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의 힘으로 성공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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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환 |
뜨거운 강에서 헤엄친 자유로운 영혼 -연암 박지원 (1737년~1805년)
“어린이가 책을 읽으면 요망하게 되지 않는다. 늙은이가 책을 읽으면 노망이 들지 않는다. 귀해졌다 하여 변하지도 않고, 천해졌다 해서 멋대로 굴지도 않는다. 어진 자라고 넉넉한 법이 없고, 부족한 자에게 무익한 경우도 없다. 집이 가난한데 독서를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어도, 집이 부유해도 책 읽기를 좋아한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다.”
“흥미를 위주로 한 수박 겉핥기식의 독서를 해서는 안 된다. 그 책을 쓴 사람의 고심한 자취를 헤아리는 데까지 나아가야 그것이 참독서다. 이러한 독서를 위해서는 집중적인 노력과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며, 과정을 정해 놓고 하는 것이 좋다. 죽은 지식만 구하는 것은 잘못된 독서다. 차라리 생기 가득한 이른 아침 새소리를 듣는 것이 참 독서다.”
“독서를 잘한다는 것은 읽는 소리를 잘 내는 것을 말함이 아니다. 구두점을 잘 찍는 것을 말함도 아니다. 의미를 잘 이해함을 말하는 것도 아니며, 그 내용을 잘 말함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비록 효제충신(孝悌忠信)한 사람이 있더라도 독서가 아니면 모두 사사로운 지혜 뿐이다. 권모지략과 경륜의 기술이 있다고 하더라도 독서가 아니면 모두 권모술수로 맞추는 것이다. 이런 선비는 바른 선비가 아니다. 바른 선비란 그 뜻은 갓난아이와 같고 그 모습은 처녀와 같아서 평생 문을 닫아걸고 독서하는 선비다.
갓난아이는 비록 연약하지만 그리워하는 것에 전심전력한다. 처녀는 비록 서투르고 꾸밈이 없지만 자신을 지킴은 확고하다. 그처럼 문을 닫아걸고 독서하는 선비는 우러러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굽어 사람에 부끄럽지 않다.”
- 정민 지음, <고전문장론과 연암 박지원> 중에서
박지원이 밝힌 독서론이다. 박지원은 조선 후기 북학파를 대표하는 학자다. 그는 44세 때(1780년, 정조 4) 삼종형 박명원을 수행하여 연경(燕京)을 거쳐 청나라 황제의 여름 별궁이 있는 열하(熱河)까지 갔다. 그가 남긴 불후의 명작 『열하일기』는 1780년 청나라를 다녀온 후, 1783년에 완성한 기행문 형식의 책이다. 그가 이곳에서 약 2개월간 견문한 내용을 정리한 책이 『열하일기』다. 거기에는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수용하여 조선의 낙후된 현실을 개혁하고 풍요하게 하기 위한 이용후생론을 제시하며, 조선사회의 편견과 타성의 폐단을 예리하게 분석하여 그 개선책을 강구했다.
그의 실학사상은 ‘이용후생’을 한 다음에 올바른 덕을 실현할 수 있다고 봤다. 도학의 입장과는 정반대로 공허한 도덕보다 실용을 앞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벼슬에 야심이 없었다. 50세 때 비로소 선공감 감역에 제수되고, 이후 안의 현감 · 면천 군수 · 양양 부사 등 지방 수령으로서 자신의 이용후생론을 실험하고 그 경험을 지식으로 구체화했다.
연암의 대표작 <허생전>에 그의 사상이 잘 드러나 있다. 주인공 허생은 기발하게 큰돈을 벌고도 이를 상업자본으로 투자하지 않았다. 이윤을 노린 무역 행위를 하지도 않았다. 50만 냥이란 큰돈을 벌어 바다에 쓸어 넣어버렸다. 정치적 강제가 존재하지 않는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이념이다.
연암은 서울의 서쪽인 반송방 야동에서 출생했다. 아버지가 벼슬 없는 선비로 지냈기 때문에 할아버지 박필균이 양육했다. 1752년(영조 28) 이보천의 딸과 혼인했다. 이보천의 아우 이양천에게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비롯해 역사 서적을 읽고 배웠다. 수년간의 학업에서 문장에 대한 이치를 터득했다. 처남 이재성과는 평생 문우로 지내면서 서로 학문에 충실한 조언자가 되었다.
연암은 학문이 뛰어났으나 과거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오직 학문과 저술에만 전념했다. 1768년 백탑(白塔) 근처로 이사를 했다. 거기에는 박제가·이서구·서상수·유득공·유금 등 서로 죽이 맞는 이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과 이웃하면서 학문적으로 깊은 교유를 가졌다. 이 때를 전후해 홍대용·이덕무·정철조 등과 이용후생에 대해 열띤 토론을 했다. 유득공·이덕무 등과 함께 서부 지방을 여행했다. 당시 국내 정세는 홍국영이 세도를 잡아 벽파였던 박지원의 생활은 더욱 어렵게 되고 생명의 위협까지 느꼈다. 결국 황해도 금천 연암협(燕巖峽)으로 은거했는데 박지원의 아호가 연암이 된 것도 이에 연유한다.
연암은 타고난 기질이 매우 강건하여 남들과 타협하지 못하였다. 연암의 아들 박종채는 『과정록』에서 "아버지는 사람을 대하여 담소할 적에 언제나 격의 없이 말씀하셨다. 그러나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이 자리 중에 있어 말 중간에 끼어들기라도 하면 기분이 상해 하루 종일 그 사람과 마주하고 앉았더라도 한마디 말씀도 나누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부화뇌동하거나 아첨하거나 거짓을 꾸미는 태도를 용납하지 못하셨다"라고 회고했다.
연암도 자신의 단점을 잘 알아 "이는 내 타고난 기질의 병이다. 바로잡고자 한 지 오래되었지만 끝내 고칠 수 없었다. 일생 동안 이런저런 험한 꼴을 겪은 것도 모두 그러한 기질 탓이다"라고 스스로 인정했다. 비판과 풍자로 사람들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 주었지만 정작 자신은 심적 고통을 겪었던 연암, 고지식한 지식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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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힘으로 성공한 사람'은 '한 우물을 파면 강이 된다 - 독서로 성공한 사람들 -'로 출간된 도서의 일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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