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윤환의 삶과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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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환 |
*제97회 - " 화는 나와 상대, 주변을 모두 불태우는 재앙입니다 "
영광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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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1 03:45
살아오면서 어디서, 누군가에게 크고 작은 화를 냈을 것입니다. 가족에게, 친구에게, 직원에게, 나는 잊었지만 상대에겐 상처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그 화란 모두 나를 불태운 것이고, 상대를 불태운 것이고, 그 자리에 같이 있었던 사람들을 불태우는 것이었습니다.
시어머니가 가혹하게 며느리를 나무라면 젖 빨던 아기가 그 자리에서 생똥을 쌉니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라 실화입니다. 아기의 수유를 위해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는다 해도 사람들과 불화하면 아기가 먹은 것은 엄마의 사랑이 아닌 엄마의 홧독입니다.
수유기에 시름시름 앓는 아이, 잘 자라지 못하는 아이가 있다면 그 가족 관계를 살펴보면 원인을 알 수 있습니다. 느닷없이 아기에게 병이 왔다면 틀림없이 부부 싸움이나 고부간의 갈등에 한 원인이 있습니다. 면박을 받아서 서글픈 여인은 그냥 훌쩍훌쩍 울면서 돌아 앉아 아기에게 젖을 물립니다. 그 순간, 자신이 기댈 곳은 아기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정상적인 피는 그 맛이 대략 달고 짭짤합니다. 그러나 애(오장육부)를 태우거나 화가 나면 홧김에 의해 쓰고 떫으며 흑갈색을 띤 강한 산성 피로 변해 버립니다. 그러면 산성을 좋아하는 호산세균들이 혈액 안에 급속히 팽창합니다. 그것들이 인체 중에서 가장 방비가 허술한 부위로 몰려들어 암 등을 유발시킵니다.
독일에서 인간의 화에 대해 실험을 했는데 그 결과는 매우 섬뜩합니다. 극도로 화가 났을 때 입에서 나오는 공기, 즉 ‘홧김’을 비닐에 받아 농축 시켜 보니 5cc의 노란 액체가 모였습니다. 이 액체 0.5cc를 돼지에게 주사했더니 돼지가 비명을 지르며 그만 즉사해 버렸습니다.
홧김을 호박이나 오이 같은 넝쿨식물의 생장점에 대고 불면 생장점은 하루도 못가 이내 시들어 버립니다. 또 홧김은 공기를 금방 독성화시킵니다. 우리 속담에 ‘장맛이 나쁘면 집안이 기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메주를 쑤어 새끼줄로 엮어 벽이나 천장에 걸어두는데 그러면 집안의 온갖 미생물이 메주에 달라붙어 발효시킵니다. 그런데 그 집안에서 가족 간에 다툼이 잦으면 그 다툼의 홧김에 의해 발효균이 죽습니다. 그래서 메주가 꺼멓게 되고 결국 장맛이 고약해집니다.
이렇듯 무서운 것이 홧김인데, 잔뜩 화를 품고서 아기나 사람을 대하면 어찌 될까요? 싸움이 잦은 집에서 사는 아이들이 끊임없이 온몸에 부스럼과 종기를 달고 사는 것은 노여운 기운이 죄 없는 아이들의 혈관 속을 흐르기 때문입니다.
화를 내는 사람을 보면 얼굴이 새파래지거나 새하얗게 변합니다. 비정상적인 사고와 흐린 판단력이 찰나를 지배합니다. 느닷없이 휘발유를 끼얹고 방화를 하거나 기물을 닥치는 대로 부숴 버립니다. 즉, 일순간 미쳐 있는 것입니다. 그 순간은 분명 미친 것입니다. 짧은 순간 그는 정신병자가 됐던 것입니다.
그 순간 식욕이 정지되며 피는 거꾸로 흐르고 명치 끝이 바짝 긴장되며 간은 강한 타격으로 극심하게 발작하는 것입니다. 잠시 후, 화가 풀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서 그렇지 그 찰나에 중병환자가 된 것입니다. 이렇듯 노여움과 증오, 화는 그 사람의 정신과 몸에 심한 타격을 입히며 그 앞에 서서 꼼짝없이 분풀이 당하는 사람의 정신과 몸에 치명적인 상해를 입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게 아니라, 서로간의 사랑과 극진한 보살핌에 힘을 얻어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라고 빵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은 보이지 않는 빛입니다. 보이는 빛은 몸을 치료하고, 보이지 않는 빛은 마음을 돕는 치료 광선이 됩니다. 빛 앞에 어둠은 소멸합니다. 빛의 힘으로 사람은 살기에, 원래 사람은 빛의 자녀입니다. 곧 사람은 육체를 지닌 빛입니다.
‘화’는 도대체 왜 나는 것일까요? 간단합니다. 상대방의 생각이 내 마음의 기대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기대한 욕망이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내 속에서 화가 끓어오르는 것입니다. ‘화’는 내 욕망의 좌절에서 기인합니다.
‘화’를 분석해 보면 ‘화’의 원인은 모두 이미 지난 일들입니다. 예를 들어 아이가 집안에서 무언가 큰 잘못을 했다 칩시다. 그러니 잘못한 시점은 이미 지난 과거지사입니다. 아버지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지금입니다. 즉 현재입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을, 현재 파악하여 화를 터트린 것입니다. 그러니 ‘화’를 터트린 시점은 잘못한 과거에 대하여 미래가 됩니다. 이런 미친 짓이 어디 있습니까?
과거의 일 때문에 미래를 향해 화를 내고 있었다니! 과거의 잘못은 지나간 것이라 하여 과오(過誤)라 합니다. 과거의 것은 ‘용서라는 큰 바다’에 던지지 않고서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자비는 무서운 교훈입니다. 용서라는 큰 포용 앞에선 누구나 뉘우치고 재범(再犯)하지 않습니다. 담장 높은 교도소의 형벌은 거듭 전과 2범, 전과 3범 더 큰 죄수를 만들지만, 품어 주는 자비는 거듭나는 삶을 살게 합니다. (*)
시어머니가 가혹하게 며느리를 나무라면 젖 빨던 아기가 그 자리에서 생똥을 쌉니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라 실화입니다. 아기의 수유를 위해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는다 해도 사람들과 불화하면 아기가 먹은 것은 엄마의 사랑이 아닌 엄마의 홧독입니다.
수유기에 시름시름 앓는 아이, 잘 자라지 못하는 아이가 있다면 그 가족 관계를 살펴보면 원인을 알 수 있습니다. 느닷없이 아기에게 병이 왔다면 틀림없이 부부 싸움이나 고부간의 갈등에 한 원인이 있습니다. 면박을 받아서 서글픈 여인은 그냥 훌쩍훌쩍 울면서 돌아 앉아 아기에게 젖을 물립니다. 그 순간, 자신이 기댈 곳은 아기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정상적인 피는 그 맛이 대략 달고 짭짤합니다. 그러나 애(오장육부)를 태우거나 화가 나면 홧김에 의해 쓰고 떫으며 흑갈색을 띤 강한 산성 피로 변해 버립니다. 그러면 산성을 좋아하는 호산세균들이 혈액 안에 급속히 팽창합니다. 그것들이 인체 중에서 가장 방비가 허술한 부위로 몰려들어 암 등을 유발시킵니다.
독일에서 인간의 화에 대해 실험을 했는데 그 결과는 매우 섬뜩합니다. 극도로 화가 났을 때 입에서 나오는 공기, 즉 ‘홧김’을 비닐에 받아 농축 시켜 보니 5cc의 노란 액체가 모였습니다. 이 액체 0.5cc를 돼지에게 주사했더니 돼지가 비명을 지르며 그만 즉사해 버렸습니다.
홧김을 호박이나 오이 같은 넝쿨식물의 생장점에 대고 불면 생장점은 하루도 못가 이내 시들어 버립니다. 또 홧김은 공기를 금방 독성화시킵니다. 우리 속담에 ‘장맛이 나쁘면 집안이 기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메주를 쑤어 새끼줄로 엮어 벽이나 천장에 걸어두는데 그러면 집안의 온갖 미생물이 메주에 달라붙어 발효시킵니다. 그런데 그 집안에서 가족 간에 다툼이 잦으면 그 다툼의 홧김에 의해 발효균이 죽습니다. 그래서 메주가 꺼멓게 되고 결국 장맛이 고약해집니다.
이렇듯 무서운 것이 홧김인데, 잔뜩 화를 품고서 아기나 사람을 대하면 어찌 될까요? 싸움이 잦은 집에서 사는 아이들이 끊임없이 온몸에 부스럼과 종기를 달고 사는 것은 노여운 기운이 죄 없는 아이들의 혈관 속을 흐르기 때문입니다.
화를 내는 사람을 보면 얼굴이 새파래지거나 새하얗게 변합니다. 비정상적인 사고와 흐린 판단력이 찰나를 지배합니다. 느닷없이 휘발유를 끼얹고 방화를 하거나 기물을 닥치는 대로 부숴 버립니다. 즉, 일순간 미쳐 있는 것입니다. 그 순간은 분명 미친 것입니다. 짧은 순간 그는 정신병자가 됐던 것입니다.
그 순간 식욕이 정지되며 피는 거꾸로 흐르고 명치 끝이 바짝 긴장되며 간은 강한 타격으로 극심하게 발작하는 것입니다. 잠시 후, 화가 풀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서 그렇지 그 찰나에 중병환자가 된 것입니다. 이렇듯 노여움과 증오, 화는 그 사람의 정신과 몸에 심한 타격을 입히며 그 앞에 서서 꼼짝없이 분풀이 당하는 사람의 정신과 몸에 치명적인 상해를 입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게 아니라, 서로간의 사랑과 극진한 보살핌에 힘을 얻어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라고 빵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은 보이지 않는 빛입니다. 보이는 빛은 몸을 치료하고, 보이지 않는 빛은 마음을 돕는 치료 광선이 됩니다. 빛 앞에 어둠은 소멸합니다. 빛의 힘으로 사람은 살기에, 원래 사람은 빛의 자녀입니다. 곧 사람은 육체를 지닌 빛입니다.
‘화’는 도대체 왜 나는 것일까요? 간단합니다. 상대방의 생각이 내 마음의 기대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기대한 욕망이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내 속에서 화가 끓어오르는 것입니다. ‘화’는 내 욕망의 좌절에서 기인합니다.
‘화’를 분석해 보면 ‘화’의 원인은 모두 이미 지난 일들입니다. 예를 들어 아이가 집안에서 무언가 큰 잘못을 했다 칩시다. 그러니 잘못한 시점은 이미 지난 과거지사입니다. 아버지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지금입니다. 즉 현재입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을, 현재 파악하여 화를 터트린 것입니다. 그러니 ‘화’를 터트린 시점은 잘못한 과거에 대하여 미래가 됩니다. 이런 미친 짓이 어디 있습니까?
과거의 일 때문에 미래를 향해 화를 내고 있었다니! 과거의 잘못은 지나간 것이라 하여 과오(過誤)라 합니다. 과거의 것은 ‘용서라는 큰 바다’에 던지지 않고서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자비는 무서운 교훈입니다. 용서라는 큰 포용 앞에선 누구나 뉘우치고 재범(再犯)하지 않습니다. 담장 높은 교도소의 형벌은 거듭 전과 2범, 전과 3범 더 큰 죄수를 만들지만, 품어 주는 자비는 거듭나는 삶을 살게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