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윤환의 삶과 생각
|
김윤환 |
*제44회 - " 책의 역사 "
영광도서
0
469
2016.12.01 03:45
현대는 가히 출판물의 홍수시대다. 그것은 활자의 발명, 인쇄술의 발전에 기인한다. 최초의 책은 낱장을 나란히 이어붙이고 양끝을 나무나 상아로 된 막대기를 말아서 만든 두루마리 형태였다. 두루마리가 오늘날 우리에게 친숙한 외양인 낱장을 함께 꿰맨 코덱스(codex) 형태로 변했다.
헬레니즘 시대에 대형 도서관이 존재했고, 소아시아의 페르가논 도서관과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50만권이 넘는 서책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이는 도서관이 필사 작업실과 긴밀한 연계 속에서 운영되었다는 사실을 추측케 한다.
로마 제국 붕괴 이후 비잔틴 제국에서는 장서가 풍부한 도서관들이 번창했고, 서양의 채식 장식에 영향을 준 세밀화 기법이 발전했다. 한편 라틴 문명은 유럽에서 영적 삶의 근원지요, 경제적 생산 활동의 중심지며 동시에 문명의 관리자였던 수도원으로 숨어들었다. 수도원마다 필사 전용실인 스크립토리움을 갖추고 있었다. 수도사들은 그곳에서 종교적 텍스트는 물론, 라틴어 문장 습득에 필요한 고대 그리스, 로마의 세속적인 작품을 베껴 쓰면서 삽화를 그려 넣었다.
일찍이 구텐베르크만큼 명성과 논란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던 발명가는 없다. 그가 세계적인 발명의 대부란 점은 이론의 여지가 있다.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 활자본으로 공인된 서적은 직지심경<원제: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이다. 1372년(공민왕 21)에 저술되었고 1377년 청주목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인쇄되었다. 현재 이 책의 하권이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1972년 파리에서 열린 세계 도서의 해 기념전시회에 출품되어 세계 최고의 금속 활자본으로 공인받았다. 사찰 나름의 재래방법으로 활자를 만들어 인쇄한 것으로 목활자가 섞여 있고 크기와 모양이 고르지 않으나 그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
보기 좋고 접하기 쉬운 책은 16세기의 종교와 문화생활의 핵심이 되었다. 새로운 사상을 전파하는 도구로서, 고상함이나 사치스런 외관을 위한 수집대상으로 책은 눈과 정신의 축제였다.
해마다 열리는 전시장은 서적상들끼리 텍스트를 교류하는 기회가 되었다. 인쇄인, 서적상, 편집자들은 프랑크푸르트의 ‘책거리’로 통하는 뷔허가세에서 서로 마주치곤 했다. 그곳에서 1564년부터 정기적으로 선보여온 책 카탈로그는 인쇄 출판물의 귀중한 자료로 눈길을 끌었다. 17세기 초부터 프랑크푸르트 전시장은 라이프치히로 옮겼다.
17세기는 적어도 형식적 측면에서 유럽 책의 역사에 전환점을 맞는 시기였다. 문학이라는 광범위한 장르가 기반을 굳혀갔던 당시, 책은 근대적인 외형을 갖춘 일상용품이 되었다.
파피루스에서 양피지로 이어서 종이로, 개인적인 필사작업에서 움베르토 에코의 장편소설 ‘장미의 이름’의 무대가 되었던 수도원의 필사전용실 스크립토리움으로, 스크립토리움에서 동업조합과 가내작업으로, 다시 목판술에서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으로 현란한 종이책으로부터 지금의 전자책에까지 이르렀다.
어떠한 변화가 오더라도 인간에게 가장 오래되고 유용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인 책의 역사는 지속될 것이다.(*)
헬레니즘 시대에 대형 도서관이 존재했고, 소아시아의 페르가논 도서관과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50만권이 넘는 서책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이는 도서관이 필사 작업실과 긴밀한 연계 속에서 운영되었다는 사실을 추측케 한다.
로마 제국 붕괴 이후 비잔틴 제국에서는 장서가 풍부한 도서관들이 번창했고, 서양의 채식 장식에 영향을 준 세밀화 기법이 발전했다. 한편 라틴 문명은 유럽에서 영적 삶의 근원지요, 경제적 생산 활동의 중심지며 동시에 문명의 관리자였던 수도원으로 숨어들었다. 수도원마다 필사 전용실인 스크립토리움을 갖추고 있었다. 수도사들은 그곳에서 종교적 텍스트는 물론, 라틴어 문장 습득에 필요한 고대 그리스, 로마의 세속적인 작품을 베껴 쓰면서 삽화를 그려 넣었다.
일찍이 구텐베르크만큼 명성과 논란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던 발명가는 없다. 그가 세계적인 발명의 대부란 점은 이론의 여지가 있다.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 활자본으로 공인된 서적은 직지심경<원제: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이다. 1372년(공민왕 21)에 저술되었고 1377년 청주목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인쇄되었다. 현재 이 책의 하권이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1972년 파리에서 열린 세계 도서의 해 기념전시회에 출품되어 세계 최고의 금속 활자본으로 공인받았다. 사찰 나름의 재래방법으로 활자를 만들어 인쇄한 것으로 목활자가 섞여 있고 크기와 모양이 고르지 않으나 그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
보기 좋고 접하기 쉬운 책은 16세기의 종교와 문화생활의 핵심이 되었다. 새로운 사상을 전파하는 도구로서, 고상함이나 사치스런 외관을 위한 수집대상으로 책은 눈과 정신의 축제였다.
해마다 열리는 전시장은 서적상들끼리 텍스트를 교류하는 기회가 되었다. 인쇄인, 서적상, 편집자들은 프랑크푸르트의 ‘책거리’로 통하는 뷔허가세에서 서로 마주치곤 했다. 그곳에서 1564년부터 정기적으로 선보여온 책 카탈로그는 인쇄 출판물의 귀중한 자료로 눈길을 끌었다. 17세기 초부터 프랑크푸르트 전시장은 라이프치히로 옮겼다.
17세기는 적어도 형식적 측면에서 유럽 책의 역사에 전환점을 맞는 시기였다. 문학이라는 광범위한 장르가 기반을 굳혀갔던 당시, 책은 근대적인 외형을 갖춘 일상용품이 되었다.
파피루스에서 양피지로 이어서 종이로, 개인적인 필사작업에서 움베르토 에코의 장편소설 ‘장미의 이름’의 무대가 되었던 수도원의 필사전용실 스크립토리움으로, 스크립토리움에서 동업조합과 가내작업으로, 다시 목판술에서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으로 현란한 종이책으로부터 지금의 전자책에까지 이르렀다.
어떠한 변화가 오더라도 인간에게 가장 오래되고 유용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인 책의 역사는 지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