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동식의 다섯 계절의 노래


 

이동식
1953년 생. 서울대학교 영어교육학과 졸업후 1977년 KBS에 입사하여 30여 년을 현장에서 보낸 언론인이다. 초대 북경특파원, 런던지국장, 과학부장, 국제부장, 보도제작국장, 문화담당....< 더보기 >

*제82회 - " 나의 것, 남의것 "

영광도서 0 1,076
세종 때 벼슬에 나가 세조 때까지 산 문신이자 서화가인 강희안은 꽃과 나무를 좋아해 <양화소록>이란 조그만 책을 남겼다. 이 책 안에 보면 우리가 요즈음 ‘영산홍’으로 부르는 ‘일본철쭉’ 항목이 나온다.

“세종대왕 재위 23년(1441) 봄에 일본에서 철쭉 화분 몇 개를 바쳤다. 임금께서 뜰에서 기르도록 명하셨다. 꽃이 피었을 때 꽃잎은 홑잎으로 매우 컸다. 색깔은 석류와 비슷하고...(중략)... 우리나라의 품종과 아름답고 추함을 비교하면 모모와 서시의 차이보다 심했다. 임금께서 즐겁게 감상하시고 상림원에 하사하시어 나누어 심도록 명하셨다.”

이를 통해 볼 때 영산홍이란 꽃나무가 우리나라에 온 것이 이미 500년이 넘었음을 알 수 있다. 강희안은 이 때 받은 영산홍의 뿌리를 나누어 받아 집에서 키우면서 친척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했다. 그것이 우리나라 전역으로 조금씩 퍼져 나갔을 것으로 보인다. 최근 국립공원 내인 무주 양수 발전소 주변 지역에 한국전력이 국내 자생종을 심지 않고 외래 수종을 심은 것이 말썽이 되고 있다고 한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한국전력공사와 한국남동발전은 보기 좋다는 이유만으로 1990년부터 지난해까지 무주 양수 발전소 건립으로 인한 산림 훼손 지역에 일본에서 들여온 자산홍과 영산홍, 겹철쭉, 백철쭉 그리고 북미가 원산지인 쪽제비싸리, 중국 원산의 중국단풍, 일본 원산의 홍단풍 등 26종의 외래종 총 12만 3,084그루를 심었다는 것이다. 눈에 띄는 것이 영산홍 6천여 그루와 자산홍 7천여 그루, 이름에서 보듯 관상용 수목임을 알 수 있다.

환경단체들은 현행 자연공원법 상 국립공원 내에는 외래 수종 도입이 금지돼 있는데도 덕유산 국립공원관리소는 이를 제지하기는커녕 인식조차 못하고 있어 국립공원 관리에 문제점을 드러냈다고 말한다. ‘국립공원을 지키는 시민의 모임’은 “무주 양수발전소는 자연보존지구이자 사적 146호 적상산성 주위의 문화재보호지역에 위치해 건설 당시부터 많은 환경단체와 전문가들의 반대가 있었다.”면서 “댐 건설로 인해 18만 평의 삼림이 벌채되고 독특한 고산 분지와 습지 생태계가 파괴된 데다 외래 식물을 심는 불법 행위까지 자행돼 자연생태계가 다시 한번 훼손됐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발전소 측은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는 곳이므로 보기 좋은 조경수를 심어 꾸민 것”이라며 “자연공원법 내용은 잘 모르고 있었다.”고 해명했다. 환경단체들은 “외래종을 제거하고 무조 양수 발전소 건설 이전에 서식하고 있던 자생종을 심어 복원해야 한다.”고 말한다.
원칙대로라면 외래종을 모두 뽑아버리고 그 전에 살던 자생종을 심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조금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영산홍이나 자산홍이 일본산이어서 문제라고 하지만, 이미 500여 년 전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이다. 원산지가 일본일 뿐 우리나라에 들어봐 번식이 되고 있는데 굳이 일본산이라느니 외래종이라느니 분류를 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필자가 자주 가는 여의도 공원에도 소나무와 느티나무, 개쉬땅나무나 마가목 등 여러 수종이 식재돼 있는 가운데 자산홍과 영산홍도 심어져 있다. 환경인들이 말하는 원칙대로라면 이런 나무들도 외래 소종이면 뽑아버리고 순수한 재래 수종으로 교체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한 번 생각해보자.
우리가 외래 수종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근저에는 그것이 우리 고유의 생태계를 교란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말하자면 요즈음 호수나 하천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블루길이나 배스, 붉은 거북처럼 우리의 재래 물고기를 다 잡아 먹어버리는 것은 명백히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영산홍이나 자산홍 혹은 다른 관상용 수종들이 그렇게 생태계를 교란시킬 위험이 있는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이때의 기준은, 발전소 주변이라는 특별한 환경을 감안할 때 관상용, 곧 등산객이나 손님들이 보기에 좋고 즐거우면 된다는 기준이 적용되면 되는 것 아닐까? 이런 기준이라면 일찍이 세종대왕이 말씀하셨듯이 재래종과 영산홍의 차이는 모모와 서시의 차이만큼이나 크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국립공원이기에 생태계를 복원하는 것이 옳은 일이겠지만, 발전소 부근이라면 재래종을 고집하기보다는 관상용으로 인기 있는 수종들이 식재되는 것이 굳이 흠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근래 들어 전통을 찾는 움직임이 여러 방면에서 활발해지면서 우리의 생각이 약간은 편협해지고 있지 않나 하는 우려 때문이다. 우리 것을 지키고 되살리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렇지만 밖에서 온 것이 좋은 것임에도 외래종이라는 이유만으로 배척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의 생각이나 문화의 폭을 좁고 왜소하게 만드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외래와 순수 토종을 구분하다고 하지만 그 기준은 무엇이며, 어디까지를 토종으로 구분할 것인가? 우리 민족의 주체가 누구이며 어디까지가 우리 민족인가 하는 문제조차도 논란이 많지 않은가? 역사 이래 우리의 삶 속에 들어온 외래라는 요소가 얼마나 많은가? 우리가 쓰는 이름에서부터 우리의 생각이나 사고방식, 생활용품, 과학기술, 사상과 종교 등등 그 모두가 외래 아닌 것이 있는가?
외래의 것을 받아들이고 우리 것으로 소화하기 위해서는 외래의 것을 너무 비판적으로 보지 말고 좋은 것은 좋은 것으로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그 바탕 위에서 외래의 요소를 우리 것으로 소화해내는 일이 중요하다.
그렇다고 영산홍은 좋은 것이니 무조건 살리자는 것은 아니다. 영산홍이나 자산홍이라도 문제가 있으면 백 번 갈아치우고 뽑아버려야 한다. 다만, 그것이 외래종이라는 이유로 배척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국립공원 안이기 때문에 원래의 생태계를 무조건 복원해야 한다는 강제규정이 있으니 당연히 문제가 되기는 하지만. 어차피 발전소를 지으면 그 주위는 조경을 할 수 밖에 없고, 조경을 하자면 전통적인 수목이 많지 않으니 일반 사람들이 선호하는 영산홍이나 자산홍 등 일본 원산의 관상목이 식재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외래와 전통, 우리 것과 남의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이분법적 구분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 결콘 바람직하지 않다. 내 것, 남의 것의 문제가 아니라 나에게 유리한 것, 불리한 것, 나에게 좋은 것, 나쁜 것이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나, 우리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 즉 인류에게 유익하고 보탬이 되는냐가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
백남준, 윤이상, 이우환, 정경화, 정명훈, 조용필, 김수철, 배용준, 비 그리고 이승엽, 박찬호 드등 세계로 나가 활약하고 있는 모든 한국인들을 보는 눈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 또한 한국에 온 모든 외국인들에게도 그것은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 앞으로의 세상은 한국인이 한국에서만 사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세상은 모두가 잘 사는 세상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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