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윤환의 삶과 생각


 

김윤환
(주)영광도서 대표이사 | 경영학 박사
yhkim@ykbook.com
[약력] 경남 함안 대산 구혜 출생(1949).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일본학과 졸업, 부산외국어대학교 경영학석사, 부산대학교 국제학석사, 동아대학교대학원 경영학박사. ‘87 JCI부산시지구 회장, '88한국청년회의소중앙부회장, '89부산시체육회이사, 한국청년회의소 연수원 교수부장, (사)목요학술회 부회장, '06국제신문 부사장, 부산고등법원민사 조정위원, 부산문화재단 이사, (사)한국마케팅관리학회 부회장, 2014부산ITU전권회의범시민지원협의회 부회장, 2014한ㆍ아세안 특별정상회의 범시민지원협의회 부회장, 부산광역시 새마을회 회장, 부산새마을신문 발행·편집인 등 역임...< 더보기 >

*제70회 - " 맨발 "

영광도서 0 518
맨 발- 문태준

어물전 개조개 한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맨발, 맨손에는 추억이 많다. 6.25와 6~70년대를 관통해온 이들에게는 그것이 시대의 코드이기도 했다. 가진 것이라곤 맨손, 맨주먹이 전부였던 시절이다. 오죽하면 ‘맨발의 청춘’이란 영화에 열광했을까. 영광을 뒤로한 채 은거하고 있는 배우 신성일 씨의 열연이 지금도 눈에 생생하다. 그의 출세작이었지.

오늘날 나와 같은 중년배들에겐 맨발이란 말이 아련한 추억이자 뭉클한 감동이다. 시간을 썩둑 잘라 그 시대와 지금을 맞닿아 놓으면 ‘기적’ 같다. 그래서 지금의 풍요에 겸허해진다. 파티에는 미숙하나 궁핍과 고생에는 자신감이 불쑥 솟는 것도 맨발의 추억 때문이다.

젊은 시인 문태준(38)의 시에서는 곰삭은 된장 냄새, 뜨듯한 여물 냄새가 난다. 느림보 소가 뱃속에 든 구수한 여물을 되새김질하는 투실한 입모양이 떠오른다. 첨단 감수성이 난무하는 21세기에 그의 시는 '오래된 미래'다. 찬란한 '극빈(極貧)'과 '수런거리는 뒤란'을 간직한 청정보호구역이다. 기억하기 싫은 세월을 기억해내게 하는 소중한 타임캡슐이다.

죽기 직전의 개조개가 삐죽 내밀고 있는 맨살에서, 죽은 부처의 맨발을 떠올리는 상상력이 놀랍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들 아버지의 맨발, 그 부르튼 한평생을 얘기하고 있다. 어린 시절 먹고무신 속에 담겨진 우리들의 맨발, 목양발조차 변변이 없어 언발이 되어야했던 잃혀진 우리들의 맨발을 끄집어내게 한다. 그 시림이 지금의 넉넉함과 너그러움을 만들어낸 원초적 힘이었음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10리, 20리길을 거침없이 맨발로 달려 학교에 가고, 심부름 갔던 추억의 힘이 아직 소멸되지 않았다.

세상에 제일 나중에 나와,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큰 하중을 견뎌내고서는, 세상으로부터 제일 나중에 거두어들이는 것이 맨발이다. 맨발로 살다 맨발로 돌아가는 모든 것들은 세파를 화엄적으로 견뎌내는 존재들이다.

길 위에서 태어나 평생토록 길 없는 길을 '맨발'로 걸어 다니다 길 위에서 열반에 든 부처가,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는 가섭을 위해 관 밖으로 내밀어 보여준 두 발에는 부처의 무량겁 지혜의 형상을, 그리고 죽고 사는 것이 하나라는 것을 제자에게 일러주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 다시 세상은 맨발을 강요하고 있다. 세계적 금융위기, 끝이 보이지 않는 불경기의 한파, 청년실업, 자살 등으로 잠자리가 편치 못하다. 지혜보다는 자학적 충동이 난무하는 듯하다. 무언가를 혹은 전부를 잃고 자신의 초라한 움막으로 되돌아와야 하는 '맨발'은 적막하다. 가난한 우리의 아버지들, 빛이 보이지 않는 청춘들에게 세계의 아득한 끝을 바라본다. 생명의 끈을 놓아버린 차디찬 맨발을 만져본 사람에게 이 시의 적막함은 유난하다.

그러나, 맨발은 절망을 부추기는 존재가 아니다. 시리고 턱턱 갈라진 맨발의 추억은 따뜻한 아랫목의 추억을 기억해낼 줄 안다. 절망도 힘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지금 비록 북풍한설 몰아치지만 머잖아 봄볕이 다가옴을 알고 있다. 우리에겐 절망을 삭혀서 희망으로 만드는 DNA가 있다.

스산함이 밀려오는 계절이다. 머잖아 눈보라가 몰아칠 것이다. 이제 다시 오래된 무기를 꺼내서 그것들은 이겨내야 할 것이다. 그 무기는 첨단미사일이 아니다. 초고속으로 질주하는 열차도 아니다. 조상대대로 물려준 튼튼한 맨발이 최고의 무기다. 언땅을 녹이며 무소의 뿔처럼 앞으로 나아갈 우리들의 맨발이 최고의 무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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