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동식의 다섯 계절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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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 |
*제75회 - " 흐르는 물처럼 우리도 "
영광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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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1 03:44
요즈음 우리 관광객들이 즐겨 찾아가는 중국 관광지 중에 소흥이란 곳이 있다. 오월동주라는 말로 유명한 그 옛날 춘추전국시대 월나라의 수도이자, 도시 곳곳에 운하가 있어 ‘물의 도시’로도 유명한 곳이다. 이곳에서 서남쪽으로 12킬로 남짓을 가면 난정이란 곳이 나온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서예가 왕희지가 살던 곳이다.
중국 동진의 영화 9년, 곧 서기 353년 음력 3월 3일 삼짇날 오전, 왕희지를 비롯해 손통, 사안, 지둔 등 당대의 명사 41명이 이 난정에 모인다. 이들이 굽이쳐 흐르는 물가에 늘어앉자 상류에서부터 술로 가득 채운 잔이 떠내려온다. 그 술잔이 자기 앞으로 오면 그들은 냉큼 술잔을 받아들고 시를 지어 발표해야 했다. 시를 짓지 못하면 벌주로 세 잔을 마셔야 했다. 이렇게해서 26명으로부터 37편의 시가 나왔다. 이 모임을 주관한 서예가 왕희지가 바로 이 시들을 적고 이런 상황을 묘사한 글을 지어 유려한 필체로 써 내려간 것이 유명한 <난정집서>이다.
이처럼 굽이굽이 물이 흐르는 시설을 만들어 물에 술을 띄우고 시를 읊고 노래 부르며 풍류놀이를 즐기던 전통 정원 시설을 ‘유상곡수’라고 한다. 왕희지가 자신의 집에 유상곡수를 설치해 놀던 때가 4세기 중반인데, 실제로는 춘추전국 시대의 한 나라인 정나라에도 이런 시설과 놀이가 있었다고 하니 그 연원은 훨씬 오래되었던 모양이다.
이런 유상곡수를 쉽게 이해하려면 경주의 포석정을 생각해보면 된다. 신라 시대 왕들의 놀이터로 알려져 있는 포석정이 바로 이렇게 굽이쳐 흐르는 물길을 돌로 만들고 그 물길에 잔을 띄워 주회를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 물길 형상이 마치 전복 같다고 해서 전복 포자를 써서 포석정이라고 하는데, 잘 알다시피 신라 멸망을 얼마 앞둔 서기 927년, 신라의 경애왕은 이곳에서 왕비, 신하들과 함께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놀이를 즐기다 바로 그때 경주에 쳐들어온 후백제 견훤의 군대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 유명한 포석정의 전설이다.
신라 천년의 역사가 종말을 고한 비극의 현장, 포석정이 단순히 술을 마시며 시를 짓는 신라 왕들의 놀이터였을까 하는 점에 의문이 제기되자, 신라 헌강왕 때 왕이 포석정에 갔는데 남산신이 임금 앞에 나타나 춤을 춘 것을 옆에 있던 신하들은 보지 못하고 왕만이 보았다는 기록을 근거로 포석정이 놀이터가 아니라 신이 나타나는 성스러운 장소였다는 주장이 제기돼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을 보면, 유상곡수는 단순히 술 마시고 노는 장소가 아니라 일종의 종교적인 의식도 행한 공간이기도 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즉, 구곡으로 흐르는 물가에 술잔을 띄우고 술 한 잔 먹고 시 한 수 읊으면서 자연과 우주에 대한 인간의 유한함을 느끼고 살아 있음에 대한 감정을 표현하던 청류의 한 방법으로, 당시 문인이나 현사들이 즐긴 놀이 중 가장 깨끗한 것이었고, 왕들에게는 정치의 도를 수양하는 한 방편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에는 이 유상곡수에 관한 기록이 많다. 신라말의 대학자 최치원은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의 태수로 재직하면서 칠보면 시산리 고운천변에 유상대를 조성하고 시를 지어 유유자적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 그 지명이 시를 짓는 산이라는 뜻의 시산리가 되었고, 최치원이 놀았다는 뜻에서 그의 호을 따 고운천이 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문종이 궁궐인 만월대의 후원 상춘정에서 곡수연을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고, 그 뒤 15대 숙종과 16대 예종, 18대 의종 때 곡수연을 베풀었다는 기록이 이어지고 있다. 또 유명한 시인 이규보는 무관인 기홍수의 초대를 받아 그의 정원인 퇴식재에서 곡수연에 참석했던 일을 ‘기상서퇴식재팔영’이란 시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기도 했다.
“날씨는 포근하고 햇볕은 따사로운데 산들바람 가볍게 불어봐 푸른 소나무에 몸을 기대고 두건을 젖혀 쓰고 흐르는 물에 둘러앉아 술잔을 띄우면서 난정의 봄 수계를 그리워하고...”
조선 시대로 넘어오면 고려 때처럼 활발하지는 않지만 숙종 때 창경궁 양화당 동쪽에서 곡수거를 만들고 곡수연을 베풀었으면, 정조 때는 비원의 옥류천에서 여러 신화들을 초청해 잔을 기울이고 시를 읊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민간으로는 충남 아산시에 있는 이도선 씨의 집에 곡수연을 할 수 있는 곡수거가 설치돼 있는데, 사랑채 동쪽의 돌담 밑으로 흘러든 물이 사랑채 앞을 지나 남쪽으로 흐르도록 해놓고 여기에 음양석과 경석을 심어 곡수거를 조성해놓았다.
그러나 그런 유상곡수의 전통은 최근 실종되었다. 경주 포석정의 유상곡수가 나라를 망하게 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김부식의 기술이 영향을 준 때문인지, 물이 굽이쳐 흐르게 하고 술을 마시면 놀았다는 것이 너무 퇴폐한 귀족 문화로 느껴졌기 때문인지 ‘곡상유수’는 우리 문화에서 실종돼 있었다.
그런데 사단법인 ‘우리 문화 가꾸기회’라는 곳에서 경기도 양평 양수리 한강변 세미원에 유상곡수를 재현해 놓아 화제가 되었다. 문화운동가인 이훈석 씨가 주도하는 ‘우리 문화 가꾸기회’는 가로 19미터, 세로 28미터의 야외를 잡아 창덕궁 비원의 옥류천과 흡사한 바위에서 물이 솟아오르게 하고 그 물이 S자 형으로 돌아 나가면서 태극을 이루도록 하고 그 흐르는 물을 따라 자리를 만들어 사람이 앉아 술잔을 받고 시를 짓도록 했다. 그런 연후에 2005년 11월 22일 현사들을 모아 유상곡수연을 재현하는 행사를 가졌다.
이 유상곡수의 복원은 그 옛날 정조대왕이 이런 행사를 가진 뒤 200년 만에 다시 살아난 흐르는 물이 사람과 만나는 문화다. 물을 통해 자연의 이치를 배우고 그 물과 동화됨으로써 사람도 자연의 일부분이 되는 것, 우리 선조들이 물과 어떻게 친해질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문화다.
술이 물이 되고, 물이 자연이 되고, 그 자연을 읊는 우리도 자연이 된다. 그것이 설령 중국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우리나라 역대 왕조를 면면히 이어온 것은, 물과 함께 한다는 그 본성이 우리에게 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보면 사소한 것 같은 작은 문화 복원 운동, 그것은 우리 선조들이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떤 삶을 영위해 왔는지, 그리고 그런 생활방식이 왜 소중한 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중국 동진의 영화 9년, 곧 서기 353년 음력 3월 3일 삼짇날 오전, 왕희지를 비롯해 손통, 사안, 지둔 등 당대의 명사 41명이 이 난정에 모인다. 이들이 굽이쳐 흐르는 물가에 늘어앉자 상류에서부터 술로 가득 채운 잔이 떠내려온다. 그 술잔이 자기 앞으로 오면 그들은 냉큼 술잔을 받아들고 시를 지어 발표해야 했다. 시를 짓지 못하면 벌주로 세 잔을 마셔야 했다. 이렇게해서 26명으로부터 37편의 시가 나왔다. 이 모임을 주관한 서예가 왕희지가 바로 이 시들을 적고 이런 상황을 묘사한 글을 지어 유려한 필체로 써 내려간 것이 유명한 <난정집서>이다.
이처럼 굽이굽이 물이 흐르는 시설을 만들어 물에 술을 띄우고 시를 읊고 노래 부르며 풍류놀이를 즐기던 전통 정원 시설을 ‘유상곡수’라고 한다. 왕희지가 자신의 집에 유상곡수를 설치해 놀던 때가 4세기 중반인데, 실제로는 춘추전국 시대의 한 나라인 정나라에도 이런 시설과 놀이가 있었다고 하니 그 연원은 훨씬 오래되었던 모양이다.
이런 유상곡수를 쉽게 이해하려면 경주의 포석정을 생각해보면 된다. 신라 시대 왕들의 놀이터로 알려져 있는 포석정이 바로 이렇게 굽이쳐 흐르는 물길을 돌로 만들고 그 물길에 잔을 띄워 주회를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 물길 형상이 마치 전복 같다고 해서 전복 포자를 써서 포석정이라고 하는데, 잘 알다시피 신라 멸망을 얼마 앞둔 서기 927년, 신라의 경애왕은 이곳에서 왕비, 신하들과 함께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놀이를 즐기다 바로 그때 경주에 쳐들어온 후백제 견훤의 군대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 유명한 포석정의 전설이다.
신라 천년의 역사가 종말을 고한 비극의 현장, 포석정이 단순히 술을 마시며 시를 짓는 신라 왕들의 놀이터였을까 하는 점에 의문이 제기되자, 신라 헌강왕 때 왕이 포석정에 갔는데 남산신이 임금 앞에 나타나 춤을 춘 것을 옆에 있던 신하들은 보지 못하고 왕만이 보았다는 기록을 근거로 포석정이 놀이터가 아니라 신이 나타나는 성스러운 장소였다는 주장이 제기돼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을 보면, 유상곡수는 단순히 술 마시고 노는 장소가 아니라 일종의 종교적인 의식도 행한 공간이기도 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즉, 구곡으로 흐르는 물가에 술잔을 띄우고 술 한 잔 먹고 시 한 수 읊으면서 자연과 우주에 대한 인간의 유한함을 느끼고 살아 있음에 대한 감정을 표현하던 청류의 한 방법으로, 당시 문인이나 현사들이 즐긴 놀이 중 가장 깨끗한 것이었고, 왕들에게는 정치의 도를 수양하는 한 방편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에는 이 유상곡수에 관한 기록이 많다. 신라말의 대학자 최치원은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의 태수로 재직하면서 칠보면 시산리 고운천변에 유상대를 조성하고 시를 지어 유유자적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 그 지명이 시를 짓는 산이라는 뜻의 시산리가 되었고, 최치원이 놀았다는 뜻에서 그의 호을 따 고운천이 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문종이 궁궐인 만월대의 후원 상춘정에서 곡수연을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고, 그 뒤 15대 숙종과 16대 예종, 18대 의종 때 곡수연을 베풀었다는 기록이 이어지고 있다. 또 유명한 시인 이규보는 무관인 기홍수의 초대를 받아 그의 정원인 퇴식재에서 곡수연에 참석했던 일을 ‘기상서퇴식재팔영’이란 시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기도 했다.
“날씨는 포근하고 햇볕은 따사로운데 산들바람 가볍게 불어봐 푸른 소나무에 몸을 기대고 두건을 젖혀 쓰고 흐르는 물에 둘러앉아 술잔을 띄우면서 난정의 봄 수계를 그리워하고...”
조선 시대로 넘어오면 고려 때처럼 활발하지는 않지만 숙종 때 창경궁 양화당 동쪽에서 곡수거를 만들고 곡수연을 베풀었으면, 정조 때는 비원의 옥류천에서 여러 신화들을 초청해 잔을 기울이고 시를 읊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민간으로는 충남 아산시에 있는 이도선 씨의 집에 곡수연을 할 수 있는 곡수거가 설치돼 있는데, 사랑채 동쪽의 돌담 밑으로 흘러든 물이 사랑채 앞을 지나 남쪽으로 흐르도록 해놓고 여기에 음양석과 경석을 심어 곡수거를 조성해놓았다.
그러나 그런 유상곡수의 전통은 최근 실종되었다. 경주 포석정의 유상곡수가 나라를 망하게 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김부식의 기술이 영향을 준 때문인지, 물이 굽이쳐 흐르게 하고 술을 마시면 놀았다는 것이 너무 퇴폐한 귀족 문화로 느껴졌기 때문인지 ‘곡상유수’는 우리 문화에서 실종돼 있었다.
그런데 사단법인 ‘우리 문화 가꾸기회’라는 곳에서 경기도 양평 양수리 한강변 세미원에 유상곡수를 재현해 놓아 화제가 되었다. 문화운동가인 이훈석 씨가 주도하는 ‘우리 문화 가꾸기회’는 가로 19미터, 세로 28미터의 야외를 잡아 창덕궁 비원의 옥류천과 흡사한 바위에서 물이 솟아오르게 하고 그 물이 S자 형으로 돌아 나가면서 태극을 이루도록 하고 그 흐르는 물을 따라 자리를 만들어 사람이 앉아 술잔을 받고 시를 짓도록 했다. 그런 연후에 2005년 11월 22일 현사들을 모아 유상곡수연을 재현하는 행사를 가졌다.
이 유상곡수의 복원은 그 옛날 정조대왕이 이런 행사를 가진 뒤 200년 만에 다시 살아난 흐르는 물이 사람과 만나는 문화다. 물을 통해 자연의 이치를 배우고 그 물과 동화됨으로써 사람도 자연의 일부분이 되는 것, 우리 선조들이 물과 어떻게 친해질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문화다.
술이 물이 되고, 물이 자연이 되고, 그 자연을 읊는 우리도 자연이 된다. 그것이 설령 중국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우리나라 역대 왕조를 면면히 이어온 것은, 물과 함께 한다는 그 본성이 우리에게 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보면 사소한 것 같은 작은 문화 복원 운동, 그것은 우리 선조들이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떤 삶을 영위해 왔는지, 그리고 그런 생활방식이 왜 소중한 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