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동식의 다섯 계절의 노래


 

이동식
1953년 생. 서울대학교 영어교육학과 졸업후 1977년 KBS에 입사하여 30여 년을 현장에서 보낸 언론인이다. 초대 북경특파원, 런던지국장, 과학부장, 국제부장, 보도제작국장, 문화담당....< 더보기 >

*제76회 - " 한지를 지켜야 하는 이유 "

영광도서 0 1,181
삼국 중 가장 뛰어났던 우리 종이
25년 전인 1982년 12월 13일, 덕수궁 석조전 서관 건물이 시끌벅적했다. 당시는 국립현대미술관이 그 자리에 있어서 원래 소리도 없는 미술품들이 진열, 전시되던 공간이었다. 그런데 다소 웅성거리는 분위기 속에 부산하다.
당시 문화부 기자였던 필자는 종이 전시회가 열린다고 해서 미술관을 찾은 것인데, 가보니 나무로 된 통을 이곳저곳에 놓은 가운데 한쪽에는 김이 나고 있고 다른 쪽에는 멀건 풀 같은 것을 퍼서 발 같은 데다 받치고 있다. 이것이 수도 서울의 한복판에서 최초로 펼쳐진 한지 제조 시범이었다.
이 자리에서 김영연 사장님을 처음 뵈었다. 원주시 단구동 190번지에서 무영물산이란 종이공장을 하고 계신단다. 이 날부터 12월 28일까지 보름 동안 열린 이 전시회는 ‘현대 종이의 조형, 한국과 일본전’이란 제하에 종이 생산국으로서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한국과 일본 두 나라가 종이의 우수성에 대한 일반의 의식을 높이고 현대 미술에서 새롭게 대두되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 곧 종이는 예술을 표현하는 매체일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소재가 된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한 자리였다. 여기에는 종이를 소재로 작품 활동을 하는 60여명의 한국과 일본 두 나라 작가들이 참여했는데, 전시회를 계기로 전통 한지 제조 기술을 처음으로 공개하는 것이었다. 김연연 사장이 이 시범회를 지휘했는데, 홍관하, 정영선, 김창선, 송우석 씨 등 평생을 종이와 함께 살아온 제지장 9명이 자리를 같이해 전통 한지의 다양한 종류와 만드는 법을 일일이 선보였다.

막 서른 살이 된 새파란 기자인 필자는 이날 처음으로 한지를 가까이에서 보면서 한지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김영연 사장님은 우리가 만들어온 이 한지는 세계에 내놓을 만한 보배인데도 점차 시들어가고 있다며, 이를 부활시키는 것이 당신의 꿈이라고 밝혔다. 이 일을 계기로 필자는 우리 전통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해 그 뒤로 전통 한지뿐 아니라 부채, 장승, 가구, 탈, 차, 민화 등 우리 문화 전반에 걸쳐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때, 그러니까 20여 년 전만 해도 원주는 전주와 함께 그런 대로 전통 한지를 만드는 중요한 산지였고 종이를 만드는 공장도 수십 개가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김영연 사장은 우리 전통 한지 부활이라는 꿈을 미쳐 펴보지도 못한 채 몇 년 후인 1985년 갑자기 타계하셨고, 그 일과 직접 연관은 없겠지만 전통 한지의 주요 생산지로서의 원주의 면모는 더욱 시들해졌다.
원래 원주의 종이는 유명했다고 한다. 해방 전까지는 원주의 종이가 전국에서 이름을 날린 것이다. 지금은 행정구역상 원주시가 된 옛 원성군 호저면, 이곳은 이름 그대로 호저, 곧 좋은 닥나무가 많다고 해서 호저라는 이름이 붙은 곳인데, 일제 시대에는 저전동면이라고 해서 닥나무 밭이 많이 있던 곳이었다고 한다. 원주 시내 옛 중심부에 해당하는 원주 감영 일대에는 ‘다박골’ 이란 지명이 있었는데, 이곳도 닥밭골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러던 원주가 이제는 손으로도 꼽기 힘든 지경이 됐다. 어디 원주뿐이랴? 전국의 유명한 한지 생산지가 대부분 그렇기 않겠는가?

“닥나무로 만든 한지는 같은 동양의 중국, 일본 세 나라 가운데 우리나라 것을 최고로 쳤습니다. 해방 전에 안변에 있는 석왕사에 간 일이 있는데, 그 절에 있던 목판 불경이 좀이 슬어 몹시 상해 있더군요. 그 목판이 오래됐다고는 해도 천 년밖에 안 되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닥나무로 만든 우리 한지는 좀처럼 좀이 슬지 않고 오랫동안 견디기 때문에 사실상 반영구적인 보존이 가능하지요.”

1982년 12월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한지 제조 시범을 보이던 홍관하 할아버지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한지는 우리나라 것이 최고 였다.
중국 송나라 사람들은 고려지는 비단과 고치로 만든 것처럼 색이 하얀 것이 비단 같고 질겨서 글씨를 쓰거나 그릴 때 먹이 잘 퍼져, 중국에 없는 귀한 물품이라고 표현하면 아꼈다고 한다.

맨 처음 중국에서 발명된 종이는 불교 문화의 유입과 함께 3~4세기경 우리나라에 들어와 많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백제에서는 4세기 말에 사서를 많이 편찬했는데, 이 때에도 종이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610년에는 고구려 스님 담징이 일본에 건너가 종이 만드는 기술을 전해 주었다는 사실이 <일본 서기>라는 역사책에 나타난다. 신라 진덕여왕 1년인 서기 648년에는 종이로 만든 연을 띄웠다는 기록도 있어 600년을 전후해 고구려와 백제, 신라 3국 모두에 종이가 들어와 제조되고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최고의 종이는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서기 706년이나 751년에 만들어진,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 곧 종이 인쇄물이다. 또 국보 196호로 지정돼 있는 ‘금은니자금지 불보살도’도 신라 경덕왕 13년, 서기 754년에 만든 것으로 돼 있다. 당나라 때에는 이미 종이가 중요한 공물, 즉 무역품이 된 것으로 보아 종이 제조 기술은 중국에서부터 전해졌지만 우리나라에서 더욱 개량돼 우수한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우리 종이가 우수한 것은 우리 닥나무 때문
“우리나라 종이가 우수한 것은 우리나라에서 나는 닥나무 때문입니다. 닥나무 껍질이 질긴데다 껍질 자체를 방망이로 때려주기 때문에 종이가 되는 섬유질이 길쭉길쭉해집니다. 이 때문에 우리 종이가 중국이나 일본 종이보다 질기고 오래 갑니다.”

김영연 사장님은 이렇게 자랑을 했다. 김 사장님은 우리 한지의 우수성을 널리 자랑하기 위해 문헌도 많이 찾아보며 학구적인 연구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한지 기술자 가운데 유일하게 외국에서 알려져 있어서 전시회가 열린 다음해인 1983년 3월 일본교토에서 열리는 국제종이회의에도 참가해 우리 한지를 자랑하고 오기도 했다,

종이의 원료로 닥나무가 확고하게 자리 잡은 것은 고려 시대부터로 본다. 닥나무 말고도 삼베나 대나무 껍질 등이 원료로 쓰이기는 했지만, 닥나무가 재배하기도 비교적 쉽고 번식도 잘 되며 가공하기도 손쉽기 때문에 점차 닥나무만이 쓰이게 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 중엽인 12세기에 들어서면서 불경과 사서를 비롯한 각종 서적의 인쇄가 활발해지면서 종이의 수요도 격증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같은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인종 23년인 1145년부터 명종 18년인 1188년까지 전국적으로 닥나무 재배를 권장하면서 민간 제지업을 적극 육성했다고 한다. 또 제지업을 관장하고 직접 종이도 만드는 관청으로 지소를 설치해 제지업의 적극적인 발전을 꾀한 결과 난지 또는 아청지 같은 우수한 종이를 생산하게 되었다.

고려 시대가 제지술의 발전 단계였다면 조선 시대는 대량생산체제로의 발전 단계라고 말할 수 있겠다. 조선 초 금속활자의 개량과 함께 대량의 서적 간행이 이어지면서 종이의 수요가 크게 늘어났다. 이런 수요에 맞춰 태종 15년인 1415년 제지장들을 관장하고 직접 종이도 만드는 조지소가 설치돼 제지 기술의 보급과 개량, 합리적인 생산 관리, 지질의 개량 등이 본격화됐다. 이 당시 기록을 보면 서울에 있는 공장에는 최고 기술자인 지장이 85명, 지방에 있는 공장에는 지장이 698명이나 있어 많은 잡역부들을 데리고 종이를 만들었으며, 이들은 법으로 생활을 보장받았다고 한다. 일찍부터 교육과 문화를 일으키는 가장 중요한 기술자들을 우대한 셈이다.
세종 10년 1428년에는 일본에 갔던 사신의 보고에 따라 일본 종이의 제조기술을 지장에게 습득하도록 했고, 성종 6년 1475년에는 지장을 직접 중국에 파견해 삼을 이용해 종이를 만드는 법을 배워오기도 했다. 이것은 당시 수요가 크게 늘어난 종이를 보다 쉽고 싸게 만드는 법이 없을까 고심한 결과였다. 닥나무 섬유질을 표백하는데 쓰는 나무재를 줄이고 값싸게 얻을 수 있는 여회로 대체하기도 했다. 이 같은 시도로 갈수록 늘어나는 종이의 용도에 따른 다양한 품목의 개발이 진전을 가져왔다. 서울의 종이공장은 현재의 세검정 일대에 있었으며, 이를 중심으로 민간 공장들도 많아져 조선조 중기 이후의 서민들에게까지 종이를 공급했다고 한다.

중국인들은 아득한 신라 시대부터 우리 종이를 좋아해서, ‘계림지’, ‘고려지’라고 예찬하다가 다시 ‘조선지’로 부르면 우리 종이를 아꼈다고 한다. 그래서 송나라부터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고려나 조선 사신들이 들고 가는 선물이 ‘종이’와 ‘청심환’이었다는 데서 우리 종이의 명성을 확인할 수 있다. 더군다나 이 시기의 중국인들은 우리 종이의 질이 명주와 같이 정밀해서 비단 섬유로 만든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으며, 명나라 <일통지>에서야 비로소 닥나무로 만든 것이라고 확인한 기록이 보인다고 한다. 이런 까닭에 서명응은 그의 저서 <보만재총서>에서 “송나라 사람들이 여러 나라 종이의 품질을 논하면 반드시 고려지를 최고를 쳤다... 고려의 종이가 가장 질겨서, 방망이로 두드리는 작업을 거치면 더욱 고르고 매끄러웠던 것인데 다른 나라 종이는 그렇지 못하다”고 적어, 우리 종이의 우수성을 예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종이의 황금 시대는 갔다.

“일제 시대까지만 해도 상당수의 한지 제조공장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고, 6.25동란 이후까지도 대부분의 서양식 제지공장이 파괴 됐기 때문에 한지 제조도 그런 대로 활발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1969년 896호로 집계된 한지제조업소는 1982년 말 현재 150호로 줄어들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앞으로 몇 년 안에 하나라도 살아남을까 걱정됩니다. 겨우 창호지나 화선지를 사는 게 고작이지 않습니까? 아무도 한지를 쓰지 않으려 하니 어떻게 합니까?”

끊어지고 있는 한지제조업소의 실태를 직접 조사해보았다는 김영연 사장의 말이다. 그것이 20년 전의 일이니 오늘날이야 더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중국과 일본에서 명맥을 잇고 있는 우리 한지
중국 북경의 유리창이라는 데를 가면 각양각색의 종이들을 만나 볼 수 있다. 청나라 전성기인 건륭 황제 치세때부터 서적과 서화류의 집산지로 자리를 잡아온 유리창에는 동과 서로 이어지는 두 개의 큰 골목에 영보재를 비롯한 수많은 유명 서화상들이 즐비하고, 그 속에 들어가면 중국 전국의 이름 있는 종이들은 말만 하면 턱 대령한다. 그러기에 우리나라의 예술가들도 즐겨 찾고 있다. 그런데 중국 서화가들 사이에는 ‘고려지’라는 종이가 사랑을 받고 있다. 서화 재료를 파는 데 가서 ‘고려지’를 보자고 하변 화선지보다는 덜 하얗지만 약간 까칠까칠한 느낌의 종이를 내놓는다.
중국의 ‘고려지’는 하북성 천안현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천안현의 현성 북문 밖에 3개의 마을이 있는데, 모두 종이마을로 불린다고 한다. 가장 먼저 만들어진 종이공장은 현기지창으로 청나라 말기에 이현정이란 사람이 만든 것이라고 한다. 1861년생인 이현정은 천안이 집안에 지물포를 열어 운영하면서 전후 3차례 조선에 가서 종이 만드는 기술을 배워 왔다. 그리고 1909년 천진에서 기사를 초빙해와 ‘홍신지’와 ‘유삼지’라는 두 종류의 고려지를 만들었다. 기본적으로는 당시 조선의 종이와 비슷하지만, 흰색으로 두껍고 견고하고 질기고 직선의 무늬가 들어있는 종이를 만들어 냄으로써 이 공장의 명성이 전국을 흔들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일본에도 아직까지 ‘고려지’라는 종이가 있다. 일본의 유명한 정치가로 총리까지 지낸 이누카이 쓰요시는 유명한 서도가이기도 한데, 1920년대 말에 ‘고려지’에 시험적으로 써본 글씨가 지금도 남아 있다. 일본에서는 요즈음에도 중국 돈황의 벽화를 모사해서 파는데, 그 모사하는 종이가 고려지이다.
한지는 세계의 많은 종이 가운데서도 섬유질이 길기 때문에 거의 영구적이라고 할 정도로 장기간 보존이 가능한 것은 물론, 방한과 보온을 해주면서도 통풍이 잘 된다. 또한 반투광성이 있어 직사광선으로부터 우리 눈을 보호해주면서 은은한 느낌을 갖게 해주는 등 장점이 많다. 우리 조상들이 창호지를 바른 창문에 적응하면서 천여년을 살아온 것도 한지의 이 같은 장점 때문이리라. 그러나 서양 종이에 눈이 먼 이제는 우리 주위에 한지를 애용하는 가정이 그리 많지 않다. 건축을 하는 회사들도 아파트를 열심히 지으면서 유리창만 사용해 한지는 설 땅이 없다. 그러다 보니 한지를 쓰지 않아서 한지를 만들어낼 필요가 없어졌고, 그러다 보니 공장도 줄어든 것이리라.
이에 비해 이웃나라 일본은 전통적인 서화용뿐 아니라 산업용으로 일본 종이의 용도를 개발해 자동차 배터리 절연지와 같은 고기능 종이들로 전세계 산업용 종이의 70%를 공급하고 있다. 그러니 지금도 일본 곳곳에는 일본 종이를 만드는 공장이 번창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현실과는 대조적으로 요즘은 외국에서 한지의 우수성에 눈을 떠 한지를 수입해 가는 나라들이 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옛날 서적을 한지로 영인함으로써 영구보존판으로 판매하고 있으며,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책의 안쪽이나 겉을 한지로 배접함으로써 책의 수명을 장기화한다고 한다. 우리만이 우리 것에 무심했기에 정작 우리 것을 외국에서 다시 배워 와야 하는 현상, 어디 그것이 한지에만 국한된 이야기일까?

김영연 사장님은 생전에 남모르게 우리 한지와 관련된 문헌자료들을 방대하게 수집하고 있었다. 종이의 역사에서부터 우리나라에 한지가 들어와 번창하기 시작한 신라와 고려, 그리고 조선 시대로 이어지는 자랑스런 한지의 역사, 그리고 당신이 직접 한지를 만들어 본 경험에 비춰 한지의 원료에서부터 제지법에 이르기까지 한지의 전 분야를 철저히 파고들어 이를 수천 매의 원고로 남겨놓았고, 우리 한지를 외국에 소개하기 위해 직접 영문 원고까지 써놓았다. 이런 배경에는 일찍이 동경대학 중국어과를 나오고 1963년부터 조선대학교 교수 겸 도서관장을 역임하신 경력이 크게 작용했으리라. 김사장님의 원고가 최근 원주시에 의해 <한지의 발자취>라는 이름으로 발간됐다. 사단법인 ‘한지산업기술발전 진흥위원회’의 차우수 이사의 노력이 큰 작용을 했다.
책 속에 들어 있는 내용이 너무 깊고 방대해서 이제 한지에 관해서는 이 이상의 책이 없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책을 펼쳐보니 김영연 사장의 한지에 대한 사랑과 정열이 새삼 파도처럼 다가온다.
김영연 사장님이 다시 살아서 돌아올 수는 없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의 한지를 다시 살릴 수 있을까? 가을, 독서의 계절이 돌아왔다. 지구상에서 가장 글과 책을 좋아했던 나라, 그 전통을 어떻게 하면 다시 살릴 수 있을까? 김영연 사장님과 같은 열정을 가지신 분들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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