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동식의 다섯 계절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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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 |
*제79회 - " 중국에 가서 뭘 보고 오는가? "
영광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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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1 03:44
중국 강남 지방에 관광을 가면 그 지방 사람들이 늘 외우고 다니는 구절이 있다. “上有天堂, 下有蘇杭.“ 하늘에 천당이 있다면 땅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는 뜻이다. 그만큼 소주와 항주가 아름답다는 것이다. 이 말에 홀려서 소주와 항주를 찾는 우리나라의 관광객이 일 년에 30만 명이 넘는다. 그 소주 관광에 꼭 약방의 감초로 끼는 것이 한산사이다.
한산사는 소주시 성서 풍교진이라는 데에 있다. 남조 양천감 연간에 지어진 사원이니까 원래대로라면 약 1500년 전에 지어진 고찰이다. 원래 절의 이름은 묘보명탑원이었는데, 당나라 때 고승인 한산자가 이곳에서 머문 후 그의 이름을 따 한산사로 명칭이 바뀌었다. 혹 가보신 분들이 있으면 아시겠지만 중국의 다른 절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평범한 절이다. 대웅전의 높이는 12.5m로 그저 그렇고, 원래의 건물도 대부분 파괴되었다가 신해혁명 이후인 1911년에 다시 지었다. 유일하게 유명한 건물은 종각인데, 그 안에 당나라 때의 청동 유두종을 모방하여 만든 종이 하나 있다.
그런데 이 절이 왜 유명한가? 바로 당나라 때 장계라는 시인이 쓴 시 한 편 덕택이다. ‘풍교야박’ 이란 제목으로 유명한 이 시는, 과거 시험을 보고 낙방해서 집으로 돌아가던 장계라는 사람이 풍교라는 데서 일박을 하다가, 그 때 마침 한산사에서 저녁 종소리가 들리자, 이를 듣고 그 쓸쓸한 심사를 얹어 시로 쓴 것이다.
달이 지자 까마귀 울고 하늘엔 서리 가득
풍교의 어선 등불은 나그네 시름 돋우네.
고소성 밖 한산사에서는
한밤중 종소리가 객선에 이르네.
뭐 이런 뜻인데, 내용을 보면 그냥 평범해서 특별히 잘 되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런데 중국인들은 이 시를 천하의 명시라고 선전을 한다. 이유인즉슨 이 시에는 계절, 저녁, 장소가 짧은 시 속에 잘 압축되어 있고, 당시 자신의 심사뿐 아니라 어려운 서민들의 생활까지도 녹아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좋고 나쁘고를 판단하는 것은 각자의 취향이므로 강요할 일은 없지만 굳이 이 시를 들춰 보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
우선 이 한산사에 있던 원래의 종은 명나라 말기에 일본이 가져갔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이 종에 관련된 시를 일본인들이 즐겨 애송하게 되었고, 그것이 일본의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리게 되어, 일본인들 가운데 공부 좀 하신 분들은 이 시를 줄줄 외우고 다닌다고 한다. 청나라 말기에 아마도 한산스님을 흠모해서 그런 이름을 지었을 山田寒山라는 일본인이 이 종을 되찾아 중국에 돌려주려고 일본에서 백방으로 찾았으나 찾지 못하자, 돈을 모아 청동으로 당나라 시대의 종을 만들어 하나는 한산사에 보내고 다른 하나는 일본의 관산사라는 곳에 보존시켜 놓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인들도, 중국인들도 이 한산사 종에 대한 생각이 각별하다. 그런 까닭에 일본인들은 이곳 관광을 의미 있게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다른 하나는 이 시에 나오는 고소성에 대한 이야기와 관련된다. 이 시에서 보면 한산사는 고소성 밖에 있다. 말하자면 한산사에서 멀지 않다. 고소성은 고소산에 쌓은 성으로, 태호가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있다. 그런데 고려 말 이곳을 방문한 익재 이제현이 이 성을 방문해서 ‘고소대’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저라산 나무꾼 예쁜 딸은 이팔청춘
옥 같은 살결은 분도 연지도 일없네.
오나라 궁정의 환락은 언제 끝나나?
월나라 임금은 와신상담하고 있는데.
고소성 꼭대기는 가을 풀이 가득하고
성 아래에는 강물이 철썩이는데
‘치이’ 조각배는 지금 어디에 있는고?
고소성 안에 있는 고소대는 오왕 부차가 월왕 구천을 쳐서 이겼을 때 월왕 구천이 천하절색의 미녀 서시를 바치자. 그녀를 위해 지은 누대로서, 여기서 서시와 즐기다가 국정을 돌보지 않아 결국 나라를 망하게 했다는 고사가 있다. 시에서 저라산 나무꾼 예쁜 딸은 서시를 말하는 것이고, 치이 조각배는 이런 월왕의 복수를 가능케 한 월나라의 재삼 범려를 뜻한다. 시를 이해하려면 고사에 대한 지식이 좀 필요하지만, 장계가 지은 ‘풍교야박’과 비교해도 꽤 괜찮은 작품이다.
익재 선생은 고소대 외에도 소주의 유명한 관광지인 호구에도 들러 시를 한 편 남겼다. 호구는 소주에서 서북으로 5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나지막한 야산인데, 월나라 구천과 싸우다 숨진 오왕 합려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합려가 죽어 이곳에 무덤을 만들자 사흘째 되던 날 백호 한 마리가 그 위에 올라가 있는 것이 별견돼 그러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익재는 여기에서 나그네의 쓸쓸한 마음을 읊었다.
합려성 밖에는 역사 오랜 가람이 있는데
생공의 강당 앞은 나무 그늘이 침침하다.
두 번 찾아보니 또렷이 삼생을 잇는 꿈
네 곳 둘러봐도 아득히 만리 닫는 마음
누각 그늘 겹치니 산에 달이 오른 것을
고패소리 머니 바위 샘이 깊은 탓이라,
남여를 타고 강촌 길 돌아가노라면
구름 끝에서 종소리가 들려오는 듯 하다.
- 호구사
소중에 가면 졸정원 등 멋있는 정원과 운하가 볼 만하지만 그것만 보고 오면 재미가 덜하다. 우리는 최근 한 해에 수십만 명이 해외에 나가 관광을 하지만, 우리와 관련된 것은 아무 것도 모르고 그냥 중국 애기만 듣고 돌아보다가 발마사지 하는 것을 중국 여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여행사에서도 대충 구경시키고 관광객들을 면세점에 들여보내서 오랜 시간을 보내어 본전을 뽑으려 하는 것은 아닌지. 하나하나 뜯어보면 우리 선조들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이 많이 숨어 있는데도 우리는 선조의 역사를 모르고 그의 시작품도 모르다 보니 여행을 해도 별 재미가 없다.
관광지나 사적지와 관련된 역사를 학자들의 책 속에 가둬놓지 말고 끄집어내어 한국인들에게 알려주는 역할이 필요하다. 그것은 여행사가 해야 할까, 아니면 학자들이 해야 할까?
한산사는 소주시 성서 풍교진이라는 데에 있다. 남조 양천감 연간에 지어진 사원이니까 원래대로라면 약 1500년 전에 지어진 고찰이다. 원래 절의 이름은 묘보명탑원이었는데, 당나라 때 고승인 한산자가 이곳에서 머문 후 그의 이름을 따 한산사로 명칭이 바뀌었다. 혹 가보신 분들이 있으면 아시겠지만 중국의 다른 절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평범한 절이다. 대웅전의 높이는 12.5m로 그저 그렇고, 원래의 건물도 대부분 파괴되었다가 신해혁명 이후인 1911년에 다시 지었다. 유일하게 유명한 건물은 종각인데, 그 안에 당나라 때의 청동 유두종을 모방하여 만든 종이 하나 있다.
그런데 이 절이 왜 유명한가? 바로 당나라 때 장계라는 시인이 쓴 시 한 편 덕택이다. ‘풍교야박’ 이란 제목으로 유명한 이 시는, 과거 시험을 보고 낙방해서 집으로 돌아가던 장계라는 사람이 풍교라는 데서 일박을 하다가, 그 때 마침 한산사에서 저녁 종소리가 들리자, 이를 듣고 그 쓸쓸한 심사를 얹어 시로 쓴 것이다.
달이 지자 까마귀 울고 하늘엔 서리 가득
풍교의 어선 등불은 나그네 시름 돋우네.
고소성 밖 한산사에서는
한밤중 종소리가 객선에 이르네.
뭐 이런 뜻인데, 내용을 보면 그냥 평범해서 특별히 잘 되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런데 중국인들은 이 시를 천하의 명시라고 선전을 한다. 이유인즉슨 이 시에는 계절, 저녁, 장소가 짧은 시 속에 잘 압축되어 있고, 당시 자신의 심사뿐 아니라 어려운 서민들의 생활까지도 녹아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좋고 나쁘고를 판단하는 것은 각자의 취향이므로 강요할 일은 없지만 굳이 이 시를 들춰 보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
우선 이 한산사에 있던 원래의 종은 명나라 말기에 일본이 가져갔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이 종에 관련된 시를 일본인들이 즐겨 애송하게 되었고, 그것이 일본의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리게 되어, 일본인들 가운데 공부 좀 하신 분들은 이 시를 줄줄 외우고 다닌다고 한다. 청나라 말기에 아마도 한산스님을 흠모해서 그런 이름을 지었을 山田寒山라는 일본인이 이 종을 되찾아 중국에 돌려주려고 일본에서 백방으로 찾았으나 찾지 못하자, 돈을 모아 청동으로 당나라 시대의 종을 만들어 하나는 한산사에 보내고 다른 하나는 일본의 관산사라는 곳에 보존시켜 놓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인들도, 중국인들도 이 한산사 종에 대한 생각이 각별하다. 그런 까닭에 일본인들은 이곳 관광을 의미 있게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다른 하나는 이 시에 나오는 고소성에 대한 이야기와 관련된다. 이 시에서 보면 한산사는 고소성 밖에 있다. 말하자면 한산사에서 멀지 않다. 고소성은 고소산에 쌓은 성으로, 태호가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있다. 그런데 고려 말 이곳을 방문한 익재 이제현이 이 성을 방문해서 ‘고소대’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저라산 나무꾼 예쁜 딸은 이팔청춘
옥 같은 살결은 분도 연지도 일없네.
오나라 궁정의 환락은 언제 끝나나?
월나라 임금은 와신상담하고 있는데.
고소성 꼭대기는 가을 풀이 가득하고
성 아래에는 강물이 철썩이는데
‘치이’ 조각배는 지금 어디에 있는고?
고소성 안에 있는 고소대는 오왕 부차가 월왕 구천을 쳐서 이겼을 때 월왕 구천이 천하절색의 미녀 서시를 바치자. 그녀를 위해 지은 누대로서, 여기서 서시와 즐기다가 국정을 돌보지 않아 결국 나라를 망하게 했다는 고사가 있다. 시에서 저라산 나무꾼 예쁜 딸은 서시를 말하는 것이고, 치이 조각배는 이런 월왕의 복수를 가능케 한 월나라의 재삼 범려를 뜻한다. 시를 이해하려면 고사에 대한 지식이 좀 필요하지만, 장계가 지은 ‘풍교야박’과 비교해도 꽤 괜찮은 작품이다.
익재 선생은 고소대 외에도 소주의 유명한 관광지인 호구에도 들러 시를 한 편 남겼다. 호구는 소주에서 서북으로 5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나지막한 야산인데, 월나라 구천과 싸우다 숨진 오왕 합려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합려가 죽어 이곳에 무덤을 만들자 사흘째 되던 날 백호 한 마리가 그 위에 올라가 있는 것이 별견돼 그러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익재는 여기에서 나그네의 쓸쓸한 마음을 읊었다.
합려성 밖에는 역사 오랜 가람이 있는데
생공의 강당 앞은 나무 그늘이 침침하다.
두 번 찾아보니 또렷이 삼생을 잇는 꿈
네 곳 둘러봐도 아득히 만리 닫는 마음
누각 그늘 겹치니 산에 달이 오른 것을
고패소리 머니 바위 샘이 깊은 탓이라,
남여를 타고 강촌 길 돌아가노라면
구름 끝에서 종소리가 들려오는 듯 하다.
- 호구사
소중에 가면 졸정원 등 멋있는 정원과 운하가 볼 만하지만 그것만 보고 오면 재미가 덜하다. 우리는 최근 한 해에 수십만 명이 해외에 나가 관광을 하지만, 우리와 관련된 것은 아무 것도 모르고 그냥 중국 애기만 듣고 돌아보다가 발마사지 하는 것을 중국 여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여행사에서도 대충 구경시키고 관광객들을 면세점에 들여보내서 오랜 시간을 보내어 본전을 뽑으려 하는 것은 아닌지. 하나하나 뜯어보면 우리 선조들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이 많이 숨어 있는데도 우리는 선조의 역사를 모르고 그의 시작품도 모르다 보니 여행을 해도 별 재미가 없다.
관광지나 사적지와 관련된 역사를 학자들의 책 속에 가둬놓지 말고 끄집어내어 한국인들에게 알려주는 역할이 필요하다. 그것은 여행사가 해야 할까, 아니면 학자들이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