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의 힘으로 성공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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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환 |
국보 180호 ‘세한도’에는 추사의 쓸쓸함과 의리가 그려져 있다 - 추사 김 정 희 (1786년~1856년)
추사 김정희의 제주도 유배 시절에 제자인 이상적만이 스승을 잊지 않았다. 귀한 서적을 구해서 제주도 유배 중인 스승 추사에게 보내주었다. 추사는 고마운 마음을 담아 자신과 이상적의 관계를 암시하는 ‘세한도’를 그려주었다.
추사는 명문가에서 태어나 조선 최고의 지식인으로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았다. 1840년, 그의 나이 55세에 세도정치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한양에서 가장 먼 제주도, 유배형 중 가장 극형인 위리안치형에 처해졌다. 추사는 가시나무 울타리 밖의 세상으로 나갈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장 친한 친구인 김유근의 부고를 전해 들었다. 2년 후에는 사랑하는 아내가 죽었다. 유배오기 전 자주 만나서 술 마시고 담소하던 친구들마저 소식 한 통 전해오지 않았다.
1844년, 추사 김정희는 생애 최고의 명작을 남긴다. ‘歲寒圖’(세한도) 라 제목을 쓰고, 藕船是賞(우선시상)이라 썼다. 우선은 제자 이상적의 호였다. ‘우선은 감상하게나’라는 의미다. 이상적은 청나라의 최신 서적을 구하여 제주도에 있는 스승에게 보냈다. 그 책들을 권문세가에 바쳤다면 출세가 보장되었을 것이다. 김정희는 이상적의 마음을 알아주었다. 그리하여 長毋相忘(장무상망)이라는 붉은 글씨를 남긴다. ‘서로 오래되이 잊지말자’라는 뜻이다. 세한도의 이름은 『논어』「자한」편의 "歲寒, 然後知 松柏之後凋也." (세한 연후지송백지후조야) 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추운 겨울이 지나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뜻이다.
유배지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정치적 적들을 증오하고 유배 보낸 왕을 원망하는 것이 인간의 1차적 본성이다. 많은 이들이 세상을 원망하고 술과 시름으로 기약 없는 세월을 보냈다. 추사는 달랐다. 자신을 연마했다. 책을 읽었다. 자신의 소장 도서 및 독서 계획 서목을 만들었다. 지금도 그 내용의 일부가 전해진다.《만학집》, 《본초강목》, 《해국도지》 등 당대에도 귀하게 여겼던 책을 읽었다. 추사가 읽은 책 가운데 눈길을 끄는 책은 《해국도지》다. 이 책은 세계지리에 대한 소개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19세기 청나라 공양학파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상서다. 우리나라 개화파에 큰 영향을 주었다. 1844년에 간행된 이 책을, 추사는 1845년에 읽었다. 제자 이상적이 보내준 것이다.
유배 때문에 독서에 전념할 수 있었다. 유배의 시간이 길어져 감시가 느슨해지자 제주도 사람들에게 실학을 소개하면서 많은 제자를 길렀다. 추사의 독서가이자 교육자로서의 모습은, ‘제자가 3천 명’이라고 그의 제자인 개화사상가 강위(姜瑋)가 증언했다.
추사는 서예가로 많이 알려졌지만, 그는 전 학문 분야에서 뛰어난 인물이었다. 추사는 이미 20세에 신구(新舊)학문에 막힘이 없는 천재성을 발휘하여 주위를 놀라게 했다. 이러한 추사를 길러낸 가장 큰 힘은 독서였다. 추사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평생 천 자루의 붓을 몽당붓으로 만들었고, 열 개의 벼루 바닥에 구멍이 날 정도로 주야로 읽고 쓰기를 멈추지 않았다.’라고 했다.
그는 청나라의 고증학을 기반으로 한 금석학자이며, 실사구시를 제창한 경학자이기도 하며 불교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추사는 금속이나 돌에 새긴 글씨나 그림을 해석하는 금석학에도 실력자였다. 당시까지 ‘무학대사비’로 알려진 북한산 ‘진흥왕순수비’의 실체를 밝혀냈다. 추사는 7월 무더위 속을 뚫고 북한산에 올라 그곳에 있던 진흥왕순수비의 탁본을 했다. 그 뒤 그는 침식을 잊은 채 비문을 판독한 다음 그 비가 진흥왕순수비임을 밝혀냈다. 금석학 연구에는 역사지식 외에도 천문과 지리 등 다양한 과학지식이 필요하다.
추사의 과학적 사고는 ‘세한도’에서도 발견된다. ‘세한도’를 연구하는 현대 학자들은 “철저한 수학적 구도에 관한 지식 없이는 나올 수 없는 그림”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림과 글씨, 화폭 등 여러 요소들의 수적 관계에 바탕해서 주도면밀한 구상으로 계획된 그림”이 바로 ‘세한도’라는 것이다.
제주도 대정읍에 있는 미술관인 추사관 건물은 세한도의 건물을 본 따서 만들었다. 세한도는 복사본, 인터넷 사진 등으로 우리 눈에 익숙하다. 그것에 대한 일화를 알면 아슬아슬하다. 세한도는 이상적이 죽은 후에 일제시대에 고미술 수집가이자 완당(추사)의 매니아였던 후지츠카 치카시(藤塚隣)의 손에 들어갔다. 후지츠카는 완당의 서화나 그에 대한 자료를 매우 많이 소장하고 있었다. 서예가 손재형(1902~1981)이 그에게 간곡하게 부탁하여 세한도를 양도받았다고 한다.
손재형이 세한도를 양도받고 난 세 달 뒤인 1945년 3월, 도쿄 대공습으로 후지츠카의 서재가 모조리 불타버렸다. 그가 수집한 완당의 많은 작품들도 함께 사라졌다. 세한도는 그야말로 운명적으로 살아남은 작품이라고 하겠다. 손재형은 이 작품을 매우 귀하게 여겼으나 정치에 입문하면서 가세가 기울어 어쩔 수 없이 이를 매각했다. 이를 매입했던 개성 출신의 부호이자 고미술 수집가였던 손세기의 아들인 손창근이 물려받아 소유하고 있다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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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힘으로 성공한 사람'은 '한 우물을 파면 강이 된다 - 독서로 성공한 사람들 -'로 출간된 도서의 일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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