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동식의 다섯 계절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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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 |
*제74회 - " 공부의 대가 이덕무 "
영광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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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3
2016.12.01 03:44
인기 작가인 장정일 씨가 <공부>라는 책을 펴냈다고 해서 화제인 모양이다. 김수영 문학상 최연소 수상자인 <천재 시인>을 비롯해서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 <내게 거짓말을 해봐> 등의 소설로 문학적,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킨 소설가인 그가 “문학 책만 읽었을뿐 다른 것은 모르는 채로 청춘을 보냈다”고 털어놓으며, 2002년부터 ‘문학 말고 다른 모든’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한국 사회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아져 관심 가는 문제를 놓고 수십 권, 수백 권의 책을 찾아 읽었는데, 그 결과 나온 책이 <공부>라는 것이다.
장정일씨는 평소에도 다독가로 소문났다는데, 다독가 말이 나오면 조선 시대 최대의 다독가인 이덕무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나는 뜻을 굳세게 먹고 고인의 글을 읽기로 결심하였으나 그대로 하지 못하고 무더운 여름, 낮고 비좁은 집에 앉아 과거 시험 보는 문장이나 공부하고 있으니 어찌 내 마음이 흡족하겠는가?”
우리 나리로 24살 때인 1764년 이덕무는 이런 한탄을 하다가 드디어 9월부터 제대로 책을 읽기로 작심한다. 이 때에 읽기 시작한 것이 사서삼경의 하나인 <중용>이다.
“<중용>에 이르기를, ‘군자는 화하여도 흐르지 아나하나니 굳세도다. 중립하고 편벽되지 아나하나니 굳세도다. 나라에 도가 있어 벼슬하게 되면 빈천할 때의 지조를 변하지 아니하나니 굳세도다. 나라에 도가 없으면 죽음에 이르더라도 뜻을 변하지 아니하니 굳세도다’ 하였다.”
이렇게 중용 한 구절의 뜻을 새기다가 광해군 때에 원로대신인 백사 이항복이 광해군에 맞서 인목대비를 폐할 수 없다고 주장하다가 북청으로 귀양가서 죽은 사실을 상기하고는 ‘굳세도다’라는 말을 외며 그의 높은 뜻을 기린다.
그러나 독서를 하기에는 그의 환경이 너무나 어려웠다. 그의 집은 ‘천장을 쳐다보면 밝은 별이 내려 비치고, 벽을 돌아보면 얼음이 빙둘러 있으며 연기 그을음이 꽉 차서 갓이나 의복이 검어지는’ 상황이었다. 가족 상황도 그리 유리한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폐기가 고르지 못하여 계속 객담을 쏟고 기침을 하는 바람에 애가 타서 차마 잠깐도 곁을 떠날 수 없고, 아버지가 남쪽 먼 바닷가로 나가 있으니 상사를 조문하고 혼례를 축하하며 왕복 문안의 서신을 쓰는 일 또한 이덕무가 혼자서 맡아야 했다. 이미 증조부, 고조부 세대로부터 가세가 넉넉하지 못하여 마음 놓고 책을 살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그렇지만 그의 독서열은 결코 식지 않는다. 그 해결책은 책을 사지는 못하지만 빌려서 베끼는 것이었다.
“나는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 대해서는 대체로 어두워 아무것도 모르지만 오직 시서를 모으는 것만은 마음을 두고 있으므로 남의 서책을 빌려 일찍이 좌우에 즐비하게 정돈하여 수백 권을 쌓아 놓았다. 그리고 혹시 서책을 빌리지 못하였을 때는 비록 장부나 일력 따위라도 한결같이 열람하기를 마지않았다.
-甲申除夕記
그가 정신을 차려서 꼼꼼히 읽은 주요한 책은 다음과 같다. 주자의 <성리대전>, 이율곡의 <성학집요>, <맹자>, 육우의 <남당서>, <입촉기>, 백거이의 <장경집>, <노자익>, <장자익>, 왕세정의 <우린집>, 이몽양의 <헌길집>, <전국책> ...
그는 이런 책을 읽으면서 시간이 나는 대로 베껴 적었다. 퇴계의 <성학십도>, 남용익의 <기아 시인명>, 노수신의 <숙흥야매잠소>, 허목의 <미수경설>, <청사열전>, 이반룡의 <잡체시> 수백 편을 손수 베껴 적었다. 특히 중국의 글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글도 열심히 읽었는데, 조선 선조 때 허봉이 지은 <해동야언>, 허목의 <기언>, 월사 이정구의 <월사집>, 송상기의 <옥오재집> 등 닥치는 대로 구해서 읽었다. 그렇게 많은 책을 구해 읽으면서 그의 지식과 안목은 점점 넓고 높아졌다.
“<명사>를 읽고 인종 소황제의 재위기간이 길지 못하였음을 탄식하고, 인하여 환관의 극성과 당고의 참혹한 일이 쌓여 점차로 진전해서 갑신년 3월 수황정의 일을 일으킨 것을 슬퍼하였다. 초목, 금충, 토석 등의 이름을 알아야 하므로 나는 <본초>를 보았다. 나는 지봉의 글에서 괴이한 일들을 알고서 천하의 사물은 없는 것이 없음을 탄식하였다. 옛 사람의 풍류가 찬란하게 빛나는 것을 나는 좋아하므로 구양 문충공, 소장공, 왕개의 척독을 읽었다.
<쇄아> 1권을 초하여 망령되이 약간 들은 것으로써 고금 문장의 득실을 논하였으며 각피편 조항을 약간 초고하여 풍속 민요에 관한 담론과 명물 전장 등 참고하여야 할 것들을 기록하였으며, 국조의 훌륭한 일 36조를 초고하고 각체시 50여 편을 저작하였다. 나는 또 일찍이 <노릉지>, <육신전>을 읽고 크게 탄식하였다. 또 일찍이 정동명의 선가행장편을 사랑하여 박자를 치면서 읊조렸다.“
그러나 이 많은 책을 읽고 공부하는 데 몇 년이 걸린 것이 아니었다. 음력 9월9일부터 설날까지 넉 달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에 한 것이었다.
“이것은 모두 중양인 9월9일부터 제석까지 모두 1백여 일 동안에 내가 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이 밖에 있었던 사우들과 담론한 것 및 이것저것 자질구레한 서적들을 관람한 것은 모두 여기에 넣지 않았다. 따라서 9월9일 이전의 일은 번거롭고 겨를이 없으므로 말하지 않는다. 나는 매양 고금을 통하여 인가의 자제들이 밀 먹인 종이로 바른 창문에 문채 있는 좋은 나물에 높직한 다리를 붙인 책상을 설치하고, 황색의 베로 장정한 질책에 상아 표찰을 꽂아 많이 진열하여 놓고, 자신은 머리에 복건을 쓰고 흰 담요 위에 비스듬히 반쯤 누워 잔기침이나 하고 쓸데없는 말을 지껄일 뿐 해가 다하도록 책 한 자도 읽지 않는 것을 한스럽게 여긴다. 그러니 이것이 어찌 앞서 말한 바 그 기질이나 장소나 시간이나 자력이나 서적 등이 모두 없는 사람들이겠는가?”
-甲申除夕記
진실로 그에게는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으며 편안히 있어 가르침이 없으면 바로 금수에 가까운 것”이고, “하루를 독서하지 아니하면 털구멍이 모두 막힌다”. 그는 가난한 집안 형편을 이기기 위해 진실로 “흐르는 물은 썩지 아니하고, 문의 지도리는 좀먹지 않는다”는 말을 실천했다. 그로부터 15년 후인 39살 때 그는 주위 사람과 벗의 추천에 의해 규장각의 초대 검서관으로 발탁된다. 공부하는 국왕 정조의 눈에 든 것이었다. 검서관의 하는 일은 규장각의 문서 정리와 자료 조사, 그리고 책을 교정하는 작업이었다. 그런 공부를 통해 쌓은 학식과 신견으로 그는 정조 시대의 르네상스를 위한 밑거름이 되었다. 정조 시대의 대표적인 편찬 사업은 그의 머리와 붓끝에서 이루어졌다. <국조보감>, <갱장록>, <문원보불>, <대전통편>, <송사전>, <규장전운>과 같은 책들은 정조와 그의 합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이덕무는 호를 청장이라고 했다. 청장은 해오라기의 일종으로서 ‘자신의 앞에 닥치는 먹이만을 먹고 사는 청렴한 새’를 뜻한다. 그 당시 지식인들의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이덕무의 학품은 아들 광규를 거쳐, 손자인 이규경에게 이어졌다. 19세기 백과전서적인 학풍을 대표하는 이규경의 저술 <오주연문장전산고>는 할아버지로부터 이어지는 가학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독서록을 기록으로 남겨 놓았다. 이덕무의 문집인 <청장관전서>에 남아 있는 <갑신제석기>가 그것이다. 그 기록은 이렇게 끝난다.
“대저 약간 시속의 문자를 해득하는 자는 스스로 한정선을 그어 더 넓히지 아니하며, 일자무식도 아무렇지 않은 듯 편안히 여기고 스스로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마음가짐이 모두 편협하고 천박하여, 근면 노고하여 자립하는 자를 까닭 없이 조소하고 꾸짖는 것은 똑같다. 이른바 근면 노고하여 자립하는 자도 이미 조소하여 꾸짖음을 당하면 반드시 그들과 비교하게 되고 혹자는 자랑하여 교만이 생기기도 한다. 교만한 마음이 비로소 생기면 재앙이 뒤따라 이른다. 그러므로 군자는 소경이나 귀머거리처럼 더욱 독서하고 더욱 겸손한다. 이에 반하여 혹시 이런 것을 두려워하여 중도에서 폐한다면 이는 약한 자이며 진정 수치스러운 일이다. 갑신년 제야에 붓 가는대로 기록한다.”
엣날지식인은 ‘선비’라고 불리었다. 예전에는 “천, 지, 인을 통달한 것을 유라 한다.”하였으니, 한 물건이라도 알지 못하며, 한 일이라도 능하지 못하면 수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보다 완벽한 지식을 위해 스스로와 피나는 싸움을 벌였다. 공부라는 것은 이처럼 끝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예전 이덕무가 공부할 때의 그 어려운 환경을 생각하면 오늘날 21세기를 사는 대한민국 국민 누구라도 환경이 어려워 공부를 못하겠다는 말을 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런 공부도 없이 고위관직에만 목을 매고 있지는 않는가?
장정일씨는 평소에도 다독가로 소문났다는데, 다독가 말이 나오면 조선 시대 최대의 다독가인 이덕무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나는 뜻을 굳세게 먹고 고인의 글을 읽기로 결심하였으나 그대로 하지 못하고 무더운 여름, 낮고 비좁은 집에 앉아 과거 시험 보는 문장이나 공부하고 있으니 어찌 내 마음이 흡족하겠는가?”
우리 나리로 24살 때인 1764년 이덕무는 이런 한탄을 하다가 드디어 9월부터 제대로 책을 읽기로 작심한다. 이 때에 읽기 시작한 것이 사서삼경의 하나인 <중용>이다.
“<중용>에 이르기를, ‘군자는 화하여도 흐르지 아나하나니 굳세도다. 중립하고 편벽되지 아나하나니 굳세도다. 나라에 도가 있어 벼슬하게 되면 빈천할 때의 지조를 변하지 아니하나니 굳세도다. 나라에 도가 없으면 죽음에 이르더라도 뜻을 변하지 아니하니 굳세도다’ 하였다.”
이렇게 중용 한 구절의 뜻을 새기다가 광해군 때에 원로대신인 백사 이항복이 광해군에 맞서 인목대비를 폐할 수 없다고 주장하다가 북청으로 귀양가서 죽은 사실을 상기하고는 ‘굳세도다’라는 말을 외며 그의 높은 뜻을 기린다.
그러나 독서를 하기에는 그의 환경이 너무나 어려웠다. 그의 집은 ‘천장을 쳐다보면 밝은 별이 내려 비치고, 벽을 돌아보면 얼음이 빙둘러 있으며 연기 그을음이 꽉 차서 갓이나 의복이 검어지는’ 상황이었다. 가족 상황도 그리 유리한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폐기가 고르지 못하여 계속 객담을 쏟고 기침을 하는 바람에 애가 타서 차마 잠깐도 곁을 떠날 수 없고, 아버지가 남쪽 먼 바닷가로 나가 있으니 상사를 조문하고 혼례를 축하하며 왕복 문안의 서신을 쓰는 일 또한 이덕무가 혼자서 맡아야 했다. 이미 증조부, 고조부 세대로부터 가세가 넉넉하지 못하여 마음 놓고 책을 살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그렇지만 그의 독서열은 결코 식지 않는다. 그 해결책은 책을 사지는 못하지만 빌려서 베끼는 것이었다.
“나는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 대해서는 대체로 어두워 아무것도 모르지만 오직 시서를 모으는 것만은 마음을 두고 있으므로 남의 서책을 빌려 일찍이 좌우에 즐비하게 정돈하여 수백 권을 쌓아 놓았다. 그리고 혹시 서책을 빌리지 못하였을 때는 비록 장부나 일력 따위라도 한결같이 열람하기를 마지않았다.
-甲申除夕記
그가 정신을 차려서 꼼꼼히 읽은 주요한 책은 다음과 같다. 주자의 <성리대전>, 이율곡의 <성학집요>, <맹자>, 육우의 <남당서>, <입촉기>, 백거이의 <장경집>, <노자익>, <장자익>, 왕세정의 <우린집>, 이몽양의 <헌길집>, <전국책> ...
그는 이런 책을 읽으면서 시간이 나는 대로 베껴 적었다. 퇴계의 <성학십도>, 남용익의 <기아 시인명>, 노수신의 <숙흥야매잠소>, 허목의 <미수경설>, <청사열전>, 이반룡의 <잡체시> 수백 편을 손수 베껴 적었다. 특히 중국의 글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글도 열심히 읽었는데, 조선 선조 때 허봉이 지은 <해동야언>, 허목의 <기언>, 월사 이정구의 <월사집>, 송상기의 <옥오재집> 등 닥치는 대로 구해서 읽었다. 그렇게 많은 책을 구해 읽으면서 그의 지식과 안목은 점점 넓고 높아졌다.
“<명사>를 읽고 인종 소황제의 재위기간이 길지 못하였음을 탄식하고, 인하여 환관의 극성과 당고의 참혹한 일이 쌓여 점차로 진전해서 갑신년 3월 수황정의 일을 일으킨 것을 슬퍼하였다. 초목, 금충, 토석 등의 이름을 알아야 하므로 나는 <본초>를 보았다. 나는 지봉의 글에서 괴이한 일들을 알고서 천하의 사물은 없는 것이 없음을 탄식하였다. 옛 사람의 풍류가 찬란하게 빛나는 것을 나는 좋아하므로 구양 문충공, 소장공, 왕개의 척독을 읽었다.
<쇄아> 1권을 초하여 망령되이 약간 들은 것으로써 고금 문장의 득실을 논하였으며 각피편 조항을 약간 초고하여 풍속 민요에 관한 담론과 명물 전장 등 참고하여야 할 것들을 기록하였으며, 국조의 훌륭한 일 36조를 초고하고 각체시 50여 편을 저작하였다. 나는 또 일찍이 <노릉지>, <육신전>을 읽고 크게 탄식하였다. 또 일찍이 정동명의 선가행장편을 사랑하여 박자를 치면서 읊조렸다.“
그러나 이 많은 책을 읽고 공부하는 데 몇 년이 걸린 것이 아니었다. 음력 9월9일부터 설날까지 넉 달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에 한 것이었다.
“이것은 모두 중양인 9월9일부터 제석까지 모두 1백여 일 동안에 내가 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이 밖에 있었던 사우들과 담론한 것 및 이것저것 자질구레한 서적들을 관람한 것은 모두 여기에 넣지 않았다. 따라서 9월9일 이전의 일은 번거롭고 겨를이 없으므로 말하지 않는다. 나는 매양 고금을 통하여 인가의 자제들이 밀 먹인 종이로 바른 창문에 문채 있는 좋은 나물에 높직한 다리를 붙인 책상을 설치하고, 황색의 베로 장정한 질책에 상아 표찰을 꽂아 많이 진열하여 놓고, 자신은 머리에 복건을 쓰고 흰 담요 위에 비스듬히 반쯤 누워 잔기침이나 하고 쓸데없는 말을 지껄일 뿐 해가 다하도록 책 한 자도 읽지 않는 것을 한스럽게 여긴다. 그러니 이것이 어찌 앞서 말한 바 그 기질이나 장소나 시간이나 자력이나 서적 등이 모두 없는 사람들이겠는가?”
-甲申除夕記
진실로 그에게는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으며 편안히 있어 가르침이 없으면 바로 금수에 가까운 것”이고, “하루를 독서하지 아니하면 털구멍이 모두 막힌다”. 그는 가난한 집안 형편을 이기기 위해 진실로 “흐르는 물은 썩지 아니하고, 문의 지도리는 좀먹지 않는다”는 말을 실천했다. 그로부터 15년 후인 39살 때 그는 주위 사람과 벗의 추천에 의해 규장각의 초대 검서관으로 발탁된다. 공부하는 국왕 정조의 눈에 든 것이었다. 검서관의 하는 일은 규장각의 문서 정리와 자료 조사, 그리고 책을 교정하는 작업이었다. 그런 공부를 통해 쌓은 학식과 신견으로 그는 정조 시대의 르네상스를 위한 밑거름이 되었다. 정조 시대의 대표적인 편찬 사업은 그의 머리와 붓끝에서 이루어졌다. <국조보감>, <갱장록>, <문원보불>, <대전통편>, <송사전>, <규장전운>과 같은 책들은 정조와 그의 합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이덕무는 호를 청장이라고 했다. 청장은 해오라기의 일종으로서 ‘자신의 앞에 닥치는 먹이만을 먹고 사는 청렴한 새’를 뜻한다. 그 당시 지식인들의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이덕무의 학품은 아들 광규를 거쳐, 손자인 이규경에게 이어졌다. 19세기 백과전서적인 학풍을 대표하는 이규경의 저술 <오주연문장전산고>는 할아버지로부터 이어지는 가학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독서록을 기록으로 남겨 놓았다. 이덕무의 문집인 <청장관전서>에 남아 있는 <갑신제석기>가 그것이다. 그 기록은 이렇게 끝난다.
“대저 약간 시속의 문자를 해득하는 자는 스스로 한정선을 그어 더 넓히지 아니하며, 일자무식도 아무렇지 않은 듯 편안히 여기고 스스로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마음가짐이 모두 편협하고 천박하여, 근면 노고하여 자립하는 자를 까닭 없이 조소하고 꾸짖는 것은 똑같다. 이른바 근면 노고하여 자립하는 자도 이미 조소하여 꾸짖음을 당하면 반드시 그들과 비교하게 되고 혹자는 자랑하여 교만이 생기기도 한다. 교만한 마음이 비로소 생기면 재앙이 뒤따라 이른다. 그러므로 군자는 소경이나 귀머거리처럼 더욱 독서하고 더욱 겸손한다. 이에 반하여 혹시 이런 것을 두려워하여 중도에서 폐한다면 이는 약한 자이며 진정 수치스러운 일이다. 갑신년 제야에 붓 가는대로 기록한다.”
엣날지식인은 ‘선비’라고 불리었다. 예전에는 “천, 지, 인을 통달한 것을 유라 한다.”하였으니, 한 물건이라도 알지 못하며, 한 일이라도 능하지 못하면 수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보다 완벽한 지식을 위해 스스로와 피나는 싸움을 벌였다. 공부라는 것은 이처럼 끝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예전 이덕무가 공부할 때의 그 어려운 환경을 생각하면 오늘날 21세기를 사는 대한민국 국민 누구라도 환경이 어려워 공부를 못하겠다는 말을 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런 공부도 없이 고위관직에만 목을 매고 있지는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