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동식의 다섯 계절의 노래


 

이동식
1953년 생. 서울대학교 영어교육학과 졸업후 1977년 KBS에 입사하여 30여 년을 현장에서 보낸 언론인이다. 초대 북경특파원, 런던지국장, 과학부장, 국제부장, 보도제작국장, 문화담당....< 더보기 >

*제73회 - " 진정한 선비를 찾습니다 "

영광도서 0 1,016
우리 말에 ‘선비’ 라는 단어가 있다. 처음에는 학식은 있으나 벼슬을 하지 않던 사람을 이르던 말이었는데, 점차 ‘학식이 있고 행동과 예절이 바르며 의리와 원칙을 지키고 관직과 재물을 탐내지 않는 고결한 인품을 지닌 사람’ 이라는 좋은 뜻으로 진화되어 쓰이고 있다. 그러나 이 말만큼 논란을 일으키는 말도 많지 않으리라. 학식이 있으면서 의리와 원칙을 지킨다는 말은 자기가 배운 만큼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목숨을 걸고라도 밝혀야 한다는 것이고, 그러면서도 관직과 재물을 탐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역사상 그런 인물이 누가 있을까? 조선 시대에는 그런 인물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현대로 오면서 점점 보기 드물어진 것은 아닐까?
그런데 조선 시대에도 그런 참된 선비는 많지 않았던 모양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선조의 신망을 받았던 신흠 같은 이도 선비를 정의하면서 “몸에 재능을 지니고 나라에서 쓰기를 기다리는 자는 선비이다. 선비란 뜻을 고상하게 가지며, 배움을 돈독하게 하며, 예절을 밝히며, 의미를 지니며, 청렴을 긍지하며,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또한 세상에 흔하지 않다” 참선비가 드물다고 지적하고 있다. 나아가서는 ‘가짜 선비’ 가 판을 치고 있다고 한탄한다.

“세상에서 선비라고 불리는 자들을 보자. 과연 어떠한가? 그들이 받드는 것이 권세이고, 힘쓰는 것은 이익과 명예이고, 훤히 밝은 것은 당대의 유행이고, 굳게 지키는 바는 도덕이 어떠느니 하는 이야기뿐이고,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겉치레이고, 잘 하는 것은 경쟁하는 것이다.
선비란 자들은 이 여섯 가지를 가지고 날마다 권력 있는 사람의 집에 몰려가 집주인의 취향이 어떤지 엿보고 집주인의 뜻이 어떤지 알아내고, 권력 있는 사람이 한 번 눈여겨보아 주면 으쓱해져서 우쭐대고, 한 번 말이라고 붙여 주면 히히덕거리며 서로들 축하한다.
이런 작가를 선비라고 한다면 이 땅 위에 가로로 눈이 붙어 있고 세로로 귀가 달린 자들 모두가 선비일 것이고, 이런 사람들을 선비라고 하지 않는 다면 나라 안에 선비는 한 사람도없을 것이다.“
- 상촌선생집 제40권 내집 제2 잡저 2 사습편

신흠은 태어나면서부터 모습이 남달랐는데, 이마가 넓고 귀가 컸으며 눈은 샛별 같았고 오른 뺨에는 탄환 모양의 사마귀가 있었다. 어린 시절에 노는 것도 범상치 않았으며 몸가짐이 단정하고 무게가 있었다고 한다. 나이 겨우 10여 세에 글 잘한다는 소문이 사방에 퍼졌다. <죽창한화>에 그에 관한 일화가 전해진다.

“이때 송군 미로가 꽤 소동파의 시에 밝고 또 짓기도 능하여 세상에서 동파를 배우고 싶어하는 이는 모두 그에게로 갔다. 그는 항상 학도들을 모아 놓고 시부를 시험하므로 나이 젊고 재주 있는 선비들은 앞다투어 그의 처소로 모여들었다. 그래서 마치 그 관경이 관학에서 재주를 겨뤄 볼 때와 같았다.
신흠도 역시 나이 14세에 그곳에 참여했는데, 용모과 옥과 같고 행동이 단아하니, 사람들이 모두 공경해서 나이 어린 총각으로 대접하지 않았다. 바야흐로 글을 짓게 되어 분명하게 글의 종류를 구별하여 시를 읊고 부를 짓느라 자리가 벌집처럼 어수선했다. 그러나 신흠은 조용히 한 구석에 앉아 한 권 책도 갖지 않고 또 남이 짓는 것도 보지 않았다. 날이 이미 한낮이 되자 혼자서 종이를 펴더니 부를 먼저 다 쓰고 나서 계속하여 시편을 썼다. 도도한 걸작을 잠시도 붓을 멈추지 않고 두 편을 모두 완성했는데, 문장의 기운이 세련되고도 기운차서 만좌한 많은 선비들이 모두 와 보고 혀를 차면서 칭찬하고 탄식하기를, ‘이는 반드시 참 신선이 세상에 나려온 것이지, 어찌 인간에 이런 기이한 재주가 있겠느냐?“ 하고, 모두 붓을 던지고 손을 거두면서 맥이 없는 기색으로 아무도 감히 그와 겨뤄보려고 하지 않았다. 송군은 이 글을 읽어 내려가다가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치면서, ’문장의 수단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내가 감히 손을 댈 수가 없다. 이는 반드시 천재이다‘ 하고는, 마침내 그의 글을 장원으로 뽑았다. 그리고 당사자를 불러 보려고 했으나 그는 이지 집으로 돌아가고 없으니, 대개 남의 칭찬 받기가 싫었던 것이다.”

문장을 잘해서 명나라고 가는 외교문서를 도맡다시피 했던 신흠은 선조의 신임을 받았고 광해군을 지나 인조 때에 영의정까지 오른 인물이지만, 선조 때에 시작된 당쟁이 격화되면서 그 속에서 지조를 잃고 시속에 영합하는 무수한 인물들을 본 것이 그에게 이런 생각을 갖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신흠은, 그 자신은 선비라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선비같이 보지 않는 ‘가짜 선비’를 죽은 시체에서 쌀을 꺼내는 도둑과 비교하며 진실로 그 폐해가 엄중하다고 고발한다.

“망치로 시체의 턱뼈를 깨어서 입속에 든 구슬과 쌀을 훔쳐내는 도굴꾼은, 썩은 시신에 나쁜 짓을 한 것이지만, 죽은 자 한 사람에게만 피해를 끼친 데 불과하다. 그러나 갓끈을 드리우고 옷을 번지르르 차려 입고서 손뼉치며 세태를 쫓아가는 자들은, 인륜에 해를 끼친 것이므로 온 세상에 피해를 남긴다. 따라서 귄세를 좋아하는 추태는 도굴보다도 더 극악무도한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권세를 좇는 자를 등용해서 학사를 삼기도 하고 간관을 삼기도 하며 공경을 삼는다면, 이들은 현달할수록 욕심은 불어나고 벼슬이 높아질수록 기세가 등등해져 나라를 갈수록 위축시키고, 임금을 갈수록 고립되게 할 것이다.“

어쨌든 신흠은 1581년 16세에 향시에 급제하고 20세에 생원시와 진사시, 21세에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다. 학문에 전념한 결과 일찍부터 문명을 떨쳤고 관직에 나가서는 준엄한 자세로 자기 시대의 수많은 과제를 잘 수행함으로써 관료로서 또는 정치가로서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신흠이 살았던 시대는 혼란과 격동의 시기였다.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이 일어났고 계축옥사와 인조반정, 정여립의 난과 이괄의 난 등 크고 작은 정치적 사건들이 줄을 이었다. 그 사건들의 고비마다 신흠은 정치권의 중심에 있었고 직접 또는 간접으로 그 사건들과 관련을 지니게도 되었다. 그 결과 그는 삭탈관직, 방축, 유배의 생활에 동요되지 않고 풍요한 마음을 경영하며 수많은 글을 남겼는데, 한시 2천36수가 전하고 있고 시조도 30편이 전한다.

오늘날의 정치 상황도 신흠이 살았던 그 때와 비견될 수 있을까?
임진왜란 이후의 어수선한 상황, 광해군의 폭정과 인조반정이란 쿠데타, 그리고 다시 전란이 있어났던 그 시대는 일제의 지배와 해방, 다시 6.25와 그 뒤를 이은 정치적 격변기가 이어지고 있는 우리의 현대와 비교해 볼 때, 짧은 시대에 큰 일이 많았다는 점에서 비슷한 점이 많은 것 같다. 그런 혼란한 시대를 살아온 중심인물인 신흠으로서는 권력에 영합하며 자신의 영달만을 추구하는 수많은 ‘가짜 선비’, 곧 벼슬아치들의 행태를 참고 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신흠이 다시 이 시대를 산다면 역시 ‘가짜 선비론’을 펴며 이 시대의 수많은 사이비 선비들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해방 전과 그 이후의 지식인들의 수많은 변절과 변신, 명성을 얻기 위한 학자들의 잇따른 논문 표절 의혹, 정치가들의 그 많은 줄서기와 줄바꾸기, 정치 상황에 따라 자신이 표방했던 이념과 정책을 하루아침에 바꾸는 행태, 그리고 자신이 속했던 집단에 갑자기 등을 돌리는 행동은, 과거 당파싸움에서 자신의 당파를 고수하려다 죽기까지 한 조선 시대의 ‘가짜 선비’ 들보다도 더 한심하다고 할 수 있다.

“아는 것은 많아도 실천할 줄 모르는 지식, 권위는 없고 권위주의만 팽배한 사회. 자기는 안 하면서 남만 부추기는 이기주의, 줏대 없이 풍문 다라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무정견과 몰안목. 이 속에서 선비란 말이 숨쉴 곳은 없다”고 한양대 정민 교수는 한 글에서 지적한다. 해방 반 세기를 넘었고, 민주화가 많이 진척된 현대 우리 사회에 진정한 선비는 없는가? 과연 현대는 선비가 불가능한 시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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