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윤환의 삶과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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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환 |
*제72회 - " 비망록 "
영광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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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1 03:45
햇빛에 지친 해바라기가 가는 목을 담장에 기대고 잠시 쉴 즈음. 깨어보니 스물네 살이었다. 신(神)은, 꼭꼭 머리카락까지 졸이며 숨어있어도 끝내 찾아주려 노력하지 않는 거만한 술래여서 늘 재미가 덜했고 타인은 고스란히 이유 없는 눈물 같은 것이었으므로.
스물네 해째 가을은 더듬거리는 말소리로 찾아왔다. 꿈 밖에서는 날마다 누군가 서성이는 것 같아 달려 나가 문 열어보면 아무 일 아닌 듯 코스모스가 어깨에 묻은 이슬발을 툭툭 털어내며 인사했다. 코스모스 그 가는 허리를 안고 들어와 아이를 낳고 싶었다. 석류 속처럼 붉은 잇몸을 가진 아이.
끝내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네 살엔 좀 더 행복해져도 괜찮았으련만. 굵은 입술을 가진 산두목 같은 사내와 좀 더 오래 거짓을 겨루었어도 즐거웠으련만. 이리 많이 남은 행복과 거짓에 이젠 눈발 같은 이를 가진 아이나 웃어줄는지. 아무 일 아닌 듯 해도.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 강물 위인들 걷지 못하랴 문득 깨어나 스물다섯이면 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오래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실낱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아무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도록. -김 경 미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이 없다는 것과 같다. 이상(李箱)의 말이다. 속을 다 뒤집어 고해성사를 해도, 가슴 바닥에는 침전된 앙금처럼 비밀이 있다. 그것마저 없다면 인간은 너무 헛헛하다. 비밀은 때로, 힘이 되기도 하고 성찰의 자양이 되기도 한다. 그것이 인간이다. 불가사의한 존재,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는 복잡한 회로, 그것이 인간이고 인간의 삶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탐구해볼만한 가치가 있다.
누구든 삶의 중요한 골자를 적는 하나의 비망록을 갖고 있다. 고급 양장본 다이어리든 낡은 대학노트든 그건 상관없다. 더러는 영원히 기록하지 못할 영혼의 비방록도 있다. 생(生)의 사건은 낙차가 있고, 중립(中立)이 없으므로, 그 자체로 강렬하지 않은 생(生)의 시간은 없다. 어떤 과거는 해약하고 싶어진다. 어떤 과거는 지금에라도 더 꽃피우고 싶어진다. 어느 때는 폭풍이 지나가는 바닷가처럼 스산하고 절벽처럼 위태위태해 시큰한 냉기가 돌기도 한다. 어느 때는 사랑이 붉은 가슴에게로 오지만 눈물의 손바닥이 얼굴을 덮는 밤도 있다. 우리는 이 사건들을 모두 속기할 수는 없다. 갈피를 잡지 못해 헤매는 미망(迷妄) 속에 살면서 잊을 수 없는 미망(未忘)만을 기록할 뿐. 기록과 기억은 일치되기도 하고 혼란이기도 하다.
붉은 줄이 굵게 쳐진 1급 국가기밀은 이미 비밀이 아니다. 공개된 자료에 불과하다. 단지 몇몇 소수의 권력자만 그것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일 뿐이다. 별것 아닌 것을 가지고 소수만 희희덕거리며 즐기는 화투패 같은 것이다. 소수를 제외한 대다수는 관심도 없다. 그것은 인간의 삶을 요동치게 하지 못한다. 그러나, 불가사의한 존재 속에 담긴 비밀은 때로는 폭풍이 되고 화산이 되고 우주를 삼킨다. 그래서 비밀을 기록한 비망록은 돋보인다. 비망록은 절망을 바탕에 깔되 행간에 간절한 염원을 쑤셔박아놓고 있다.
‘비망록’은 김경미(49) 시인의 데뷔작이다. 스물네 살에서 스물다섯 살로 넘어가는 나이의, 섬세한 감성을 소유한 화자의 이 갈리는 고백이다. 신(神)은 그녀의 절망을 구원하지 않았고, 그녀가 만나는 이들은 팔뚝으로 눈물을 훔쳤으며, '산두목 같은 사내'는 끝내 그녀의 사랑이 되지 못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네 살. 그러나 젊은 열정이 어딘들 못 나서랴.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 강물 위인들 걷지 못하랴". 그예 젊은 열정은 생의(生意)를 내는 것. 마치 견고한 배는 풍랑에도 해를 입지 않듯이.
그러나, 이 굽히지 않는 마음이 20대의 젊음에게만 있을쏜가. 우리는 또 내일을 만나고, 내일은 공백(空白)의 페이지이고, 내일은 새롭게 써야 할 또 다른 비망록이다. 가끔은 누군가에게 들키기도 하지만 끝내 공개를 원치 않는 비밀의 방이다. 그것이 다른 색깔의 옷을 입고 거리를 나서지만 알몸은 늘 그대로이다.
김경미의 다른 시 〈나의 서역〉의 도발적인 허무는 또 어떤가. "서로 편지나 보내자 삶이여/ 실물은 전부 헛된 것/ 만나지 않는 동안만 우리는 비단 감촉처럼 사랑한다 사랑한다 죽도록/ 만날수록 동백꽃처럼 쉽게 져버리는 길들/ 실물은 없다 아무 곳에도/ 가끔 편지나 보내어라". 이렇게 솔직하게 속내를 꺼내 보이는 시를 읽고 나면 우리는 다시 만나고 싶어진다. 다시 만나 동백꽃처럼 모가지를 꺾으며 서로를 외면하게 될지라도. 다시 만나 과거의 비망록을 다시 열람하려는 용기, 그것이 우리의 가슴에 아직 남아있는 그리움 아니겠는가.
허무와 절망의 목소리가 세상에 자욱하다. 희망을 얘기하자는 정치가, 사상가, 종교인의 선창에 쉬이 후렴구를 넣기 어렵다. 세상은 선창, 후창으로 쉽게 굴러가지 않는다. 모든 절망과 실패는 오로지 개인이 책임져야할 숙명이다. 그래도 믿을 구석은 우리 속에 차곡차곡 쌓인 비망록의 심지에 불이 붙어 활화산으로 타오를 것을 믿는 믿음만이 희망이다. (*)
스물네 해째 가을은 더듬거리는 말소리로 찾아왔다. 꿈 밖에서는 날마다 누군가 서성이는 것 같아 달려 나가 문 열어보면 아무 일 아닌 듯 코스모스가 어깨에 묻은 이슬발을 툭툭 털어내며 인사했다. 코스모스 그 가는 허리를 안고 들어와 아이를 낳고 싶었다. 석류 속처럼 붉은 잇몸을 가진 아이.
끝내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네 살엔 좀 더 행복해져도 괜찮았으련만. 굵은 입술을 가진 산두목 같은 사내와 좀 더 오래 거짓을 겨루었어도 즐거웠으련만. 이리 많이 남은 행복과 거짓에 이젠 눈발 같은 이를 가진 아이나 웃어줄는지. 아무 일 아닌 듯 해도.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 강물 위인들 걷지 못하랴 문득 깨어나 스물다섯이면 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오래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실낱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아무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도록. -김 경 미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이 없다는 것과 같다. 이상(李箱)의 말이다. 속을 다 뒤집어 고해성사를 해도, 가슴 바닥에는 침전된 앙금처럼 비밀이 있다. 그것마저 없다면 인간은 너무 헛헛하다. 비밀은 때로, 힘이 되기도 하고 성찰의 자양이 되기도 한다. 그것이 인간이다. 불가사의한 존재,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는 복잡한 회로, 그것이 인간이고 인간의 삶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탐구해볼만한 가치가 있다.
누구든 삶의 중요한 골자를 적는 하나의 비망록을 갖고 있다. 고급 양장본 다이어리든 낡은 대학노트든 그건 상관없다. 더러는 영원히 기록하지 못할 영혼의 비방록도 있다. 생(生)의 사건은 낙차가 있고, 중립(中立)이 없으므로, 그 자체로 강렬하지 않은 생(生)의 시간은 없다. 어떤 과거는 해약하고 싶어진다. 어떤 과거는 지금에라도 더 꽃피우고 싶어진다. 어느 때는 폭풍이 지나가는 바닷가처럼 스산하고 절벽처럼 위태위태해 시큰한 냉기가 돌기도 한다. 어느 때는 사랑이 붉은 가슴에게로 오지만 눈물의 손바닥이 얼굴을 덮는 밤도 있다. 우리는 이 사건들을 모두 속기할 수는 없다. 갈피를 잡지 못해 헤매는 미망(迷妄) 속에 살면서 잊을 수 없는 미망(未忘)만을 기록할 뿐. 기록과 기억은 일치되기도 하고 혼란이기도 하다.
붉은 줄이 굵게 쳐진 1급 국가기밀은 이미 비밀이 아니다. 공개된 자료에 불과하다. 단지 몇몇 소수의 권력자만 그것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일 뿐이다. 별것 아닌 것을 가지고 소수만 희희덕거리며 즐기는 화투패 같은 것이다. 소수를 제외한 대다수는 관심도 없다. 그것은 인간의 삶을 요동치게 하지 못한다. 그러나, 불가사의한 존재 속에 담긴 비밀은 때로는 폭풍이 되고 화산이 되고 우주를 삼킨다. 그래서 비밀을 기록한 비망록은 돋보인다. 비망록은 절망을 바탕에 깔되 행간에 간절한 염원을 쑤셔박아놓고 있다.
‘비망록’은 김경미(49) 시인의 데뷔작이다. 스물네 살에서 스물다섯 살로 넘어가는 나이의, 섬세한 감성을 소유한 화자의 이 갈리는 고백이다. 신(神)은 그녀의 절망을 구원하지 않았고, 그녀가 만나는 이들은 팔뚝으로 눈물을 훔쳤으며, '산두목 같은 사내'는 끝내 그녀의 사랑이 되지 못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네 살. 그러나 젊은 열정이 어딘들 못 나서랴.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 강물 위인들 걷지 못하랴". 그예 젊은 열정은 생의(生意)를 내는 것. 마치 견고한 배는 풍랑에도 해를 입지 않듯이.
그러나, 이 굽히지 않는 마음이 20대의 젊음에게만 있을쏜가. 우리는 또 내일을 만나고, 내일은 공백(空白)의 페이지이고, 내일은 새롭게 써야 할 또 다른 비망록이다. 가끔은 누군가에게 들키기도 하지만 끝내 공개를 원치 않는 비밀의 방이다. 그것이 다른 색깔의 옷을 입고 거리를 나서지만 알몸은 늘 그대로이다.
김경미의 다른 시 〈나의 서역〉의 도발적인 허무는 또 어떤가. "서로 편지나 보내자 삶이여/ 실물은 전부 헛된 것/ 만나지 않는 동안만 우리는 비단 감촉처럼 사랑한다 사랑한다 죽도록/ 만날수록 동백꽃처럼 쉽게 져버리는 길들/ 실물은 없다 아무 곳에도/ 가끔 편지나 보내어라". 이렇게 솔직하게 속내를 꺼내 보이는 시를 읽고 나면 우리는 다시 만나고 싶어진다. 다시 만나 동백꽃처럼 모가지를 꺾으며 서로를 외면하게 될지라도. 다시 만나 과거의 비망록을 다시 열람하려는 용기, 그것이 우리의 가슴에 아직 남아있는 그리움 아니겠는가.
허무와 절망의 목소리가 세상에 자욱하다. 희망을 얘기하자는 정치가, 사상가, 종교인의 선창에 쉬이 후렴구를 넣기 어렵다. 세상은 선창, 후창으로 쉽게 굴러가지 않는다. 모든 절망과 실패는 오로지 개인이 책임져야할 숙명이다. 그래도 믿을 구석은 우리 속에 차곡차곡 쌓인 비망록의 심지에 불이 붙어 활화산으로 타오를 것을 믿는 믿음만이 희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