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동식의 다섯 계절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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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 |
*제72회 - " 백운거사 이규보와 사륜정 "
영광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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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0
2016.12.01 03:44
움직이는 정자 사륜정
고려 시대의 대시인 이규보, 사람들은 그를 두고 ‘동방 문학의 관’ 이라고 했다. 2천 수에 이르는 방대한 한시는 편마다 주옥이요, 줄마다 기발과 절묘 아닌 것이 없어 호탕 활달한 시풍은 당대를 풍미했으며, 과연 우리 동방에서 가장 뛰어난 문인으로 숭앙받을 만하였다. 지금까지 사랑을 받고 있는 시만 해도 그 얼마인가?
산에 사는 스님이 달빛을 탐내어
병 속에 물과 달을 함께 길었네.
절 모퉁이 돌아와 마땅히 깨달았으리.
병을 기울이니 달도 따라 비게 되는 것을.
- 우물 속에 달을 노래함
모란꽃 이슬 머금어 진주 같은데
신부가 모란을 꺽어 차가를 지나다
빙긋이 웃으면서 신랑에게 묻기를
“꽃이 예쁜가요? 제가 예쁜가요?”
신랑이 일부러 장난치느라
“꽃이 당신보다 더 예쁘구려.”
신부를 꽃이 예쁘다는 데 뾰로통해서
꽃가지를 밟아 짓뭉개고 말하기를
“꽃이 저보다 예쁘시거든
오늘밤은 꽃하고 주무시구려.“
- 절화행
세상의 부귀영화를 뜬구름으로 본다는 뜻에서 백운거사 라는 호를 좋아했으며 시, 술, 거문고를 지나칠 정도로 즐겨 스스로 ‘삼혹호 선생’ 이라 칭할 정도로 그는 풍류객이었다.
“거문고는 악기의 으뜸이다. 때문에 군자들은 항상 몸에서 떼지 않고 사용한다. 나는 참다운 군자는 아니지만 줄 없는 거문고 하나를 가지고 즐겨왔다. 어떤 손님은 이것을 보고 웃고는 줄을 제대로 갖추어서 주므로 나는 사양하지 않고 기꺼이 받았다. 그리고는 모여 놀 적마다 마음대로 타며 놀았다.
옛날 중국의 도연명에게 줄 없는 거문고가 있었다. 타는 것이 아니라 간직하기만 하면서 그의 높은 뜻만 밝힐 뿐이었다. 나는 이와 달리 그 소리를 듣고자 하니 도잠의 고상한 뜻과는 너무 거리가 멀다. 그러나 내 스스로 즐기는 것인데 꼭 옛사람을 본받아야 할 까닭이 있겠는가? 나는 한 잔 마시고 한 곡조 타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는다. 이 역시 세월을 보내는 한 가지 즐거움이 될 수 있다.“
- 소금의 등에 새기는 데 대한 지
이처럼 술과 거문고와 시 없이는 한 시도 못 사는 지경에 이르자 백운거사 또는 농서자 이규보는 마침내 아주 깜찍한 꾀를 내었다. 한여름 시원한 솔나무 그늘에 술을 펴놓고 거문고 곡조를 들으며 시상을 가다듬는 것을 낙으로 하던 이 양반은, 해가 중천을 돌아 서천으로 갈 때마다 자리를 옮기는 것이 여간 번거롭고 또 주흥과 시상을 가로막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아예 움직이는 정자를 생각한 것이다.
“여름에 손님과 함께 동산에 자리를 깔고 누워서 자기도 하고, 앉아서 술잔을 들기도 하고, 바둑도 두고, 거문고도 타면 뜻에 맞는 대로 하다가 날이 저물면 파한다. 이것이 한가한 자의 즐거움이다. 그러나 햇볕을 피하여 그늘로 옮기면서 여러 번 그 자리를 바꾸는 까닭에 거문고, 책, 베개, 대자리, 술병, 바둑판이 사람을 다라 이리저리 옮겨지므로 자칫 잘못하면 떨어뜨리는 수가 있다. 그래서 비로소 설계하여 사륜정을 세우려고 하는데, 아이 종으로 하여금 그것을 밀어 그늘진 곳으로 옮기게 하면, 사람과 바둑판, 술병, 베개, 대자리가 모두 한 정자를 따라서 동서로 이동하게 되리니, 어찌 이리저리 옮기는 것을 꺼려하랴?”
그것이 사륜정, 곧 네 바퀴가 있는 정자다. 움직이는 정자, 요즈음으로 애기하면 이동식 정자다. 평생 술과 시, 거문고만을 좋아했던 이규보만한 풍류객이 아니고서는 상상도 못 할 기상천외의 착상이다. 바퀴를 네 개 단 정자를 짓는 것이다.
정자는 사방이 6척이고 들보가 둘, 기능이 넷이며, 대나무로 서까래를 하고 대자리를 그 위에 덮는다. 이것은 되도록 정자의 무게를 줄여서, 이동할 때 보다 쉽게 하기 위함이다. 동서가 각각 난간 하나 씩이요, 남북이 또한 같다.
“정자는 사방이 6척이니 그 칸수를 총계하면 모두가 36척이다. 세로 가로를 계산하면 모두가 6척인데, 그 평방이 바둑판 같은 것이 정자이다. 판국 안에 또 둘레로 돌아가며 자로 헤아여 보면 한 자의 평방이 바둑판의 정간과 같다. 정간이란 선 사이의 정 자처럼 네모 반듯한 것이다. 정간이 각각 1평방척이니, 36정간은 곧 36평 방척이다.”
왜 이런 정도의 크기가 필요했는가? 백운거사 이규보는 이 정자안에 적어도 여섯 명이 앉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이 동쪽에 앉되 4편방 정간을 차지하고 앉는다. 세로 가로가 모두 2척인데 두 사람의 분을 총계하면 모두가 8평방척이다. 나머지 4편방 정간을 쪼개어 둘로 만들면 각각 세로가 2평방척이다. 2평방척에다가는 거문고 하나를 놓는다. 짧은 것이 흠이라면 남쪽 난간에 걸쳐서 반쯤 세워 둔다. 거문고를 탈 적에는 무릎에 놓는 것이 반은 된다. 2평방척에다가는 술동이, 술병, 소반그릇 등을 놓아 두는데, 동쪽이 모두 12평방척이다. 두 사람이 서쪽에 앉는 데도 또한 이와 같이 하고, 나머지 4평방 정간은 비워 두어서 잠깐씩 왕래 하는 자는 반드시 이 길로 다니게 한다. 서쪽도 모두 12평방척이다. 한 사람은 북쪽 4평방 정간에 앉고 주인은 남쪽에 앉는데 또한 이와 같다. 중간 4평방 정간에는 바둑판 하나를 놓으니, 남쪽과 북쪽 중간이 모두 12평방척이다.”
백운거사 자신도 거문고를 잘 탔지만 이런 때는 더 잘 하는 전문가를 초빙한다. 거문고 주자에도 목청이 좋은 가인 곧 가객과 시를 잘 짓는 스님 곧 시승 각 한 사람이 흥을 돋운다. 거기다 친구가 되든 누가 되든 바둑 두는 사람 두 사람이 앉을 수 있어야 하고, 또한 주인이 앉아야 하니 6명이 앉을 수 있는 정자가 되는 것이다. 거기서는 누구나 자연 속에 몰입해 신선이 된다. 바둑을 두다 보면 시간이 가는 것을 잊어버린다. 자연이 주는 멋과 흥을 즐기면서 술잔이 적당히 돌아간다. 물론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서로 마음이 맞아야 한다. 적어도 문학과 음악과 철학이 서로 통해야 한다. 이규보 자신은 고려 때의 귀족이지만 그 자리는 아래 위가 없다. 서로 한 마음이 되어 자연 속에서 즐기는 것이다.
“사람을 한정시켜 앉게 한 것은 동지 임을 보인 것이다. 이 사륜정을 끌 때 아이 종이 힘든 기색이 있으면 주인이 스스로 내려가서 어깨를 걷어붙이고 끈다. 주인이 지치면 손님이 교대로 내려가 조력한다. 술에 취한 뒤에는 가고 싶은 대고 끌고 가지, 꼭 그늘로만 갈 필요가 없다. 이와 같이 하여 저물 때까지 놀다가 저물면 파한다.”
농경을 주로 했던 우리나라는 자연을 사랑함에 상류층과 서민층에 차이가 없었다. 이는 우리나라의 서민 문화와 상류 문화가 모두 그 바탕을 자연에 두고 있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맑고 깨끗하여 부정이 없는 자연을 닮으려는 심성이야말로 한국인들의 순수한 기질이라 하겠다. 그래서 정자는 당연히 산 좋고 물 좋은 경관을 배경으로 한다. 그러한 곳에서 움직일 수 있는 정자는 시간이나 방법에 구애받음이 없다. 굴러가다가도 멈추면 정자가 된다고 해서 “행할 때가 되면 행하고 그칠 때가 되면 그쳐라”는 뜻 그대로 내키는 대로 가다가 멈추면 되는 것이다. 고금에도 동서 어디에도 없었던 기발한 정자,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놀이시설만은 아니었다. 그 곳에 바로 우리의 철학이 있었다. 자연에 나와 놀더라도 지나치지 않고 풍류는 격이 있어야 하며, 그러면서도 나라를 생각한다.
“밑은 바퀴로 하고 위는 정자로 한 것은 바퀴로 굴러가게 하고 정자로 멈추게 한 것이니, 행할 때가 되면 행하고 그칠 때가 되면 그친다는 뜻이다. 바퀴를 넷으로 한 것은 사시를 상징한 것이고, 정자를 6척으로 한 것은 육기를 상징한 것이며, 두 들보와 네 기둥을 한 것은 임금을 보좌하여 정사를 도와 사방에 기둥이 된다는 뜻이다.”
자연과 환경의 조화를 꿈꾼 환경주의자
그러나 이 기발한 사륜정은 설계는 다 했지만 실행에 옮겨지지는 못했다. 고려 신종2년인 1199년에 이미 설계를 다 했지만 마침 전주로 부임하라는 명이 있어서 이룩하지 못하고, 그 2년 뒤인 신유년, 1201년 4월에 전주로부터 서울로 와서 한가하게 지내던 중 바야흐로 지으려고 하였으나 또 어머니의 병환으로 성취하지 못하였다. 결국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인 다음해 5월에야 다시 이 정자에 생각이 미쳐, 그냥 두다가는 자신의 설계마저도 잊혀질까 우려해 이를 <사륜정기>라는 글로 자세히 남긴 것이다.
이규보의 도도한 문장에 비하면 <사륜정기>라는 이 글은 그리 길지는 않지만 고려 시대 문인들의 멋의 세계를 우리에게 그대로 전해준다. 당시는 무인 집권기라서 문인들이 무인의 그늘에서 세를 펴지 못하던 때였다. 그러나 자연의 무더위를 피해 가며 음악과 술과 시를 즐겼으며, 느긋하게 자연에 순응하면서도 군자로서의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아쉽게도 설계에 그치긴 했지만 삼복더위가 오면 한적한 자연을 찾아다니며 그 속에 숨어들어 여유를 즐기며 보냈을 이규보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가 지은 <백운소설>에서는 이규보는 “당나라 백낙천과는 음주와 광음영병이 천생 같아 낙천을 스승으로 삼는다” 라고 말했다. 고려의 문인들에게는 자연과 사시사철이 다 함께 하는 벗이었던 것이다. 그 속에서 즐긴 풍류는 메마른 현대인과 달리 마치 버드나무의 늘어진 가지 수만큼이나 천 가지 만 가지이다.
“여름을 바라보자면 더위에 짜증이 나고, 가을은 너무나도 쓸쓸하며, 겨울은 착착 막히어 봄에 비하면 지나치게 일방적이지만, 오직 봄만은 때에 따라 곳에 따라 화창해지기도 하고 슬퍼지기도 하며, 저절로 노래가 나오기도 하고 눈물이 나기도 하여, 사람마다 그 감정이 흐르니 감정이 천 가지 만 가지로 변한다. 취했을 때 바라보면 즐겁고, 깬 뒤에 바라보면 슬퍼지고, 궁했을 때 바라보면 왜 그리 구름과 안개가 많으며, 호화스러움에 바라보면 하늘도 맑아라.”
- 춘망부
그러나 자신들의 호의호식만을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사륜정에 두 들보와 네 기둥을 세운 것이 임금을 보좌하여 정사를 도와 사방에 기둥이 된다는 뜻이라고 한 설명에서 보듯 그 곳에는 무인들의 정권싸움에 피폐해진 민중들의 삶에 대한 연민과 이를 해결해야 한다는 강한 의지도 담겨 있다.
흉년 들어 거의 죽게 된 백성들은
앙상하게 뼈와 가죽만 남았네.
몸 속에 남은 살이 얼마나 된다고
남김없이 모조리 긁어내려 하는가.
그대는 보는가 하수를 마시는 두더지도
그 배를 채우는 데 지나지 않음을.
묻노니 너는 얼마나 입이 많아서
백설들의 살을 겁탈해 먹는 것이냐
- 개군수수인이장피죄이수
고려때는 사대부 문화의 형성기라고 할 것이다. 최충 등 학자들을 통해 퍼져 나가는 유학이 사대부들의 문화로 정착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에게서 보는 것은 특히 한시에 대한 천착이다. 2천 수가 넘는 한시를 남긴 이규보는 익재 이제현과 함께 고려조 시문학의 쌍벽을 이루면서도 그의 호방한 시세계는,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동방에서 제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말과 뜻이 서로 어우러져 씹을수록 맛이 나는 시를 추구했다.
시 지음에 특히 어려운 것은
말과 뜻이 아울러 아름다움을 얻는 것.
머금어 쌓인 뜻이 진실로 깊어야
씹을수록 그 맛이 더욱 순수하나니.
- 시론 중에서
시인 이규보는 자연에 관심이 많았고, 그의 자연은 세속과 대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세속과 조화할 수 있는 자연이었다. 특히 그의 시에는 물이 자주 등장한다.
나는 물 흐르는 것을 볼 때마다
세월 빠른 것을 슬퍼했다네.
맑은 샘물도 나의 뜻을 알고서
돌에 걸려 짐짓 더디더라오.
- 제석천
이규보는 자연에서 물의 역할을 알고 자연과 환경의 조화를 꿈꾼 환경주의자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가 정자를 좋아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정자는, 신체의 휴식이나 잔치, 놀이를 위한 기능보다는 자연인으로서 자연과 삶을 같이 하려는 기능이 더 강조된 구조물이라 할 수 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맑은 물이 흐르는 계속 옆에, 마을 어귀 연못 옆에, 산천 경개나 들이 잘 보이는 곳에 으레 정자가 있다. 그런 정자 안에 앉아 있으면, 비록 인공의 구조물이긴 해도 이미 그 인공을 초월한 대자연 속에 동화되고 만다. 때로는 물과 함께 억겁의 세월 속에서 함께 흐르기도 하고, 때로는 광활한 허공에서 거침없이 시공을 초월하기도 한다. 정자의 조경은 숲이나 주변 환경 요소인 냇물이나 강 등을 자연 상태 그대로 받아들여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서양의 조경이 인위적이고 기하학적인 것과 달리, 한국의 조경은 본래의 자연 형태를 그대로 주변의 조경 요소로 이용한다. 한국의 정자는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며, 자연과 조화를 이룬다. 정자는 우리 민족의 심성을 반영하는 휴식 공간이며, 문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규보는 이런 세계를 알고 ‘사륜정’ 이라는 창의적인 발명품을 통해 우리 곁으로 가까이 데려오려 한 것이다.
이규보는 그런 자연친화적인 정자 문화를 현대에 되살릴 수 있다는 점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그야말로 “천지가 사귀어 만물이 통하고 상하가 사귀어 그 뜻이 동일한” 자연과 환경, 사람과 사람의 합일된 경지, 그것이 우리가 갖고 있던 멋과 해학의 세계였다. 전통 문화 복원에 대한 목소리가 높은데, 그 비결은 이와 같은 옛 사람들의 멋과 해학을 이해하고 되살리는 길일 것이다.
고려 시대의 대시인 이규보, 사람들은 그를 두고 ‘동방 문학의 관’ 이라고 했다. 2천 수에 이르는 방대한 한시는 편마다 주옥이요, 줄마다 기발과 절묘 아닌 것이 없어 호탕 활달한 시풍은 당대를 풍미했으며, 과연 우리 동방에서 가장 뛰어난 문인으로 숭앙받을 만하였다. 지금까지 사랑을 받고 있는 시만 해도 그 얼마인가?
산에 사는 스님이 달빛을 탐내어
병 속에 물과 달을 함께 길었네.
절 모퉁이 돌아와 마땅히 깨달았으리.
병을 기울이니 달도 따라 비게 되는 것을.
- 우물 속에 달을 노래함
모란꽃 이슬 머금어 진주 같은데
신부가 모란을 꺽어 차가를 지나다
빙긋이 웃으면서 신랑에게 묻기를
“꽃이 예쁜가요? 제가 예쁜가요?”
신랑이 일부러 장난치느라
“꽃이 당신보다 더 예쁘구려.”
신부를 꽃이 예쁘다는 데 뾰로통해서
꽃가지를 밟아 짓뭉개고 말하기를
“꽃이 저보다 예쁘시거든
오늘밤은 꽃하고 주무시구려.“
- 절화행
세상의 부귀영화를 뜬구름으로 본다는 뜻에서 백운거사 라는 호를 좋아했으며 시, 술, 거문고를 지나칠 정도로 즐겨 스스로 ‘삼혹호 선생’ 이라 칭할 정도로 그는 풍류객이었다.
“거문고는 악기의 으뜸이다. 때문에 군자들은 항상 몸에서 떼지 않고 사용한다. 나는 참다운 군자는 아니지만 줄 없는 거문고 하나를 가지고 즐겨왔다. 어떤 손님은 이것을 보고 웃고는 줄을 제대로 갖추어서 주므로 나는 사양하지 않고 기꺼이 받았다. 그리고는 모여 놀 적마다 마음대로 타며 놀았다.
옛날 중국의 도연명에게 줄 없는 거문고가 있었다. 타는 것이 아니라 간직하기만 하면서 그의 높은 뜻만 밝힐 뿐이었다. 나는 이와 달리 그 소리를 듣고자 하니 도잠의 고상한 뜻과는 너무 거리가 멀다. 그러나 내 스스로 즐기는 것인데 꼭 옛사람을 본받아야 할 까닭이 있겠는가? 나는 한 잔 마시고 한 곡조 타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는다. 이 역시 세월을 보내는 한 가지 즐거움이 될 수 있다.“
- 소금의 등에 새기는 데 대한 지
이처럼 술과 거문고와 시 없이는 한 시도 못 사는 지경에 이르자 백운거사 또는 농서자 이규보는 마침내 아주 깜찍한 꾀를 내었다. 한여름 시원한 솔나무 그늘에 술을 펴놓고 거문고 곡조를 들으며 시상을 가다듬는 것을 낙으로 하던 이 양반은, 해가 중천을 돌아 서천으로 갈 때마다 자리를 옮기는 것이 여간 번거롭고 또 주흥과 시상을 가로막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아예 움직이는 정자를 생각한 것이다.
“여름에 손님과 함께 동산에 자리를 깔고 누워서 자기도 하고, 앉아서 술잔을 들기도 하고, 바둑도 두고, 거문고도 타면 뜻에 맞는 대로 하다가 날이 저물면 파한다. 이것이 한가한 자의 즐거움이다. 그러나 햇볕을 피하여 그늘로 옮기면서 여러 번 그 자리를 바꾸는 까닭에 거문고, 책, 베개, 대자리, 술병, 바둑판이 사람을 다라 이리저리 옮겨지므로 자칫 잘못하면 떨어뜨리는 수가 있다. 그래서 비로소 설계하여 사륜정을 세우려고 하는데, 아이 종으로 하여금 그것을 밀어 그늘진 곳으로 옮기게 하면, 사람과 바둑판, 술병, 베개, 대자리가 모두 한 정자를 따라서 동서로 이동하게 되리니, 어찌 이리저리 옮기는 것을 꺼려하랴?”
그것이 사륜정, 곧 네 바퀴가 있는 정자다. 움직이는 정자, 요즈음으로 애기하면 이동식 정자다. 평생 술과 시, 거문고만을 좋아했던 이규보만한 풍류객이 아니고서는 상상도 못 할 기상천외의 착상이다. 바퀴를 네 개 단 정자를 짓는 것이다.
정자는 사방이 6척이고 들보가 둘, 기능이 넷이며, 대나무로 서까래를 하고 대자리를 그 위에 덮는다. 이것은 되도록 정자의 무게를 줄여서, 이동할 때 보다 쉽게 하기 위함이다. 동서가 각각 난간 하나 씩이요, 남북이 또한 같다.
“정자는 사방이 6척이니 그 칸수를 총계하면 모두가 36척이다. 세로 가로를 계산하면 모두가 6척인데, 그 평방이 바둑판 같은 것이 정자이다. 판국 안에 또 둘레로 돌아가며 자로 헤아여 보면 한 자의 평방이 바둑판의 정간과 같다. 정간이란 선 사이의 정 자처럼 네모 반듯한 것이다. 정간이 각각 1평방척이니, 36정간은 곧 36평 방척이다.”
왜 이런 정도의 크기가 필요했는가? 백운거사 이규보는 이 정자안에 적어도 여섯 명이 앉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이 동쪽에 앉되 4편방 정간을 차지하고 앉는다. 세로 가로가 모두 2척인데 두 사람의 분을 총계하면 모두가 8평방척이다. 나머지 4편방 정간을 쪼개어 둘로 만들면 각각 세로가 2평방척이다. 2평방척에다가는 거문고 하나를 놓는다. 짧은 것이 흠이라면 남쪽 난간에 걸쳐서 반쯤 세워 둔다. 거문고를 탈 적에는 무릎에 놓는 것이 반은 된다. 2평방척에다가는 술동이, 술병, 소반그릇 등을 놓아 두는데, 동쪽이 모두 12평방척이다. 두 사람이 서쪽에 앉는 데도 또한 이와 같이 하고, 나머지 4평방 정간은 비워 두어서 잠깐씩 왕래 하는 자는 반드시 이 길로 다니게 한다. 서쪽도 모두 12평방척이다. 한 사람은 북쪽 4평방 정간에 앉고 주인은 남쪽에 앉는데 또한 이와 같다. 중간 4평방 정간에는 바둑판 하나를 놓으니, 남쪽과 북쪽 중간이 모두 12평방척이다.”
백운거사 자신도 거문고를 잘 탔지만 이런 때는 더 잘 하는 전문가를 초빙한다. 거문고 주자에도 목청이 좋은 가인 곧 가객과 시를 잘 짓는 스님 곧 시승 각 한 사람이 흥을 돋운다. 거기다 친구가 되든 누가 되든 바둑 두는 사람 두 사람이 앉을 수 있어야 하고, 또한 주인이 앉아야 하니 6명이 앉을 수 있는 정자가 되는 것이다. 거기서는 누구나 자연 속에 몰입해 신선이 된다. 바둑을 두다 보면 시간이 가는 것을 잊어버린다. 자연이 주는 멋과 흥을 즐기면서 술잔이 적당히 돌아간다. 물론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서로 마음이 맞아야 한다. 적어도 문학과 음악과 철학이 서로 통해야 한다. 이규보 자신은 고려 때의 귀족이지만 그 자리는 아래 위가 없다. 서로 한 마음이 되어 자연 속에서 즐기는 것이다.
“사람을 한정시켜 앉게 한 것은 동지 임을 보인 것이다. 이 사륜정을 끌 때 아이 종이 힘든 기색이 있으면 주인이 스스로 내려가서 어깨를 걷어붙이고 끈다. 주인이 지치면 손님이 교대로 내려가 조력한다. 술에 취한 뒤에는 가고 싶은 대고 끌고 가지, 꼭 그늘로만 갈 필요가 없다. 이와 같이 하여 저물 때까지 놀다가 저물면 파한다.”
농경을 주로 했던 우리나라는 자연을 사랑함에 상류층과 서민층에 차이가 없었다. 이는 우리나라의 서민 문화와 상류 문화가 모두 그 바탕을 자연에 두고 있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맑고 깨끗하여 부정이 없는 자연을 닮으려는 심성이야말로 한국인들의 순수한 기질이라 하겠다. 그래서 정자는 당연히 산 좋고 물 좋은 경관을 배경으로 한다. 그러한 곳에서 움직일 수 있는 정자는 시간이나 방법에 구애받음이 없다. 굴러가다가도 멈추면 정자가 된다고 해서 “행할 때가 되면 행하고 그칠 때가 되면 그쳐라”는 뜻 그대로 내키는 대로 가다가 멈추면 되는 것이다. 고금에도 동서 어디에도 없었던 기발한 정자,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놀이시설만은 아니었다. 그 곳에 바로 우리의 철학이 있었다. 자연에 나와 놀더라도 지나치지 않고 풍류는 격이 있어야 하며, 그러면서도 나라를 생각한다.
“밑은 바퀴로 하고 위는 정자로 한 것은 바퀴로 굴러가게 하고 정자로 멈추게 한 것이니, 행할 때가 되면 행하고 그칠 때가 되면 그친다는 뜻이다. 바퀴를 넷으로 한 것은 사시를 상징한 것이고, 정자를 6척으로 한 것은 육기를 상징한 것이며, 두 들보와 네 기둥을 한 것은 임금을 보좌하여 정사를 도와 사방에 기둥이 된다는 뜻이다.”
자연과 환경의 조화를 꿈꾼 환경주의자
그러나 이 기발한 사륜정은 설계는 다 했지만 실행에 옮겨지지는 못했다. 고려 신종2년인 1199년에 이미 설계를 다 했지만 마침 전주로 부임하라는 명이 있어서 이룩하지 못하고, 그 2년 뒤인 신유년, 1201년 4월에 전주로부터 서울로 와서 한가하게 지내던 중 바야흐로 지으려고 하였으나 또 어머니의 병환으로 성취하지 못하였다. 결국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인 다음해 5월에야 다시 이 정자에 생각이 미쳐, 그냥 두다가는 자신의 설계마저도 잊혀질까 우려해 이를 <사륜정기>라는 글로 자세히 남긴 것이다.
이규보의 도도한 문장에 비하면 <사륜정기>라는 이 글은 그리 길지는 않지만 고려 시대 문인들의 멋의 세계를 우리에게 그대로 전해준다. 당시는 무인 집권기라서 문인들이 무인의 그늘에서 세를 펴지 못하던 때였다. 그러나 자연의 무더위를 피해 가며 음악과 술과 시를 즐겼으며, 느긋하게 자연에 순응하면서도 군자로서의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아쉽게도 설계에 그치긴 했지만 삼복더위가 오면 한적한 자연을 찾아다니며 그 속에 숨어들어 여유를 즐기며 보냈을 이규보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가 지은 <백운소설>에서는 이규보는 “당나라 백낙천과는 음주와 광음영병이 천생 같아 낙천을 스승으로 삼는다” 라고 말했다. 고려의 문인들에게는 자연과 사시사철이 다 함께 하는 벗이었던 것이다. 그 속에서 즐긴 풍류는 메마른 현대인과 달리 마치 버드나무의 늘어진 가지 수만큼이나 천 가지 만 가지이다.
“여름을 바라보자면 더위에 짜증이 나고, 가을은 너무나도 쓸쓸하며, 겨울은 착착 막히어 봄에 비하면 지나치게 일방적이지만, 오직 봄만은 때에 따라 곳에 따라 화창해지기도 하고 슬퍼지기도 하며, 저절로 노래가 나오기도 하고 눈물이 나기도 하여, 사람마다 그 감정이 흐르니 감정이 천 가지 만 가지로 변한다. 취했을 때 바라보면 즐겁고, 깬 뒤에 바라보면 슬퍼지고, 궁했을 때 바라보면 왜 그리 구름과 안개가 많으며, 호화스러움에 바라보면 하늘도 맑아라.”
- 춘망부
그러나 자신들의 호의호식만을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사륜정에 두 들보와 네 기둥을 세운 것이 임금을 보좌하여 정사를 도와 사방에 기둥이 된다는 뜻이라고 한 설명에서 보듯 그 곳에는 무인들의 정권싸움에 피폐해진 민중들의 삶에 대한 연민과 이를 해결해야 한다는 강한 의지도 담겨 있다.
흉년 들어 거의 죽게 된 백성들은
앙상하게 뼈와 가죽만 남았네.
몸 속에 남은 살이 얼마나 된다고
남김없이 모조리 긁어내려 하는가.
그대는 보는가 하수를 마시는 두더지도
그 배를 채우는 데 지나지 않음을.
묻노니 너는 얼마나 입이 많아서
백설들의 살을 겁탈해 먹는 것이냐
- 개군수수인이장피죄이수
고려때는 사대부 문화의 형성기라고 할 것이다. 최충 등 학자들을 통해 퍼져 나가는 유학이 사대부들의 문화로 정착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에게서 보는 것은 특히 한시에 대한 천착이다. 2천 수가 넘는 한시를 남긴 이규보는 익재 이제현과 함께 고려조 시문학의 쌍벽을 이루면서도 그의 호방한 시세계는,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동방에서 제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말과 뜻이 서로 어우러져 씹을수록 맛이 나는 시를 추구했다.
시 지음에 특히 어려운 것은
말과 뜻이 아울러 아름다움을 얻는 것.
머금어 쌓인 뜻이 진실로 깊어야
씹을수록 그 맛이 더욱 순수하나니.
- 시론 중에서
시인 이규보는 자연에 관심이 많았고, 그의 자연은 세속과 대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세속과 조화할 수 있는 자연이었다. 특히 그의 시에는 물이 자주 등장한다.
나는 물 흐르는 것을 볼 때마다
세월 빠른 것을 슬퍼했다네.
맑은 샘물도 나의 뜻을 알고서
돌에 걸려 짐짓 더디더라오.
- 제석천
이규보는 자연에서 물의 역할을 알고 자연과 환경의 조화를 꿈꾼 환경주의자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가 정자를 좋아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정자는, 신체의 휴식이나 잔치, 놀이를 위한 기능보다는 자연인으로서 자연과 삶을 같이 하려는 기능이 더 강조된 구조물이라 할 수 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맑은 물이 흐르는 계속 옆에, 마을 어귀 연못 옆에, 산천 경개나 들이 잘 보이는 곳에 으레 정자가 있다. 그런 정자 안에 앉아 있으면, 비록 인공의 구조물이긴 해도 이미 그 인공을 초월한 대자연 속에 동화되고 만다. 때로는 물과 함께 억겁의 세월 속에서 함께 흐르기도 하고, 때로는 광활한 허공에서 거침없이 시공을 초월하기도 한다. 정자의 조경은 숲이나 주변 환경 요소인 냇물이나 강 등을 자연 상태 그대로 받아들여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서양의 조경이 인위적이고 기하학적인 것과 달리, 한국의 조경은 본래의 자연 형태를 그대로 주변의 조경 요소로 이용한다. 한국의 정자는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며, 자연과 조화를 이룬다. 정자는 우리 민족의 심성을 반영하는 휴식 공간이며, 문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규보는 이런 세계를 알고 ‘사륜정’ 이라는 창의적인 발명품을 통해 우리 곁으로 가까이 데려오려 한 것이다.
이규보는 그런 자연친화적인 정자 문화를 현대에 되살릴 수 있다는 점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그야말로 “천지가 사귀어 만물이 통하고 상하가 사귀어 그 뜻이 동일한” 자연과 환경, 사람과 사람의 합일된 경지, 그것이 우리가 갖고 있던 멋과 해학의 세계였다. 전통 문화 복원에 대한 목소리가 높은데, 그 비결은 이와 같은 옛 사람들의 멋과 해학을 이해하고 되살리는 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