하나로 너 댓 시간을 끄는 그런 예술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밀고 당기는 박자만으로도 세계를 감동시키는 사물놀이를 보세요! 우리의 노래소리처럼 아주 길게도, 아주 높게도, 아주 느리게도 빼는 그럼 음악이 세계에 어디 있습니까?”

강연이 끝나고 뒤풀이를 위해 나란히 앉은 장사익 선생에게 나는 이런 격려성 멘트를 날렸다. 당신의 목소리가 세계를 울려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미국 공연에서 돌아온지 얼마 되지 않아 피로가 가시지 않은 장선생은 이런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마음이 세상에 나오면 꽃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뒤늦게 찾은 이 길이 제가 좋아하는 노래를 마음껏 부를 수 있는 길이어서 너무 행복합니다. 저는 제가 보는 하늘의 색깔을 노래로 그릴 것입니다. 찬송가도 독경도 진도씻김굿도 다시래기도 다 슬픔을 이기고 즐거움을 찾는 방법입니다. 우리의 희로애락은 가슴속에 쌓아놓고 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풀어드리기 위해 저는 힘이 다하는 날까지 노래를 할 것입니다. 그곳이 한국이든 미국이든 가리지 않고요.”

LA공연을 보고 나온 한 동포가 인터넷에 소감을 올렸다.

“활명수를 사발로 마시는 듯한 공연이었습니다.”

장사익 선생님!
당신은 정말 (남이 보지 않는 구석에서 피어나도 누구보다도 강렬한 향기를 품어내는, 그래서 세계인들까지도 그 향기를 맡게 할 수 있는) 찔레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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